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대로 살면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1)

생명있는 신앙 2010. 9. 26. 10:07

로마서 8:13

 

"육신으로살만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서 육신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사람을 죽이는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

  

영혼과 육체 사이에 마음이라는 기관이 있고 마음의 이쪽과 저쪽에 육체와 영혼이 서로 대면하고 마음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음을 점령하려고 하듯이 있습니다. 영혼으로는 하나님과 관계한 모든 인식의 세계를 마음에 비추어 육체가 느끼게 하고, 육체로는 눈에 보이는 피조세계의 사물의 정보를 마음으로부터 영혼에 비추어 영혼이 인식하게 합니다.


사람의 구조는 영혼에서 마음을 바라보면 마음 너머에 육체가 있고, 육체에서 마음을 향하여 마음 너머에 영혼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는 대면하고 어느 방향에서든지 동일하게 대면하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뒤에서도, 양 옆에서도 서로 영혼과 육체가 마음을 사이에 두고 대면하고 있어서 이것을 그림으로 그린다는 것이 간단하지 않습니다. 마음에 비취는 일을 쉬지 않고 이것이 서로 유기적으로 사람으로 생명을 가지고 살도록 조직되어 있습니다. 유기적이란? 영혼과 육체가 각각 독립된 개체를 가지고 한사람을 이루는 조직의 단위라고 한다면 영혼의 인격적인 기능과 육체의 인격적 기능이 별도로 구성되어 있는데 서로 다른 두 인격이 연합하여 한 인격을 이룬다는 말은 결코 성립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 인격 안에 영혼과 육체의 유기적인 연합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유기적인 연합은 이성적인 존재로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통합한 총칭을 의미하는 말로 인격을 말합니다. 그래서 두 인격이 연합하여 한 인격을 이룬다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전혀 맞지 않는 말입니다. 한 사람에게는 한 인격만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한 인격을 한 사람이라고 말하므로 영적인 인격 영혼과 육적 인격 육체라고 따로 말하지 않고 이를 영혼과 육체 기능으로 나누어 생각을 할 뿐 각각을 인격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영적인 사람과 육적인 사람으로 구분되어 칭하고 그 책임의 한계도 분명히 하고 영혼은 천국에 가고 육체는 지옥에 가는 구분된 심판이 주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영혼과 육체가 같이 타락하고 같이 범죄 한 것으로 즉 한 사람의 범죄 즉 한 인격의 범죄로 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은 곧 우리의 부활이라고 말하고 마지막 날에 우리 육신의 부활을 분명히 확신시켜 주었고 복음이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부활하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유기적이면서 영혼과 육체 통틀어 인격이라고 말하고 이 인격은 지, 정, 의가 유기적 연합에 의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을 지으시는 과정이 먼저 흙으로 빚어 지으셨고 다음에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사람이 생령이 되게 했습니다. 사람은 육체로만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고 영혼과 함께 합하여 생령인 상태가 사람인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지성을 영혼에 거한다고 했고 하나님의 형상을 영혼의 눈이라고 했습니다. 지성은 모든 지식의 창고이고 영혼에 있으며, 감성은 모든 감각의 힘이며 육체에 있으나 영혼에 까지 있고 정욕의 대표 기관이며, 의지는 마음에 있고 마음은 행동의 근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행동은 마음으로부터 육체에 열매를 맺고 영혼에서 지식을 얻고 마음에 빛을 비추어 육체에 나타나도록 함에 있어서 영혼에서 육체로 들어가는 문이 마음이고, 육체에서 영혼으로 들어가는 문이 마음이며, 전인격으로 사람의 밖으로 드러내거나 표현하며 나가는 것이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사람의 속사람으로 들어가는 문이기도 하지만 사람의 감정이나 혹은 지식의 표현의 진의를 마음을 통해서 표현함으로 사람의 전인적인 인격의 표현입니다.

성경은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라고 전도자가 말했으며,  “율법을 마음에 새기며” 라고 모세가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인격의 구성인 지성과 의지 감성을 표현하듯이 개별적인 기능이나 기관을 표현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 마음은 어떻게 이루어져 있으며 육체의 어느 부분에 위치하고 있는 것입니까?

대부분 사람들은 마음을 심장에 있으며 차가운 정신과 대조적으로 따뜻하고 온화한 기능을 가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마음을 전인적인 대표적 표현으로 사용함에 있어서 인격적 구성의 하나인 지성과 감성, 의지와 같은 기능을 가진 개별 구성으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개별적인 인격적 기능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부분적인 인격성을 표현 할 때만 사용합니다. 지성과 감성, 의지는 각기 개별적인 성격을 지칭할 수 있는 말입니다. 하지만 마음이 어떠하면 그 사람이 어떠함의  판단하므로 그 사람을 지칭함에 있어서 전인적인 판단을 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전인적인 표현을 함에 있어서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마음 안에는 모두 함축하여 표현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마음이란?” 전인을 표현하는 의미의 기관인 것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인격적 구성인 지성, 감성, 의지가 마음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는 별도의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영혼과 육체가 합하면서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께서 마음을 지으신 것이며 마음은 사람 속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려고 시도하면 더 깊이깊이 숨어버리고 그 모습을 자신에게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어디엔가 분명히 존재하고, 성경은 이것을 “속사람”이라고 했고 하나님께서 이것을 살피고 들여 다 보시며, 그 사람의 됨됨이를 판단하신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누가 일리요, 그러나 하나님을 사람의 깊은 것이라도 다 아시느니라”

마음에는 지성의 판단, 감성의 감각과 욕구, 의지의 행동이 한 결과로 나옵니다.

사람이 타락한 이후 정욕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인격은 마음에서 정욕적인 사람으로 나타나고 생각은 끊임없이 정욕의 욕구를 얻으려는 모사를 기획하고, 육체의 정욕 보다 진리를 갈망하는 영혼의 욕구가 강한 사람은 진리를 순종함으로 영혼을 깨끗게 하여(벧전 1:22) 하나님을 향하는 본질적인 기능을 가진 영혼에 의해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고 마음에 선한 방향으로 의지의 작용이 일어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육체가 영혼이 이끄는 대로 끌려가는 질서로운 삶을 살게 되는 은혜의 상태에 머물게 됩니다. 

육체는 피조물이 실제로 행동하는 결과를 나타내는 움직일 수 있는 존재이지만 영혼은  육체와 같이 본질적인 물질로 구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성향의 의지를 피조 세계에 드러내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영혼의 성향이 육체를 통해서 드러내도록 지으셨으므로 성향을 외적 결과로 나타내지 못하는 것은 물질로 지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육체는 성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의지에 따라 존재하는 피조물로서 움직이는 결과를 나타내는 경향을 가집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피조 세계에 하나님의 영광이 사람을 통해 보이도록 하셨고 육체는 영혼의 성향을 의지의 경향으로 자율적인 행동으로 하나님을 향한 영광을 드러내거나 노래함으로써 완전한 객관적 탁월하심(superiority)을 피조물을 통해 알 수 있으므로 더욱 창조로부터 모든 아름다움과 선함의 영광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런 영광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이 자율적으로 드리는 것으로  만들어진 영광이 아니므로 완전히 객관적이며 피조물에 의해 더욱 탁월한 영광입니다. 이것이 지음을 받은 피조물에게 나타난 것으로 창조의 영광과 피조물인 사람이 드러내는 영광이 더하여 더욱 가치 있는 영광을 드러내는 것(요한계시록 4:11)입니다.


육체가 가지고 있는 본래 성향은 활동적이며 정욕입니다. 영혼은 육체의 성향에 영향을 미쳐 정욕적인 활동을 나타내거나 제거 되도록 하는 판단기능을 합니다. 영혼의 성향이 육체에 영향을 미침에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을 마음에 비추어 육체가 자신을 지으신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인식하게 함으로 결과적으로 육체로 하여금 선한 의지만을 드러내게 합니다. 이것은 육체의 성향을 판단하고 제어하는 역할을 영혼이 담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짐승들을 훈련하여 성향을 바꾸어 놓으면 훈련을 받은 짐승과 훈련을 받지 않은 짐승이 비교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잘 훈련된 짐승은 사람의 뜻에 잘 순종하지만 훈련되지 않은 짐승은 자기 보호 본능 및 욕구에 의해 오히려 사람을 공격하거나 난폭하게 덤벼듭니다. 잘 훈련된 짐승이 사람에게 행하는 행동을 선하다고 판단한다면 난폭하게 덤벼들고 공격하는 짐승의 행동을 악하다고 규정할 것입니다. 이것은 동물의 육체에서 나타난 정욕적인 행동으로 사람의 육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정욕과 비슷한 경향입니다. 이 경향을 선한 경향과 악한 경향이라고 말하고 곧 선과 악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범죄 한 후에 “저들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중 하나같이 되었으니(창 3:22)”하시고 타락한 사람이 완전히 육체로 자율적인 존재 상태가 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육체가 영혼에 의해 이끌림을 받고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지향하는 활동과 정욕을 추구할 때 육체는 한량없이 아름다운 존재가 됩니다. 이때의 정욕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보다 뛰어난 힘과 능력을 지닌 짐승들을 훈련시켜 사람이 할 수 없는 고도의 기능을 이용하여 위기에 빠진 사람을 구하거나 주인을 잘 기억하고 항상 주인의 주위에서 안전을 목적으로 적에게 위협을 가하거나 공격하여 주인을 지키기도 하고 혹은 주인을 위해 장렬하게 목숨을 희생하기도 하는 훈련된 개들이 사람의 의지에 의해 길들여져 사람을 위해 충성하는 것과 같이 육체가 영혼의 이끌림을 받거나 길들여지므로 재어 받는 상태 즉 영혼이 제 기능을 하고 있는 상태에서 인간은 참으로 아름다운 존재입니다.

사람의 육체는 무질서한 성향을 가진 채로 존재합니다. 그 무질서한 성향이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하는 모든 경향이 욕구이며 이를 통틀어 정욕이라고 하는데 본래 정욕은 선과 악을 향하여 함께 행동 할 수 있는 의지의 활동을 일으키는 動因(drive)입니다. 반드시 정욕은 훈련을 받거나 아니면 외부에서 영향력에 의해 재어가 가능한 어떤 원인자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행동의 원인을 재어할 수 없는 이성 없는 존재의 욕구 덩어리입니다. 배고픔을 이기지 못한 밀림의 왕자 사자가 먹을 것을 발견하고 공격하기 위해 몸을 움츠리고 앉아 있는 상태가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의지이고 공격의 기회를 붙잡고 잔인한 생각으로 무거운 몸을 일으켜 쏜살같이 달려가는 행동하는 움직임은 정욕의 극한에 이르는 열정입니다. 이 열정이 낳는 것은 피흘림과 아픔과 고통 그리고 연약한자의 슬픔이고, 강한자의 잔인함과 감당할 수 없는 욕구 노예인 육체에 심겨진 야수 성향을 제어할 수 없는 도구일 뿐입니다. 정욕은 샘솟듯 분출하는 성향에 의해 육체를 행동하게 하고 육체는 행동하려는 성향을 마음에 비추어 의지를 일으킬 때 영혼이 육체의 의지에 브레이크를 가함으로 마음은 육체의 정욕을 제어(벧전 2:11)하게 됩니다. 이 정욕은 쉬지 않고 분출하지만 영혼은 그 정욕의 활동을 쉬지 않고 재어함으로 사람은 온전함을 유지할 수 있게 합니다. 육체는 쉬지 않고 행동하려는 성향을 마음에 드러내고 영혼도 마찬가지로 육체의 성향을 분석하고 쉬지 않고 악한 성향을 제어합니다. 육체는 그 속에 선과 악을 함께 지니고 있고 그 성향이 쉬지 않고 분출하여 마음에 뿌리므로 마음은 그 욕구를 감당 할 수 없을 많큼 많은 육체의 정보들을 영혼으로부터 얻고 선한 의지만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의 육체의 정욕을 아시고 마음에 양심(conscience)을 심어 두신 것입니다. 이것은 정욕의 행동을 억제하는 최후의 수단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한걸음 더 나아가 사람을 생각하시고 사람으로 악에 대한 최후의 억제 수단을 마음에 두신 이유는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이 범죄하여 영혼의 기능을 제대로 할수 없는 상태를 준비하신 것으로 사람의 타락을 이미 다 아셨기 때문입니다.

이 양심(Conscience)은 육체에서 분출한 정욕이 마음에 들어와 의지를 부추키려 할 때 자기가 행동할 행위에 대한 자기 검열, 곧 도덕에 관한 자기의 생각입니다. 이것은 영혼의 기능을 대신하는 육체의 기능으로 하나님께서 마음에 심어 두어 육체의 정욕을 재어하도록 하셨습니다만 양심이 영혼과는 다른 것은 옳고 그름에 관한 개념을 가지되 육체의 감정을 이용한 자기 검열에서 비롯된 도덕만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강력한 선의 경향을 뿜어냄으로 육체의 정욕에서 뿜어져 나오는 모든 더러운 것을 재거하되 마음에 심겨진 양심으로 정욕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지성에 알게 합니다. 

마음에 두신 양심에는 성문법처럼 마음 판에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니지만 마음에 두셨고 하나님께서는 이 양심으로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자율에 맡겨둔 것입니다. 사람은 육체의 상태에 따라 경험이나 혹은 선험적인 판단에 의해 도덕관념을 형성한 다음 자율에 의해 옳고 그름을 판단합니다. 그런 이유로 모든 사람에게 일정한 도덕관념이 드러나지 않고 사람에 따라 다양한 관념들을 드러내는 원인이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율법이 있기 전에 양심이 법이 되어 사람의 행동을 재어 했던 것입니다.

사람의 타락은 영혼이 하나님으로 부터 단절됨으로 생명이 끊어져 제 기능을 하지 못한 상태 있으며, 육체는 영혼과 합하여 사유하지 않고 순전히 자율적인 판단 기준을 가지거나 아니면 삐뚤어진 영혼의 기능에 의해 인도되고 있습니다. 양심은 삐뚤어진 영혼에 의해 오히려 재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육체의 정욕에 따라 행동하는 강제적인 활동에 부분적으로 역할을 할 뿐입니다. 오히려 이런 상태를 육체가 자율로 사유하고 판단하는 편향적인 상태가 되었으며 다른 피조물들과 같이 정욕의 노예가 된 자기중심의 존재가 된 것입니다.

육체는 흙을 빚어 만들었기 때문에 그 본질은 흙에서 왔습니다. 육체는 인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영혼과는 다르게 인격적 존재로서의 성향에 따라 움직이고 욕구를 드러내는 모든 작용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육체의 성향이 정욕적인 것은 성향을 제어할 수 없는 동물들과 같으나 실상은 동물보다 더 향상된 생각할 수 있는 것과, 도덕관념을 가진 이성적 존재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그들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환경적인 인식능력만을 가진 제한된 성향만을 가진 존재이며 지극히 정욕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양심이 없는 생각하는 기능이 미미하고 비도덕적인 존재이지만 사람은 이들과 철저히 구별됩니다. 선악을 알고 사물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과 다른 피조물들을 다스리고 정복할 수 있는 지혜, 더할 나위 없이 위대한 창조의 능력을 겸비함에 있어서 육체가 거의 완전한 존재에 이르도록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에 의해 지음 받은 사람이 자신의 인격적인 존재로서 거의 하나님에 가까운 존재이며 만물보다 뛰어난 존재임을 이유로 교만을 가지고 하나님을 떠나 자기 중심적인 존재가 되어 스스로 존재하시고 만물에게 생명을 부여하시는 하나님보다 높아지려는 범죄에 이른 것입니다.


비록 사람이 범죄에 이르렀으나 피조물로서 생각을 가지고 스스로 존재하는 자와 같이 판단을 하고 생각하는 점에 있어서 이 존재의 위대함을 드러냈으나 그들에게 욕구를 재어할 수 있는 기능이 현저하게 약화되어 제멋대로 삶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문화와 과학혁명, 경제와 정치 구조의 질서유지, 변화에 대응하는 능력, 지구를 정복하고 우주를 정복하는 탐구하는 생각, 신에 이르는 도전과 모험정신 등, 동물에 결코 비할 수 없는 뛰어난 존재로서의 신적인 능력을 드러낸 존재이지만 이 모든 것이 육체의 정욕에서 비롯된 것으로 하나같이 눈에 드러나 보이도록 행동되어집니다. 그러나 영혼은 육체보다 뛰어난 존재임에는 분명하지만 이처럼 영혼의 단독적으로 경향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영혼의 활동은 눈에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위대한 성향과 뛰어난 창조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영적인 존재로서의 의지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영혼과 육체를 합하여 하나님의 아름다운 피조세계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하셔서 이를 지으시기를 결정하시고 구체적으로 영혼과 육체가 합한 사람으로 다음과 같이 만드셨습니다.

첫째, 영혼과 육체는 각기 인격적인 독립체를 유지한 존재입니다.

1) 영혼의 지성은 육체의 지성과 연합하여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지성을,

2) 영혼의 감성은 육체의 감성과 연합하여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감성을,

3) 영혼의 의지는 육체의 의지와 연합하여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의지를 드러내도록 지으셨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지으셨습니다.

마음은 사람의 중심입니다. 모든 인격적인 기능의 총 합체입니다. 마음은 영혼이나 육체가 지닌 것 같은 인격 구성을 가지지 않았으며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영혼과 육체에 의해 인간 안에 형성된 사람의 중심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영혼과 육체를 각기 별도로 지으시고 이 둘이 합하여 마음이 이루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지으셨다(시33:15)고 하되 그 지으심이 사람의 구성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감하시면서 마음에 담겨질 사유의 본질들을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마음을 선한 마음, 강팍한 마음, 완악한 마음들과 대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구성적 요소로서의 마음을 의미하는 것은 영혼과 육체가 합하여 이루어진 의지의 집을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은 영혼과 육체 중 하나만으로 결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육체가 없는 영혼으로 마음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영혼이 없는 육체만으로 마음이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마음은 육체와 영혼이 마음을 이루도록 하였기 때문에 어느 하나가 없으면 마음이 성립되지 않으므로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이 성립되지 않으면 생각을 할 수 없고 생각이 없으면 의지가 뜻을 드러내지 못함으로 마음속에 있는 것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그 본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만 지옥으로 돌아감으로 이들의 영혼에게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있어서 사람을 지으신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함으로 아름답고 질서로움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온전한 인간의 상태에 머물지 아니하면 결코 아름다움을 드러내지 못함으로 질서로움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은 물질의 모양과 상태에 있는데 육체가 죽음으로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허무로 향하여 내려갔으므로 아름다움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영혼은 존재에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으나 형태를 가지지 못함으로 아름다움을 나태나지 못하고 선함에 이르지 못합니다. 영혼이 선함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육체가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이므로 사람이 죽음에 이르는 것은 하나님의 선함을 이루지 못하는 상태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체가 없는 영혼은 존재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육체와 함께 하지 못함으로 마음을 가지지 못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들의 영혼은 완전한 사람으로 구성되지 아니하는 영혼으로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없으면 생각을 할 수 없고, 생각을 하지 않으면 이성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비록 영혼이 영적인 존재라도 단일 존재로 지음을 입은 피조물로 남을 뿐입니다.

죽은 육체는 물론 흙으로 돌아가니 마음이 있지 않습니다. 마음이 없으니 생각조차 할 수 없고 흙으로 돌아간 다음 무로 돌아가고 그 육체에 새겨지고 기억된 모든 지식까지도 무로 돌아 가버리고 육체가 누리고 추구하고 그토록 채우기를 원하던 정욕까지도 남김없이 무에게로 던져져 버립니다. 결국 무가 육체를 삼켜 버렸고 육체의 모든 기억까지도 지워버린 것입니다. 마음도 생각도 없고 기억도 없는 지워진 육체는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죽음인데 그와 한 몸을 이루고 있었던 영혼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와 사람과 하나 되기 위해 지음을 받은 존재였기 때문에 불멸의 영혼으로 육체가 죽은 후 하나님께로 돌아가지만 생존하는 동안의 육체로부터 얻은 지식을 기억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영혼이 육체 안에 생존하는 동안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고 소생함을 받지 못하여 죄로 말미암은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존재인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영혼을 위해 다시는 생각을 마음을 가지지 못하고 생각을 할 수 없는 고통으로 빠뜨리시는데 그 고통의 세계가 지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영혼이 지옥 고통의 못에 빠져 고통 속에서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여 거듭나기 위해 회개하거나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기 위해 하나님을 부르짖거나 돌아가는 일을 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육체 안에 거한 타락한 영혼에게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 짖으라 내가 응답하겠고(렘 33:3),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을 찌라(출 22:23), 너희가 내게 부르짖음으로 내가 너희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였거늘(사 10:12),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출 22:27)”

이 말씀들은 사람의 영혼이 육체에 머물러 있을 기간에 사람이 자기의 판단에 따라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간절한 호소를 외면하시지 않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렇다면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는 영혼이 그 고통 중에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으실까요? 하나님께서는 육체보다 영혼을 더 사랑하시고 구원 자체도 육체가 아니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기 때문에 지옥에 빠져 부르짖는 영혼을 구원하시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옥에 빠진 영혼이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지 못하는 그 이유는 그 영혼에 마음이 없으며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혼은 분명 하나님께서 지으신 존재이므로 육체 안에 살아 존재하던 동안에 얻은 지식은 남겨져 있습니다. 영혼은 인격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인격적 기능이 있으며 감정을 가지나 마음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의지는 있으나 육체와 연합하기 까지는 의지가 아닌 표상일 뿐이므로 드러내지 못하며 마음에 담지 못한 껍데기일 뿐입니다. 영혼의 의지에 육체의 의지가 합하든지 아니면 육체의 의지에 영혼의 의지를 담든지 서로 협력하여 또 다른 하나를 이룰 때 비로써 마음을 형성됩니다. 육체나 혹은 영혼, 둘 중 하나의 의지로는 결코 마음을 이루지 못하고 마음이 이루어지지 아니한 의지는 행동하는 존재로 드러내지 못함으로 죽어 있거나 혹은 행동하지 못하는 영혼의 의지로서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지으신 선한 목적에 결코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영혼에서 육체로, 육체에서 영혼으로 서로 교차하는 유일한 문이며 영혼과 육체 사이에 있고, 영혼이 육체를 향하고 육체는 영혼을 향하는데 그 사이에 마음이 자리를 잡고 영혼과 육체에서 보내진 모든 지식이 스크린에 비취는 상을 얻는 것처럼 지식을 얻고 그것이 감정으로 드러납니다.

마음은 영혼과 육체에 의해 이루어진 하나님께서 지으신 인간의 중심 기관임으로 이것의 기능은 육체와 영혼의 균형을 이루게 하고 인간으로서 하나님께서 원하는 온전한 인격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게 하므로 하나님의 선함에 온전한 목적을 이루는 존재를 드러내게 하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특별한 기관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마음만을 별도로 지으신 것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를 통하여 마음이 성립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드러내게 한다는 것은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기능의 경향으로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의 얼굴은 갖가지의 감정을 표현하듯이 속에 있는 감정을 드러내는 것과 같은 것으로 겉모습은 일정하게 만들어져 다양한 감정과 다양한 의지적인 표현이 얼굴이나 행동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이런 기능을 가지지 않았고 생존을 위한 극히 일부분의 감정만을 나타낼 뿐입니다. 이것은 고통스런 아픔을 울부짖음으로 표현하고 즐거움을 꼬리를 흔들거나 몸짓으로 표현하는 듯이 극히 일부분의 의지적인 표현으로 재한 되어 있으나 사람은 수 많은 행동들로 마음의 상태를 표현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최고 피조물로 지으신 것을 드러내고 이성을 가지고 생각할 수 있는 존재 곧 하나님처럼 자존하지 않지만 자신의 갖가지 의사 자유자재로 표현 가능한 존재라는 점에서 신적인 감각을 가진 존재인 것입니다. 이 신적인 감각은 영혼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영혼은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의 형상을 담은 그릇이므로 하나님의 형상이 가진 신적인 감각이 주어져 있습니다.


육체의 경향은 제한적이지만 그 추구하는 방향은 예측할 수 없으며 심지어는 제어가 불가능합니다. 반면 영혼의 경향은 하나님의 형상을 담은 그릇이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완전한 선에 이르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혼의 성향은 하나님 형상에게 있고 하나님 형상은 하나님의 뜻에 이르는 완전성에 있으며 하나님의 질서로운 선을 지향하는 내적인 경향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이 필수적으로 존재하는 이유는 어떤 이유에서든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존재로서는 자의적으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형상의 경향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육체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도덕적인 선의 경향이 개발되지 않은 존재가 된 상태로부터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에 의해 이미 새겨진 양심과 언약으로 주신 약속 있는 계명들로 도덕에 갇힌 상태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도덕으로 억제하시는 것은 인간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찾아가도록 하려는 것이었으나 인간의 육체는 모든 피조물과 같아서 결코 하나님을 올바로 인식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육체는 본래 허무로 돌아가려는 의지에 붙잡혀 있습니다. 이 성향은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고 순수한 피조물의 본질에 머무는 것이며 철저하게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사람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일정 기간 세상에 존재하다가 생명을 떠나 무로 돌아가듯이 흙으로 지음을 입은 사람의 육체가 생명에서 벗어나 무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동물이 일정한 시간을 존재하다가 죽어 흙으로 돌아가고 무로 돌아가는 것과 사람이 같은 경향에 매여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경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경향을 죄라고 하셨고 죄는 허무로 돌아가려는 경향에서 사람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며 영혼을 주셔서 허무로 돌아가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의 욕심에 미혹되어 하나님처럼 되려는 욕망에 미혹되어 하나님의 생명의 끊을 자르고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였고 영혼 속에 두신 하나님의 형상을 과감하게 부서뜨려 재 기능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생명은 하나님과 단절 되었고 영혼의 기능은 뒤죽박죽이 되거나 아니면 대부분의 기능이 온전하지 못한 삐뚤어진 상태가 되었습니다. 영혼의 모든 기능은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단절되어 하나님의 형상의 등불이 꺼져 버렸고 심하게 어두워져 버렸습니다. 영혼이 하나님의 생명을 떠나 비참한 상태가 되었고 유일하게 하나님께만 있는 생명으로부터 단절됨으로 반드시 죽을 육체가 되었습니다.

어떤 피조물이라도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연결 되어있지 않고 일정한 시간동한 존재를 명받아 무로 돌아가는 것과 같이 사람도 일정 기간 존재하다가 무로 돌아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람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영원을 향한 존재로 지음을 받았고 불멸하는 영혼이 주어졌지만 그의 범죄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비참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마음


바리세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공격하여 말하기를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이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많은 말씀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방패니 이 모든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막21- 22)”

주님께서는 여기에서 육체에서 나온다거나 영혼에서 나온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이라고 하셨습니다. 영혼과 육체가 분명히 구분되어 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지칭하는 통합적인 언어로는 “마음”이고 생각이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생각”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디아로기스모이” Reasoning 이라는 논의, 추론이 라는 말입니다. 이 말의 근원은 “디아로기조마이/숙고하다 고려하다” 디아,  through , on account of~, because of, 와 “로기조마이”는 수를 세다, 계산하다, 라는 의미로 ”로고스“ 곧 ”말씀에서 유래”된 것으로 마음은 “생각”을 품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마음에서 이미 악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어떻게 할 것을 계산하고 있었고 그 생각들은 악한 것이었습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고 하고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언 4:23)”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 막 12:30)“  는 의미는 모든 행위가 마음 안에서 계산되어지고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생각을 품은 집이고 생각은 마음에서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계산하는 행위이며 행동의 근원이 됩니다.

마음은 하나님과 관계한 지식이 영혼으로부터 마음에 비취고, 육체의 눈으로 보고 듣고 느끼는 세상 지식이 마음에 들어와 함께 계산 되어집니다.

이 두 개의 지식이 마음에 서로 겹치어져 계산되어지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러므로 생각의 결과 X=영혼의 지식A+육체의 지식B, 입니다.

하지만 생각 결과X 는 X-A 일수도 있고 X-B 일 수 있습니다.

X-A 는 X의 결과가 B 의 지식으로 만 결과를 얻은 것을 의미하고 X-B 는 X가 B를 배제한 A의 지식만으로 결과를 얻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사람은  생각의 결과를 X라고 하고,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X-A, 육체의 생각의 결과라고 합니다. 그러면 X-B는 무엇일까요? 저와 여러분은 아주 합리주의적인 사람이어서 이런 문제가 나오면 곧바로 답을 X-B라고 기록합니다. 너무도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X-A가 있으면 X-B 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을 말로 하면 영혼이 어두운 상태로 빛을 마음에 비취어주지 아니한 상태의 생각의 결과를 X-A라고 합니다. 그러면 육체의 빛이 없는 마음의 생각의 결과 X-B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후자인 X-B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진 구성인데 하나님께서 사람의 생각의 결과를 반드시 영혼과 육체의 결과를 얻도록 만드셨고 그것이 가장 질서롭고 아름다운 조합이었습니다. 그런데 X-A의 결과는 B의 생각의 결과를 얻은 것이지만 X-B의 결과는 충분히 가능한 논리이지만 실지로 그런 결과를 얻는 것은 질서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B가 없는 존재가 A로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런 상태는 천사들이나 가능한 일이지만 사람은 천사와 같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이므로 천사와 같은 생각을 가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천사와 사람과의 본질적인 차이점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인간이 천사 보다 못한 존재가 되어버린 비극을 통해 인간의 상태가 지식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육체가 없는 영혼만의 마음에 비췸이란?  존재론적으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실지로 사람의 존재는 피조물로서 육체가 우선이고 육체는 영혼을 담는 그릇입니다. 육체가 없으면 영혼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육체가 없는 영혼만으로 생각은 본질상 불가능하지만 육체가 존재한 이후에는 영혼이 존재함으로 육체가 죽을 때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X-B는 두 가지로 이해 나눌 수 있습니다. 1) 육체의 존재가 죽어버린 상태, 2)처음부터 육체가 존재하지 않은 사람이 탄생되지 아니한 상태로 나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육체의 존재가 죽어버린 상태를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거듭난 영혼을, 두 번째는 거듭나지 않은 영혼으로 구분 됩니다.

거듭난 영혼은 영혼이 거듭남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얻었습니다. 이제 그 영혼은 육체의 죽음으로 인하여 새로운 상태를 소망하는 기다리는 존재가 되거나 아니면 하나님과 함께 육체의 부활을 기다리는 상태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 영혼은 생명을 얻은 소생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결코 죽을 수 없습니다. 성도의 견인이라는 의미라 이렇게 쉽고도 간단하게 얻을 수 있는 지식이었습니다. 이 말은 생명을 가진 존재가 죽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영혼은 생명을 얻었으므로 육체가 죽은 이후 육체의 부활을 기다리는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영혼은 육적인 부활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육적인 부활을 기대할 수 없는 영혼은 이미 심판을 받아 멸망의 상태에 버림을 받았는데 그곳이 지옥입니다. 이들은 결코 육체의 부활을 기대할 수 없으므로 영원히 마음으로 생각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생각을 가진 존재가 된다면 고통가운데 부르짖는 그들의 호소를 사랑의 하나님께서 결코 외면하지 않으실 것이며 만약 이런 논리가 가능하다면 하나님께서 만드신 지옥은 결코 무의미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드리면서도 주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에 많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누가복음 16:22~24 에서 부자가 고통 중에 부르짖는 것을 본 것 때문에 이 논리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럴 지라도 영혼의 상태에서 생각을 가진 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의 말씀을 억지로 해석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렇게 말씀하신 주님의 뜻이 있으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여러분께서 눅 16:22~24의 구절로 인해 제가 지금까지 드린 말씀을 버리신다면 다시 말씀을 드릴 생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옳다고 말씀을 드리지는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영혼과 육체가 함께 있을 때 존재하고 육체와 영혼을 하나로 만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한 사람으로서의 분명한 표상이라는 것입니다. 이 마음으로 생각을 하게 되는데 저는 이것을 인격적 구성의 존재적인 표현으로 의지의 기관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나지 않은 영혼은 육체의 죽음으로 인하여 더 이상 마음의 활동을 가질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심판에 따라 지옥으로 떨어지고 의지적인 활동을 중단하는 것입니다.

2) 처음 육체가 존재하지 않은 상태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영혼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사람자체가 구성되지 아니한 것이므로 논의 자체가 무의미합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