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대로 살면

사람의 구성과 의지의 자유(2)

생명있는 신앙 2010. 10. 19. 08:12

로마서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육신대로 살면......."

 

    1) 생각과 의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고전 15;22)”

 

앞에서 아담이 하와 앞에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부부간의 사랑 싸움을 하는 것도 아니고 갈등이 있어서 다투는 모습도 아닙니다. 인생을 고민하는 사람들의 괴로운 모습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기에 좋았더라고 하시던 그 선한 모습도 아닙니다. 아름다움은 사라졌습니다. 뭔가 심각한 문제가 그들 가운데 드리워 있습니다. 사람에게 드러난 흉악한 모습, 암울한 미래가 예견되는 비참한 모습이 보입니다. 하와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정신은 산만해진 여자처럼 두리번 거리고 영혼 속에서 비취던 하나님의 형상의 빛은 온데간데 없고 두려움이 가득찬 환자와 같이 창백한 모습니다. 애원하듯이 간절히 아담에게 과일을 건네는 모습은 도와주지 않으면 안 돼는 처량한 모습니다. 예전에 보이던 모습과는 상이한 완전히 이그러진 하와의 모습을 본 아담은 마음에는 하나님의 신이 계시고 영혼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으며 의지는 견고하여 하나님의 형상에서 비취는 선을 향한 결단의 경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애절한 호소에 무너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형상으로부터 나오는 선한 결단인 의지를 육체의 생각이 짓밟고 경향의 힘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이렇게 의지는 영혼으로부터 오는 빛을 버리고 생각에게 자신을 맡기고 말았습니다. 생각이 육체 지성의 움직임이라고 한다면 저는 이것을 이성의 작용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이 생각이 마음에 있는 신과 영혼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을 철저히 무시하고 하나님의 뜻과 반대 되는 거짓된 의지를 일으키는 것 같이 아담은 이미 육신의 생각으로 기울어진 생각으로 합리적인 자신의 의지를 행하기로 결심하고 영혼의 지성에서 보내진 하나님의 선을 향한 경향인 의지가 무시 되고 말았습니다. 선지자는 “네 마음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나서 악한 꾀를 내어(겔38:10)”라고 말하는 선지자의 말대로 마음에서 나온 육체의 생각이 영혼의 빛을 꺼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 하나님의 선과 인간의 합리적인 선이 충돌하였습니다. 아주 올바른 행동처럼 이해되고 있었던 하와를 향한 애틋한 마음은 육체의 정욕이 빚어낸 작품이었던 것입니다.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말을 할 때마다 제 것으로 하나니(요 8:44)”

 

위에서 우리는 안전장치가 없이 허술한 듯이 보인 인간의 모습을 보고 인간이 어떻게 저리 허술하게 자기 영혼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과 마음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뻔뻔스럽게 왜면하고 자기중심에 따라 선택할 수 있을까? 하고 의문이 들었을 것입니다.

사람의 탁월함은 스스로 선과 악을 택할 줄 아는 존재에서 의지의 자유가 자율적인 존재로 허용되어져 있다는 사실과 문제를 일으키고 발생한 문제를 해결할 방법도 알고 스스로 기준에 따라 선을 알고 악을 아는 기준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에서 탁월성은 빛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은 하와의 불순종에 관한 문제 해결 방법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하와의 모습에서 영혼의 등불이 꺼져 외면으로 비취는 상실된 어두움을 보았고 그들에게 죽음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죽음은 아담이 경험하지 않은 비참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실체적인 두려움보다는 훨씬 약한 느낌을 가졌을 것이고 영혼의 빛을 잃은 정도만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하와에게는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단절되어 하나님의 중대한 심판이 영혼에게 임한 것이며 아담의 영혼에는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는 경고와 함께 마음 안에서 아담의 의지의 경향을 하나님께서 지켜보시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담이 하와의 의지에 동의하게된 것은 뭣인가 새로운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엄위로운 말씀이 아니라 아담을 부추키는 하나님의 대적자가 그곳에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리세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그들의 거짓을 폭로하시고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말을 할 때 마다 제 것으로 하나니(요 8:44)”라고 가르치신 말씀처럼 참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왜곡된 신앙을 가진 그들에게서 합리적인 인본주의 신앙을 밝혀 주셨습니다. 그들의 눈은 어두웠고 하나님으로부터 낳은바 되신 성자 하나님이 사람의 옷을 입고 그들에게 다가오셔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시는 증거를 믿지 않았고 오히려 어떻게든지 책을 잡아 재거하려는 음모를 찾으려 따라다녔던 것입니다.

아담은 자기의 속사람 영혼에서 보내어진 하나님의 선을 향한 경향으로의 경고가 마음에서 행동으로 옮기기를 기다림과 동시에 육체의 감성으로 비롯된 의지의 경향에 더욱 기울어졌으며 고의적으로 영혼으로 부터 비추어진 경향을 거부함으로 마음에 거하신 하나님을 왜면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호하게 결심하여 하와를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자기의 생각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두 의지가 사람을 마음을 점령하려고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당시 아담은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 사이에 갈등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의 마음은 하와에게 집중 되어 있으며 하나님보다 사람 편에 서 있는 동종의 마음을 가지고 과감히 하나님을 외면하게 됩니다.

영혼은 하나님의 경고와 심판을 알고 있지만 영혼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그 빛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사도가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하실 때(요 1:4)” 최초 지음을 받은 아담에게서 빛나는 빛이 있었으니 그것은 생명의 빛이었고 영혼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비취는 빛이었습니다. 분명히 하와에게도 그 빛이 있었고 빛나고 있었으나 당시 아담 앞에 서있는 하와에게서는 그 빛이 현저하게 사라져 버렸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담에게도 그 빛은 빛을 잃고 어두워저 가는 모습으로 변한 것은 자신의 속사람 영혼에서 비취는 하나님의 형상의 빛이 자기를 통해 드러나도록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 기도

 

아담이 마음에서 일어난 영혼의 빛과 육체의 의지가 일으키는 비상상황은 영혼의 빛을 거절할 수 있는 일치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게 된 두 개의 상황, 곧 지식이 한 사람에게 동시에 제시되었고 아담의 마음에는 두 개의 의지가 충돌하여 경합하고 있기 때문에 두 개의 의지에 대해서 어떻게 할 것인지 마땅히 하나님께 묻고 선택할 것을 결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으시고 마음에 거하시므로 아담이 묻고 하나님은 대화하는 친근한 관계를 즐거워 하셨습니다. 게다가 아담에게 일어날 미래의 일들에 관해서도 이미 다 아시고 계셨을 뿐만 아니라 아담에게 주어진 의지의 자유가 참으로 아름다운 결정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시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런 일들이 발생하면 어떻게 할 것인지, 또한 아담이 하나님과 대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기 위해 멀리 계시지 않았고 아담의 마음에 거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삼위 하나님 가운데 한 위인 성자 하나님이시지만 이 땅에 오셔서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쉬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도움을 청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첫 아담을 산 영이라 하고 마지막 아담을 살려주는 영(고전 15:47)이라고 했을 때는 예수그리스도를 마지막 아담으로 표현하는 사도의 마음을 살펴 볼 때 예수님을 첫 사람 아담과 일치하게 보고 있다는 점에서 죄가 없는 참 사람이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아담과 그리스도는 죄가 없는 사람으로서 같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하나님이라는 점에서 신적인 것과 인간인 아담과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시면서도 이 땅에서 사람으로 완전한 삶을 살았으며 참 사람으로 하나님 안에서 사는 모습을 잘 보여 주셨으며 죄가 없는 사람이 하나님과 대화하시고 물으시며 관계하시는 본이 되셨고, 아담과 같은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잘 보여 주셨 습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아담이 하와를 만나서 당황하던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오직 기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마 14:23,26:36,39,42,44, 막1:35(새벽 기도)6:46,14:32,39, 눅 3:21,5:16,6:12,9:18,9:28, 29,22:32,41,45,11:1,에서 친히 기도하시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고 항상 하나님을 가까이 하신 것을 보이셨습니다. 죄가 없는 완전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의 옷을 입으셨기 때문에 하나님과 대화하시고 하나님의 결정을 바라는 마음으로 전심을 다하여 하나님만을 의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은 마땅히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담의 마음에서는 영혼에서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육체의 감성으로 기울어진 의지는 생각을 일으켜 영혼의 경고를 왜면하고 마음에 계시는 하나님을 무시하여 거짓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내 지체 속에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롬 7:23)”라고 자신의 속에서 일어나는 투쟁을 아담이 본 것과 같았습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5)”마음은 영혼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의 빛이 의지를 일으켜 하나님을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또 지체 속에서 마음으로 밀려오는 육신으로부터 마음에 오는 하나님 뜻과 반대 되는 인간의 박애정신과 감정, 육신의 의지가 일으킨 생각이 하와의 모습을 보고 너무 불쌍히 여긴 나머지 동질성에 대한 사랑으로 가져온 육체가 주는 법입니다.

하지만 아담은 하와를 구원할 방법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영혼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지식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그것을 비추었고 아담은 영혼으로부터 오는 의지의 경향을 육체로 하여금 행동하도록 결정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자기 희생이 아니면 하와를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를리 없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비밀(엡 3:9)이라고 했습니다.

영혼이 비췬 자기희생은 하와를 진정으로 사랑하여 구원하는 길이고 이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와의 모습에는 하나님의 빛이 사라졌고 어두움과 비참함 형용할 수 없는 고난의 삶이 보였습니다.

그녀는 지금 하나님께서 금하신 열매를 먹었고 그 열매를 지금 들고 와서 자기에게 먹으라고 내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고 하셨고, 이것을 먹는 날에는 하와와 같이 영혼의 빛을 잃을 것이고 비참한 상태에 빠질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도 죽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문제에 대한 답은 하와가 자기의 잘못을 늬우치고 회개하면 되지!라고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문제가 아주 간단합니다.

그야 말로 죄짓고 회개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많은 불신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비웃는 말들입니다.

저들은 죄를 짓고 교회 가서 회개하면 된다고 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세상에 있는 비신자인 자기들보다 더 큰 죄들을 당당하게 짓는 다고 합니다.

“회개” 그 큰 부피를 차지하는 교리가 여기에 등장합니다.

회개는 돌이키는 것입니다.

현 상태에서 자기 깨어짐도 아니고, 용서를 받는 고백도 아닙니다.

“회개”는 돌이키는 것, 죽은 생명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근본 적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죽음에 대하여 큰 오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주 “영혼이 죽었다”고 말합니다. 영혼이 죽은 것은 사실이지만 멸절한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멸절은 육체의 죽음과 같이 심장의 박동이 멈추고 숨은 끊어져 온 몸이 썩어 부패하여 냄세나고 조직이 풀어지는 상태를 말하지만 영혼이 이처럼 풀어져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라면 영혼이 없는 육체가 존재한다는 의미의 말로 잘못 이해 될 것입니다. 앞에서 영혼은 육체와 결합되지 않으면 사람을 구성할 수 없으며 마음이 형성되지도 않는 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영혼이 없는 육체 만으로나 육체가 없는 영혼만으로 사람이 형성되지 않고, 둘 중에 하나만으로 결코 사람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반드시 영혼과 육체의 결합을 통해서 완성 되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으나 썩음을 보지 않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옷을 입으셨으나 근본상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죽으실 수 없는 분으로 육체가 죽으실 때 영혼이 죽음을 보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죽임을 당하는 것은 죽음과는 무의미 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그리스도께 있기 때문에 죽으실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존재하는 영혼이 죽음을 보지 않았다면 육체의 죽음은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사람의 생명이 영혼에 있으며 일단 하나로 결합된 영혼이 존재한다면 반드시 육체를 찾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영혼이 생명이 있는 영혼으로 거듭나게 되면 그 사람은 반드시 부활을 얻은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아주 많은 부분에서 반복 되어 질 것입니다.

이해에 있어서 많은 오해를 불러 옵니다. 여기에서 “죽음”과 “불멸”의 반대인 “멸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기능이 선에서 왜곡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육체의 생명이 숨을 멈추고 썩어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육체의 집에서 벗어나는 것을 육체의 죽음 곧 멸절입니다. 그러나 영혼의 죽음을 육체의 죽음과 같은 오류에 빠져 이해를 어렵게 하는 경우가 교회 안에 많이 있습니다. 영혼이 본래의 기능인 선에서 벗어나 왜곡 되었고 온전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죽음이라는 말보다는 영혼은 불멸의존재로 지음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단절 되었고 본래의 기능에서 완전한 왜곡되었기 때문에 의미를 “부패”라고 말하여 여러분의 이해를 도우려고 합니다. 영혼의 부패는 자기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였으나 사람의 구성을 이루기 위해 육체와 결합된 상태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혼은 고쳐지든지 아니면 새롭게 되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에 관하여 아무런 행위도 할 수 없는 영혼이 영혼의 의지로 자기의 의사를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담 앞에 와서 아담으로 하여금 열매를 먹도록 종용한 하와 자신이 하나님께 회개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는 일입니다. 어떻게 생명이 없는 존재가 생명이 있는 일을 할 수 있습니까? 하와는 하나님에 대해서 이미 모든 것을 상실한 존재입니다. 그녀는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설사 안다고 해도 무서운 심판자로 이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와의 영혼이 하나님을 향하여 회개하고 용서를 구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사실입니다.

오직 그녀를 위해서 그녀가 불순종한 행위의 대가를 치르고 하나님께서 그녀를 부르셔서 영혼을 새롭게 부여하셔서 낳게 하시고 육체와 결합되어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영혼이 새롭게 되는 것을 “거듭남, 곧 중생”이라고 하고 비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상태가 되어 용서를 구하고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소명으로서 하와를 다시 부르시는 것이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칭하고 하나님의 부르심도 없이 거듭났다고 주장하며 회개에 이르는 용서를 받았으며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당당히 말하는 사람들을 아주 많이 보게 됩니다. 심지어 강단에서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이 이글을 보면서 자신을 심각하게 조명해 보아야 하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부르시지 않았는데 부름 받은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소명은 받았으나 확실한 거듭남을 모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부르심도 아니요 거듭남도 아닌 자기의 욕구나 혹은 육신의 생각에 따르는 위안과 축복, 평안을 얻기 위해 종교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과연 자신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는가? 하는 문제에서부터 어떻게 영혼이 거듭났으며 자기의 고백이 진실로 하나님의 받으심이 되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하와를 위해 죽는다고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께 의탁하시며 슬퍼하시는 피눈물을 흘리실 만큼 고통스러워했는데 아담이 쉽게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자신을 죽여 멸하고 하와의 죄를 용서받는 다는 것은 엄청난 영광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결코 아담의 상태로는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죽음 이후가 안전하게 보장 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께 맡기는 그 어려움을 선택하신 것처럼 지음을 받은 아담으로서는 도저히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아담은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유대의 박사인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요 3:5)”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 3:6)”

하지만 여기에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아담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 라는 문제가 등장합니다.

하와가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아담이 죽음을 당해야 하는데 그 방법은 제단을 만들고 그 제단에서 하와가 자기의 손으로 아담을 죽이고 아담은 그 죽음을 하와를 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으로 바쳐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런 바쳐짐은 여러 가지 제의적인 조건들이 따릅니다. 하와가 아담을 죽여 제의로 드리는 과정에서 조건을 만족시키지 않으면 오히려 그것은 살인을 하는 범죄가 되고, 아담 자신이 스스로 자기의 목숨을 바쳐 하나님께 드리면 자살이 되어 그것 자체가 범죄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공의에 합당하게 하려면 조건을 충족시키려는 여러 가지의 요건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공의를 충분히 만족시키는 것은 아담으로서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첫째, 대속을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보내 주셔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킨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바울 사도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구속 경륜은 창조의 과정입니까? 아담을 지으신 목적은 창조된 모든 피조물을 관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보내심은 관리자들을 살리고 그들로 하나님의 가족을 이루어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의 완성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담을 지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전체 맥락에서 볼 때 창조의 과정입니까? 라는 반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타락을 창세전에 이미 아셨고 그 문제의 해결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보내시는 것을 작정하셨습니다. 사도는 이것을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엡 1:4, 3:11, 딤후 1:9)”라고 기록하고 만물을 지으시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프로그램에 계획되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의지와 관계된 목적론적 의미로서 아담과 그리스도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둘째, 대속 제물로 선택된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만족 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는 사람은 허무로 돌아가려는 경향성이 영혼에 새겨져서 스스로 그 경향성을 인식하고 이겨낼 수 있는 영원히 존재하는 존재이어야 합니다. 이 사람은 유혹자의 시험을 능히 이길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유혹자를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이 인간은 결코 유혹자를 이겨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을 사람의 모습으로 보내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들로 지으신 허무로 돌아가려는 생명의 대적자인 죽음의 성향에 관한 지식을  영혼에 새겨주어 대적자의 의지를 알고 사람으로 유혹당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아담이 사단의 유혹을 받고 넘어졌고, 그리스도께서도 동일하게 사단으로부터 유혹을 받으셨으나 승리하셔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켰습니다.

 

셋째, 대속의 제사는 하나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창조의 완성은 사람의 손을 빌려서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은 창조의 완성을 위해 반드시 정해진 하나님의 작정 안에 있었습니다. 이 작정의 거룩하고 위대한 창조는 하나님 한분이 이루시고 마무리 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피조물인 사람의 희생과 도움으로 완성된다면 하나님의 완전성에 커다란 흠이 됩니다. 하지만 타락이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은 참으로 사람에게 영광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참 사람의 인격의 죽으심뿐만 아니라 하나님이신 신격도 함께 죽으시는 것이지만 실지로는 성자 하나님이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영혼과 같이 육체가 모두가 죽으셨습니다.

만약 죽음이 그대로 이어진다면, 다시 사는 것이 없다면, 설사 우리가 거듭난다 하더라도 성자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지 못합니다.

그분은 존재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셨습니다. 다시 사시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죽으실 수 없는 분이 사람을 위해 죽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는 죽으실 수 없는데 죽기 위해서 사람의 옷을 입으셨고 죽기 위해 보냄을 받으셨으며 창조의 완성을 위해 자신을 완전히 희생하시고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는 성자 하나님의 죽으심으로 큰 고통을 입으셨으며 다시 살아나심으로 창조의 대 역사의 완성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으시고 지음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만 창조의 섭리를 행하시는 하나님은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크고 놀라운 일들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이 시간에 적용될 때는 사람들은 괴롭고 고통스러우며 또는 기쁘고 만족과 감사와 영광이 함께 하지만 그 일이 시간 위에 마무리 될 때 무한한 영광과 기쁨이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고 대속의 죽음으로 하와를 타락으로부터 구원할 것인지 영혼이 비취는 자기희생을 보았지만 그것은 자기의 의지와 능력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의지를 만족시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임무를 감당하기에 충분치 않음을 알았습니다. 그때 비로써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기를 구원자 그리스도를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하와의 범죄는 자기 몸에서 나간 자기와 한 몸이 범죄한 것이므로 곧 동질의 피조물이 함께 죄를 범한 것으로 이해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과 같이(고전 15:22)”라고 말함으로 모든 아담의 후손과 피조된 사람을 지칭하여 함께 죄를 범한 것으로 피조된 사람의 자기의 범죄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었던 것입니다.

아담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자기를 구원해주시는 것을 기다리는 비참하고 고통스런 죄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 분명히 인지하였으며 겸손히 자기의 상태를 시인하며 생각에 따르기로 하고 타락의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만약 아담이 이와 같은 사실을 알지 못하고 무지하게 타락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창조의 완전함을 부인하는 것이며 아담이 하나님의 계획을 완전히 아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계시하시지 않은 심오한 분야를 재외하고 완성이르기 까지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오류가 아닙니다. 아담은 완전히 자유스런 사람이었습니다. 순종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 시킬 수 있는 능력도 있었습니다. 또한 불순종 하여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약속을 깨뜨려 죄악의 삶을 살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와가 죄를 지을 줄도 알았고 아담이 타락하게 될 줄도 알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자유를 주신 것은 그들의 선택으로 그들을 지으심이 더 영광스럽게 되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셨습니다. 바로 그 방법이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시는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 하나님 안에 있는 비밀의 경륜(엡3:11, 행 3:20~21)이었으며,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에 따라 사람은 “육신”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을 하게 된 것입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