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러러 볼 수도 없으며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 둘러 볼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 마음이 사라졋음이니이다.시편 40:12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 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 둘어 볼수도없으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만족의 충만하심이 만물을 창조하게 하신 원인이 됩니다. 만족이란 행복과 관계가 있으며 넘치는 기쁨과 관계가 있고 충만이란 가득 채워진 상태를 의미하는 말로 하나님 당신의 의식 속에 만족이 가득 채워져 행복 그 이상의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래 선하시고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에게는 악이란 그림자도 찾아 볼 수 없고, 선하시고 완전하신 분이 십니다. 그러므로 선하시고 완전하신 분이 만물을 지으셨다면 만물이 선하고 완전하게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인간과 천지의 피조물들은 하나님 안에서 완전하고 선하여 하나님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시므로 만물은 하나님 앞에서 선하고 아름다우며 완전한 상태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완전이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환경은 완전한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곳곳에 나타난 추악한 모습들은 하나님의 완전을 신뢰할 수 없도록 한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완전을 믿지 못하고 기근과 재앙 그리고 사람으로 사람의 욕구로 말미암은 수많은 욕구들은 피조세계를 거의 선하신 하나님이 볼 수 없는 시궁창의 상태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지역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환경재앙,
자연 환경에서 벌어지는 생존 경쟁의 피비릿내 나는 투쟁,
인간의 욕구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수많은 환경의 재앙,
들끓는 땅덩어리 속에서 분출하는 화염,
끓는 용암이 분출하려는 에너지에 의해 벌어지는 지각변동,
한시도 예측이 불가능한 온도의 변화로부터 일어나는 기상의 재앙,
종교와 이념을 달리하는 사람들 간의 죽고 죽이는 전쟁,
버림받은 사람들이 벌이는 수많은 사건들,
미움과 원망이 분출하는 폭동,
소외당하는 사람들과 인종 갈등으로 인한 울부짖는 호소,
가난으로 인한 고통,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생명을 경히 여기는 생명경시의 풍조에 이르기까지.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피 흘리는 지구촌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완전이란 한낱 철학에 불과한 것입니다.
성경은 이 모든 원인을 인간의 타락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타락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궁극적으로 인간이 하나님을 신뢰 할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은혜로 회복시켜 놓으셨다는 말씀을 전해 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하시고 선하신 분으로 피조세계를 지으시는 것을 즐거워하셨습니다.
모든 만물을 지으시고 이 만물들을 관리하는데 필요한 존재를 더 지으셨습니다.
피조세계의 만물을 관리하는 존재로서는 완전하신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의 모습을 드러냄으로 피조세계가 다스려 지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 1:26) 라는 의지를 가지시고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라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창조의 목적은 피조세계를 다스리고 관리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완전하게 지음을 받은 피조세계가 인간에 의해 관리 되도록 위탁하셨고 그 위탁은 결코 후화하심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주 좋은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완전하게 지음을 받은 완전한 인간이 반대의 양상을 나타낸 것은 곧 하나님께서 지식이 모자라셔서 완전하시지 않은 것이 아닌가? 라는 질문을 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인간의 타락은 하나님의 완전을 더욱 완벽하게 증거 하는 결과가 됩니다. 비록 그것이 인간들 사이에 불완전한 모습들이 나타나 보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이 더욱 완전한 창조를 증명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을 완전하게 지으신 것은 사단의 말대로 인간이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는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창 3:6)] 능력을 가질 수도 있고 그것을 뛰어 넘어 회개함으로 더욱 완전한 존재로 나아갈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에 의한 것이지 인간이 스스로 지혜를 계발하거나 존재를 향상시킨 것은 결코 아닙니다. 완전하게 지으신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이 그렇게 지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존재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능력이 없을 뿐 자기중심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불멸의 존재와 같은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유한한 존재로서 하나님의 능력에 버금가는 인격을 지닌 존재라는 의미를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격적으로 지성과 감성과 의지가 있으시듯이 인간들도 하나님에게 있는 인격적 속성을 지님으로서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서의 피조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조세계에 나타난 불행들은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것이지만 이것이 불완전을 증거 하는 것은 결코 아니고 오히려 완전을 증거하는 결과를 가져 올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준 피해는 완전하게 지음을 받은 피조 세계가 인간이 타락함으로 하나님의 완전하신 영광의 모습이 사라지고 말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의 타락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물의 완전성을 깨뜨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피조세계는 하나님의 완전하시고 선하신 피조 상태 대로 존재합니다. 다만 피조세계를 관리하는 인간이 타락함으로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의 거룩함은 사라지고 인간의 인격도 온전히 타락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서는 드러나는 하나님의 형상은 사라졌고 전혀 다른 타락한 인간의 모습이 드러나 보인 것입니다.
피조세계는 인간의 이런 모습을 즉시 알 수 있었기 때문에 피조물이 인간에 대하여 경계의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고, 인간에게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땅은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창 3:15)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인자는 무궁하셔서 타락한 인간에게 땅이 네게 어떻게 대할 것인지 말씀해 주셨고 그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스스로 깨우쳐 알도록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악이 없으시고 선하시고 완전하시기 때문에 악이 하나님으로부터 발원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는 악이라는 것은 그림자도 으며, 선으로 충만하시기 때문에 악이 자리할 어떠한 마음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피조세계가 사람에게 대하는 행동에 대해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범죄하였으나 하나님은 그를 사랑으로 대우하셨고 그가 회개하기를 기다리시기로 작정하셨던 것입니다.
존재하는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스스로 드러내지만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함으로 피조세계에 두려운 존재가 되었으며 파괴자가 되었기 때문에 경계하고 가까이할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눈에 비취는 자연이나 피조물들은 결코 안전한 곳이 못되었고 오히려 가까이 할수 없는 두려운 환경으로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실을 사람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가인에게도 죄를 짓게 될 것을 분명히 말씀하여 미리 알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지성으로 사유하고 깊이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자기가 죄를 범하게 될 것인지는 알려고 하지 않았고, 항상 조심하여 마음을 다스려서 죄를 멀리했었어야 하는데 반대로 닥치는 대로 행동하고 자의 마음대로 행동하였다가 결국 아우 아벨을 죽이는 최초의 살인자가 된 것입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창 4:6~7).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이유에 대해 많은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내용을 깊이 생각하면서 읽게 되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이유를 알게 됩니다.
가인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뭔가 우리가 알수 없는 하나님을 속인 거짓된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상한 것이든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가인의 양심에 꺼리는 그 어떤 것을 행하므로 하나님 앞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은 자기의 잘못을 알고 있었고 자기가 하나님께 범죄한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비록 범죄 하였을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선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선을 행치 아니함으로 얼굴을 들지 못하는 것은 양심이 행동입니다. 양심이 하나님앞에서 심판하여 가인이 하나님을 속인 그 무엇이 옳지 않은 행동임을 마음속에서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인이 농사하는 첫 열매를 드림에 있어서 가인만 아는 무슨 일로 하나님께 거짓된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가인의 거짓된 행위는 얼굴을 하나님 앞에 들지 못하게 했고 죄를 지은자의 진실이 드러날까 피하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고 이중적인 성격을 지닌 인간처럼 눈은 옆을 향하고 안면은 땅에서 뒤로 향하여 움직여졌습니다. 어떻게든지 그 자리를 피하여 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입니다. 아무리 죄를 감추려고 해도 얼굴에서 드러나는 표정은 양심에 의해 관리할수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얼굴을 들고 죄를 짖지 않은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은 양심 자체가 화인을 맞은 것입니다. 가인이 얼굴을 들지 못하고 곁눈질을 하며 안면을 땅을 향하여 양심의 심판에 정죄를 받은 것은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섰기 때문입니다. 감히 거짓을 가진 자가 하나님 앞에 설수 없는 것은 선하신 하나님의 선한 판단이 그를 설수 없게 합니다.
시인은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 볼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시인의 양심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 자체가 용납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제사를 드림에 있어서 죄로 말미암은 판단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죄들에 대한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죄들이 그를 괴롭혀 하나님 앞에 설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날마다 괴로운 고통에 억눌려 죄를 토설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태에놓였습니다.
쉬지 않은 재앙이 덮쳐 옮으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범죄한 지난 일들뿐이었습니다.
마음은 산란했고 정신은 죄들의 고소로 고통스러웠습니다.
조여드는 위기상황에 대처할 만한 판단력도 거의 상실한 상태일 뿐입니다.
다윗이 이렇게 고백한 것을 보면 우리는 의아해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했습니다.
그런 그가 죄로 말미암아 이처럼 처절한 마음의 아픔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요?
과연 우리는 다윗보다 더 죄를 덜 지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100배는 더 많은 죄를 지었을 것입니다.
물론 밧세바를 범하고 그의 남편 우리아를 전쟁터 최전선에 보내 적의 손에 죽게하는 그런 흉측한 죄를 짖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불신앙의 죄는 항상 하나님의 마음을 가까이하려했던 다윗보다는 더 많은 죄와 친구로 살았습니다.
다윗의 호소를 보십시오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 그치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보호하소서(시 40:11)
거의 매달리는 정도입니다.
그의 영혼은 이제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시면 이 환경에서 벗어날 수 없는 아주 절박한 심정에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다가온 재앙들이 죄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하나님의 지으신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처절한 모습을 시인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는 인생의 고난이 이처럼 험난한 삶일 줄이야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죄들을 기억조차 못합니다.
그것이 있는지 조차도 알지 못합니다.
또한 정확하게 무엇이 죄이고 무엇이 하나님 뜻에 맞는 것인지 무지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삶을 지속적으로 살아가고 하나님의 뜻을 멸시하며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영혼은 깊은 잠속에 빠져 있고 깨어날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아직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지 못한 것입니다.
고난의 아침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죄가 우리를 점령하고 우리의 양심에 화인을 박아 우리로 죄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되게하고 있습니다.
이런 무수히 많은 죄들 때문에 완전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은 도저히 참으실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내가 한계가 왔습니다.
더 이상 죄를 보시고 계실 수 없었고 하나님의 인내의 한계가 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얼굴을 들지 못하고 우러러 보지도 않으며 눈도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가까이 있으나 불안한 모습으로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마음은 녹아내리고 심장은 오그라져 움직임을 멈추기 직전입니다.
반복되는 사람들의 죄로 인한 고통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으신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계획하신 일을 진행하셔야만 했습니다.
고난주간 세째날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