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육체가 됨이라(창 6: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창6:3)
아름다운 꽃은 아름다운 이유가 있습니다. 아무리 작은 꽃이라 하더라고 꽃은 일정한 규칙에 따라 꽃잎이 만들어지고 일정한 색소의 량이 골고루 뿌려지고 분명한 모양으로 대칭구조로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균형을 유지하며 환경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씨앗에 담겨진 수대로 꽃은 피워지는 것입니다.
이 모든 규칙은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계획 된 것이며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이런 것들이 결코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길을 걷다가 작은 언덕의 섶들 속에서 피어오르는 이름 모를 꽃을 보았습니다.
저도 모르게 그 꽃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꽃들은 고개를 오르고 수줍어 얼굴을 붉혔습니다.
Y 셔츠 단추보다 더 작은 자줏빛 꽃들은 마치 아직 캐내지 못한 보석이 돌 속에 박혀 있는 듯이 숨어서 빛을 내고 있었는데 그 수가 하도 많아 밤하늘의 별들의 반짝임과 같았습니다. 게다가 아직 피지 아니한 준비된 꽃망울들과 함께 작은 언덕을 수놓은 장면은 한편의 명화를 보는 듯 하였습니다.
예전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이 그냥 지나쳤을 탠데 오늘은 그 작은 꽃들이 제 발을 붙잡고 호소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놀랍게도 제 눈에 비취는 그 꽃들은 크기도 일정했고, 모양도 일정했으며, 태양 빛을 받아 모금은 자주 색채는 안에서 바깥으로 점점 더 진하게 수를 놓았고, 꽃 잎마다 색조의 깊이 가 일정하였으며, 한 잎을 대칭하여 양 옆으로 2개씩 배열된 것도 일정했고, 가운데 아주 작은 암술과 5개와 수없이 많은 꽃가루를 머리에 이고 있는 수술들이 한결 같이 다 일정하여 보였습니다.
순간 저의 영혼이 이 꽃들을 만들어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사유 되었고,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시는 것 같은 하나님의 일하시는 모습이 저의 마음에 충만으로 부풀어졌으며, 심장은 빨라지고, 기쁨이 솟구쳐 온몸에 활기가 오르는 것 같았습니다. 놀랍게도 이 작은 꽃들에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충만한 인식으로 제 마음이 기뻐함으로 나도 모르게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게 되었습니다.
누가 일부러 정확한 수열을 배열한 것도 아니고,
조직하여 만든 것도 아닌데,
Y셔츠 단추의 절반 정도 밖에 되지 않은 수많은 꽃들이 하늘을 향하여 활짝 웃으며 고개를 들고 운동장에 뛰어노는 어린 아이들과 같고, 무대 위에 올라 노래하는 살아서 움직이는 오케스트라와 같았습니다.
누가 이 꽃을 만들 수 있습니까?
누가 이 꽃들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까?
아주 작은 꽃이라서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 같았는데, 그것들이 한결같이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나타내고 있어서 도저히 이것들을 지으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 질서로운 하나님의 창조하심에 내 영혼이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하늘을 우러러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렸습니다.
하나님!
여기 당신의 손길로 일을 하신 아름다움을 보십시오.
무엇이 필요해서 이 잡초 가운데에서 저렇게 작은 꽃을 피웠습니까?
사람이 무엇이관데 모든 피조물보다 아름답게 지으시고
제가 무엇이관데 이 작은 꽃을 통해 영광의 하나님을 뵙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 이렇게 찬양하도록 하셨습니까?
모든 영광 주님의 것입니다.
저의 발목을 붙잡으시는 이 시간은 제가 알지 못하는 신비하신 일이 계획되어 있의시지요.
제가 아는 한 하나님의 무한하시고 탁월하심이 저 작은 꽃들에서 보이고,
저들에게 생명을 공급하시고,
빛을 보내 색을 드러내게 하시며,
아주 작은 꽃임에도 불구하고 이 땅을 장식하도록 함에 있어서,
저들의 종만이 가지는 독특함으로 조금도 손색이 없는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이 정말 놀랍습니다.
또한 저에게는 오늘 이 자리에서 제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저렇게 작은 꽃들의 밭을 주신 것입니다.
이 작은 꽃으로 지면을 아름답게 장식하실 수 있으며,
온 세상을 능히 꽃으로 장식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저의 온 마음과 사랑을 드리도록 하셨습니다.
주님은 마땅히 우리의 영혼이 드리는 찬양을 받으시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으십니다.
입이 있는 대로 온 땅과 모든 피조물과 하늘과 하늘의 별들을 지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양을 드립니다.
온 땅과 거기 충만한 생물들과 하늘의 하늘들과 하늘의 수많은 별드를 지으신 하나님,
영광과 존귀 바드십시요.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드리지 않는 그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눈에 흐르는 감동의 눈물을 지워가며,
그것들을 만드신 하나님께 복 받쳐 오르는 기쁨을 억제하고 조용하게 하나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무리 작은 꽃이라도 그것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지으신 하나님,
그것들이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달라고 제 발을 붙잡아 저를 감동시키려고 그렇게 아름다운 꽃을 피워 올린 그 힘들을 볼 때,
터질세라
상처 입을 세라
아주 조심조심 어루만지시며 다루시는 세심하고 정확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저렇게 작은 꽃이
저의 발을 붙잡아 한동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했으니 저 꽃은 자기의 사명을 다한 것으로 넘치는 만족을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로 인해 영광이 하나님께 돌려진 것을 기뻐할 것을 생각하니 제 마음이 더욱 기쁨으로 충만하게 채워졌습니다.
저렇게 작은 것으로 내 마음이 만족을 얻으니
대지와 우주의 크고 넒은 피조물들이 돌리는 영광을 다 알면 인간의 영혼은 기준 이상 공기의 유입으로 견디지 못하여 터져 버린 풍선처럼 되고 말 것입니다.
또한 저렇게 작은 꽃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간절히 사모하거든 우리의 이웃이야 아니 우리 주위에 있는 수많은 영혼들이야 어디 비유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다른 화면을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는 분명하게 사람을 다른 피조물들과 구별되게 지으심으로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에 있어서 다른 관계를 유지하여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것은 피조물로서 하나님과 충분한 교제를 할 수 있도록 지으셨으며, 피조물들을 관리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을 사람에게 위탁하심으로써 생명을 유지시키고 존재되어지도록 하거나 종대로 아름다운 모양을 드러내게 하시고 생존에 필요한 모든 관리를 위임한 것으로 지금은 휴식을 취하시느냐고 문제를 제기하신 분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런 질문에 대하여 마땅히 대답을 드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드리는 글에서는 더욱 사유를 넓혀 사전에 이런 의문들의 내용을 차단 되도록 충분히 말씀을 준비하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하려고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이번 “하나님의 임재”에 관해서도 10회에 걸쳐 말씀을 전하는데 있어서 충분한 사유와 교리적인 바탕에서 적절하게 말씀을 드릴 수 있도록 사유를 깊고 넓게 하여 설명을 드리려고 합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을 들을 때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는 느낌을 얻도록 최선을 다하고 말씀을 듣는 여러분이 마치 하나님 안에 계신 것 같은 느낌을 얻고 기뻐하도록 노력을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자연과 혹은 지구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을 사람들에게 관리하도록 하셨으나 그들이 생명을 공급하거나 그들이 존재하는 힘의 능력을 드러내는 데 있어서는 사람에게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에게는 그 어떤 능력도 하나님을 대신하여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모든 만물을 말씀으로 지으신 하나님께서 결코 하나님께서만 하실 일을 피조물인 사람에게 맡기셔서 일을 그르치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보좌로부터 생명이 공급하시고,
피조물이 존재 하도록 힘과 능력을 골고루 부여하시고,
그 모든 것이 보기에 좋은 결과를 얻도록 지으시는 일은 아직도 여전히 반복되거나 계속되고 있습니다.
또한 타락한 사람으로 하여금 마땅히 자신을 위해서 있게 하신 피조물들이 드러내는 하나님의 영광을 지성으로 사유하여 느끼고 그것들을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돌리는 일만을 기뻐하시도록 맡겨준 것도 변함이 없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의 최종목적은 영혼을 지닌 사람을 만드는 일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만물을 사람을 위해 지으셨고 그 사람을 창조의 완성에 이루어 더욱 큰 영광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놀랍게도 모세를 통해 계시하셨고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에는 모든 만물을 만드시기 전에 이미 사람을 계획하셨고 그 사람을 위해 만물들이 순서대로 있으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만물을 지으셨기 때문에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모든 피조물을 통하여 자신에게 얻어지는 모든 유익을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도록 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기쁨이셨고 창조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의 충만 입니다.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모든 것들,
자연과 우주까지도,
그 드러나는 만드신 것뿐만 아니라 힘으로 운행하시는 일하심까지
섬세하시고
완전하시며
조금도 실수가 없으신 계획에서 실행까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입니다.
심지어 남자에게서 갈비뼈를 취하여 만드신 여자까지도 남자와 평등하게 하셨으면서도 남자를 위해 돕는 배필로,
사람이 외롭게 사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으셔서 당신의 기쁨을 위해 지으셔서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모든 세계를 얻고 더하여 아내까지 얻은 사람은 부족할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피조물들이 사람을 위해 지으셨으나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피조물에게 생명과 능력과 섭리하심을 지체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피조물을 대표하여 피조물들이 하지 못하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로서의 의무입니다.
사람을 재외한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고 힘과 능력을 의지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엄격한 규율에 따라 존재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나님께 돌려드릴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피조물들에게 사람과 같이 영혼을 지어 부여하셔서 그 피조물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교제가 가능하도록 하셨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기쁘시고 완전하신 뜻에 의해 오직 사람에게만 영혼을 부여하셨고,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행하신 일하심을 완전한 모습으로 사람에게 보여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드러냄으로 사람이 지성으로 그 영광을 보고 감지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광을 두 배로 더하게 하시려는 것이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 지성의 사유를 통해 인식하고 그것을 더 아름답게 감정을 넣어 표현함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기쁨을 두 배로 더하게 하시려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피조물들에게 영혼을 부여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들은 자신의 모습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완전하심을 가지고 있으나 표현할 수 없습니다, 혹시 표현하는 방법이 있다 하더라고 직접 하나님께 드릴 수는 없습니다. 오직 보이는 것으로 만족을 느끼게 할 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영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온전하신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만 영혼을 부여하신 그 뜻이나 의미를 알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고유의 사유 영역을 침범하여 더욱 큰 죄에 빠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여, 사람에게만 영혼을 주시는 것이 온전한 하나님의 뜻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합니다. 설령 우리가 그 뜻을 안다고 하더라고 성경이 말하지 않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람의 타락은 피조물들에게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전혀 느끼거나 보지 못하는 소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꽃들이나 자연 그리고 대지, 우주 등을 살펴보면서도 하나님을 전혀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을 드린바와 같이 하나님의 보좌에서부터 공급되는 하나님의 생명,
피조물들에게 지속적으로 제공되는 것은 하나님의 손길,
계속해서 간섭하시고 하나님께서 섭리하심으로 피조물들은 완전하고 선함으로 아름다운 모습을 지속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지만, 피조물들이 드러내는 하나님의 영광의 기이한 빛이나 어떤 현상이나 혹은 후광들을 전혀 볼 수 없습니다.
타락된 사람은 피조물들이 드러내는 영광을 피조물 자체가 드러내 준다고 생각하고 그것들을 발견하려고 합니다.
심지어 많은 크리스천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설교자들의 설교나 혹은 다른 신앙인들의 간증을 통해서 간접적인 경험담을 듣고 그것들이 드러내는 발산하는 영광의 빛을 보았을 때 나타나는 표현 등을 인용하여 자기도 그 영광을 경험한 것처럼 이야기하는 내용들이 아주 많이 떠돌아다닙니다.
심지어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노래하며 지저귀는 새들의 노래가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것이라고 성경을 인용하면서 말했습니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 찌어다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 이름을 송축하며 그 구원을 날마다 선파 할 찌어다
그 영광을 열방 중에, 그 기이한 행적을 만민 중에 선포할 찌어다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극진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 이로다
존귀와 위엄이 그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 성소에 있도다.
만방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 찌어다 여호와께 돌릴 찌어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 찌어다 예물을 가지고 그 궁정에 들어갈 찌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 찌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 찌어다
열방 중에서는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못할지라 저가 만민을 공평히 판단하시리라 할 찌로다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바다와 거기 충만한 것은 외치며
밭과 그 가운데 모든 것은 즐거워 할 찌로다 그리할 때에 삼림의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저가 임하시되 땅을 판단하려 임하실 것임이라 저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판단 하시 리로다
그러나 저는 그들이 들이대는 성경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지식마저 무시한 체 인용하는 것을 보고 말합니다.
그 노래들이 한결같이 사람의 영혼의 구원이 완성이 있고 하나님이 피조물의 온전한 상태로 영혼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그날들에 우리 주님의 온 세상을 심판하시고 강림하실 그날들의 노래로 모든 사람의 희망의 노래임을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바로 모든 피조물들이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는 그날들입니다.
모든 피조물들과 천사들이 사람을 부러워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사유하여 그것을 더욱 빛나게 표현한 다음 영혼으로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이 일은 어떤 다른 피조물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만 영혼을 부여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비 확인 비행물체, 우주인, 저 드넓은 우주에 수많은 태양계 등을 발견하면서 새로운 생명체에 관한 관심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그럴 지라도,
그것들이 사람을 만나기를 학수고대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께 자신을 이 세상에 있게 하시도록 생명을 공급하시고 세상에 드러내도록 하신 영광을 표현하고 싶더라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사람만이 하나님의 영혼을 불어 넣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우주인이 나타났다 하더라고 전혀 두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들은 여러분을 천사보다 더 높게 받들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4장을 읽으시면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릴 것인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에 돌리는 두 존재가 나타납니다. 그 하나는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있는 네 생물들과 보좌 주위에 둘러있는 또 다른 보좌에 앉은 24장로들이 있는데 네 생물과 24장로가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돌리는 영광과 존귀를 살펴보시면 이해하게 됩니다.
네 생물들은 영원히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 있어 하나님께 수종드는 천사들임에 분명합니다. 그들의 하는 일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일입니다.
그러나 24장로들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이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있는 보좌에 앉자 있었는데 머리에 면류관을썻습니다. 네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려 드릴 때 24장로들도 그들의 면류관을 벗어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보좌에 던지며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돌리는 것으로 천지 만물들의 피조세계에서 오직 사람에게만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구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드리는 영광과 존귀의 찬송이 지나친 감정에서 느껴지는 기이한 환상이나 빛들이 아니고 지성으로 사유 할 수 있는 아름다움과 질서로움, 그리고 모양과 색, 형태 크기 등이 드러내는 규율 등으로 충분하게 지성이 사유하여 영혼의 충만한 기쁨으로 발산하는 살아있는 고백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존하시고 살아계신 분이시기 때문에 살아있는 존재로부터 우러나는 노래를 즐거워하십니다. 그 노래는 감동 있는 영광을 돌려 드리는 찬양입니다. 이것을 오직 하나님과 교제가 가능한 사람에게만 허락하셨기 때문에 영혼에 지성의 사유를 부여하셨던 것입니다.
성경은 그 누구에게도 영혼을 사람을 제외한 피조물들에게 부여하신 사실을 말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지식이 뛰어난 알지 못하는 다른 태양계에 존재하는 우주인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 부여하신 그런 영혼을 부여하신 일이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광활한 우주를 보고 그것에 빨려들어 하나님의 신비하심을 뛰어넘어 또 다른 알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존재의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불신하는 일이 없어야 하고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사람에게 주신 이 놀라운 영혼에 관하여 무한한 감사를 돌려드림으로 더욱 큰 유익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타락은 이런 사유를 부패하게 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그리스도 이후 아직 온전히 거듭나지 않은 우리의 영혼들이 영화되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기 전까지 육체로 있는 날 동안 이런 사유의 세계를 희미하게 볼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에 있습니다. 이것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가져온 지성의 혼탁과 영혼의 부패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사람의 타락으로 나타난 결과가 지성의 혼탁과 영혼의 부패뿐입니까?
육체의 정욕에게 영혼이 마땅히 하나님의 형상의 빛을 드러내는 지성이 사유하는 기능마저 제공하여 온통 더러운 상태의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의 옷을 벗어던져 버린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모든 영광의 옷을 벗어던지고 스스로 존귀한 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정욕에 따라 살도록 변함으로 교만하고 정욕적 이어서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들을 멸시하고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사유하지 않고 온통 정욕을 중심으로 자기가 영광과 존귀를 받도록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정욕의 판단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피조물을 멸시하는데 있습니다.
정욕이 하나님의 피조물을 멸시함으로 자기를 높이고 자기가 온 세상뿐만 아니라 우주 넘어까지 주인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일하시는 섭리하심에도 어두워져있으며,
결국은 영혼이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떠나 있고
오히려 정욕의 노예가 되어서 모든 것을 자기중심대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지성이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지으심을 받은 목적으로 하나님의 인격적인 속성과 같은 지성입니다. 그러므로 지성의 판단은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아주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타락한 지성은 하나님의 인격적인 지성의 판단을 이용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하는 결과, 즉 피조물들에게 나타난 아름다움이나 선함 그리고 보여지는 모습들로부터 자기 자신에게로 만족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드릴 영광을 탈취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에게 드러내 보임으로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져야 하는 최종적인 창조의 즐거움이 사람의 타락으로 인해 완전히 탈취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사람의 영혼 깊숙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죄는 정욕적 이어서 오직 자기의 만족을 위해서만 생각을 하는 기준을 가집니다. 타락한 영혼이 타락한 지성이 생산하는 정욕적인 산물을 받아들일 때, 이전 같으면 하나님께 돌려드릴 영광을 사유하지만 타락 이후에는 자기의 육체의 쾌락을 위해서 육체의 만족을 채우려고 합니다. 이것을 "육체가 됨이라"라고 모세가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욕구는 하나님의 영광을 탈취하는 실재하는 정욕인 것입니다. 이 정욕은 가변적이어서 무수히 많은 모습으로 변하여 사람을 속이고 사람의 영혼에 깊숙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이 죄는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일하셔서 드러나게 하시는 모든 피조물들에게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거짓 것으로 바꾸어 자기의 기준으로 판단하여 그 영광을 갈취하고 있습니다. 거짓이 갈취하는 영광은 허무하고 완전히 보잘것없습니다.
피조물들은 무한한 규칙과 선하심 아름다움, 그리고 질서로움이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반하여, 타락한 영혼이 느끼는 갈취한 영광은 하나님의 것과는 전혀 다르게 피조물들 스스로 영광을 발산하여 기이하고 신비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빛이나 혹은 육체나 감정에 유익이 되어 느껴져야 하는 것으로 피조물이 존재하게 되는 생명의 원천과 그것들이 전체 자연과 어울리는 조화, 태양에서 공급되는 빛에 의해 얻어지는 색체,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으로 부터 얻은 생명, 사람의 눈에 느끼는 적당하고 아름다운 모양 및 형태, 그리고 크기, 또한 조직들의 배열등을 일사 분란하게 지어진 것들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정욕적인 감각에 의해 눈에 드러나는 모양과 형태만 보고 그것들이 뿜어내는 신비한 빛들을 찾아내려는 전혀 있지 않은 허무인 것이다. 그래서 타락한 영혼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피조물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결코 볼수 없으며 인식할 수도 없습니다. 거듭난 영혼의 느끼는 하나님의 기준에서의 영광을 전혀 사유하지 않고 허무에서부터 시작되는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타락한 영혼은 피조물들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얻는다는 근본적인 의문이나 질문 등이 지식으로 전달되지 않으면 결코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알지 못합니다.
피조물들이 발산하는 생명으로 인한 존재 자체와, 드러내는 모양, 형태, 색, 주위와 어울리는 관계와 조화로움, 또한 사람의 눈에 비춰 느끼는 감각 등이 한결같이 완전함과 선함으로 가득 있다는 사실을 전혀 사유할 수 없으며 느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성의 타락으로 그런 모든 사유의 규칙을 잃어버렸고 영혼조차 정욕의 노예로 전락되어 오직 육체의 유익을 위해서만 기능을 하기 때문입니다.(엡 2:3) 그래서 타락하기 이전의 사유를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을 결코 찾지 못하는 것이며 피조물 자체가 하나님과 무관하며 스스로 존재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타락한 사람이 피조물에게서 얻는 유익은 정욕적이고 파괴적이고 영리적인 생각뿐입니다. 결국 모든 피조물들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가장 먼저는 그것들이 사람의 육체에 유익을 유무를 판단하는 기준을 가집니다. 유익을 주지 않으면 아름다움의 대상에서 하위로 밀려나고 유익을 준다 할지라도 사람이 요구하는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버리거나 배척해 버립니다.
죄는 사람의 영혼에 지성의 자리에 앉아서 또리를 틀고 자기중심적 이도록 사유하여 철저히 유익의 유무로 판단하고 분석하여 냉정하게 파괴하고 도려내는 일을 서슴치 않습니다.
모세는 이 땅에 사람들이 있기 시작할 때에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죄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 지라(창 6:2)
하나님의 아들들의 타락한 모습은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아름다움에 감사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정욕적 이어서 자기의 아내로 삼아 아름다움을 자기의 정욕을 만족시키는데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롬 1:27)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으로서 여자는 모든 피조물 중에 가장 아름다운 피조물입니다.
이 아름다운 피조물을 남자에게서 뽑은 갈비뼈로 지으셔서 아담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여자를 지으신 목적은 남자를 돕는 배필로 지으셨고 남자는 그 모든 피조물들이 드러내는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리고 피조물을 관리하여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에 하나님을 영광을 노래하도록 지으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피조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남자에게 만들어주신 하나님의 은총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마땅히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되어 하나님께서 지으신 그 목적에 아름답게 부합하도록 해야 하지만 정욕을 불일 듯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모두 썩어질 것으로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롬 1:23)
피조물인 사람에게서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인격적인 속성의 느낌을 가질 수 있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에 영광의 감화를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두 인격적 속성이 서로 창조자와 피조물로서 다르지만 각 각이 동일한 느낌으로 작용하고 사람은 자기의 인격적인 느낌으로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보좌 앞에 드려서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는 놀라운 사실 앞에 하나님의 지으심, 그 탁월함과 지혜에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되고, 피조물인 제가 이것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 앞에 이렇게 완전하고 흠이 없도록 만드신(엡 4:1)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 땅에 보냄을 입은 수많은 지혜 자들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선배들의 놀라운 사상과 지성 그리고 그들이 남겨놓은 위대한 신앙의 유산들이 하나님을 묵상하고 하나님께 대한 생각과 경건한 삶들을 볼 때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이토록 놀라운 지성을 가진 존재로 지으셨다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벌레와 같은 내 존재를 사랑하시고 나의 삶을 간섭하시어 나의 입술에서 영광의 찬양을 받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 때, 온 마음에 전율하는 감동을 느낄 수 있고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충만해진 가슴의 감동이 그 선하심에 온 몸이 녹아 주님의 정원 앞에 졸졸 흐르는 시냇물이 된 느낌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부여하신 영혼은 하나님과 관계에서 교제가 가능하도록 탁월한 기능을 부여하여, 피조물의 수준을 하나님의 수준으로 가까이 하시되 하나님과는 구별되도록 지으셨으며,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아무리 해도 사람은 하나님 이상으로 더 높은 수준의 존재가 될 수 없는 피조 된 영혼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으며 그 놀라운 영혼의 지으심은 마땅히 피조물들을 지으신 것보다 더 높은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형상이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지 짐작을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영혼들을 위하여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도 마음속으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인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지으심으로, 하나님과 약속을 하고, 의견을 주고받으며, 관계를 맺고, 용서를 하고, 심지어 연인 관계처럼 사랑도 하고, 감정을 말할 수 있다는 엄청난 사실을 살펴보면 사람을 얼마나 영화롭게 지으셨는지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이렇게 지어주신 사실에 대해서 사람들은 일평생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도 그 은혜를 다 갚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에게서 하나님과 비슷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는 교제가 가능한 존재로서의 사람이란 사단이 하와를 유혹하여 죄에 빠지게 할 때 잘 나타납니다. 사단은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이 무엇인지 인식시켜 줍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금하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과는 다른 목적으로 사람의 마음에 허망한 생각을 가지도록 한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같을 것”이라는 것은 완전히 허영에 들뜬 교만을 일으키는 속임수입니다. 사단은 본래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에 완전하게 지음을 받은 사람의 이성을 자극하여 욕구를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완전하심이 사람에게 의지의 자유를 주셨고 의지의 자유가 설령 하나님의 뜻을 어긋나게 하는 결정을 했을 때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는 분명한 심판을 받는 것을 알도록 양심이라는 심판 기관을 주셨고 설사 지혜로 자기의 잘못과 실수에 범죄 하여 얻게 되는 결과에 대하여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한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공의를 생각하면 하나님의 공의로운 완전하신 심판에 대해서도 조금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더욱 완전하심이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사람에게 더욱 가치 있게 하심으로 더욱 완전하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사단의 말한 마디에 의혹에 휩싸이게 되었고 마음은 이미 하나님을 떠나 자기 존재의 위대함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가 이미 되어 있으므로 하나님을 무시하는 결국에 이르렀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배역을 저지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타락은 영혼의 깊은 곳에서 피조물로 지음을 받은 위대한 존재로서 영혼이 타락함으로 전 육체에 깃들이게 되었고 타락한 영혼은 지속적으로 타락한 지성을 이용하여 정욕을 양산하고 정욕은 영혼에 둥지를 틀고 하나님이 아닌 피조상태 스스로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짐으로 하나님의 모든 피조세계와 피조물을 멸시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아직 타락하지 않는 온전한 선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게 되는 이유에 대해서 아주 많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은 아직도 명백하게 이해를 못하고 있는 것 들 가운데 한가지여서 계속해서 사유하고픈 마음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비춰 주시므로 능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사유의 세계를 함께 여행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고픈 이유는 하나님께서 죄를 범하기 이전의 사람의 상태는 하나님은 보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선하신 상태에서 죄가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보기에 좋은 사람들이 사단의 유혹에 넘어지고 죄를 짓고 말았을 것이지만 그들이 범죄하게된 것을 불완전한 상태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으신 선하신 상태를 묵상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러나 제가 주님 앞에 서서 기쁨을 누리는 영화에 이르렀을 때 까지 모른다 해도 전혀 실망하지 않습니다. 그때에는 밝히 보여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현재까지 저의 사유의 결론은 사람이 타락함으로 하나님의 완전성을 더욱 드러내 주신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사람이 죄를 범할 수도 있고 아니면 범죄하지 않을 수도 있는 더욱 완전한 상태로 지으신 것이 더욱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드러내고, 피조물인 사람이 의지로서 행한 자기의 행위에 대한 결과를 사람에게 맡기되 그 결과의 대한 심판을 불가피한 것임으로 범죄에 대한 책임이 분명히 사람에게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완전함에 대한 저의 의견은 협의적인 의미의 완전함과 보다 광의적인 의미의 완전함으로 구분지어 본다면 협의적인 의미의 완전함은 하나님께서 오히려 인간의 임장에서 볼 때 선 지향적인 의미의 재한적인 완전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반면, 광의적인 완전함은 인간의 범죄에 대한 행위의 결과를 미리 예측하시고 그 이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의미의 완전함을 의미하므로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은 것은 광의적인 완전함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분명히 드러내 주셨고 주님께서는 완전하신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조금도 가감 없이 보여 주셨으며 참 사람의 모습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락하기 이전에 아담에 관하여 묵상할 때에 우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 분명히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주님은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우리가 가장 기대하는 참 사람입니다.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않으리니”
죄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본래의 목적으로부터 사람을 심각하게 이탈하게 했습니다. 지성은 정욕을 양산했고 영혼은 지성이 양산한 정욕에 의해 욕구들이 창고에 가득 채웠으며 의지는 창고에서 꺼내어진 욕구들의 요구에 의해서 영혼에서 육체로 전달되는 메시지의 내용에 따라 육체는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의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사람이 행하는 모든 것은 정욕에서 양산된 것이며 정욕은 교만하고 오만하여 남의 말을 일체 듣지 아니하고 자기중심적이며 지극히 이성적이어서 세상에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도록 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지고 추악한 육체의 벗은 몸만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모세의 글에 사람이 처음 타락의 모습을 보인 이 후 지속적으로 그 죄들이 보입니다. 아담의 타락 이 후 그의 아들 가인과 아벨이 싸워 아벨이 죽임을 당합니다. 아니 가인의 일방적인 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가인이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었다가 급습하여 아벨의 육체에서 생명이 유지 되지 못하도록 흉측한 일을 저질렀는지, 아니면 음흉하게 살인의 의도를 감추고 다가가서 급습하여 아벨의 피를 땅에 뿌려지게 하고 쓰러져 죽음의 문턱에서 고통당하고 괴로워하는 아벨의 모습을 보고 조금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 없이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며 죽음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그가 죽음의 문턱에 괴로워하는 아벨을 보고 크게 후회하지 않았으며,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심하게 충격을 받게 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을 보면 가인의 죄가 얼마나 계획적이고 잔인하고 자비가 없는지를 보게 합니다. 죄는 이처럼 조금도 긍휼을 가지지 아니한 포악의 모습을 감추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영혼이라는 집에 있어 하나님의 영광의 모습을 온몸에 드러나도록 했어야 하는데 정욕이 자리를 잡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신이 함께할 자리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결국 죄를 택한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신은 거두워졌고 하나님의 신이 거두워짐으로 인해 영혼에 거처하는 하나님의 형상은 깨어져 자기를 들어내는 허영의 형상을 내 뿜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선배 신학자들이 말하기를 아주 휼륭하고 능력이 있는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명마를 비유하여 그 명마에 거짓과 허영이라는 기수가 자리를 잡아 말을 거짓되고 난폭하고 허영에 들뜨도록 몰아 채찍질함으로 순식간에 말에게 씌워진 영광의 옷을 벗겨버린 것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 기수는 거짓뿐만 아니라 아주 난폭하고 잔인해서 인정이라는 것은 조금도 없으며 사랑 자체를 모르는 냉혈인 이어서 말의 건강을 생각하지 않고 아무 음식이나 함부로 먹이고, 아무데나 함부로 뛰어다니며 길이 아닌 곳으로 말을 몰아 다리를 부러뜨리게 하고, 온통 미친 듯이 날뛰어 시끄럽게 하는 등, 선이라는 것은 조금도 찾아 볼 수 없는 오직 승리밖에 모르는 냉혈 인이 기수로 등에 올라앉은 것입니다. 이 기수는 얼마나 무식하고 미련하며 고집스러운지, 자기의 생각에 아무런 판단의 기준이 없고 오직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고 생각하며 아무의 충고도 받아들이지 않고 오직 자기의 중심에 따라 생각하고 판단하여 사람이라는 명마를 완전히 더럽고 추잡한 상태로 만들어 버립니다.
2010, 4,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