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대로 살면

죄를 대속하심(롬 8:13)

생명있는 신앙 2010. 10. 21. 11:01

롬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 영으로써 육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3) 죄의 대속


창조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십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일하시고 궁리 하셔서 친히 만들어 가십니다. 

피조물의 조력이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창조는 완전하지 않고 창조가 완전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부족한 부분이 있으며, 결국은 완전하신 분이 아님을 드러내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죽음의 죄를 범한 하와를 위해 대속 제물이 되어 자기는 죽고 하와를 구원하는 결과를 얻는다면 하나님의 창조의 놀라운 완성을 드러냄으로 영광은 더욱 빛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완전한 아담을 더 나은 상태가 되도록 완성된 상태를 계획하셨다면 아담의 대속의 죽음은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에 협력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아담은 두 마음의 갈등에 많이 혼돈스럽고 사도 바울이 고민하는 로마서 7:23의 상태에 처해있습니다.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을 육체는 하와의 모습에서 드러난 상태를 보고 앎으로 고민하는 두 사이에 끼어 갈등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아담은 어느것을 택하느냐 이것은 자기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고민하는 상태는 영혼이 완전한 회복의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아담과 같이 현저하게 드러난 영혼의 의지에 기울어지는 경향보다 육체 경향이 마음을 지배는 힘이 강하여 죄를 선택할 수 밖에 없다고 통회합니다. 하지만  아담의 영혼은 아직 파괴 되지 아니한 하나님의 형상이 빛을 비춰 마음에 찬란하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영혼의 의지에 더 강력한 경향에 이끌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형상의 빛의 반영으로 말미암아 또하나의 지식의 지평이 열러지고 있는데 하와 앞에서 갈등하는 영혼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열매를 먹느냐 먹지않느냐 고민 하는 것이 결코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는 것(엡 1:4) 을 발견한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하와와 한 몸이므로 이미 함께 범죄한 상태입니다. 다만 개 개인으로 보았을 때 하와의 영혼은 이미 죽어 있고 아담의 영혼만 범죄하지 않은 상태에 있을 뿐이고, 하와의 모습에서 나타난 비참한 상태를 목격하고 아담 영혼의 충격은 한몸이 저지른 죄의 결과가 더욱 아프게 느껴졌을 것이지만, 열매를 먹기 이전인 아담의 영혼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아직 새겨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의 지식을 알고 타락을 허용하신 하나님의 뜻까지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창조의 깊은 내용까지 이해함으로 하나님의 지성을 반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내용은 사도 바울을 통해 볼수 있는데 사도는 고린도인들에게 보내는 글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간단하게 정의하기를 이 창조의 모든 것들의 마지막에 되어질 그 결과들은 "썪지 아니함을 입는 것"(고전15:53~54) 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삶과 십자자가의 죽으심, 그리고 최후의 부활을 통해서 영광을 찬란하게 드러내셨는데 그것은 "썪지 아니함을 입으시는 하나님의 최종 창조의 모습"이고 그것이 하나님 창조의 최종 목적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물론 아담의 죄가 아니었다면 다른 방법으로든지 지금 우리가 말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에 의해 썪지 아니하는 변화된 부활의 몸을 입을 희망을 가지고 있을 것이지만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의 최후의 창조의 목표는 사람들이 썩지 아니할 몸을 입기까지 하나님의 창조는 계속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완전함에 이르기까지 지음을 받은 사람을 향하여 지금 이 지면에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사역에 사람이 협력을 할수 있는가? 협력을 하면 하나님께 어떤 도움이 되며, 하나님의 영광에 어떤 반영이 되는가? 라는 아주 중대한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죄의 필연성과 허용이라는 두가지의 문제가 또한 제기됩됩니다. 이런 사유의 지평들을 통해 우리에게 얻어진 결론들은 여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무엇이 얻어질 것인지 그 내용을 확인해 보지도 않고 사람들은 이런 방식의 지평들을 통해 자기의 입장을 선택하는 우를 범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이글을 읽는 독자들은 자기 안에 이미 어떤 결정을 가지고 비판적인 안목으로 글을 읽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의 주장이 무엇을 말하는지 확인하려는 목표로 접근하고 있을찌 모릅니다. 이런 안목을 가지고 이 글을 읽는 다면 두가지 점에서 큰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이 글이 의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 뿐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을 여러분에게 보이려는 것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코 저의 주장을 확인하려는 시도는 실망스러울 것입니다. 다음으로 사람은 사람일 뿐이라는 사실을 설명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한계를 말하므로 당신이 지금 "잔디 밭에 들어가지 마세요" "접근금지" 표시를 무시하고 잔디 밭에 들어갔거나 혹은 접근 금지 표시를 무시하고 배회하고 있는 것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생각은 하나님의 창조에 협력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 마땅히 협력을 하는 것이 지음을 받은 존재로서의 당연한 것이며 이런 행위를 하지 않으므로 더욱 하나님의 진노를 살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사상의 기본은 하나님의 완전하지 않으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先見知 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미래를  다 아시고 보시고 이루어질 것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완성은 시간 안에서 다양한 방향으로 전개 되지만 그 결론은 일정합니다. 그러므로 타락을 하든지 아니면 타락하지 않든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세상에 모습을 보인다고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결론은 이미 완성된 그 미래의 목적을 향하여 갈 것이기 빼문입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시간에 개입하시는 것은 [뼈대 오징어 같은 나무가 똑바로 서 있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그것을 세우시려고 노력하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생물이 결코 세워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생물의 중심에 뼈대 같은 철심을 끼워놓고 똑바로 세웠다고 가장합니다.] 와 같은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다양한 방법을 채택하여 과정을 전개한후 나중에 완전한 그 시간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그 실수가 있었지만 결코 좌절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그 실수가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완전한 그 선견지의 시간이 있다. 또다른 말은 오늘 당신은 실수를 했다. 하나님께 죄를 지었고 하나님의 뜻을 벗어났다. 이제 그 죄를 회개하라 그리고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라." 미래는 확실한 구원에 이르렀으니 지금 이렇게 살아라 하는 것은 선견지가 오히려 죄를 방조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왜 이런 사유에 빠져 들어갑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이해할것도 같고 할수도 없는 아리송한 시간속에 있는 과정에서 많이 해메고 있습니다. 그들은 수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피조 세계와 관계는 객관적이면서 하나님안에서 존재합니다(시 33:13). 그럴수 밖에 없는 것은 세계와 우주는 하나님안에 있으며 하나님으로 인해서 존재하고 하나님 밖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그 안에 있고 그 안에서 하나님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하와의 범죄는 하나님안에서 지은 것이고 아담의 고민도 역시 하나님안에서의 고민입니다. 이들의 행위는 아주 작고 어지간한 객관적인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을 만큼 작은 점일 뿐이지만 그것이 사람의 눈으로 볼 때 사람에게 커 보이고 더군다나 하나님께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시는 것이기 때문에 피조세계에서 위치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 오히려 제가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지 못하는 이 난관 앞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어찌하여 사람을 시간속에 가두셨는지요?"

"하나님은 영원에 계시고 사람은 시간 안에 있어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혼돈을 일으키며 오해에 빠져 잘못을 저지르지만 하나님은 그것마져 아시고 덮어두시며 용서하시고 웃으시며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조 세계에 오셔서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한 가정에 아들이 둘이 있습니다. 한 아들이 죄를 범하였는데 죄의 형벌이 사형에 해당하는 판결을 받고 죽을 날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자기의 아들들을 지극히 사랑합니다. 그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아들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타들어가고 온전하게 살수 없습니다. 매일 술로 세월을 보내며 비극적인 사실 앞에 자기 몸이 타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여러 궁리를 하다가 한 가지 방법을 알아냈습니다. 그것은 아들을 대신해서 한 피가 흐르는 가족 중에서 한사람이 대신 죽는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두아들이 있습니다. 죄지은 아들과 집에 함께 있는 아들입니다. 아버지는 죄를 지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집에 있는 아들을 내어줄 수가 없습니다. 그 아들도  죄를 지은 아들과 동일하게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아들이 죽는 것이나 죄를 지은 아들이 죽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는 결심했습니다.

사형장으로 끌려가던 아들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그 날이 다가왔습니다.

아침을 잘 차려주고 마지막 식사를 마친 시간 세사람의 간수가 와서 사형수를 불러냈습니다.

그리고는 사형장으로가는 정해진 길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인도해 가고 있습니다.

다다른 곳은 탈의실이었습니다.

손목에 항상 채워진 수갑이 풀어지고 다른 간수가 보따리를 들고 왔습니다.

사형수 복장을 벗기고 들어 올 때 입었던 옷을 꺼내주면서 갈아 입으라고 짧막하게 말하고 밖으로 나가라고 했습니다.

육중한 철문사이에 작은 문이 열리고 밖을 향해 걸어 나왔습니다. 

사실을 모르는 아들은 집으로 발걸음을 향했고 돌아왔을 때 집은 여느 초상집과 다름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한가지 이상한 것은 사형수의 집에서 초상을 치르고 여기저기에 조문객들의 방문이 이상햇습니다. 아들은 자기의 죽음을 이처럼 애통해 하는 많은 이웃들과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집에 들어가서 어머니를 뵙고 인사를 드렸으나 어머니는 그다지 반가운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상해서 자초지종을 물으니 아버지께서 자기를 대신해서 사형을 당하셨고 자기는 살아오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죽는 것보다 더 마음이 아팠고 큰 회개의 통곡이 마음 깊은 곳에서 나와 죄에 대한 사무치는 저주가 영혼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또한 자기를 향한 아버지의 그 큰 사랑을 헤아리지 못하고 죽어 가는데도 구원해 주지 못하는 아버지를 원망으로 철장 속에서 나날을 보내던 날들이 후회스러웠고 자기의 죄가 밉고 견딜 수 없었습니다. 너무 너무 후회스러웠고 아버지의 사랑이 자기의 생명을 대신하는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몇 날 몇 일을 눈물로 세월을 보냈고 죄를 용서 받은 사람으로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잘 살려고 다짐하고 살았습니다.

 

여기에 아버지는 하나님이시고 죄를 지은 아들은  아담 안에 있는 우리들이고 아들로 변장하여 사형을 당한 아버지는 예수 그리스도이고 다른 아들들은 세상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아들들이기 때문에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들들과 약속을 했고, 그 약속을 어기면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아들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죽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 죽은 아들을 계속 죽음으로 빠져 버리도록 방치하느냐 아니면 그들을 구하느냐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매여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말을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이런 상황이 일어날 것을 이미 아셨고 그 상황에 어떻게 할 것인지도 예비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에 매여 인생을 사는 사람, 아니 모든 피조의 역사를 이끌어가는 우주의 역사는 사람때문에 모두 방치하여야 할 만한 위급한 상황이 드러난 것도 위태한 상황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천하보다 한 사람 아담을 향한 사랑이 더 큰 관심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아담을 대신해서 다른 사람을 죽게 할 수 없습니다. 그 아들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사람은 피조된 생명이기 때문에 대속으로 죄를 짓지 않은 아담이 죽어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생존하게 되면 간단하게 대속의 효과가 나타났더라고 하더라도 그들이나 그 후손들이 또 다시 죄를 범하지 않는 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을 유혹한 사단은 계속해서 그들을 더 강도가 강한 어려움으로, 그들의 다른 후손들에게 유혹할 것이고, 이 땅에 태어나는 또다른 후손들 모두가 동일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자유 의지가 있으나 그 자유 의지에 의해  더욱 죄에 대해서 안전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들에게는 죄를 짓지 않는 다는 확실한 보장이 없습니다. 그들은 지속적으로 죄를 지을 것이고 죄의 대가로 또 다른 아들들이 희생을 당하고 다시 살게되는 반복적인 죄와의 챗바뀌도는 삶이 지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짓고 죽고 다시살고 하는 반복적인 행위가 사람에게 계속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아담은 죄가 없는 완전한 사람이지만 자유의지로 인해 죄를 지을 수 있는 상태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시고 계시며 그 완전하심을 이미 즐기셨던 그 창조의 완전을 위해 사람들이 죄에 유혹당하여도 결코 타락하지 않는 상태에 이르도록 성화와 영화의 과정을 설정해 두신 것입니다. 

앞에서 한 가족의 비극과 아버지의 대속의 희생으로 엄밀히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설명하려는 한 예를 보여드렸습니다. 이것은 독자들이 감성으로 이해하도록 한 것이므로 결코 기독교적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필요하지만 기독교적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이 예를 이용하여 독자들의 지평의 확장을 위해서 사용하되 진리에서는 배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 어딘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고 지적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전능하시기 때문에 과정이 없이 아주 완전하게 창조하실 수 있을 탠데 굳이 사람으로 하여금 죄의 과정을 도입하여 사람들에게 죄의 환경에 노출 되도록 하시고 사람들로 하여금 고난과 아픔을 겪도록 하셨는가? 라는 질문을 할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하나님을 인간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입니다. 인간의 수준에서 하자가 없는 완전함은 주관적이며 이기적입니다. 인간의 자기의 추론에 의한 완점함은 각을 본뜬 틀안에 넣어 만든 석고와 같은 것입니다. 결국 주관적이며 자유 의지가 없으며 하나님에 의해 불행을 피할 수 있으며 죄를 완강하게 제거할 수 있는 한마디로 오직 선만을 위해 지음받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존재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완전하여 선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지는 피조물이 완전한 자유의지로 창조의 선한 목적을 이루어가는 존재로 지으신 것입니다. 지음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이루는 것은 전적으로 그들의 의지로 더욱 빛을 드러내도록 지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하게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의지로 하나님의 선을 이루기 위해 전심으로 그 목표에 이르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이 죄를 짓지 않도록 지으시는 것은 창조의 완전성이 해치는 것입니다. 이유는 사람들의 의지의 자유가 죄를 지을수도 있고 짓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은 사람으로서 순수하게 자을적인 판단을 이끌어 낼수 있어서 더욱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완전한 사람이 되게하는 조건으로 죄 뿐만 아니라 선한 삶가운데에서도 더 나은 선과 작은 선을 선택하는 의지의 자유 곧 모든 선택의 지유를 사람에게 부여하심으로 궁극적인 의미에서 창조의 완전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람에게 주어진 의지의 자유를 제거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자유 의지가 가져온 범죄의 행위를 인식하게하고 반복적인 행위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의 특별하신 계획이 창세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예정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다시는 죄를 짓지 아니하는 상태에 머물게 하는 것입니다. 이 방법은 사람의 대속으로는 단회성에 불과한 대속으로 끝날 뿐입니다. 이런 반복적인 방법은 대속이 아니라 오히려 죄를 조장하는 결과가 나타날 것이며 심각한 타락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반복적인 타락이 아닌 단한번의 대속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사람으로는 죄를 철저히 경험하는 것이고 죄는 단번에 사죄되는 방법(롬 6:10)으로 사도 바울은 "그가 죽으심음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라고 했으며,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줄(롬 6:9)"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친히 죄값을 치루어 단회로 사단을 이기시고 죄를 이기시어 결코 죄로 돌아가지 않는 사람을 지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이 친히 죽으시기로 하시고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으로 보내어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대속의 죽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서 그 아들을 보내시는 것은 무한한 사랑을 우리에게 보이신 것입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끝이 없는 그 사랑이 자신을 희생하시고 아들을 구하심과 같이 우리를 십자가로 구원하신 것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