로마서연구

마음에 새긴율법의 행위 2 (롬2:15)

생명있는 신앙 2013. 5. 13. 04:04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며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 2:13~15)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Calvin 은 그의 주석에서 이방인들은 그들의 마음에 분별력과 판단력이 새겨져 있다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분별력과 판단력에 의해서 그들은 정의와 불의, 정직과 부정직을 분간한다, 라고 말했습니다[1]. 마음에 새겨진 분별력과 판단력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부어주신 양심을 말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피조물이라는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이 감정이 아닌 분명하고 명확한 지식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만약 감정에서 그런 판단이 나온다면 짐승들에게도 양심이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마음에서 판단력을 행사하는 이 지식이 무엇일까? 무엇이 객관적인 사실들을 판단하는 조명 역할을 하는가? 지식이라면 지성에서 자연적으로 생성된 것이 아닐 것은 분명하고, 지식이 아니고 사람에게 이미 있는 것이라면 감각의 일종인 것이 분명하지만 그것을 밝혀 본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근대철학자들이 말하는 이성인가요?  아마도 현대인들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이성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또한 현명한 사람들은 이를 본유 관념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사람은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자기의 또 하나인 영혼과의 소통이 단절되어버렸기 때문에 영혼에서는 쉬지 않고 지성에서 지식을 생성하여 전인에 보내 육체로 하여금 행동하게 하지만 육체는 영혼이 하는 일을 조금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왜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 인식하지 못하는가? 그 사실을 살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분명하게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영혼이 느끼는 감각을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의 예수님의 기도는 사람이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예수께서 하나님과 대화하시는 것을 기록한 최고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가 주는 의미는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과 대면하고 계신다는 것을 생생하게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사람에게서 이런 기도를 찾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죽어 장사 지낸 나사로를 살리시는 장면에서의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과 언제나 동행하고 계시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의식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상황을 묘사하는 생생한 증언입니다. 이런 증언과 예수님의 직접적인 증거를 볼 때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나는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는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8:28~29)” 이런 증거는 예수님의 영혼은 하나님과 항상 교제하시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런 상태는 영이신 하나님을 육체의 오감으로는 감각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육체로서는 하나님을 감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항상 하나님을 인지하시고 대화하시며 감각하시는 것은 영혼의 감성으로 하나님을 지각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지각이 육체의 감각에 인식되어 하나님을 인지하는 것은 곧 예수님 자신의 영혼이 육체와의 소통을 인식하신다는 증거입니다.

만약 예수님 자신의 육체로 하나님을 감각하신다고 말한다면 예수님의 육체는 우리와 같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육체로는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고 오직 영으로만 하나님을 인식할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신 안에 있는 영혼의 존재를 알지 못합니다. 영혼이 쉬지 않고 지식을 생성하여 사람으로 살도록 봉사하고 있으나 그 자체의 영혼으로 자신을 부정하는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들입니까? 그러면 왜 사람은 자신의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 알지 못합니까?

우리는 이 비극적인 사실을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려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 사람은 영혼과 육체의 결합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의 지식이 들어 있는 형상을 부여 받았습니다. 지식은 사람을 모든 생명 있는 피조물과 구별되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살게 하는 구별된 존재로서의 삶을 드러내는 행위의 요소입니다. 행위의 요소는  감각에 의한 반사적인 행위가 아닌 지식에 의하여 행동하여지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을 지식으로 행동한다는 점에서 다른 피조물과 분명한 구별이 있습니다.  이것을 예수께서는 그 마음에 쌓은 것으로 행동한다고 눅 6:45에서 말씀하셨을 때 그 쌓은 것이 곧 지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행위를 드러내는 모든 요소가 지식이라면, 선을 행하는 사람은 그 마음에 선한 지식이 있고 악을 행하는 사람은 그 마음에 악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으니(3:28)”에서 말한 바에 의하면, 사람의 마음에는 죄를 행하게 하는 지식만 가득 채워져 있고 선을 행하는 지식을 전무하다는 것을 말하고, 예수께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낳으니 너희 아비의 일을 행하는 도다(8:44)”, 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사람의 모든 행위가 죄라면 마음에 있는 지식이 죄의 본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와 같이 죄의 본질만을 가진 마음에 있는 지식은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이는 모두가 영혼의 지성에서 생성하고 감성으로 지각된 지식이 마음에 반영된 것입니다.

영혼은 이와 같이 죄만 생성하고 있습니다. 그 원인에 대해서 영혼이 무지할까요?

감각을 가진 사람의 육체가 객관적인 비교를 통해 자신의 우월을 느끼고 의식을 가진 것과 같이 영혼 또한 동일한 감정을 가지고 있고,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관계에 있어서 자신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은 육체에 있으나 항상 하나님을 대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우리의 영혼은 항상 외면하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대하고 살았습니다. 우리의 육체가 하나님을 아는 감각을 가지고 그 지식을 영혼에 비취기 이전까지, 두렵고 무서운 하나님을 대면하면서 외면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에 몸서리 치는 고통의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우리 영혼은 태어나는 것 자체가 저주였으며, 하나님께서 우리가 태어나는 것은 허락하셨을 뿐이지 창조 계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 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스스로 자신들이 하나님과 관계없다는 것을 지각하고 있었고 이런 결과를 통해 미래에 있을 자신들의 비참한 운명이 영원한 지옥이라는 사실을 직시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계획과 관계없는 우리의 영혼의 운명은 치가 떨리는 저주밖에 더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의 영혼을 있게 한, 하나님의 아들의 범죄를 미워하기 시작하였고,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일들이 이세상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자기들이 죄를 범하여 정욕을 일으켜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과 관계없는 잉여의 자식들을 세상에 있게 한 그 결과로 인해 이세상에 끝없는 미움과 싸움이 있게 되었고 그러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 세계가 형편이 없는 유혈이 낭자한 싸움터가 된 것에 대해서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의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된 이방인들에게 맞아 죽어야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영원히 지옥으로 보내어지는 비참은 운명으로 태어난 잉여의 자식들의 영혼은 그들의 지식으로 더욱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파괴하는 존재로 남겨지게 되어 결국은 하나님의 창조가 대 혼란으로 실패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의 영혼과 육체의 소통을 단절시킴으로 더 이상 영혼이 자기의 분노를 육체로 드러내지 못하게 하셨으므로 사람은 자기의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영혼과 우리의 영혼이 다른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의 영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우리를 낳아 이세상에 있게 한 것에 대한 분명한 죄의식을 가지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반면 타락한 하나님의 아들들은 이런 의식을 전혀 갖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이방인들과 협잡하여 자기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범죄한 영혼은 그 육체와 소통하지 못하도록 하심으로 사람이 육체로만 의식하기 때문에 영혼의 의식을 전혀 알지 못한 원인에서 오는 것입니다.


[1] Calvin, Commentary, 로마서 2:15. BSMP,  1985, 82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