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말씀이 계시니라(1:1-5)
1 말씀이 계시니라. 요 1:1-5
적용연구
본문을 적용하기 앞서 몇 가지만을 반드시 상상하여야 한다.
1. 본문의 진실성
본문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가? 만약 이 본문이 계시록이나 여러 선지서들과 같이 여러 부분에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이 있는(직접 말씀해주셔서) 말씀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설사 그렇다면 우리는 요한 복음을 복음서라고 언급하지 않고 선지서의 한 부분으로 고찰할 것이다. 그런데 요한 복음은 선지서라기보다는 진정한 제목대로 복음서다. 그리고 사도 요한이 그리스도의 신분을 명확히 밝히려는데 소개했다. 그럼에도 본문은 개인의 사상이 깊게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이 본문은 저자의 창작임에 틀림이 없다.
다른 복음서들에서는 볼 수 없는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표현으로 “말씀이신 하나님, 하나님의 어린양, 만물을 지으신 분, 말씀이 육신 되신 분, 하나님과 하나이니라” 등의 표현은 완전히 독자적인 표현이고 다른 서신들에서는 전혀 발견 할 수 없는 내용이다.
저자는 어떻게 이런 표현들을 과감사용할 수 있었을까?
필자는 객관적 계시의 증거도 없이 주관적으로 자기의 마음으로 깨달아서 단순하게 이런 표현을 했다고 생각되는 점에서 창작이라고 말한다.
만약 필자가 말한대로 사도 요한이 계시와 관계없이 자기의 생각과 사상을 발휘하여 미사여구로써 예수님을 아름답게 묘사하려했다면 요한 복음은 성경으로서 적격한 자료가 되지 못할 것이다. 살아계신 성령께서는 아무리 아름다운 표현으로 예수님을 묘사하려한다 할지라도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라고 말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또한 지나친 상상에 의한 창작으로 볼 경우 사도 요한은 지나친 억측으로 많은 성도들을 현혹시켰을 뿐만 아니라, 지나친 편견에 사로잡혀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신앙을 가진 것이 아니라 일종의 맹신적인 종교성향을 가진 사람이라는 평을 받게 될 것이다. 실지로 오늘날의 독자들이 판단하기에 요한 복음은 처음 시작부터 지나친 상상력을 동원한 내용이다. 복음의 시작이 태초 이전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 막연한 시간속에서 일어난 일들을 증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상상력의 증거로밖에 볼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가 태초 이전에 존재했을리 만무하고 설사 하나님 안에서 선지자적인 통찰력을 지녔다 할 지라도 만물이 지어지기 이전에 하나님만 계시는 그때의 일을 증거하는 사실을 독자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없기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는 독자와 저자와의 신뢰할 수 없는 상상력을 동원한 한낫 소설에 불과한 책으로 인정을 받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한가지 중요한점이 오늘 우리에게서도 발견한다.
그것은 요한복음의 최초 독자들에게도 받아들였던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일치하게 받아들여진 요한복음의 진정성의 의미이다. 오늘 우리들은 요한복음의 증거를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게다가 그 모든 내용을 신뢰하고 있다. 저자가 어떤 상태에서 기록하엿든지 그것의 진위여부를 가름하고 선경이라는 태두리 속에 기록된 모든 내용을 하나도 빠짐없이 받아들이고 있으며, 놀라운 것은 그의 증거가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한 세계를 증거 했음에도 불구하고 신뢰하고 받아들이며 성경으로 권위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 글이 어떻게 최초 독자들에게 받아들여졌으며 성경으로 읽혀지고 사람을 변화시키고 있는가? 신앙인들이 조금도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을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본문의 진실성을 어떤 방법으로 확신할 수 있을까?
아마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들이 제기될 것이다.
2. 본문의 사상 근거
본문을 창작하려면 저자는 본문을 상상할 수 있는 어떤 근거에 의지하여야 한다. 그리고 관습적으로 인정되어야만 한다.
예를 들면 세례요한이 자신을 선지자 이사야의 증거 가운데에서 제시된 약속에 근거한 사람이라고 주장한 것 처럼 저자가 본문을 언급하는데 독창적인 창작이 아니라 이미 제시된 인정될 자료에 근거한 내용이어야만 한다.
이미제시된 인정될만한 자료란? “구두 전승되었든지 아니면 독자들에게 충분히 납득이 될만한 이유로 인해서 이미 인정되고 있었던 자료”라는 것이다. 이렇게 증거된 자료는 근거가 분명하고 내용이 이미 근거(성경)에 의해서 반하지 아니한 산물이라야만 교회에 유익이 되는 자료가 될 것이다. 성경은 이런 점에 있어서 구약이나 신약이 하나이고, 수십명이 1,700년이라는 세대를 초월하는 기간동안 작업하였으나 마치 한 분(성령)의 작품처럼 느껴진다.
요한 복음은 구약의 자료에서 제시된 사상이 전혀 아니다.
처음 시작의 말부터 전혀 새로운 주장으로 시작되고 있다.
이 기록이 독자들에게 인정되기 위한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첫째로는 독자들에게 이미 인정받을 만한 근거가 있어야 하고, 두 번째는 독자들이 이미 알고 있거나 증거를 받아들이기에 충분한 사상적 기반이 조성,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독자들이 이 글을 받아들고 전혀 새롭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자료를받아들임으로 혼란을 느기지 않아야하는 것이다. 만약 저자가 자신도 처음 사용하는 말로 저자만의 의도를 가지고 독자들에게 메시지를 전한다면 저자는 첫마디부터 어리둥절하여 저자를 전혀 신뢰하려 들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저자의 글이 아무리 분명한 진리를 전한다 할지라도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결과를 낳고 교회에서 전혀 이신적인 산물로 인정받아 사장될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앞에서 제기한 다른 복음서들에서는 볼 수 없는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표현인 “말씀이신 하나님, 하나님의 어린양, 만물을 지으신 분, 말씀이 육신 되신 분, 하나님과 하나이니라” 등과 같은 다른 서신들에서는 전혀 발견 할 수 없는 독자적인 표현의 사용에 관한 교회의 반응과 신뢰성에 대해서 지금까지 간략하게 언급하였다.
이 언급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더 이상 다른 말을 할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는 이유중에 하나는 기독교가 신비적이라는 말을 지나치게 해석하여 저자가 사용하는 모든 말을 당시 독자의 이해력에는 안중에도 없는 글로 인정하고, 성령께서 강권적인 개입으로 저자로 하여금 기록하게 했다는 주장을 앞세워 가고 있으며, 이에 근거해서 교회가 성경으로 받아들였다고 믿고 있는 어리석은 신앙이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교회는 저자의 1차 독자였을 때 저자가 기록한 말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저자가 1차 독자인 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이 독자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기본적인 지식들을 이미 여러번 증거했을뿐만 아니라, 기록한 증거는 거의 수차에 걸쳐 증거된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실지로는 다른 복음서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전혀 창작과 같은 내용들은 이미 교회에서 언급되었고 확실히 밝혀진 내용이었으며 독지들은 아무런 오해 없이 저자의 글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3. 본문의 신뢰 과정
본서의 최초 독자들에게 본문이 어떻게 신뢰되었으며, 오늘 우리에게 어떻게 신뢰되었는가?
이 두 가지는 아주 중요한 문제다.
먼저, 본서가 최초 독자들에게 인정받지 못하였다면 그 다음의 독자들에게 전수된다는 것은 극히 불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저자의 권위와도 같다. 다시 말하자면 독자들에게는 본서 이전에 저자의 권위에 우선 신뢰하고 있었을 것은 당연하다. 본서는 저자를 통해서 본서의 주체이신 그리스도를 계속 경험하는데 확실한 답을 제시한다.
본 서신의 최초 독자들은 저자와 본서를 통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를 경험하지 못했다. 그런의미에서 본문이 독자들에게 거부되지 아니하고 받아들였으며 교회에서 계속 읽혀지고 인정되어 온 것이다.
그러면 현대 우리는 이 본문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우리는 너무도 맹목적이고 분별력이 없이 분문을 받아들인다. 이전부터 읽혀져 왔기 때문에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읽는다. 그러나 이런 자세는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맹신적 자세이다. 물론 성경을 맹신하는 것은 바람직하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맹신한다고 해서 전혀 죄가 되지 않는다. 이것이 신자들에게 아주 바람직한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신앙은 일정한 지식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것은 지식의 확신 정도에 따라 다소 차이가 주어질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약간의 지식으로서 신앙을 소유하고 어떤 이는 계속적인 연구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만한 신앙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신자들에게는 신앙에 회의나 의심을 가지지 않을 만큼의 지식을 겸비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신자들의 신앙을 지도하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지식을 획득하고 있어야 한다. 교회의 교사는 말씀을 깊이 연구하는 자세를 가져야하고,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확신 있게 전달하기 위해서 성경을 연구하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사도들이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일에 전무 한다]고 했던 이유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