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대로 살면

복음의 목적 2

생명있는 신앙 2010. 11. 11. 19:39

1) 택하신 자들의 믿음

 

복음은 사람의 마음에 믿음을 일으키는 진리의 지식입니다. 이 진리의 지식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셔서 사람을 위하여 친히 행하신 일입니다. 아담이 하와의 죄를 대속하는 일을 할 수 있었으나 자신에게나 후손에게서 계속 반복되어 에덴 동산에서는 지속적으로 만나게 될 것이 분명함으로 한번에 다시는 죄를 짖지 않도록 하는 방법인 다시는 선악과를 먹지 않을 것이라는 영 단번의 시험은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막을 내리실수 있습니다.

 

오순절날에 주님의 명령에 따라 다락방에서 기도에 전념하고 있던 사도와 함께한 120문도 들에게 성령께서 불과 같이 임하여 각 사람들의 머리 위에 머물러 있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이 소동하였고, 각국으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그 광경을 보고 있습니다. 저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고 비아냥 거리고 있을때, 베드로가 창조 이래로 굳게 닫혀 있었던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통의 홍수를 내보내기 위해 견고한 자물쇠를 풀고 빗장을 걷어 제치고 육중한 문을 힘 있게 밀어 활짝 열어젖혔습니다.

이 문을 여는데 다른 사도들도 함께 힘을 보탰습니다.

그전 이미 50 전에는 하나님과의 직접 교통이 예루살렘 성전 깊은 곳 지성소의 휘장이 찢어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유대와 이방인간의 구별이 없는 하나님의 창조 안에 일어난 새로운 세계와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는 유대안에만 계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허락도 유대 안에만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에덴 동산이 구별되어 두르도는 화염검으로 지키게 한 것과 같이 예루살렘 밖에 있는 사람에게는 전혀 허락되지 않았던 하나님과의 교통이 이방인에게 허락되는 순간입니다.

 

베드로의 외침을 들어십시오.

 

선지자 요엘의 예언을 낭독하면서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주리니(2:17)”~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2:21)”~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2:36)”

죽인 이 예수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이요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셨으니 그에게는 죄가 없는 분이시라라는 말이었으며 그를 죽인 것이 너희의 행위였다고 말하였습니다.

 

120문도들에게 성령의 충만함이 나타났고 각국의 사람들이 와서 그 현장을 보고 있을때 그들에게도 한가지로 성령의 덧입음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사도들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큰 일 말함을 듣는 도다(2:11)”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큰 일이라는 말은 복음의 내용과 성령 강림에 관하여 들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시 공간의 환경에 오시는 것과 피조물과 같이 낮아지셔서 사람의 육신을 입으시는 것, 피조물에게 위협과 고난을 당하시고 배척을 당하셨으며, 풍랑의 위협을 당하셨고, 조롱을 당하셨으며, 마침내 사람에게 거절 당하셔서 죽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증거하기를 너희가 죽인 이 예수를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그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받아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2:33)”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사람을 죄에서 구원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었다고 사도들의 말에 공감하고 그들은 즉시 죄책을 느꼈습니다(1:37).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이 일에 대하여 자기들이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방향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외칩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2:38)“

 

그러면 이 때에 베드로의 말을 듣는 모든 사람들 곧 이방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모두 믿게된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의 부연설명을 듣고 세례를 받은 사람의 수가 3천이나 되었는데 성경은 그들이 그 말을 받은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나(10:17)”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사도들로부터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일부는 소문을 통해서 먼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50일 전에 일어난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사건에 관하여 상당 수 소문을 듣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최근에 이르러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문도 듣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락방에서 일어난 성령강림의 역사는 그들을 신뢰하게 하는데 부족함이 없었으며 성령께서도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이 빠르게 동의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게 되는 획기적인 전환점에 이르는 동기에 대해서 살펴 보려고 합니다. 먼저는 사도들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에 관하여, 다음으로는 사도들의 말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관하여 두가지의 동기를 통하여 복음이 선택된 사람에게만 역사하는 것을 알려고 합니다.

 

(1) 사도의 말을 받지 않은 사람에 관하여(복음을 받지 않은 사람)

 

오순절 다락방에 성령께서 불의 혀같이 각 사람위에 임하여 강림하셨고 사도 베드로가 복음을 외치고 있을때 성령강림의 영향력은 청자들에게 까지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 많은 사람들은 성령의 덮음의 영향 아래 있으면서 성령의 영향에 적용되지 못합니다. 그들의 귀에 들려온 복음의 지식이 이미 알려진 부정적인 소문과 자기의 내적인 판단에 의한 불신이 영혼의 지성에 진을 치고 있다가 베드로의 복음 선포를 외면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 눈으로본 다락방의 모습은 무질서하고 혼돈스런 시끄러움이나 소란을 피운 것이라고 생각이 되어졌고 술에 취하였다고 조롱하였습니다(2;13). 확실히 그들은 경건한 예루살렘에서 왠 이런 소동이야 하고 비난의 조소를 보낸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 영혼의 지성에는 이전에 많이 들어온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부정적인 이야기나 적대적인 조소들이 견고한 틀로 자리를 잡고 있었고 이미 자리잡은 불신 지식은 육체로 판단된 지식들이었거나 거짓과 유대의 정치인들이 쏟아낸 원수 같은 능력의 말이었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정치적으로 휩쓸려 있거나 유대에 대한 지나친 애국적인 편견에 사로잡혀 있있을 때 결코 영혼에서 일어나는 자신을 진리로 인도 할 진리를 거부하고 거짓을 생명보다 더 굳게 붙잡고 있는 까닭입니다. 그들의 영혼 지성에 복음이 새겨지는 일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께서는 그들의 영혼에 들어가셔서 진리인 복음을 새기려 할 때 이미 기록되어 있는 육체의 지식과 충돌하여 혼란을 가져 옵니다. 육체의 지식은 십자가에 죽은 사람은 저주를 받은 사람이야!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었으므로 저주 받은 사람이고,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메시아는 다윗과 같이 이스라엘을 회복하시는 사람이며, 하나님을 결코 모독하지 않는 사람이며, 왕으로 오셔서 이스라엘을 통치하신다,는 것을 굳게 확신하는 것입니다. 완강한 육체의 지식은 많은 육체적인 판단에서 비롯된 증거들을 제시하면서 예수께서 그리스도가 아니는 것만 제시합니다. 진리의 성령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고 귀를 통해서 계속해서 증거하지만 그 진리가 왜곡되어 보이는 현상은 그가 육체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한 모든 지식은 영혼에 피조물의 세상에 관한 모든 지식은 육체의 감각이 마음으로 지식을 비추고 영혼의 지성에 기록함으로 비로써 지식으로 자리를 잡지만 육체의 지식은 결코 빛을 발산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육체의 감각을 통해 습득하고 영혼의 지성에 기록된 육체의 지식은 영혼과 육체가 결합하여 한 사람을 이룰 때 영혼의 지성은 하나님의 형상이 있었고, 그 형상은 하나님에 관한 모든 지식과 창조에 관한 지식을 포함하여 새겨져 영혼의 지성에 새겨져 있었고, 육체의 지성에는 아무런 기록도 없는 비어 있는 상태로 두 지성이 결합하여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육체가 자라면서 감각으로 습득한 지식이 그 본래 육체의 지성에 새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형상이 깨어지지 않았다면 육체로부터 습득한 지식은 하나님의 형상에 의해 검증을 받은 지식만이 비어 있는 육체의 지성에 기록되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기쁘게 하는데 유익한 지식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영혼은 죽어있기 때문에 하나님에 관해서 전혀 무지하고 하나님을 알지도 못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에 관하여 알고 있는 지식이라고는 완전히 육체의 습득에 의한 지식으로 하나님을 알뿐 참 하나님을 알지못합니다. 이런 현상은 사도 바울에게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다메색 도상을 행진할 때 그가 알고 있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모두 육체의 습득에 의한 지식이었습니다. 이 지식이 바울의 육적 지성에 넘치도록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왜면하고 정치적으로 견고한 바리새인 중심의 하나님을 완고하게 신봉하였던 것입니다. 그가 연약한 사람들을 무참히 살해하고도 전혀 죄의식을 가지지 않았던 것은 육적 지성에 기록된 육적 지식의 무모한 오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처럼 완악한 사람들의 영혼은 육적인 지성이 완고하게 자리를 지킴으로 진리와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을 완강히 거부함으로 성령께서 그 사람들에게 역사하지 아니하심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세례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주 간단하게 설명을 덧붙인다면 육적인 지식으로는 결코 참 하나님을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영접하지도 못하고 자신을 구원하는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 드러나 보이는 영혼의 역할에 관하여 설명을 드리자면 마치 죽어 있고 제기능을 하지 못하는 영혼이 살아서 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이것을 일컬어 영혼의 속임이라고 말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영혼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본래의 참 기능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본래의 참 영혼의 기능은 영혼에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영혼은 하나님과 관계한 모든 지식을 알고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영혼에 새겨져 있기 때문에 찬란하게 아름다운 빛을 발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육체에 비쳐 육체를 더욱 아름답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영혼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깨어졌고 완전히 기능을 상실하여 어둡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빛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영혼에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담의 타락 때 부터 나타난 현상이었는데 육체의 감각에 의해 얻어진 지식들이 하나씩 들어와 육체의 지성 곧 육적 지성에 새겨져 그 지식으로 영혼을 대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나기 이전의 우리의 육적 지성에서 드러낸 빛이 없는 영혼의 지성은 모두 거짓이고 육체를 만족시키려는 정욕의 가장자리에 있는 것들입니다. 바로 이것들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거부하게 하고, 복음을 멸시하고, 복음을 무시하며, 자신을 영원한 지옥으로 끌고가는 사망의 강력한 무기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수이며 복음의 원수입니다. 이 육적 지성의 지식들을 지우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지우려면 육체를 십자가에 못밖아야 하고, 날마다 자신을 죽여야 하고, 육체의 일을 멸하여야 하며,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고, 육을 멸하라고 사도가 단단히 이른 것입니다. 육을 죽이는 것은 경건을 실천하는 삶의 기본이며 경건이 없이 결코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의 목적에 따라 살아가는 참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자기 자신의 육체를 스스로 죽이는 살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영혼에 새겨진 육체의 지성에 따라 활동하는 육의 행실을 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래 영혼의 지성에 찬란하게 비춰주는 하나님의 형상의 지식에 따라 사는 것이지만 사람의 범죄로 그것을 잃어버렸으므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사랑하사 계명을 주셨고 율법을 주심으로 또 다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이 율법을 주야로 읽고 묵상하고 마음판에 기록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율법과 계명을 마음에 새기고 그것을 항상 기억하면 그 말씀이 사람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하고 육적인 감각을 통해서 습득된 지식의 일부는 영혼의 육적 지성에 새겨지지 않고 행위로 나타나지 않아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살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결코 포기하시지 않으시고 다시 살리시려고 부지런히 섭리하셨으나 사람은 끝까지 하나님을 배반하여 원수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여 한 곳을 정하고 그곳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따로 불러 나라를 세우고 그 나라를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알리시기를 원하셨으나 선택하신 백성들 마져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타락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비극을 자초 한 것입니다. 오순절 다락방에 나타난 성령강림의 현상을 목격하고도 하나님의 진리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을 보십시요. 그들은 하나님의 선택한 백성들 가운데 족보를 따라 난 이스라엘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사도들에게 나타난 성령의 역사를 믿지 못하는 이유가 영혼의 육적 지성에 기록된 지식 때문입니다. 그들이 영혼의 육적 지성에 기록된 지식이 왜곡된 하나님이 말씀이 아니었다면 결코 성령의 역사를 거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사도의 말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관하여.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가? 그들은 사도 베드로가 외치는 복음을 듣고 있을때 마음이 찔렸다고 했습니다. 성령께서는 복음을 듣고 있던 사람들의 영혼에 복음의 진리의 지식을 새겨 넣었습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그들의 영혼을 사로잡아 복음을 영혼의 지성에 새겨 놓으시고 빛을 발하게 하심으로 그들의 영혼에 잃어 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의 빛이 발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비로서 그 사람은 영혼이 거듭나게 되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영적이 생명을 얻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빛은 아직 찬란하게 빛나지 않습니다. 예전 아담에게 나타난 찬란한 빛을 발하려면 많은 하나님의 지식들을 그 영혼에 새겨야 하고 하나님을 자주 만나 말씀을 듣고 예전에 새겨진 육적 지성에 기록된 육체의 욕구들을 제거해야만 합니다. 육적 지성에 새겨진 육적인 욕구들을 제거하려면 반드시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경건한 삶은 하나님앞에 자신을 보이는 삶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지식을 영혼에 새겨두는 것이고 육적인 자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경건한 삶을 지속적으로 유지함으로 마침내 하나님의 형상에서 빛나는 찬란한 광채와 같이 온 몸을 밝게 비쳐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의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하나님의 형상에서 빛나는 찬란한 광체를 보시고 좋았다라는 말 앞에 심히를 더 하시고 심히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아름다움이 온 세상에 가득하면 얼마나 아름답고 하나님의 마음이 더욱 기쁘시겠습니까? 모든 사람은 이런 목적을 위해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온 세상에 충만하고 가득 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순절 다락방에서는 빛과 어두움이 교차하고 있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앞에서 빛이라(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