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설교

방언에 관하여. (행 19:1-7)

생명있는 신앙 2009. 11. 16. 22:36

행 19: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행 19:2)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행 19:3)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행 19:4)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행 19:5)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행 19: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행 19: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설교내용

 

어느날 나는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목적지는 향하여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해야할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을 하면서 정신없이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옆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서 저는 길을 제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열심히 달려 목적지를 향하여 가고 있는데 이게 왠일입니까?

지금까지 내가 걷던 길은 막다른 골목이었고 내 눈 앞에는 절벽이가로 놓여 제 길을 막아서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길은 나의 목적과는 전혀 다른 더이상 갈수 없는 꽉막혀 있는 길입니다.

앞은 100m 높이의 암벽이놓여 있고 양옆으로 비탈진 절벽이 길을 막아서고 있습니다.

만일 내가 네비게이션이 이끄는대로 왔더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물론 세계 어디에 가도 있는 길을 안내하는 네비게이션은 실수할일이 없습니다.

만약 그 네비게이션이 실수하여 저를 막다른 길로 인도 했다면 당장 네비게이션을 내동댕이치고 사람에게 길을 물을 것입니다.

 

사람에게 길을 물어야지 기계를 의지하면 안됩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확신하고 믿고 의지하며 왔던 그 길이 결국은 막다른 길이었다는 사실을 알면 기가 막힐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사업을 하거나 인생의 향방에 갈린 일을 수행하는 중이었다면 아주 곤란한 일입니다. 

신앙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두운 가운데 처해 있기 때문에 밝은 빛을 찾아 해매다가 이상한 빛 하나를 발견하고 그것이 진리의 빛이라고 판단하고 종교적인 행위를 더하여 신으로 섬기고 제사하는 많은 사람들을 봅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심으로 우리는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교회를 통하여 성공을 목표로 신앙생활을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비밀스럽고 사람이 할수 없는 일들을 행하시는 하나님께 관심을 갖고 신비한 이상을 쫒는 신앙을 가진 분들이 있습니다.

이 두 신앙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서 후회하는 경험을 하게 될 터인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이런 일이 있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신앙에 있어서 막다른 신앙을 가지지 않고 올바르게 주님앞으로 인도되고 있는 목자의 인도를 받기를 바랍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오늘날 성도를 이끄는 목자들이 성도를 주님께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한 곳으로 인도하는 신앙이 아주 많이 있어서 드린 말씀입니다.

 

오랫동안 저는 성경이 말하는 아니 오늘날 교회를 어둡게한 방언에 관한 주제에 대해서 많은 묵상과 고민을 해 왔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한시간 안에 성도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 지식을 얻으려고 많은 노력을 해 왔습니다.

그리고 고민했었습니다.

논문을 쓰기는 했었으나 1시간에 설명할수 없는 내용이어서 안타까웠습니다.

그런데 한 시간내에 설명하는 것이 너무도 쉬었습니다.

오늘 그것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방언은 교회에 뿌리깊게 파고 들어 왔으며, 신앙에서 성령강림의 징표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방언을 하지 않는 사람은 신앙자체가 없는 비신자라고 까지 말하는 사람들이 교회안에 부지기수로 등장하고 방언을 받는 것이 하나님께로 부터 능력을 받는 것과 성령으로부터 인치심인것양 말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교회들조차 강단에서 방언으로 기도가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목격해야만 했습니다.

과연 저들은 올바른 기독교를 의지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웠습니다.

도대체 방언은 무엇입니까?

 

어떤 신자는 여기까지 읽어 내려가다가 이렇게 반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에이 방언에 관한 이야기야"

혹은 "방언은 성령 강림의 표징인데" 부정해" 하고 다른 사이트로 넘어가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릅니다. 

 

앞에서 제가 말씀드린 막다른 길을 말씀했습니다. 

이 주제에 관해서 자기와 의견이 다르다고 관심이 없어 하는 사람은 어쩌면 막다른 길에 들어서서 "잘못왔군"하고 돌아가는 사람이 될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알고 계서서 관심이 없어하는 사람일수도 있습니다.

저는 개의치 않습니다.

읽고 도움이 되고 성도로서 하나님앞에 바르게 세워지기만을 바랍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은사에 관해서 말하면서 방언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주제가 바울이 인식하고 있는 방언에 관한 개념 이라는 저의 말에 놀랄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이미 방언에 관한 신비적인 신앙에 빠져 있는 분이실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인식하고 있는 방언에 관한 주제에 대해서 여러가지로 말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바울이 방언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으며 그가 사용하는 방언의 개념은 이것이다 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천사의 말(고전 13:1)로 생각하고 있다고 합니다. 다른이는 각종말(고전 12:28)이라고 합니다. 또는 하나님께 하는 말(고전 14:2)이라고 합니다. 

깊게 생각하면 이런 분류에서도 다양한 생각을 가진 주장을 보게 됩니다.

게다가 또다른 대표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을 보게 되는게 영의 언어, 혹은 영적인 말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또 바울이 고린도전서에 기록한 방언은 사도행전과 다른 의미의 방언을 말했다고 주장합니다. 

사람들의 생각에는 이처럼 다양하게 서로 다른 의미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어느 편에 서든지 하나의 언어에 대해서 개개인이 서로 다른 개념으로 이해하므로 다양한주장들이 생겨 난다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다음에 드리는 말씀을 듣고 지금까지 생각해 왔던 다른 개념의 설명이라고 생각이 되면 혼란스러워 하실 것입니다.

 

방언에 관하여 바울은 고린도서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말들을 들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방언에 관해서 언급하면서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고전14:8, 그리고 이어서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 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고전 14:9)과 같이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할 뿐만 아니라, 말을 하려면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통역하는 사람을 세우라고 분명히 말하고있습니다.

또한 고전 12:10에서 방언은 한 성령으로부터 온 은사중의 하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미 자기가 방언에 관하여 경험한 사실을 생각하고 있씁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이 1~3차까지 전도 여행하면서 아시아에서 고린도에 이르기까지 많은 교회를 세웠으나 교회에서 세례를 주고 안수하니 방언이 나타나더라 라고 기록한 곳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뿐입니다.

성경은 바울이 성령강림과 방언을 경험한 곳은 오늘 우리가 읽은 에베소에서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니다, 이미 고린도에서도 성령강림과 방언에 관한 경험이 있었다, 라고 추측성 말을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누가의 증언을 토대로 한다면 그런 가정은 성경을 잘못 본 사람의 의견들입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울의 성교 여정을 살펴 보면, 바울이 고린도에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들렸다가 다시 갈라디아를 거쳐 에베소지역으로 돌아와 그곳에서 머물고 있을 때였습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처음부터 복음을 전할때 방언의 역사가 나타나고 성령 임재와 같은 강력한 운동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의 가르침과 성경의 지식으로 사람들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강력하게 나타남으로 교회가 세워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에베소에 이르게 되자 그곳에 아볼로 제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성령도 모르고 단순히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믿음으로만 믿는 신앙인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땡 바울에게 성령은 역사하셔서 그들에게 다시 복음을 설명하고 안수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 성령께서 강림하시고 방언의 은사가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때 처음으로 에베소에서 아볼로 제자들에게 임하시는 성령강림과 방언과 예언 나타남을 처음 목격한 것입니다.

이 말이 고린도 방언과 사도행전의 방언을 이해하기 위해서 본문은 너무도 중요한 열쇠가 되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이곳에서 처음 방언을 목격했다면 바울에게 있어서 방언을 생각하려면 에베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울이 알고 있는 방언은 에베소에서 아볼로 제자들에게 나타난 현상만을 말하고 그것을 올바른 것으로 믿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바울이 방언을 경험한 유일한 장소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미 다른 부분에서 방언경험에 관한 언급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저자 누가도 본문을 아주 중요한 내용으로 언급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본문 중요성은 바울의 사도성을 변증하는 중요한 내용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성도석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음성의 기도소리는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음성인지 많은 걱정을 하게 합니다.

아니 일부 교회의 강단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이상한 기도의 소리는 더욱 신자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1. 초대교희 최초의 방언은 오순절 다락에서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4의 말씀입니다.

"오순절날이 이르매 저희가 다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집에 가득하며 불이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

이때 이 장면을 목격한 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고 이날 세례를 받은 사람의 수가 3천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날 그들에게 나타난 두가지의 중요한 사건은 1. 성령강림의 흔적, 2. 방언의 내용입니다. 

성령강림은 불의 혀 같은 것이 각사람위에 있었고 그것을 두 눈으로 분명히 보았습니다.

방언의 내용은 분명히 이렇게 말합니다.

행 2:8"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곳 방언으로 듣게 됨은 어찜이뇨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2:8~11). 이것이 분명한 방언의 표준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때 방언을 경험하고 목격한 수많은 사람들이 각국으로 흩어져 교회를 세우고 있었습니다.

로마 교회는 이곳에서 베드로에게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모여 이룬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클라우디오 황제가 로마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추방시켜 버렸고 이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고린도로 와서 있었고 바울이 이곳에서 그들을 만나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러면 바울보다 먼저 방언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각국으로부터 고린도에 와서 모였습니다. 이 모임은 바울이 주도하여 세운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는 세워졌습니다.

여기에 고린도서에 나타난 파당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방언은 고린도 교회를 분파 시키는 원인중의 하나입니다.

곧 바울에게서 성령강림과 방언의 은사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에서는 불과 서너사람 밖에는 세례를 준 일이 없었고 이미 그리스도인들이 된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이들이 그리스도파 베드로파 아볼로파라는 파당을 지은 것입니다.

특히 베드로파는 오순절 방언을 더 중요시하고 바울에게 나타나지 않은 성령강림과 방언과 은사등으로 인해 바울의 정통성을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은 오순절때에 선출한 12사도가운데 들지 않았기 때문에 바울의 사도성에 관한 심각한 의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누가가 바울의 사도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사도행전을 기록합니다.

이 사도행전안에 오늘 본문이 바울에게도 오순절과 고넬료집에서와 같이 에베소에서 성령강림과 방언이 나타났고 주님께서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사도성은 12사도와 다를게 없다. 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의 파당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방언이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2. 두번째 베드로 사도에 의해서 방언은 고넬료의 집에서 그의 가족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사도행전 10:45~46의 말씀입니다.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이 내용은 오순절과는 달리 베드로 사도로 부터 나타난 성령강림과 방언에 관한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불의 혀 같이 갈라졌다는 언급은 없습니다.

어떤 현상이 성령 부어 주셨다는 표헌을 하는지는 알수 없으나 성령은 부어 주셨고 나타난 증거로 방언을 말하였습니다.

뭔가 뜨거운 반응이 있었을 것이고 그 현상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한 어떤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고넬료의 집에서 성령부어주심을 설명하는 것은 많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저자가 이 장소에 있지 않았고 이 장면을 목격하지 않았으며 이 자료는 다른 사람에 의해 전해 들은 것이기 때문에 오순절 장소에서와 같이 성령강림의 표현이나 방언의 내용들이 자세한 내용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3. 세번째 바울 사도에 의해 성령부어주심과 방언말하는 역사가 나타난 에베소에서의 아볼로 제자들에게 입니다.

사도행전 19장 1~7

사도행전의 저자가 왜 위와 같이 오순절, 고넬료집, 에베소, 이와 같이 세곳을 정하여 성령강림과 방언과 예언을 자세하게 말하고 있습니까?

저자의 의도속에는오순절 다락에서 사도로 인정을 받지 않았고 선택받지 않았으나 베드로에게 나타난 성령강림과 방언은 일치하고 바울이 사도성으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으며 사도행전 27장 17~19에 은갑한 바와 같이 이방인의 사도로 직접 주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기록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하자면 위의 3장소에서 나타난 성령강림과 방언은 동일한 은사로 주어진 것입니다, 라는 누가의 주장입니다.

바울은 이 에베소에서 방언을 처음 목격했고 이때 본 방언이 바울이 알고 있는 방언지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위의 3 본문에서 나타난 방언은 사도행전에서 본것 뿐입니다.

그래서 어떤사람들이 말합니다.

그렇지만 "고린도서의 방언은 다르다"

 

사도행전을 잘 읽어 보십시요.

그러면 고린도전서의 방언이 보입니다.

성경은 주관적인 해석은 누구나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의 해석입니다.

주관적인 해석은 오류를 가질수 있습니다.

주관적인 해석은 검증을 받을 상황에 이르렀을때 언제든지 잘못된 해석임을 시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 분명히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성경의 내용이 개개인이 성경을 읽는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날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른 해석이 되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잘 가르치는 사람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고린도서의 방언과 사도행전의 방언이 다르면 안됩니다. 반드시 같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에베소에서 방언을 목격한것이 그가 알고 있는 방언에 관한 지식입니다.

바울은 사도행전 19장에서 나타난 방언을 알고 있습니다. '다른 방언을 모릅니다.

쉽게 말하자면 오늘날 교회에서 일어난 이상한 소리의 기도는 바울이 모르는 방언입니다.

성경이 가진 지식이 서로 다르면 그것은 성경 스스로 혼란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아니 성령께서 성도들을 향한 오류를 주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상한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기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저기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이런 방언이, 고린도에서는 저런방언이, 하나님은 성도들을 혼란스럽게 하시는 분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아무리 봐서 하나님은 그런분이 아니십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뿐입니다.

성령께서는 오류를 범하실수 없습니다.

사람이 성령의 의도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 주관적으로 해석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의 방언은 같아야 합니다.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의 생각이 이곳에서는 이런방언 저곳에서는 저런 방언이 아닙니다.

바울이 알고 있는 방언에 관한 지식은 에베소에서 나타난 방언입니다.

이 방언은 반드시 고넬료집에서의 방언과 오술절 다락에서의 방언과 일치한 방언입니다. '이 방언은 분명히 지방언어 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알고 있는 방언이고

오늘날 이상한 형상으로 나타난 방언에 관해서 바울에게는 금시 초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발하는 방언은 에베소에서 나타난 방언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말합니다.

"아무리 봐도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의 방언은 다르다"

"고린도 방언은 천사의 말 곧 하나님께 하는 말이지만 사도행전의 방언은 지방방언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일일이 대답하려니까 머리 아프지요.

 

결론을 먼저 말씀을 드려야 겠습니다.

사도행전 본문에 방언이 나타납니다.

사도 바울이 아볼로의 제자들을 만났고 그들에게 성령을 받았느냐 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아볼로의 제자들에 성령이 있음도 듣지도 못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다음 질문에서 바울은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아볼로 제자들은 "요한의 세례로라"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요한의 세례를 받은 이들에게 바울이 안수하자 주 예수의 이름으로의 세례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랫더니 나타나는 증상이 오순절과 고넬료의 집에서와 동일한 현상이 나타난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행 2:4 오순절 방언과 행 10:45~46의 고넬료 방언, 그리고 본문에서 아볼로제들에게 나타난 방언을 동일한 동질의 방언으로 사도행전의 저자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약 다른 것이라면 저자 다른 내용을 기록할 것입니다.

하지만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오순절의 성령강림이 베드로에게 나타남같이 바울에게도 나타나 바울의 사도권을 주장하는 맥락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왜 제가 본문을 가지고 방언에 관하여 여러분을 하나님앞에서 바르게 세우려는데 전심을 쏟으려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앞에서 종교적으로 진실해야 합니다

위선이나 거짓을 행치 않고 진실함으로 우리를 깊은 죄에서 구원하신 그분 앞에 서있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을 주님앞에 당당히 서도록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흠이 없고 부족함이 없다면 아주 좋을 것이지만 약간의 흠이 있어도 주님께서 싫어하시는 종교적인 흠은 당연히 없어야 하기 때문에 이 주제를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나타난 세 장소에서의 방언이 일치하다면 .......

고린도에서 방언 또한 일치할수 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아볼로 제자들에게 나타난 방언을 경험하였습니다.

아볼로 제자들에게 안수하자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했고 그들은 방언으로 말하고 예언도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행 19:6)

그러면 이때 바울이 보았던 방언이 바울이 알고 있는 방언입니다.

성경은 바울이 이 방언을 기초로 고린도에서의 방언을 언급하였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바울이 이방언을 기초로 고린도 교회에 방언에 관해서 말했다" 라는 식의 문장을 쓰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경험하여 알고 있는 것이 그에게 지식이 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아볼로제자들에게 나타난 방언을 분명히 목격하였으므로 방언에 관해서 분명히 알고 있는데 그것은 사도행전의 방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혹자들은 사도행전과 고린도의 방언이 다르다면 바울은 아볼로 제자들에게 임하던 성령으로부터 나타난 방언과 고린도에 보낸 서신에 기록한 방언이 다르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방언이 다르면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오순절(행 2:4), 고넬료(행 10:45~46), 그리고 에베소 방언(행19:6)을 같은 방언으로 연결하여 같은 말로 기록할 수 없습니다. 오순절방언의 경우"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고넬료의 집에서의 경우"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에베소에서의 경우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이렇게 성령강림-베드로-바울, 이렇게 바울에게도 동일한 성령의 세례로 인한 방언이 있는것은 누가가 속이고있는 것입니다. 

누가가 사도행전을 속이면 성령께서 속이는 것이 되고 성령은 속이는 성령이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불신입니다.

위선이며 거짓입니다.

하나님을 거짓신으로 만들지 마십시요.

 

놀라운 것은 바울은 이 사건을 경험한 이후 고린도 교회에 서신을 보냅니다. 

아주 중요한 시기에 적절한 문제애 대한 답을 바울이 경험한 것입니다.

에베소에서 바울이 성령강림과 방언과 예언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6개월~1년이후에 기록한 고린도서에 이 방언에 관한 개념을 말하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이미 교회에 방언에 관한 문제가 발생한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성령강림과 방언을 에베소에서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나는 방언에 관해서 언급할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정확하십니다.

일꿈에게 있어야 할 일은 미라 다 주십니다. 

바울은 예전에 자기가 알고 있었던 지식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이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모든 새로운 지식이 그에게 주어지고 있었고 에베소에서 방언로 새롭게 주어졌습니다.  에베소 방언은 바울이 알고 있는 방언에 관한 경험이고 지식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방언을 말할때는 반드시 에베소에서의 방언을 말하고 있지 다른 방언을 발하지 않은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방언과 서도행전의 방언은 다를 수 없습니다.

 

저는 몇년전부터 방언에관한 주제의 글을 많이 언급해 왔었습니다.

그러나 간단하게 한시간안에 방언을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아서 오랫동안  기도해 왔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 블로그에 있는 누가와 방언에 관한 논문을 보십시요.

저는 이 논문을 요즈음 조금씩 수정을 합니다.

말이 안된 부분을 고치고

매끄럽지 않는 내용을 수정합니다.

그렇게 하다가

오늘 이 중요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시간안에 방언에 관해서 분명히 말할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있게 이 말씀을 여러분에게 드립니다.

아볼로제자들에게 나타난 방언을 사도바울이 목격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방언의 경험을 제가 보았습니다.

아볼로 제자들에게 나타난 에베소의 방언이 바울에게 방언에 관한 표준 지식이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입니다.

저는 더이상 지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이제 고린도서신에 나타난 방언에 관해서 깊이 연구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간을 내서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릴 것입니다. 

  

실지로 고린도서에는 일부 내용에 따라 다른의미를 가진 방언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을 볼수 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드리는 말씀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각각 다른 3장소에서의 방언은 동질의 방언이었고 이 방언은 베드로사도와 바울 사도에게 나타났으며 바울은 이 방언을 경험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방언을 언급할때에는 아볼로 제자들에게 나타난 방언에 관한 경험적인 지식을 가지고 말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먼저 앞에서 말한대로 사도행전의 저자에 대해서 다시 말하려 합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을 기록한 목적이 바울 사도의 사도권을 주장하는 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누가가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증거를 목적으로 글을 썼으나 사도행전에 나타난 내용을 잘 살펴보면 성령의 역사하시는 행전이 된 것입니다. 물론 저자 누가도 사도행전이 성령행전이라는 사실을 알고 독자에게 보내지는 않았습니다. 오직 바울 사도의 사도권에 대한 주장을 위해서 기록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를 통하여 성령의 역사하심을 증거하시게 한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가 사도행전을 통해서 어떻게 바울의 사도권을 주장하려고 했습니까?

이미 살펴 본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다시 언급합니다.

누가는 자기만이 가진 확증할 수 있는 객관적인 자료를 통해 바울의 사도권을 주장합니다.

누가가 사도권을 주장하려는 이유는 분명히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할 당시 바울의 사도권이 심각하게 도전을 받고 있었습니다.

바울의 전도 여행으로 세운 많은 교회들이 사도 바울로 부터 등을 돌리고 유대주의 그리스도교로 회기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건은 제 3차 전도 여행도중 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도행전 18장 22절에 보면 바울은 갈라디아와 부르기아를 지나 에베소에 들어 옵니다.

이때만 해도 갈라디아교회는 바울의 사도권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기록한 내용을 보면 갈라디아 교회가 심각하게 홰손되고 있다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실지로 바울은 갈라디아 2:8에서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고 지금 그일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의 내용이 다른 복음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유명하다고 하는 사도들에 관한 언급등을 살펴 보면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의 사도권에 관해서 심각하게 도전을 받고 있었으며 이를 해하려는 사람들은 사울은 사도가 아니라를 주장으로 공격하고 있었음을 볼수 있다.

이를 공격하는 사람들은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은 다양한 시각이 있어서 보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의도를 볼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사도권을 주장하려는 목적에서 본다면 가롯유다를 대신한 사도의 선택에 관해서 언급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교회의 시작이 되는 오순절 성령강림을 언급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바울의 사도권이 도전 받은 권위적인 사건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넬료의 집에서 일어난 성령의 부으심과 방언을, 오늘의 본문의 에베소에서 아볼로 제자들에게 나타난 성령의 부으심과 방언으로 세곳에서의 성령의 강림으로인한 은사와 사역을 동질의 사건임을 이야기하고 끝으로 사도행전 26:17-18에서 사도의 사명을 증거함으로 바울의 사도성을 확실히 변증하여 듣는이로 하여금 부정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제 바울은 주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도라는 사실을 저자는 분명하게 합니다.  

오순절의 성령부으심과 고넬료의 집에서 성령부으심 그리고 에베소에서 아볼로의 제자등에게 성령부으심은 동질의 사건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고린도서에서의 방언이 사도행전에 언급된 방언이 같은 동질의 것인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일부 신학자들은 문자적인 표현과 단어의 사용이 차이가 있음을 근거로 동질의 방언이 아니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일부 신학자들은 문자적으로나 혹은 바울이 사도로서 말한 것으로 동질의 방언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확실한 주장으로 설득력있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에베소에서의 성령부으심과 방언은 바울이 방언에 관하여 이해하는 중요한 경험이 된다는 것을 말씀 드렸습니다.

누가의 주장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세곳에서의 사건이 동질의 사건임으로 인하여 성령부으심과 방언은 특별하게 주님으로부터 사도들을 통하여 역사하신 사건으로 증거하려는 누가의 의도가있었던 것이므로 성령의 임재를 통한 방언 은사의 시여는 곧 사도권을 의미한다고 봐도 될 것입니다.

 

바울은 오순절, 고넬료와 같은 동질의 성령부으심과 방언을 경험하면서도 동질의 사건임을 이해할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거의 현장을 목격하지 않았습니다.

실지로 바울은 수년동안 전도여행을 하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파하여 성도들을 세우고 교회를 일으켰으나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의 사도권에 관한 근거를 들고 공격했을때 바울은 아무런 대답도 할수 없었던 것입니다.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오순절 방언을 경험한 사람들이 대부분일수도 있었습니다.

오순절에 다락에서 있었던 성령의 부으심과 방언을 목격하고 들었기 때문에 교회마다 다니면서 바울이 주장하는 교리를 반박하는 근거로 사용할수도 있었습니다.

 

다만 이 사건을 기록하는 저자 누가에 의해서 이 사건이 동질이 사건임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이 사건을 통해서 성령부으심과 방언에 관한 동질성을 이해하고 있었다고 말할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오랫동안 전도 여행을 하면서 사도권에 관하여 도전을 받는 어려움을 입었을때 주님께서 에베소에서의 사건을 보이심으로 더욱 확증적인 사도적 사명을 확신하였을 것은 당연합니다.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들에게 방언이 절대적인 성령의 역사로 인식하는 오류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방언은 사도행전 2:4 이하에서 언급한 것처럼 지역을 표시하는 언어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방언은 곧 지방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행 19:1-7에서 방언을 경헌하고 얼마후 고린도서신을 기록합니다.

이 경험이전에 고린도 서신을 기록햇다면 의미가 다른 방언을 말한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아볼로 제자들에게 나타난 방언을 목격하였고 경험하였으며 방언에 관한 흔들리지 않은 성령으로부터 주어진 확실한 증거를 에베소에서 경험한구 고린도서를 기록합니다. 

바울의 지식속에서 에베소의 방언이 방언이라고 이해 되었습니다.

바울이 알고 있는 방언 지식은 에베소에서 아볼로 제자들에게 나타난 현상입니다. 

앞에서 언급드린 것처럼 오늘날 교회에서 나타난 이상한 언어는 바울이 말하는 방언과 같지 않습니다.

왜내하면 바울이 알고 있는 사도행전의 방언은 지방언어 였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에 보낸 서신이 사도행전에서 나타난 방언이 아닌 다른 의미를 가진 언어였다는 주장들은 사도바울이 생각하는 방언과 전혀 다른 의미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오늘날 성도들이 하는 방언의 모습을 본다면 아마도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 1:8~9)"

이 말씀은 이미 갈라디아 교회에 언급하셨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도 그 말씀으로 성도들을 충고하는 일에 주저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방언에 관한 분명한 의미를 아셨으므로 하나님앞에 진실한 모습으로 서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한가지만 마음에 깊이 생각하시면 될것입니다.

 

사도 바울께서 말하는 방언의 의미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개념이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방언의 개념은 오순절 다락방에서 나타난 오순절 방언이라는 사실을 마음속에 깊이 새겨두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자주 반복적으로 드렸습니다.

확신을 가지고 말씀드립니다.

이제 비성경적인 행위에서 떠나시고 진실로 인격적인 하나님 앞에 서십시요.

우리의 위선을 벗어버리세요.

그리고 비 성경주의자들과 구별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한없는 사랑으로 여러분에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PS. 속히 고린도서의 방언을 강해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