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4) 종교의 씨앗
1, 종교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본래부터 인간의 마음속에 뿌리 박혀 있다1). 플라톤에 의하면 영혼과 육체가 결합하기 전 영혼은 모든 순전한 이데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것에 대한 기억 안에 그 이데아에 대한 흔적들이 깊이 저장 되어 있다는 것이다. 라고 말하였고, 아리스토 텔레스의 감각지각 곧 사유 과정에 의해 가진 본성에 의해서 출생할 때 주어지는 개념들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감각과 반성을 수단으로 하여 얻어지는 것이라고 말하였다.2) 그러나 Cicero 본유 관념설을 처음 제창하여 생래적, 또는 본유적 사상인 정신에 밝혀진 개념들, 모든 경험과 탐구에 앞서 한 진리의 지식이 있음을 받아들이고, “그, 어떤 사전 가르침이 없이 영혼에 심어 놓은 가장 중요한 것들의 희미한 개념인 덕들의 본유적 씨들, 본유적 신지식이 있다”고 함으로, “천성적으로 우리는 신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는다”고 말하였다. 이어서 데카르트가 본유 관념설을 발전시켜 “지식은 감각에서 나올 수 없다. 감각은 단지 그와 관련하여 우리의 정신이 본유적 능력을 수단으로 하여 개념들과 관념들을 형성할 수 있는 기여를 제공할 뿐이다 따라서 신지식은 그 자체 원칙으로부터, 본유관념으로부터 나온다. 그것은 마치 신이 자기 작품에 찍은 저자의 도장과 같은 것이며, 영혼은 본성상 그것으로부터 관념들을 낼 수 있는 능력과 성향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이처럼 자연의 빛이 사람의 지성을 비춰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과 신 존재를 알 수 있게 하고 지각할 수 있게 하는 원천은, 플라톤이 말하는 영혼이전의 이데아나, 데카르트의 주장과 같이 관념들을 낼 수 있는 저자의 도장이 드러내는 능력이나, 신지식이 인간의 마음속에 뿌리 박혀 있다고 말하는 Calvin 주장과 같이 사람에게 부여된 불분명한 기능들의 역할로 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비슷한 질서와 규칙적인 생각을 드러내는 지성의 특별한 역할에 대해서 상이한 결론을 얻는 규칙은 동일한 페턴으로 이루어진 지성의 작용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분명히 모든 사람이 하나의 규칙과 하나의 체계를 가진 질서로운 지성의 활동으로 지식을 이끌어 내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와 같이 지식을 생성하는 지성의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Calvin이 말하는 ‘마음에 새겨진 본래의 지식’과, 본래의 지식을 밝혀주는 ‘저자의 도장’과 같은 논리를 주장하는 데카르트,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는 구별된 주장들이지만 이런 ‘지식을 얻기까지 적용되는 지성의 작용은 동일한 규칙에 의해 작용되고 있다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의 지성이 동일한 지성작용을 하는 규칙이 있고, 이 규칙은 질서로우며 체계적인 작용에 의해 지각을 갖도록 한다는 점에서, 사람은 하나의 근원으로부터 존재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지 않고서는 결코 동일한 지식체계를 가지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영혼이 지식의 질서로운 규칙에 의해 작용되도록 하셨으며, 이렇게 작용되는 지성은 지식을 생성하며, 생성된 지식을 영혼들이 동일한 규칙에 의해 인식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영혼의 지성이 가진 동일한 규칙으로 말미암는다. 데카르트의 주장에 의한 ‘저자의 도장은 관념들을 낼 수 있는 성향과 능력’이라고 했다. 이것은 영혼 안에 있는 실재가 아니라 잠재적으로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날카로운 지적을 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의 사상은 철저히 이원론적인 근거를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Herman Bavinck 가 지적하였다.3) 하지만 Calvin 은 ‘지식이 사람의 마음에 새겨져 있다’고 하였다. 이는 지식 자체가 마음에 새겨져 있으므로 사람의 영혼은 마음에 새겨진 지식대로 지각하게 된다고 생각하였으며, 사람이 이 지식에 대한 기억을 항상 새롭게 하기 위해서 신선한 물방울을 지속적으로 공급하신다고 했다4). 이 지식은 이미 사람의 마음에 부여되어 있는 것으로 종교의 씨앗이라고 말하였고 이것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식이라고 말한 것이다. Calvin이 말하는 마음에 새겨져 있는 지식이란? 데카르트가 말하는 ‘저자의 도장’, 또는 Cicero가 말하는 본유 관념설과는 다른 점이 무엇일까? 어떻게 사람들은 다른 사상을 가지면서도 하나의 주제에 관하여 이처럼 비슷한 지식을 말하는가? 이들의 주장들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이들이 이렇게 주장하는 원인은 무엇인가? 그리고 구체적으로 그들에게 돌아갈 유익은 무엇인가?
Calvin+데카르트+Cicero= ?
Calvin: 데카르트: Cicero= ?
Calvin + 데카르트 : Cicero =?
Calvin = 데카르트 ≠ Cicero =?
Calvin ≠ 데카르트 = Cicero =?
이것들 가운데 어느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실지로는 하나의 주제에 관하여 주장하는 지식들이 서로 다른데 각자가 주장하는 지식들은 자기에게서 생성한 지식이지 다른 사람의 지식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이 각각의 지식들을 참고하였을 것이고 참고 된 지식으로부터 다른 지식들을 생성하게 된다. 그렇다면 지식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가 생성하게 되고 생성된 지식을 교육받거나 듣고 동의할 때 자기의 지식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동의하고 자기의 지식으로 받아들였을 지라도 그 지식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지식에 의해 견해를 달리하는 경향들이 발생한다. 그러나 위 사람들의 주장들을 살펴 볼 때 주장하는 견해의 차이에는 크지만 목적하는바 의미는 일정하고 동일한 규칙의 적용에 따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지식이란 일정한 규칙을 벗어난 상태에서 전혀 터무니없이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한결같이 표상에 대한 연산과 결합, 분석이후 생성이라는 지성작용과 감성에 반영하여 지각을 갖게 되는데, 이러한 영혼의 작용을 사람이 대부분 느끼지 못하고 지각된 그 지식을 생물체에 적용하는 과정으로 육체의 감성에 반영하면 뇌에서 호르몬이 솟아나 온몸으로 퍼져진 후에야 지식에 대한 느낌을 갖는 것이다. 그때 비로서 사유작용이 일어나고 의지는 갖가지의 모양으로 변하여 지식에 대한 퍼즐을 맞추고 짝맞은 퍼즐 조작을 드러내서 의도하는 행위를 하게한다. 이와 같은 규칙적인 작용이 영혼에 있다는 것은 영혼은 자연적인 존재가 아니라 지음을 받은 존재라는 의미이며, 조직적이고 완전한 존재이신 하나님께서 영혼으로 하여금 지식을 생성하게 하는 동력을 가진 존재로 설계하셨고 지으신 것이다.
이것이 최초 사람 아담이 첫날 첫 시간을 맞이하던 그 순간, 그에게는 지식도 없었고, 지혜도 없었으며, 활동을 위하여 객관적인 어떤 요구에 의해 몸을 일으킨 것도 아니다. 그가 눈을 열고 존재한 자신을 일으킬 때, 세상은 오감에 의해 감각 되었고, 자연을 직시할 수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영혼의 지성에 부여된 하나님의 형상 안에 담긴 본유지식이 육체가 세상과 자연을 오감으로 감각하여 지성에 표상으로 반영한 표상들에 대하여 조명하고 지성은 그 조명에 따라 영혼의 감성으로 지각할 수 있는 자기지식을 생성하게 된 것이다.
모든 사람이 자기 영혼의 지성에서 인식할 수 있는 지식은 하나님의 형상에 있는 본유지식의 조명에 의해 사람에게서 최초 지식으로 생성되었고 이 지식에 의해 지각과 인식작용이 일어난 것이다.
결국 사람에게 지식이 없으면 감각적인 활동 이상을 할 수 없는 짐승과 같은 존재가 될 뿐이다.
첫 사람의 행적을 성경을 통해 살펴보면 여러가지 특이한 사건과 언어를 목격할 수 있다. 그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천지 창조에 관한 설명이다.
이런 설명은 누가 언제 어떻게 증거하였기에 성경에 채택되고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증거로 사람들에게 게시되고 있는지 묻는 사람이 없다. 만약 하나님의 창조를 목격한 사람의 증거라면, 그 증거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천지 창조기사는 사람이 목격할 수 없는 사람을 창조하기 이전의 모든 창조에 관한 기사와 사건을 기록한 증거들이기 때문에 이 자료를 신뢰할만한 확실한 증거를 제시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마디만 살펴본다면, 창세기 1장 1절과 2절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시니라”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때 사람은 없고 아직 지음 받지도 않았다. 창조하시는 하나님 외에 아무도 하나님의 사역을 목격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이 이 사실을 고백하고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다면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 두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이 지식을 지식으로 드러낼 존재가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에게 말씀하신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이 지식을 말씀하셨을 때, 무엇을 근거로 지각을 가지게 되는가? 이 지식에 대한 느낌을 가지는 지각이 어떤 작용으로부터 사람에게 인식이 되어지는가?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과 사람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지적인 감각을 가질 수 있는 작용에 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이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느낌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 창조를 설명하셨다고 하자.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육체의 귀로 들었거나 아니면 영혼의 감성에 의해 느낌을 받았거나 했을 때, 사람에게 천지와 창조에 관한 포괄적인 지식이 없을 경우 그것을 인식할 것이라고 믿을 수 있을까? 그것이 분명 언어로 전달되었을 것인데, 사람이 태어나면 언어를 배우는데 수년이 걸리고 배운 언어의 의미를 지적으로 이해하고 깨닫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데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에게 아이에게 언어를 가르침과 같이 가르쳤을까?
반면에 우리의 지식체계가 얼마나 어두운가?
우리는 영혼에 관하여 무지하며 완전히 어두움에 싸여있다. 심지어 영혼이 있는지 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사셨을 때, 배우지도 않았으나 율법의 의미를 알았고, 사람속에 있는 것을 아셨으며,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신다고 고백하셨으며,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보이시며 가르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최초 아담이 가진 영혼의 지성체계를 완전히 보존하고 계신 순수한 사람이셨고 타락하지 않으신 하늘로부터 오셔셔 우리와 구별되신 모습을 확실히 보여 주셨다. 그러므로 최초 사람은 처음 세상을 향하여 눈을 열었을때 그의 영혼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담긴 본유 지식이 오감으로 감각한 모든 표상을 밝혀 스스로 지식을 생성하도록 한 것이다.
또한 처음 사람이 에덴 동산에 이끌려 가서 하나님께서 짐승들의 이름을 짓게 하였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어떤 의사를 표현하시므로 사람이 하나님과 교제를 하셔서 의도를 알게 되었고, 사람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짐승들의 특징들을 살펴 빠짐없이 이름을 주었을 지라도 이때 처음 사람이 준 그 이름은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그 영혼의 지성이 생성한 하나님의 지식이 아닌 사람의 지식인 것이다.
또한 하와에 관하여 “남자에게서 낳으니 여자라 하리라”라고 여자에 관한 지식을 생성한 것도 사람이다.
물론 사람이 지식을 생성하지만 지식을 생성할 수 있는 근원이 되는 지식의 빛은 본유지식의 역할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나 신학자들이 천지 창조의 지식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고 가정하자, 우리는 신학자들의 권위 있는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동의한다고 할 때, 인식하는 것이지 인식되지도 않는 말씀을 동의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에 관한 지식을 말씀으로 사람들에게 가르치셨다고 가정하자 사람들이 그 가르침에 아무런 지각을 갖지 않고도 동의하게 되는가? 소위 말하자면 경험되지 않은 지식을 동의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인식구조인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이해할 수 있는 개념들로 정의하기 위해 본유관념, 혹은 본유지식이라는 개념들이 도입되어 연구 되었고, 다양한 개념들로 문제들을 이해하기 위한 접근 방법들을 생산할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본유지식이나 관념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접근 방법일 경우 그것들이 참된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일수 없다.
왜냐하면 이해나 인식을 위한 한 방편으로 생각한다면 또 다른 방법이 얼마든지 지식으로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스스로 지식을 생산함에 있어서 다양한 종류의 지식으로 혼돈을 예상하신 것이 분명하다. 각자 자기의 개념으로 문제를 접근한다면 문제라고 표현하는 것 자체가 전혀 옳지 않으므로, 피조 세계의 조화가 있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식을 이해하거나 인식하는 하나의 규칙에 질서로운 조화를 적용시켜 모든 사람의 지성에서 일어나는 생성되는 지식이 하나의 규칙에 의해 질서롭게 적용되므로 인해 누구에게나 동일한 이해와 인식을 가질 수 있도록 지으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의 지식에 동일한 호르몬이 인체에 작용하므로 느끼는 감각과 희노애락을 같이 공유할 수 있고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천지 창조 지식에 대한 느낌이 하나님과 사람이 동일한 의미로 느끼고 하나님께서 창조라고 말씀하실 때 사람이 하나님께서 느끼시는 의미의 창조의 느낌은 같은 것이다.
이렇게 의사가 소통할 수 있게 됨으로 지식이 통용되고 하나님을 사람이 느끼고 인식하고, 사람이 하나님을 느끼고 인식함으로 서로 객체로서 관계를 가질 수 있게 하신 것이다.
천지 창조 기사는 고백자의 지식이다.
지금까지 이 지식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하셔서 구전으로 전승 되어 모세를 통해 기록하게 하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하나님께서 이 지식을 말씀하시는 때와 말씀하시지 않으신 그 시점을 구분함으로 처음 사람은 이 지식을 알지도 못한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자료는 처음 사람 아담으로부터 언급되어졌고, 아담이 후손들에게 구전으로 전하였다고 말하는 것이 가장 옳은 주장이 될 것이다. 이것을 바탕으로 하면 아담은 하나님의 천지 창조를 자세히 인식할 수 있었는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될 것이고 이 질문에 아무런 답을 할 수 없는 황당한 상황에 이를 수 있다.
성경은 이와 같은 작은 문제라도 스스로 자증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다고 말씀하시므로 이 지식이 하나님의 형상에 의해 주어졌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할동하며 존재하도록 부여하신 지식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최초 사람 아담에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고, 그 형상을 영혼의 지성에 두셨다. 영혼의 지성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것으로 지식을 담고 있었고, 그 지식은 “하나님에 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창조에 관하여, 사람에 관하여”라는 모든 지식들이 담긴 본유지식5)이다. 이 본유지식의 역할은 최초 사람이 눈을 열고 세상을 볼 때 오감으로 감각한 모든 사물에 관한 인식할 수 있는 지식을 생성하도록 육체의 오감이 감각하여 반영한 표상을 조명해주는 것이다.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도성에서 “우리가 태양이라는 빛을 수단으로 해서 물질적인 대상을 보는 것 같이 지적인 진리들은 하나님의 빛 안에서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한 것 처럼, 이 말은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와 같은 것은 아니지만 방법에 있어서는 일치한 감을 주고 있다. Herman Bavinck 가 그의 The Doctrine of God 에서 말한바 본유관념론을 옹호하는 논의에 의하면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은 선행하는 지식을 전제로 한다”라고 잘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Herman Bavinck 가 말한바와 같은 선행하는 지식에 의해서 지식을 얻는 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Bavinck 의 말은 문제를 아주 잘 파악 할 수 있는 지식을 제공한다.
하나님의 형상에 담긴 본유지식을 선행지식이라고 하면, 사람이 이 지식으로 모든 영혼의 작용에 의해 지각되어 인식함으로, 사람의 영혼 안에서 하나님의 속성이 직접적으로 역사하셔서 사람으로 하여금 당신의 존재를 대신하도록 하는 역할을 함으로 범신론에 가까운 주장을 결코 피할 수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범신론의 주장을 피하기 위해 또 다른 지식을 생각하거나 찾아내려고 새로운 지식을 생성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완전히 독립적인 존재로 지으셨고 완전하게 지으셨다. 사람은 지식을 생성할 수 있는 존재이며 그가 생성하는 지식으로 하나님의 창조를 인식하여 그것을 세상에 드러냄으로 하나님의 사역에 더 가치 있는 영광을 드러내도록 하신 것이다.
지식을 생성하는 사람은 어떤 도움이나 혹은 어떤 자료를 이용해서 지식을 생성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스스로 지식을 생성하되 누구에게나 동일한 지성의 규칙에 따라 동일한 인식을 가질 수 있는 공통된 지식을 생성하도록 지음을 받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이 이해하는 창조 지식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고 하나님과 동일한 느낌을 가질 수 있는 감성으로 지식에 대한 지각을 갖게 하신 것이다. 이처럼 완전한 지식을 생성하는 사람의 영혼의 구조에는 육체에서 오감에 의해 감각된 사물에 대한 표상을 영혼에 있는 지성에 반영하면, 이 지성에서 하나님의 형상에 있는 지식이 빛이 표상을 밝혀 주고, 지성은 표상에 대한 지식을 생성하여 갖게 되는 것이다. 이 지식이 사람이 생성하는 지식이고 감성에 반영하여 지식에 대하여 감각하는 지각이다. 이 지각은 또다시 육체의 오감에 반영하여 전인에서 인식 감각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에 있는 본유지식은 사람의 영혼의 감성에 직접 작용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에게 직접 영향을 미치도록 하지 않고 사람이 인식을 갖는 것은 스스로 생성한 지식에 의한다.
그래서 사람은 의견이 다른 지식을 생성하여 충돌하기도 하고 충돌된 의견이 다른 지식을 서로 인식되는 지식으로 교정하기도 한다. 이를 상호 이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사람에게 인식되고 적용되는 지식은 사람에게서 생성되고, 사람에게서 생성된 지식으로 하나님과 사물을 인지할 수 있고, 그 인지된 지식으로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 존재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가지며, 영광을 표현할 수 있는 존재로 지음 받은 선한 상태다.
이 모든 진리의 지식은 하나님의 형상의 비췸에 의해 영혼의 지성에서 사람의 수준으로 인식 되도록 생성된 것이지 본래 하나님의 지식이 그대로 사람에게 인식 되어지도록 과정이 없이 주어진 것은 아니다.
이렇게 해서 처음 사람이 지음을 받은 후 눈을 뜨고 사물을 접할 때 영혼에 있는 하나님 형상에 담긴 본유지식의 조명으로 천지 창조에 관한 지식을 생성하여 지각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천지 창조 기사는 하나님의 형상에 있는 본유지식의 비췸에 의해 처음 사람이 생성한 지식에 의해 지각되고 처음 사람의 입으로 말하여진 지식이다. 물론 이 말이 사람이 눈을 뜨자마자 창세기 1장 1절과 2절을 외우듯이 말하였다는 것은 아니라 사람이 눈을 열고 세상을 바라보면서 우주의 사물들을 오감에 의해 감각되어지고 그 감각에 의한 표상이 지성에 반영되어지자 어거스틴이 말한 대로 우리가 태양빛을 수단으로 물질을 보는 것 같이, 하나님의 형상에 있는 본유지식이 지성에 반영된 표상을 조명하자 지성은 표상에 대한 지식을 생성하고. 그 지식을 영혼의 감성에 반영하자 지각이 일어나고, 감각된 감성은 즉시 육체의 감성에 반영하자 감각으로 인하여 느낌을 전달하는 전달 물질들이 뇌 속에서 온몸으로 퍼져 전인으로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6).
그러므로 지식은 사람에 의해 생성되는데 그 지식이 하나님의 형상에 있는 본유지식으로 태양이 빛을 발하여 사물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함과 같이 오감에 의해 반영된 표상을 본유지식의 조명으로 그 표상의 지식을 생성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으로 계시는 동안 그분은 참 사람이시면서 하나님이셨으나, 하나님의 권위를 버리시고 사람들에게 많은 말씀들을 하셨다. 개혁교회와 성경은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오류가 없는 진리라고 말한다. 이것은 참사람이시면서 오류가 없으신 예수그리스도는 처음 사람 아담과 같은 상태의 사람으로 보냄을 받았으며, 타락한 사람에게서 볼 수 없는, 타락하지 않은 참 사람인 아담의 상태를 보여 주신 것이다. 구체적인 것은 성자 하나님에 관한 부분에서 언급하겠지만 예수그리스도께는 아담이 타락하면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이 있었고, 창조시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계셨으며, 하나님을 대신해서 친히 사람에게 수많은 말씀을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참 사람의 조건을 아담과 같은 동일한 상태를 유지하신 분으로 이 세상에 오셨으나, 그 안에는 제 2위격인 성자 하나님의 신성을 감추셨으며, 계시로 사람에게 드러내시는 역할을 하셨던 것이다.
그러면 최초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에 의해 지식을 생성하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최초 아담과 같이 타락하시지 않은 상태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세상이나 모든 환경을 친히 보시고 판단하신 것은 하나님 형상 안에 담겨진 본유지식의 빛에 의해 밝혀진 것이기 때문에 그가 하신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포함하는 진리임에 분명하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사람에 의해 생성된 말씀이지만, 이 말씀이 감각되어지는 지식으로 생성되는 것은 하나님 형상 안에 담긴 본유지식의 비췸으로 말미암았기 때문에 처음 아담이 생성한 지식은 진리이다.
사람의 탁월성
아담은 인류의 대표자이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인류에게 전할 사람이었다. 그래서 만유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들도 다스릴 수 있는 존재이며, 지음을 받은 피조물로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자기에게서 생성된 지식으로 객관적 지각을 갖고 완전하게 하나님을 인식한다는 놀라운 탁월성과, 하나님께 언어로 서로 소통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어떤 피조물도 근접할 수 없는 신비를 가진 존재인 것이다. 이처럼 완전하게 지음을 받은 사람, 곧 하나님의 지성과 의지를 닮은 형상과 외적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모양을 가짐으로 지식을 소리로 표현하고, 피조세계에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영광을 말할 수 있으며, 하나님 사역의 영광스런 현장을 노래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으로, 피조물로서 거의 하나님과 같은 완전한 선에 이르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완전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 주심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증명하여 주신 것이다.
1) 순수지식
이 지식은 Calvin 이 말하는 종교의 씨앗이 된다. 최초 아담은 타락 전에 하나님 형상에 있는 본유지식으로 생성한 순수지식이다. 이 지식에는 하나님의 형상의 빛에 의해 생성되었기 때문에 그 지식의 요소에는 항상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근본적인 향기가 숨겨져 있다. 천자 창조의 첫마디가 “태초에 하나님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말이 그 근거다. 그것뿐만 아니라. 아담의 지성에서는 만유와 세계를 광의적으로 직시하고 말하는 의미이다. 하늘의 별과 우주, 그리고 궁창에 널리 펼쳐진 신비한 세계에 운행하는 별들의 행단, 아담의 눈에 보이는 지구의 대자연과 하늘과의 조화,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 그 근원들이 아담 영혼의 지성에 표상으로 반영되었고, 이것들이 하나님 안에 지혜와 지식으로 있다가 창조로 넘쳐 무에서 만물을 불러냈다. 나타난 그것들이 객관적으로 인식되어 하나님께 그 영광을 위하여 객관적인 증언들로 말하여 지기 위해 사람의 오감에서 감각되고 표상을 지성에 반영하여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본유지식의 빛에 의해 하나님 안에 있는 피조물에게 인식된 후 그것들을 지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노래를 하게 한다. 이것은 어거스틴이 말한바와 같이 태양빛에 의해 사물이 드러나는 것처럼, 본유지식이 표상을 밝혀주어 표상을 인식할 수 있는 순수지식을 생성되게 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영혼이 육체를 활동하게 하는데7) 하나님의 본유지식이 사람 지성에서 직접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8), 본유지식이 태양빛과 같이 빛을 비추어주면 영혼 안에서 순수 지식을 생성하여 지각하여 하나님과 같이 인식하여 완전히 상대적 관계로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 하나님을 알고, 자신 안에서 판단하고 느끼고 지각하여, 그 지식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참된 영광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사람 스스로 지식을 생성하도록 완전하게 지으신 것이다. 이렇게 완전한 피조물인 사람이 자기의 지성으로 생성하는 순수지식이 곧 바로 감성에 반영되고, 감성은 지식에 관하여 지각 작용을 갖고, 곧 바로 육체의 감관에 반영하면 육체의 두뇌에서는 물질의 존재 규칙에 따라 적용된 물질들이 온몸에 퍼져 육체로 느낌을 갖도록 한 것이다. 이때 지각을 가지는 느낌으로 온 육체는 전율하는 감동을 나타내도록 하는데 그것으로 감사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다.9)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 있는 지혜와 지식이 넘쳐 창조로 드러나고, 창조 세계에서 객관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완전한 존재가 전무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라고 계획을 세우셔서 하나님의 형상을 사람이 자기 스스로의 지식으로 판단하고 스스로 지식을 생성할 수 있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고, 천지 창조 지식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 사람 자신을 알고, 지식을 생성하는 능력으로서 여자와 각종 동물들의 이름을 짓는 일들로 드러낸 것이다.
이처럼 사람은 완전한 존재로 지음을 받음으로 순수지식을 생성하고 소유할 수 있는 존재가 됨으로 자기의 지식으로 지각하며 인식하며 사람으로서 활동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2) 순수지식의 오염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최초 지음을 받은 존재의 완전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고, 최초 사람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그가 말한 진리의 지식으로 크고 광범위한 지식을 받게 되고, 육체의 오감이 느끼는 육욕적인 감성보타는 지성의 반영을 충만하게 받을 수 있는 영혼의 감성에서 얻어지는 진리에 대한 깨우치는 감각을 누릴 수 있는 존재로 인생을 살아 갈 것이라는 사실을 볼 수 있었다.
아담 역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완전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기 의지로 선으로부터 과감히 이탈하는 그 순간까지 진리를 말할 수 있도록 지성을 밝혀주는 하나님 형상의 빛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의 빛이 사라지고 즉시 어두움이 그의 영혼을 지배하게 되었다. 지성은 어두움에 사로잡혔고, 육체의 활동은 멈추지 않음으로 계속적으로 감각된 표상을 지성에 반영하였으나, 하나님 형상의 빛이 꺼진 지성에는 표상에 관한 분명한 지식을 생성할 수 없는 혼란한 상태가 되었다. 육체의 활동 범위는 광범위해지므로 더 많은 표상들이 지성에 반영되지만 그 표상에 관한 지식을 생성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지성은 하나님 형상 안에 있는 본유지식의 빛으로 밝혀져 생성된 순수지식과 그 빛을 받지 못하고 지극히 제한적인 순수지식을 비교하여 별도로 지식을 생성하게 되었다.
또한 본유지식의 빛을 받아 생성되었던 순수지식은 본유지식 역할을 대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으나, 순수지식은 사람이 지음을 받고 완전한 환경과 상황에 의해 모든 지식을 생성 되어진 것이 아니라, 이전까지 경험을 통해 얻은 지극히 재한 된 지식이기 때문에 새로운 상황과 환경 또한 새로운 피조물들을 만나는 상황에서는 순수지식이 역할을 하여 새로운 지식을 생성하게 되었다. 이 순수지식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라 사람의 경험에 의해 본유지식의 빛을 받아 생성한 순수지식으로 동일한 상황과 환경을 반복적으로 경험할 때 지식을 다시 생성하지 않고 순수지식에 의해 지각을 갖기 위해 사람의 지성 안에 저장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계속되는 삶에 의해 오감이 새로운 감각의 표상을 지성에 반영하면 이미 지성에 있는 순수지식과 일치한 지식을 찾을 수 없을 때 순수 지식의 역할로 새로운 생성하게 되는데 바로 이 지식은 순수지식과 같은 무오류의 지식이 아니라 오류 지식이다. 왜냐하면 표상과 일치한 지식이 지성에 있지 않으면 지성은 표상에 관하여 새로운 지식을 생성하게 되는데 모든 지식을 완전하게 밝혀줄 본유지식과 같은 역할을 순수지식이 할 수 없으므로 순수지식만으로 지식을 생성하게 됨으로 완전한 지식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억지로 조합되듯이 생성되어지게 된다. 그 결과 불완전한 지식을 생성하게 되고 이 지식이 순수 지식과 함께 역할을 하여 갈수록 분분명한 지식들로 변해가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지식이 진화론이다. 진화론은 역사와 시간 그리고 과학의 조합물인데 과학이라는 학문이 체계적으로 뛰어난 수의 역할로 진리에 가깝지만 진화는 논리에 있어서 대비 되거나 증거 되는 무수히 많은 역사적 고증들과 사실들과는 다른 당시의 지식으로 증명을 얻으려한다는 점에서 반복적인 수정을 요구하는 학문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궁극적인 결론에 이를 때는 진화로 시작하여 무수히 많은 수정을 통하여 창조를 증명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 자명하다. 왜냐하면 창조가 분명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2) 타락 후 획득지식
이렇게 완전한 존재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불순종하는 사건이 일어남으로 사람은 타락하게 되었다. 타락한 사람에게 나타난 반응은 예전과 같이 새로운 감각에 대한 지성의 비췸이 없어졌고, “무지(모른다)”라는 새로운 지식이 생성되어 감성에 지각되었고, 이 무지로 인하여 육체에 나타난 반응은 떨림과 두려움이었다. 예전에 없던 새로운 감각과 더불어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이 몰려왔고, 기쁨으로 대하던 하나님이 이제는 두려움으로 인하여 그 앞 설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에이 있는 본유지식을 잃어버리게 됨으로 표상을 밝혀주지 못하여 ‘모른다’라는 무지의 지식을 생성되었다. 영혼의 지성에는 무지로 인해 지각을 갖지 못하는 무수히 많은 새로운 상황과 환경들이 밀려왔고 너무 많은 모르는 상황 때문에 어찌할지 모르는 혼란에 빠져버린 것이다. 이처럼 이해와 인식이 어려워짐으로 두렵고 떨리는 아픔을 경험하게 되었고 평안과 자유를 잃어버린 두려움이 빠져 버린 것이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지극히 미약한 부족한 지식만을 가지고 새로운 환경과 상황에 부딪혀 살아야 했다. 어떤 지식의 도움을 받지 못한체 홀로 살아가야하는 인간에게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은 너무 크고 광대하였으며, 수많은 두려움과 공포스런 환경이 기다리는 삶의 현장에 던져졌으며, 너무 많은 환경과 상황, 시시각각 변화되는 역사의 현실 앞에 던져져 버린 것이다. 하나님은 그를 떠나가지 않았으나, 그의 영혼의 지성에 담긴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됨으로 인해 주파수를 잃어버린 라디오와 같이 아무런 소식을 들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곁에 계시는 하나님을 지각하지 못함으로 부르지도 못하였으며, 설사 맹인이 사람을 부르는 것처럼 허공을 향하여 하나님을 불렀을 때 곁에 계신 하나님이 응답하여 손길을 내 밀어도 지각되지 않음으로 붙잡지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런 상태는 사람이 스스로 선택한 일이고 특히 아담에게 있어서는 그렇게 될 것을 알면서도 걸어가 버린 우매하기 짝이 없는 일을 저지른 결과였다. 그런 상황에서 사람은 스스로 자기 자신이 자신의 삶을 개척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이른 것을 깨닫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으려고 할 때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사람에게 미치고 도움을 주었으나 사람은 그 도움의 손길을 지각하지 못하는 하나님께 대하여 벙어리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하나님은 항상 사람 곁에 있어서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있으나 사람은 하나님을 지각하지 못하였고, 사람에게 하나님은 전혀 인지되지 않은 어두운 상태가 되고 만 것이다. 만물이 하나님 안에 있고 사람역시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 있으나, 만물에게 보이는 하나님은 사람의 눈에 감각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은 곁에 계시나 사람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실지와는 다르게 사람은 광활하고 넓은 사막에 홀로 던져진 존재처럼 살게 되었다. 아무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는 오아시스 없는 사막에 물을 찾으려는 발정난 사슴처럼 사막을 헤매는 길 잃은 존재처럼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실지로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 곁에 있었고 언제나 사람을 돕고 사람에게 힘을 주시고 계셨다.
타락한 사람은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환경과 상황에서 접한 사물들에 대하여 지성에 표상을 받게 되어도 영혼의 지성은 아무런 빛을 비추지 못하였다. 다만 타락 이전에 생성된 얼마 안 되는 지식이 일부를 밝혀 새로운 지식을 생성하고 지각되게 할 뿐 대부분 새로운 상황과 환경 그리고 보지 못한 새로운 사물들에 대하여 무지로 인한 혼란스런 상황을 만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이미 획득한 지식에 비추어 새로운 지식을 억지로 생성해야 하는 결과를 갖게 된다. 이렇게 타락 전 획득 지식에 의해 새롭게 생성한 지식이 타락 후 획득 지식이 된다.
타락 전 획득 지식이 하나님의 형상에 담긴 본유지식이 밝혀주는 빛에 의해 생성된 진리의 지식이라면 타락 후 획득지식은 진리의 지식의 비췸을 받았을 지라도 다양한 부분에서 일부 지식에 해당하는 부족한 지식이 함유되어 있으므로 진리가 될 수 없고, 또 다른 무지의 연산에 의해 생성 되어진 지식이기 때문에 거짓의 요소가 많이 함유된 불순한 지식이 된다. 그러므로 처음 사람이 타락 이전에 많은 부분의 지식을 본유지식의 빛에 의해 생성하였을지라도 그 지식이 순수하게 유지되지 못하고 새로운 환경과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타락된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지식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4) 타락 후에도 지식을 생성하는 기능은 유지됨
하나님의 창조의 탁월함은 사람이 타락하였음에도 더욱 빛나게 되었으니, 완전한 하나님께서 그 지은 피조물이 완전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타락한 사람에게서 그 완전함이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밝은 세상에 드러난 만물을 접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의 빛에 의해 활발하게 지성활동을 하며 지식을 생성하던 아담의 영혼은, 타락 후 어두움에 휩싸여 수많은 무지한 사물들을 접하고 혼란스러워 했으나, 즉시 그의 지성은 마치 하나님의 형상의 빛이 밝혀주는 것과 같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그것은 순수지식이 그의 지성에서 활성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아담의 지성은 마치 타락 이전의 사람과 같이 객관적으로 피조물들을 경험하며 인식할 수 있었다. 어쩌면 타락이전의 상태와 조금도 다를 수 없으나 한 가지 다른 것은 예전에는 오감에 의하여 감각된 객관적 존재들의 표상을 하나님 형상의 빛이 밝혀줌으로 지식을 생성할 수 있었으나, 이제는 경험하지 않은 환경이나 사물에 관하여는 밝혀주는 빛이 없음으로 지식을 생성하지 못하는 무지가 그를 괴롭히고 두려워하게하는 새로운 현상들을 경험된 것이다. 마치 칠 흙 같은 어두운 곳에서 커다란 물체를 감각적으로 만나는 경험을 하고 그 존재에 관한 지식이 없음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영혼의 두려움 감각이 육체의 감각으로 반영되어 전신으로 두려운 느낌에 떠는 것이다. 이미 생성되었던 미약하기 이를 데 없는 순수지식은 이미 경험한 사실이나 환경, 그리고 하나님, 사물들에 관한 지식들이었으므로 이 지식은 반복적인 경험으로 표상을 즉시 지각하고, 나아가 또 다른 지식을 생성하게 한다. 그러므로 최초 사람이 아직 경험하지 않은 수많은 상황들을 시간의 간격을 뛰어넘어 경험을 하지 않았다. 차례대로 시간에 따라 경험을 하게 되고 비참한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짧은 생애에서 경험한 아주 일부분인 순수지식으로 인해 경험되지 않은 수많은 상황과 환경과 타락으로 말미암은 결과들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이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그리고 혼란스런 종교에 대한 무수한 질문들에 아무런 답을 못하고 무지의 어려움을 호소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존재유지를 위해 스스로 터득하였는데, 그것은 획득지식들의 상호 판단과 연산에 의해 새로운 지식을 생성하는 놀라운 지혜를 발휘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지식을 생성하고 그 지식으로 독립적인 존재를 드러내고 창조주 하나님께 대하여 설 수 있는 존재로 지음을 받은 아주 탁월한 존재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자신이 진리를 말한다(요한복음 8:46)고 분명히 말씀하셨고, 요한복음 8:44에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며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말을 할 때 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라고 아주 분명히 세상 사람들과 자신을 본성에 있어서 완전히 구별하여 말씀하셨다. 이것은 타락한 사람에게 진리가 그 속에 없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고, 그들이 말할 때 거짓된 지식으로 말한다는 사실이 거짓에 오염된 획득지식을 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본유지식에 비추어 생성된 순수 지식은 진리인 반면, 진리인 순수지식에 의해 얻어진 또 다른 획득지식은 본유지식이 아닌 순수지식의 빛에 의해 생성되면서 필연적으로 무지와 거짓을 더하여 생성하기 때문에 전혀 진리의 요건을 갖추지 못한 거짓에 오염된 획득지식이 되고, 그것들로 인해 더 많은 왜곡된 지식들을 생성하게 된다. 첫 사람에 가까울수록 진리의 빛이 강하게 비추지만 세대가 거듭하여 사람들에게 새롭게 생성되어진 수많은 지식들에게서 진리의 빛은 감소되어 간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지식에 관하여서도 마찬가지이다. 역사를 거슬러 첫 사람 아담에게 가까이 다가가 지식을 탐구할수록 하나님에 관한 빛은 더욱 빛나고 있으나, 반대로 자신에게 향할 수록 하나님에 관한 빛의 지식은 더욱 희미해져 가게 된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본유지식의 빛에 거하시며 죄가 없으시므로 본유지식을 잃어버리지 않은 순수한 진리의 지식만을 말씀하시므로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은 진리가 아닌 것이 없다. 그러므로 아담이후 모든 사람들은 왜곡된 지식에 의해 살고 있으며, 예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진리라고 하셨다10).
5) 순수지식과 하나님의 영광
인간의 마음속에 타고난 본능에 의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말하는 Calvin 의 주장은 사실 옳다. 플라톤의 이데아나 데카르트의 본유관념설, 이를 발전시켜 또 다른 이론을 주장하는 칸트, 헤겔, 또 다른 많은 사람들에 대한 본유관념설은 타락이후 사람들이 영혼의 지성에서 고뇌하고 궁구하여 찾아낸 최초 획득 지식들의 연산과 상호 관계를 통하여 생성된 지식들이므로 Calvin의 주장과는 전혀 다른 부류의 지식이다. 그러므로 Calvin 이 말하는 종교의 씨앗은 타락 이전에 본유지식에 의해 비췸을 받고 생성된 순수지식들이다11). 이 지식들이 대표적으로 성경에 기록되어 증언되어 왔는데, 창세기 1:1이하에서 사람이 범죄를 시작하기까지 아담의 증언이며, 아담이 살아서 남겼던 구전들 가운데 극히 일부인 사람에게 최초로 생성된 지식이었고, 이 지식은 진리이고 이 지식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누구든지 아담이 증언한 성경에 기록된 천지 창조기사에 관하여 들으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역에 관하여 의식을 갖게 되고, 어떤 상태이든지 신적존재인 하나님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본유 지식이 그의 지성에 찬란하게 빛나 지성을 밝혀주고 지속적으로 순수 지식을 생성하여 오로지 순수 지식으로 후손들에게 교육하고 드러낸다면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대로 참으로 무한한 영광의 아름다운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지속적으로 타락의 깊이가 깊어갈 수로 하나님과 멀어진 사람의 상태에 비하여, 역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노래하고 찬양을 돌리는 순수지식이 세대를 거듭할수록 더욱 정결하게 빛나게 되면,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그 기쁨은 더하여 질 것이며, 사람의 세계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식을 생성하는 존재가 되게 하시는 탁월한 존재로 지으시는 것을 기뻐하셨고, 그 존재로 하여금 영광을 받기를 원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지식들이 시간의 흐름에 의해 사람들의 지성에서 각각 다르게 적용 되고 해석되었으며, 완전히 다른 의미의 지식으로 뒤바뀌고, 더 나아가 복잡한 환경에 의해 처음 획득한 지식은 왜곡을 거듭하여 본래의 지식이 지닌 중요한 의미들이 희미해지고 사라지고 없어졌다12).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계획이 사람들의 범죄에 의해 방해 받는 것을 슬퍼하셨고, 계획을 성취하시려는 강력한 의지를 피력하셨는데, 그것을 사랑으로 드러내셨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무너뜨리게 하였으나, 오히려 그 불순종이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값지게 하는 결과를 얻게 하시기 위해,13) 성령을 사람들에게 보내어 진리의 말씀이 거짓과 왜곡 속에서 보존되게 하셨다.
지식의 생성 규칙
역사가 계속되는 동안 인류는 지식으로 인해 급속히 변화를 거듭하였고, 그 발전은 상상할 수없는 사회의 변혁을 거듭하여 왔다. 하나님께서는 인류가 쌓은 바벨탑을 보시고, 인류가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을 가지셨다. 이는 “그들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임으로”(창세기 11:1) 인해 그들의 생각이 뛰어나 단결력이 있으며, 그 발전 속도가 상상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구는 약 70억이며 이들이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말을 사용한다면 지금 인류가 누리는 현대 과학과 IT 문명 이상의 초 과학의 문명을 얼마든지 이룰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바벨탑이 증명해 보였다. 이 모든 것이 지식을 생성할 수 있는 지성을 가진 존재로 지음을 받은 사람만이 가능하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에게 객관적인 판단으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영광을 돌리며 찬양하도록 더욱 완전한 존재로 지으셨고, 사람 영혼의 지성에 어떤 표상이라도 반영이 되어진다면, 그 표상을 어떤 방법으로도 지식으로 생성할 수 있는 완전한 능력을 소유한 존재로 지으셨던 것이다. 그러나 지성에 반영된 표상을 어떤 근원14)이 밝히느냐에 따라 생성된 지식은 달라진다. 타락하기 이전 아담 영혼에 반영된 표상을 밝혀준 그 빛은 본유지식이었다. 그러나 타락 후 아담의 영혼은 변화를 겪게 되었는데 곧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고 그 기능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15) 아담의 영혼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의 빛이 더 이상 밝혀지지 않고, 육체는 아직 살아 있으므로 영혼의 지성에 표상을 지속적으로 반영할 것인데, 이 표상들을 밝혀 비춰주는 본유지식이 더 이상 빛을 내지 못함으로 사람의 지성은 이미 생성되어 있는 순수 지식의 역할에 의해 지식을 생성하여 지각하게 된다. 이 지식은 지식의 완전한 모체인 본유지식이 아니기 때문에 순수지식은 새로운 표상과 다르거나 비슷한 표상으로 얻은 지식이기 때문에 표상에 대한 다름, 부족함, 무지와 같은 지식들이 연산, 해석, 판단이 순수 지식에 개입하여 결과적으로 잘못되어진 오염되거나 거짓된 지식이 생성되게 된 것이다16). 그러므로 본유지식에 의해 밝혀진 최초 순수지식은 진리임에 분명하지만, 순수지식의 표상이 순수지식으로 판단하려는 표상이 상이함으로 인해 진리라는 개념을 갖지 못한 획득지식만을 생성하게 된다. 그러므로 Calvin이 말하는 종교의 씨앗, 곧 사람의 마음에 심겨져 있었던 그 지식은 타락 전 본유지식에 의해 인간이 생성한 진리 지식이고, 타락이후의 모든 지식은 종교의 씨앗을 가지고 있으나, 세대를 거듭하여 하나님과 그에 관계된 모든 지식들이 점차 희미해져 완전히 인간중심의 거짓에 오염된 지식들로 생성되어 의견과 견해가 다른 두 부류의 사람들로 대립되게 했으며 함께 섞여서 문화를 이루고 반목을 거듭하여 존재를 이어온 것이 인류의 역사이다17). 그러나 이러한 대립을 형성하게 하는 지식이 모두 사람에게서 생성되어진다. 사람이 지식을 생성하는 영혼의 지성에는 두 부류 사람에게 공히 동일한 규칙이 적용되고 있다. 그 결과 하나의 순수지식을 생성하는 지성에 적용되는 규칙이 동일하게도 순수지식을 대립하는 지식을 생성한다. 그러므로 지성에는 지식을 생성하는 알 수 없는 규칙의 적용에 의해 지식을 생성한다. 하나님께서 영혼을 지으실 때 지성의 지식 생성기능을 지어 주셨으며 이 기능이 동일하게 모든 사람이 부여 받고 태어남으로 동일한 규칙의 적용으로 지식을 생성하게 된다. 만약 사람에게서 지식을 생성하는 지성작용의 규칙이 상이할 경우 결코 대립되는 지식을 생성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생성하는 지식 이 완전히 상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보아 사람은 창조 되지 않고 자연적으로 생성되어 진화를 거듭하여 사람이 되었다는 주장에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순수지식에 거짓과 부족, 무지가 함께 연산, 혼합, 결합, 상호판단의 과정으로 ‘진화’의 획득지식을 생성하게 된 것이다.
사람이 종교를 인식하는 것은 모든 지식에 내포하고 있는 작은 종교의 씨앗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최초 사람이 지각을 갖고 인식을 시작할 때 모든 지식에 내포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사유 과정에서 희미하게 지각된 감각을 갖게 된다. 그럼에도 지식에 내포된 지식은 희미하여 참된 하나님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그것은 무지가 지식과 연산되든, 아니면 결합되든, 지성이 생성한 왜곡된 지식이 순수 지식에 있는 지각된 신 의식이 표상으로 반영하여 지식을 생성하는 과정에서 유입된 왜곡된 지식들로 인하여 왜곡된 신에 관한 지식을 갖게 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해서 신에 관한 지식은 다양하게 나타났고 종교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