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앙

죄의 열매1, (선교를 소망하는 사람들에게)

생명있는 신앙 2012. 5. 17. 17:47

사람의 영혼의 지성작용

 

저는 지난 시간까지 사람은 영혼의 지성에서 생성되는 지식에 의해 의식 활동을 하는 존재이고, 지성에서 어떤 지식으로부터 조명을 받아 생성된 지식으로 자기 정체를 구성했는지 따라 존재론적으로 참과 거짓의 사람으로 구별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식의 조명을 받는 방법은 두가지인데 하나는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 형상으로부터 조명을 받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 생성하여 가지고 있는 자기지식으로부터 조명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를 이해하고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얼마나 중요하고, 이 신앙이 제공하는 은혜로운 지식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으로 이끌어 가는 섭리에 속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에 생명을 주시려고 오셨는데,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하셨고,(17:3)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6:63) 하셨고, 구약성경 잠언 6:3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고 말씀하신 것처럼, 말씀을 얻고 말씀으로 사는 것이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말씀과 관계하여 생각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자율적으로 존재하고,

피조물로서 가장 완전하고

모든 피조물보다 구별된 존재로 특별히 스스로 지식을 생성하고 그 생성된 지식에 의한 자아 정체성을 가지고 의식 활동을 하는 존재로 지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피조물에게서도 발견할 수 없는 탁월한 인식능력과 창조적인 지적인 능력을 갖춘 완전한 존재입니다

 

지음 받은 사람이 잠에서 깨어나 의식 활동을 하는 것은 영혼의 지성에서 일어나는 지성적 작용에 의해 생성되는 지식으로 말미암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지식을 생성할 수 있도록 육체의 감각으로 말미암은 표상(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이를 영상이라 함고백록10,8)이 영혼의 지성에 반영되어야 하고반영된 표상을 밝혀주는 선재하는 지식이 있어야 (이를 조명하는 지식이 합니다.) 사람으로 활동할 수 있는 지식을 생성하고생성된 그 지식의 자아 정체성을 가진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를 증명이라고 하시 듯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7:14에는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니라 하시므로 사람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을 가지도록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정체성은 영혼의 기능인 지성작용에 의해 생성된 지식이고, 이 지식은 피조물인 인간으로 완전하게 자기 스스로 자율적인 행동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지식과 명확하게 구별된 독립적입니다.

만약 영혼의 지성에서 생성하는 지식이 모순을 가진 지식이라면 사람은 필연적으로 모순된 행위를 하고완전한 진리 지식이 생성되었다면 진리대로 행동을 합니다그러므로 모든 행위는 여러분의 지성에 있는 지식이 진리인지 아니면 거짓인지로 구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6:70에서 12제자중 한 사람, 가롯 유다를 마귀라고 하시고, 8:44절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마귀의 자식이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8:33, 마태복음 16:23에서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 하는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아 네 뒤로 물러가라 라고 꾸짖으셨습니다. 이 말씀들에 비추어 볼 때 사단에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 우리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고못박아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일은 곳 거짓을 의미하고 왜곡된 지식을 의미하며, 사람들은 이 지식들에 의해 행위를 하는 것임을 성경이 말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0:13 최후의 심판에서는 사람을 그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의 결국은 사람은 그 사람이 행하는 행위를 보면 그 사람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다고 정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에 비추어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4장에 등장하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진리의 핵심이 무엇일까요?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타락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잘 드러내 주고, 인류의 첫 아들인 가인과 아벨에게서 진리와 거짓의 정체를 명확하게 잘 드러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배워온 본문에 대한 설명들은 가인과 아벨의 행위에 중점을 두고 해석해 오고 있었습니다.

전통적인 해석에 의하면, “사람이 타락하고 후손을 낳았고, 그렇게 태어난 사람들이 싸움을 일으켜 살인을 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조상이 타락해서 그 타락의 열매가 그들에게 나타났으며, 다음으로는 당사자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원인이 되고 이것으로 인해 결정적으로 살인을 저지르므로 사람의 극악무도한 죄의 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철저히 스콜라 철학적인 해석입니다.

개혁교는 아주 오랫동안 이 철학적 해석에 의존한 신앙 생활을 했습니다. 이 해석은 매우 교모하게 위장된 인간적인 해석입니다. 앞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을 비추어볼 때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인간적으로 생각하여 큰소리친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말한 것이 인간의 정체에 대한 주님의 배격이라면, 인간적인 스콜라철학은 사탄아 물러가라고 말씀하셔야 하는 대상임을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스콜라 철학에 의하면, 사람의 이성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분문을 취하여 본문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의미를 찾아냅니다. 그리고 그것을 중심으로 전체의 스토리를 전개한후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해석함에 있어서 이성의 판단을 매우 중시합니다. 이성의 판단에 따라 타락의 원인에 의한 결과가 죄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합니다. “타락하지 않았다면 죄라는 열매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곧 죄는 타락의 결과물이다라고 규정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타락했기 때문에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고, 죄가 타락하게 만드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는 행위가 먼저냐 행위를 일으키는 지식이 먼저냐 라는 논쟁이 있을 수 있는데 반드시 지식이 먼저여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창세기 4장을 본문으로 말하고자 하는 의미는, 가인과 아벨에 관한 스토리는 사람의 정체성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을 사람의 정체성에 맞추어 해석하려는 방법 또한 스콜라적인 방법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구체적으로 스콜라적 해석이란? 교리체계를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해 나아가려는 경향이 주된 관점으로 하는 방법을 스콜라 철학이라고 합니다.   

18세기 말에 새로운 신학 방법이 등장하여 성경을 해석하려는 방법이 등장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구속사적를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려는 방법이 등장하였습니다. 이학문의 방법이 성경 신학이라고 하고 지금까지 신학의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18세기중엽에 스콜라주의로 부터 탈피하기 위해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났으며 이들은 대학 선교회를 중심으로 활동영역을 넓혀서 지금 대부분 교회의 대세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근자에 이르러 이 활동의 중심 사상을 면밀히 살펴 본 결과 지극히 인간적인 방법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주의를 요하고 있지만, 많은 부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방법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더 멀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스콜라적인 해석을 고수하는 자칭 개혁파라고 주장하는 교회 안에서 보수적 경향으로 이해하고 있는 상태가 생명이 없는 죽은 신앙을 양산하고 있다는 각성이 매우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러면 가인과 아벨을 통해서 계시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사람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그 주제에 따라 본문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사람의 행위를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후 그들의 동침과 그 결과로 인한 가인과 아벨의 탄생, 이들이 하나님께 대한 반응에서 나타난 결과들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에는

1, 아담과 하와의 동침과 가인과 아벨의 출생

2, 하나님과 관계에서 가인과 아벨의 정체성을 성경이 선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으로부터 추방당한 아담과 하와에게 삶의 환경에서부터 하나님과의 관계까지 엄청난 변화에 직면하였습니다.

동산안에서 있었던 하나님과의 경험은 동산 밖에서는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의 어깨에 매워진 삶이라는 운명은 단순한 것이 아니라 문제 투성이었습니다. 밀려오는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하기에는 감당하기 버겨운 일들이 너무 많았을 것입니다. 농사만 해도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외부로부터 오는 자연적인 위험, 각종 짐승들의 공격에 속수 무책이었을 것입니다.

양식을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나 삶의 환경을 개척해 나아가야 하는 수많은 만만치 않은 일들로 어려움을 겪기도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어려운 것은 정신적인 문제였을 것입니다.
아직 접하지 못한 사건이나 물질들, 경험하지 못한 수많은 상황들, 눈으로 보고 귀로 이해해야 하는 수많은 자연 현장들은 아담의 지혜능력의 한계가 이르렀을 것입니다. 동산 안에서는 하나님 형상이 조명 해주시므로 정신적인 어려움에 대해서는 전혀 상상되지 않은 일이었으나 동산밖에서는 깜깜한 세상 바로 그것이었을 것입니다.

매우 혼란스럽고 가중되는 두려움이 더욱 그들을 괴롭혔을 것은 분명합니다.  

그중 하나가 창세기 4:1에 나타난 아담과 하와의 우리말의 번역으로 동침에 관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창세기 4: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실지로 동침이라는 말은 성적 관계에 사용하는 언어로 한글로 71회 걸쳐 번역되었는데 대부분 부정적, 정욕과 욕구를 뒷받침하는 의미로 언급되었습니다.

한가지만 예를 들어도

창세기 19:34
이튿날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어제 밤에는 내가 우리 아버지와 동침하였으니 오늘 밤에도 우리가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네가 들어가 동침하고 우리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후손을 이어가자 하고

 

와 같이 71회나 사용되는 이 단어는 충분히 부정적인 언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 동침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יָדַ֖ע 입니다.
실지로 יָדַ֖ע 는 알다 To Knew 입니다. 이 단어가 부정적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아는 것이 부정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아는 것이 부정적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형상이나, 혹은 성령의 조명에 의하지 않고 욕구로 인한 자의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게다가 41절에서 표현하는 아담과 하와의 동침은 결과적으로 가인과 아벨로 연결시킵니다.

이것은 행위가 결과의 원인에 부합하는 언어입니다.

이 부정적인 행위로 인하여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났다. 곧 일의 원인은 앞에 행위다. 라는 식의 말은 매우 부정적인 묘사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아들들, 이삭, 야곱, 모세 등의 출생은 특별히 פֶּ֥טֶר רֶ֖חֶם태를 열어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에 동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의 태를 열어 주신 것이 아니라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일어난 호기심에서 비롯된 일련의 행위나 혹은 다른 구절에서 부정적으로 표현된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볼 때, 이들의 출생을 하나님의 창조 계획과 연결시킨다는 것은 무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아담과 하와는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지성이 심각하게 오염되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이지 않은 상황에 까지 이르게 되었을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부정적인 냄새가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인과 아벨은 범죄로 말미암은 정욕의 결과로 낳은 아들이라고 말해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뒷 편에 가인의 정체성에서 그 정황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1, 가인

 

4:6에 보면 지나치기 쉬운 메시지가 눈에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다가가셔서 말씀하셨습니다우리가 자주 말씀을 드린 것은 현재 가인은 타락 이후에 태어난 죄로 말미암아 오염된 상태에 있는 사람입니다. 가인 뿐만 아니라 아벨 역시 마찬가지 이지만 가인은 아벨과 대비되는 사람으로 증언되고 있습니다.

죄로 오염되었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드러난 죄의 부분을 면밀히 살펴 보고 이해를 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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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구조는 창세기 2:7에 의하면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었습니다. 흙으로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습니다. 이렇게 사람은 살아 있는 존재가 됩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생명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명이 그릇에 담겨 있는 상태, 곧 흙으로 지어진 육체가 하나님의 숨인 영혼이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고 그 속에 생명이 있는 상태를 살아 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육체와 영혼이 같이 있는 상태를 살아 있다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상태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지어진 상태라고 말합니다. 피조상태, 만들어진 상태 입니다. 이 상태에 생명이 들어가 있을 때 살아 있다라고 말하고, 살아 있으면 행동할 수 있도록 완벽히 준비되어 있거나 행동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실지로 인간의 본질에 관해서 이부분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다는 것은 흙과 숨으로 지어졌으며 그것이 하나님 형상이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자면 행동하지 못하는 인간은 식물인간입니다. 이 사람에게 생명이 들어갔다는 것은 지식 정보 곧 말씀 들어가서 자기 지식을 가지고 그 지식으로 의식하여 세상을 보고 활동하는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의식을 일으키는 지식 정보가 있느냐에 따라 생명으로서의 존재가 결정되고 그 지식정보의 사람의 정체가 결정됩니다. 지식정보가 육체의 뇌에만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진화론자이며, 과학중심의 사고를 가진 사람입니다. 반면에 영혼에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고 영혼에 있든 육체에 있든 그 정보를 얻는 방법에도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이미 태어날 때 가지고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한편은 사람이 경험을 통해서 지식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가장 쉽게 이해하자면 하나님께서 흙과 하나님의 숨으로 사람이 되게 하셨는데, 사람을 활동하고 움직이는 지식정보가 흙에 있었느냐, 영혼에 있느냐, 지음을 받을 때 받았느냐, 살면서 경험을 통해 얻느냐, 라는 것이 가장 큰 논란 거리입니다.

결국은 지식정보가 타락한 사람에게서 어떻게 역할을 하는지 살피는 것이 성경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가인에게서 그것을 배울 것입니다.
제가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을 드리려고 합니다.

성경은 가인과 하나님과 만남을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여기에서 가인은 그의 상태에 관한 현주소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약 가인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취한 행동과 하나님께 발언한 것을 살펴 보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파악하려 했다면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드러난 괴리가 무엇인지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인에게는 그런 생각을 가질 상황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런 생각을 가질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들여다 보고 자기를 이해하려는 생각을 전혀 갖지 않았습니다. 곧 반성하려는 의지가 없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가인이라는 사람을 거울삼아 우리 자신을 그에게 비춰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인에게 비쳐 보이는 우리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회개하며 우리 자신을 가다듬고 고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가인과 닮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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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살펴 보십시요,

가인에게 무엇이 문제인지 보십시요.

가인은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자신이 드린 제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 때문에 마음에 분노가 일어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다가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가인이 하나님과 소통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되는 구절입니다.
그렇다면 가인의 지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상태의 사람이라는 의미입니까?

가인의 지성에서는자신의 제사가 받아들여지지 않음으로 인해 참을 수 없는 멸시와 열등감, 분노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가인의 영혼에서 일어난 지적인 반응에는 반대 급부의 작용으로 분노와 미움열등감이 솟구쳐지고 있습니다. 소위 말하자면 악의가 가득한 사람인데 이와 같은 사람과 하나님의 그 거룩하시고 순결하신 말씀이 소통되신다는 것은 상상 할 수 없습니다.

가인에게는 아벨을 향한 잔인하고도 표독스런 살의가 있지 않습니까?

가인은 자신의 제사를 받아 주시지 않은 하나님에 대해서 철저하게 무시하는 마음을 가진 우글거리는 증오심과 질투심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자기 아버지가 당했던 과거의 일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 더해지고 있습니다.

(4:14 이 지면에서 나를 쫒아내시온즉 주의 낮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이것을 들으면 아담의 말이 가인에게서 나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진리를 전하는 설교자(수많은 설교자들이 진리로부터 멀어졌습니다모든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극히 일부만이 진리를 위해 생명을 다 해 수고하고 있습니다.)의 말에 대해서 교회에 있는 성도들이나 아니면 세상의 불신자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그들이 한결 같이 가인처럼 진리 말씀에 결코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진리를 전하는 설교자의 입에서 나오는데그 말씀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자기만족을 위해 외치는 이야기만 들으려 합니다

오로지 성공과 자기의 만족을 위해 발을 닦아 달라고 하고

꿈은 자기가 꾸고

그 꿈을 성취해 달라는 때를 씁니다.

그렇게 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갖지 않고 그런 관계에 대해서 털끝 만큼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어려운 세상을 힘들게 살아가는데 위로해 주지 못 할 망정

오히려 더 많은 시간을 빼앗고, 봉사를 강조하고, 헌신에 목매이게 한다고 짜증을 내기 일쑤입니다.

다독거리며 등을 두들겨주며 서로 포옹하고 달콤한 말을 듣기를 바랄 뿐

진리에 대해서 조금도 목말라 하지 않습니다.

왜 네가 선을 행하지 못하느냐죄가 문에 엎드렸느니라라는 책망과 경고의 말씀에 대해서는 살인의 감정으로 덤벼들고 분노의 자세를 취하는 가인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 모습과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자기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하나님이 자신에게 다가와 말씀하시는 그 음성에 대해서 곁눈질하며 비아냥거리는 것 같은 분노는, 금새라도 광기를 드러낼 것 같은 증오심이 가슴속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음성을 외면한 체 아벨을 향한 미움의 칼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으면서도 가슴속에 웅크리고 있는 죄는 살의를 가득품은 광기와 같은 분노입니다.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지금 나에게 충고하시는 건가요?

나의 제사를 받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편애하십니까?

아벨은 사람이고 나는 사람이 아닙니까?

나는 하나님과 관계없는 존재입니까?

나는 나 대로 갈 것입니다.

나를 간섭하시지 마십시요

아버지 아담에게도 이렇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토록 분노의 광기를 드러내며악한 칼을 갈아 대는 가인의 마음에는 왜곡된 지식들의 응축되어 폭발 직전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기에 가인의 지식과 하나님의 지식구조는 완전히 불일치하기 때문에 결코 소통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가인이 분노하고 악의를 드러내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께서 가인을 향한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노하는 가인을 외면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를 모른체, 아무런 관심이 없는체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나타난 심각한 위험의 상태를 직감하시고 그에게 다가가셔서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사악하고 더러운 타락한 지성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낮아지셔서 접근하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음성이 가인에게 들려지도록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직접 조명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으로 하여금 고통스런 삶으로부터 안전하고 자유로운 삶을 누리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선택과는 무관하지만 하나님의 품안에서 사는 날 동안 행복을 누리며 살도록 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가인은 이를 이해 할리 만무합니다.
자신의 존재를 한번만이라도 돌아본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인데 그렇게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습니다.

 

이왕에 솟구친 분노의 마음은 가인을 완전히 사로잡았습니다.  

죄악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 죄악을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 이전에는 불가능합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외면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아무런 생각을 갖지 못합니다.  

하나님에 관하여 바른 지식을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 있어서 나타나는 반응은 가인을 비춰보면 아주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다가가셔서 말씀하시지만 가인의 반응은 이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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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반항적인 대꾸는 오늘날 하나님께 예배한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하는 말과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범사에 하나님에 관한 존경과 감사를 말합니다.

십일조도 잘하고 새벽기도도 아주 잘합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정말 참 신자와 같습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곳에서 행하는 그의 모습들을 보면 기겁을 할 정도입니다.

직장에서는 폐쇄적이고 동료들과 교제가 전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을 비판하고 무시합니다.

자기와 생각이 다른 점들에 대해서 전혀 이해할 줄 모릅니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조금도 없습니다.

 

가정에서는 아버지가 아니라 폭군입니다.

아내에게는 사랑이 없고 유교적 전통을 물려받은 남녀 차별 사상이 뿌리 깊게 박혀 있습니다.

자식들에게는 언제나 고 자세이고심지어는 때리기도 하고 심한 말로 마음을 아프게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천사입니다.

봉사하는데 앞장서고, 확실히 구별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자기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불신자들과 어울리면 죄가 묻을까 두려워합니다.

그럼에도 어울리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처하면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며, 오히려 더욱 세상사람처럼 행동합니다.

도대체 본성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교회에만 있고 교회 밖에는 안 계십니다.

가인이 말하는 것처럼 지면에서 나를 쫒아내시온즉 주의 낮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그래서 교회에서는 거룩하지만 교회 밖에서는 막무가네 입니다.

물론 불신자는 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들의 완악함은 하나님에 관하여 전혀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가인을 대하시는 하나님을 한번 보십시요.

도저히 낮아지실 수 없는 상황에 까지 내려가셔서 가인의 눈 높이에서 말씀을 하시고 설득하시려고 하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랑하시는 자기백성들과 대화하시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자기 백성이라 하는 자들은 주님을 돌로 치려 달겨들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인의 모습은 의기 양양하고 당당하며 자신의 행동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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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은 아담과 하와로 말미암아 낳은 아들입니다. 

사단이 낳은 아들이 아닌 완전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은 완전히 사단의 모습을 가지고 마치 잔뜩 굶주린 사자가 먹을 것을 향하여 포효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 이런 모습이 가인에게 나타납니까?

그것은 바로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 욕정으로 말미암아 낳은 아들로서의 결과입니다.

가인이 의식에는 하나님을 이해하는 지식이 스며들지 못합니다.

가인의 지성에는 진리의 지식을 생성하지 못합니다.

정욕의 아들, 창세전에 그리스도안에서 계획되지 아니한 작정에 속한 아들이 아닌 비극이 가인의 지성에서 명확하게 나타나 그의 정체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정체를 아브라함 때에 이르러 분명히 보여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그를 데라의 집에서 불러내실 때부터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후에 사래의 몸종 하갈에게서 낳은 아들 이스마일이 있었는 대도 불구하고 네 씨에게서 낳을 아들에 네 후손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이후 30년이 지나서 100세에 아들 이삭을 낳았고그 아들을 약속의 아들이라고 하셨으며이 약속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가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이어 이스라엘을 세우시는 것이 아니라 이삭을 통해서만 이스라엘을 세우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있어서 이스마엘은 누구입니까?

그는 아브라함의 아들이 아닙니까?

성경이 보여주는 바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을 약속의 아들의 반열에서 재외하시고 유기자들의 반열에 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약속하시지 않았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계시는 여러분은 이 말씀이 여러분의 귀에 들려옵니까?

아니면 이 말씀이 선포되고 있는 중인데 여러분의 정신은 수면상태에 있어서 말씀이 들려지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는 이 말씀이 들려지게 하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듣지 못하도록 귀를 막아 버리십니다. 들을 사람만 듣도록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상황을 너무 많이 겪었습니다.

심지어 복음을 듣기위해서 자신 앞에 다가온 사람들에게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무수히 본 것입니다.(사도행전 28:26~27)

 

여러분은 창세기를 읽으시면서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스마엘과 이삭, 아담과 하와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을 비교해서 살펴보십시오. 한 가정이 더 있습니다. 이삭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을 반드시 비교해서 살펴 보십시오.

시간이 있거든 종이와 연필을 가지고 이 세 가정을 통해서 이들에게 있는 두 아들들을 살펴 보시기를 권합니다.

반드시 세세하게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는 버림을 받고 다른 하나는 택함을 받음이 보입니다.

가인은 어떤 입장에 속한 사람일까요?

그의 행동에서 정확하게 드러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대로이고 자기 마음대로 입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지성에서 지배력을 갖지 못합니다.

가인, 이스마엘, 에서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반응입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에 없습니다. 그들의 정체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유기자의 자식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비참한 존재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버림을 받은 유기자일지라도 가인이나 이스마엘에게 똑 같은 은혜를 베푸시고 동일하게 대우하십니다반대로 사람의 입장에서 아벨과 이삭보다 더 친근히 대우하십니다.

그들에게도 넘치는 축복을 한없이 충분하게 부어 주십니다.

이스마엘에게도 아브라함에게 약속 하신바와 같이 백성이 하늘의 별과같이 많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으며, 그들의 영토를 넉넉하게 주셨고, 에서에게도 마찬가지로 족장으로서 충족하게 살도록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쯤에서 우리는 예수를 은 삼십에 판 가롯 유다에 대해서 하신 말씀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좋을 뻔 하였도다

이 말씀을 잘못 들으면 예수님께서 가롯 유다를 미워해서 하신 말씀으로 생각하고, 예수님도 미움의 감정을 가지셨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는 그런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오히려 미워한 말씀이 아니라 그가 어떤 행위를 하며 어떻게 비참한 인생을 살게 될 것인지를 아셨기 때문에 그가 이 땅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그런 비참한 삶을 살지 않았을 것이라고 불쌍히 여기는 말씀이었습니다.

 

잉여(surplus)의 자식

 

저는 여러분에게 아주 무서운 주제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감히 말씀을 드리게에 너무 두려운 주제이지만 가인에게 있어서는 피할 수 없는 내용이기에 여러분의 신앙에 큰 도움이 되도록 이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듣는 중 여러분의 정체를 명확하게 이해하시고, 지금 여러분의 귀에 들려온 말씀이 누구의 말씀인지 인식하면서 여러분과 소통하시고 계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시며 들으시기를 권면합니다.

그 주제는 잉여(surplus)의 자식이라는 주제입니다.

잉여라는 말은 경제적인 용어입니다.

사용하고 남은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 계획을 세우실 때섭리하심에 있어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특별하게 계획을 가지셨습니다. 그 계획은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작정이라고 부르는 계획이고 이 계획속에 예비계획/Reserve Plan을 가지셔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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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유는 사람을 지으시는 계획에 있어서는 다른 피조물을 지으시는 것보다 더 완전한 존재로 지으시는 창조의 꽃을 계획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서 두 계획은 서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계획이지만 그 계획이 섭리를 통해 드러날 때 나타나는 결과에 따른 계획인 것입니다.
이는 작정(Main Plan)은 반드시 실행되어져야 하는 계획인 반면, (예비계획)Reserve plan은 반드시 실행되어진 계획의 결과에 따라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피조물인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무시무시한 계획입니다.

지음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지어질 사람에게 나타나는 행위의 결과에 따라 설계된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이고 이 과정에서 나타난 사람에 대한 필요 불가결한 계획에 대한 실행이 Main plan 으로 지음 받을 사람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는 계획은 사람을 완전하게 지으시고 그 사람에게 책임과 의무가 부여된 존재이게 하셨으며, 그에게 책임과 의무를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두시는 또 다른 계획이 바로 (예비)Reserve plan 이었던 것입니다.

Main Plan(작정)은 사람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하나님의 섭리하심으로 실행 되어져 창조 세계가 성취되어져 가지만예비 계획은 지음을 받은 사람의 결과에 따라 실행 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에 하나님과 언약에 의한 사람의 책임이 얼마나 무겁고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2:17 행위언약)

하지만 하나님의 작정 계획은 얼마나 완전 하신지 사람에 의해  (예비계획)Reserve Plan이 실행되었다 할지라도 Main Plan 어떤 영향도 받지 않으며, Reserve Plan Main Plan과 유기적으로 함께 성취 되도록 철저히 사람에게 맡겨진 것입니다. 여기에서 Reserve Plan에 속한 창조 세계에서 나타난 역사들을 가인과 아벨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서 두 개의 세계가 나타났는데 하나는 죄의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선의 세계입니다하지만 이 두 세계는 죄의 세계가 선의 세계를 단절되게 했습니다

만약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 계획이 단절되거나 죄로 말미암은 볼 꼴 사나운 상태로 이어져 버리는 상황이라면 하나님의 창조 계획은 완전히 파탄난 실패작이 될 것입니다.

실지로 가인과 아벨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나타난 현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 계획이 단절 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셋을 주심으로 창조의 세계가 유지되도록 하셨다고 생각하도록 합니다.

물론 이런 모든 것들이 Main Plan Reserve Plan이 함께 혼합되어 성취되어가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든 일들을 모두 아셨기 때문에 허락할 것은 허락하시고 새롭게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실 것은 이미 Main Plan을 가지실 때 유기적으로 성취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셋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의 새로운 계획이 그리스도까지 이루어지고 오늘 우리로 부터 종말에 이르러 완성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Main Plan에 설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Reserve Plan에 속한 사람들에 관한 계획은 본래 Main Plan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가인과 이스마엘 처럼 오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작정의 결과에 의해 맺어지는 열매로서 사람의 욕정에 의해 오는 결과들입니다. (여기에서 비로서 아담과 하와의 동침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이 욕정은 Main Plan에 속한 사람들에 의해서 나타나는/ 곧 하나님의 창조 계획에 의해 설계된 사람의 행위의 결과에 따라 예비 계획의 실행 여부가 달려 있다고/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버림을 받은 유기자들의 탄생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욕정이 낳은 타락과 죄의 열매인 것입니다하나님께서는 유기자들이 유기자들을 낳는 것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인 백성들이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유기자들을 생산하게 되는데가인과 아벨그리고 야곱과 에서를 통해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기자들의 탄생은 곧 하나님의 자녀의 죄로 말미암은 욕정의 결과이고그 결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을 낳게 되는 축복이 아닌비극적인 출생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비극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렇게 자기와 자기 형제들의 욕정으로 낳은 자녀들이 유기되고 버림을 받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일평생 슬퍼하는 인생을 살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형제의 죄가 곧 나의 죄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개인적인 사고를 가지는 것은 일종의 범죄와 같이 하나님의 율법이 의미하는 이웃과 형제 사랑을 위반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유기적인 형제 관계의 책임이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함께 부과되고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작정을 이해할 때만 충분이 이해되고 이것이 가인과 아벨에게서 보여지고 있다는 사실에 여러분은 놀라시게 될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자녀인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형제들은 다른 형제가 유기적 한 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지은 죄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유기적으로 함께 범죄 한 것이며아담의 죄가 곧 자신의 죄라는 사실을 지각되게 될 것입니다.

개혁교회의 (대표교리의 오류)

결국 주님께서 가롯 유다에 대해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그의 역할이 구속사에 있어서 중요한 일이지만 그가 자신의 행하는 그 일이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고 오히려 의로운 행위라고 생각하는 그런 판단을 갖게 하는 오류에 대해서 차라리 그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에게 있어서 유익하지도 안타까운 일도 아닐 것이지만 태어나는 것 그것이 그에게 있어서 불행이라는 비극적인 말씀을 밝히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가인이나이스마엘에서그리고 가롯 유다와 같은 존재라면 정말 나지 않은 것이 좋을 것입니다. 존재라는 영광을 누리고 비극의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 그 아픔은 하나님의 Main plan에 속하지 않은 정욕의 결과적 존재라는 점에서 슬픔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기자들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이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목적을 벗어난 하나님의 아들들이 정욕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있게 한 낳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라는 비극적인 사실을 오늘 우리가 깨닫게 됩니다

 

2. 아벨

그리스도인의 책임

이렇게 유기자들과 선택 자들의 개괄적인 의미들을 알게 되었습니다이 의미를 통하여 죄의 열매에 관한 본질적인 의미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죄의 열매란 죄로부터 행하여 지는 악을 통하여 얻어지는 결과들을 의미합니다

죄의 본질이 지성에서 생성된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지식이고, 그 지식은 본질적으로 무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무를 지향하는 지식이 숙주인 거처(사람의 영혼)로 지식을 지각하고 의지로 행하는 모든 행위를이라고 하고, 이 악의 결과들을죄의 열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가 욕정을 일으켜 가인을 낳은 것이나아브라함의 아내 사래가 자기의 몸종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주고 아들 이스마엘을 얻은 것이삭이 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 태중에 두 민족이 있었고,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게 되는 그 태생에서의 구별은 하나는 욕정에 의해 택자이고, 다른 하나는 동일한 욕정에 의한 유기자입니다. 이는 마 13:36~42 에서 예수께서 가라지와 곡식의 비유로 말씀하신 것에서 답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욕정을 빌어 택자를 얻으시려고 태를 열 때 사단이 가라지를 덧뿌리는 것은 작정과 예비 계획의 유기적 현상으로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의 열매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창조 계획의 Main Plan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일은 사람의 행위의 결과에 따라 허용된 Reserve Plan에 속한 결과들입니다그러므로 이런 일들이 발생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죄가 이런 결과의 열매들을 얻게 하였고사람의 선택에 의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결과가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Reserve Plan Main Plan의 열매들이 있도록 하신 것은 훗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심판하시는 것과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작정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을 은혜로 구원하시는 명분이 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이후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으로 창세전에 그리스도께서 예정하신 일입니다.(1:4) 이런 사건들이 있기까지 하나님께서는 Main Plan Reserve plan을 혼합하여 섞어 두셨으니사람으로서는 누가 Reserve Plan에 속하고 Main Plan 에 속한자인지 결코 분간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Main Plan 에 속하지 않은 별도의 열매들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신 것이 Reserve Plan 에 속한 사람들의 탄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복음을 듣고 예수그리스도를 마음에 믿어 하나님을 영접하고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인식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 깨우칠 필요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 태어났을 지라도 한 사람에게는 성령의 조명을 받은 대로 인도를 받아 행동하여 선을 행하고다른 한 사람을 성령의 조명을 받을지라도 자기지식으로 행하여 어두움에 방치된 상태로 살아갑니다.
누가 선택되었고 유기자인지는 하나님만 아시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 사이를 사람이 결코 판단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구분들을 가인과 아벨을 통해서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인은 성령께서 그에게 조명하여 주심으로 하나님을 만나 대화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지성에서는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바른 지식을 생성하지 않고, 초월적 존재에 대하여 자기 자신의 지식을 생성하여 그 지식으로부터 신에 관한 자기만의 지식을 갖게 되었는데 이것이 불신자의 신 지식입니다.

왜그럴까요?

가인이 하나님에 대한 신지식을 가지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만났다는 분명한 사실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본래 그는 예비 계획에 속한 유기자이므로 인류의 조상으로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하나님에 관한 자기지식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고, 모든 후손이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지식을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만나주시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지식을 가진 사람에게 하나님이 존재 하시다는 명확한 증거를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에게 적용된 선의 원칙

이들에게 적용되는 하나님의 선의 원칙은 가인에게 성령의 조명이 있을지라도 그 조명에 의해 강제적으로 지식을 가지도록 한 것이 아니라 오직 선택 받은 자만 성령의 조명을 적용시킬 수 밖에 없는 원칙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령은 모든 사람(불신자나 신자)에게 동일하게 임하십니다.

가인이나 아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 적용은 택자와 불 택자가 영혼의 지성에서 구별되게 적용되는 것이 가인과 아벨에게 나타나는 것으로 확인되는 것입니다.

 

제사에 관하여 가인의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자기의 마음의 열정에 따라 정성을 다해 드립니다. 그것은 순전히 자기 지성이 생성한 자기지식의 결과입니다.

아벨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제사에 대해서는 그들이 선택할 결과가 아니라 창세 전에 하나님의 선택의 결과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들 스콜라적으로 피 있는 제사만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해석으로 진리를 덮으려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벨은 당연히 성령의 조명이 적용되기 때문에 피 있는 제사를 드릴 수 밖에 없고, 가인은 성령의 조명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자기의 생각에 따라 제사를 드릴 수 밖에 없는 존재로서 구별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가인이 생성하여 지각한 신은 지엽적이고 사람으로부터 경배를 받으시는 존재로서 신입니다.5) 신은 사람들처럼 만났다가 해어질 수 있으며 무소 부재하신 신이 아니라 자기가 만난 그곳으로 부터 멀리 떠나면 만날 수 없는 그런 신으로서의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라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자의적이고 근본적으로 선에 대한 행동을 할 수 없고 죄의 행동만 하는 존재였다는 것을 가인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이후 이방인들에게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게 됩니다그들은 본질상 가인과 구별되지 않은 동일한 지식을 생성하고 지각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복음을 듣고 때가 이르렀을 때 변화된 모습을 보게 됩니다예전에 느껴보지 못한 지각을 갖게 되고 그 영혼의 지성에서 일어난 변화는 예전의 지식과 전혀 다른 지식을 생성하게 되었습니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게 되고,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고 자기를 지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기들의 존재가 하나님의 창조로 말미암았다는 분명한 지식이 영혼의 감성에서 지각된 것입니다.

변화되기 이전에는 자기가 경험적으로 혹은 자의적으로 생성한 자기지식으로 복음을 조명하였고그렇게 조명하여 얻은 지식으로 지각하였으며, 자기들의 생각대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들었을 때 자신도 알지 못하는 영혼의 지성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인하여 참 하나님에 관한 복음의 의미를 받아들이고그 지식에 대한 지각을 갖게 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고 해서 성령의 조명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모든 사람이 복음을 들을 때 성령께서 조명하시는 것은 분명하지만 적용을 받는 사람은 그리스도안에서 선택 받은 사람으로 오직 성령님 만이 아십니다.

 

최초 사람 가인과 아벨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의 욕정의 한 결과로 인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데하나는 성령의 조명을 받은 선택의 자식이지만 다른 하나는 성령의 조명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으로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셨고자녀로 삼아 주신 것을 알고 난 이후부터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볼 수 있는 지식을 가집니다지각된 놀라운 지식에는 자기 죄의 행위와 모든 하나님의 아들의 공통적인 죄의 행위에 대한 공동의 책임까지 지각하게 됩니다

본래 자신은 하나님의 자녀였으나자기가 죄를 범하여 세상에 사람들이 있게 했고우리의 죄가 영원히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세상에 있게 했다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유기적 관계 의식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아들인 인류의 조상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우리가 욕정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고우리가 욕정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비극적인 존재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유기자들이 세상에 있게 된 원인은 비록 직접적인 나의 죄로 인한 욕정의 결과가 아니라 하더라도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움을 받은 사람들인 나와 같은 형제들의 유기적 관계에서 공동의 책임에 의해 발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욕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비극적인 운명을 가진 가인과 같은 사람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아들은 무한한 책임을 느끼고 그 죄의 정욕으로 말미암아 비극을 부여 받게 한 책임에 대해서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벨은 바로 이것을 느꼈습니다.
자신의 영혼의 지성에는 성령의 조명하심에 의해 자기의 정체가 명확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인이 자신과 다르게 드리는 제사를 보고 의아했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아들이지 않은 결과에 대해서도 안타까움을 토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아벨은 가인의 정체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인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자기의 아버지 아담과 하와 그리고 자신을 포함한 모든 하나님의 아들들의 유기적 관계에서 공동으로 범한 죄의 결과라는 것을 인식하였을 것입니다.

아벨은 가인에게 다가가 죽기까지 사랑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아벨의 지성에 있는 지식은 (5:22)의 지식으로 채워진 사람입니다. 그 지식에는 정욕이 없기 때문에 욕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의 정체에 관해서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증거하고 있습니다.

아벨은 가인에게 이끌려 죽임을 당할 때 그리스도처럼 죽임을 당합니다.

하나님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요,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그리스도인입니까?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여러분들이 행한 일에 대해서 여러분들은 어떤 책임감을 가지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택함을 받지 못한 여러분의 정욕의 열매들을 향하여 죽기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정욕으로 말미암아 저들을 세상에 있도록 한 것이 씻을 수 없는 고통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저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을 향하여 분노하고 진노를 드러내는 것에 대해서 이해 하고 죽기까지 용서해야 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존재의 근원인 하나님의 Main Plan으로부터 벗어나 있었고하나님의 자녀로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단순히 하나님의 아들들이 죄를 통한 욕정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으로 인하여하나님의 아들들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들을 존재하게 한 것에 대한 미움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미워하는 것은 직접적인 욕정을 일으킨 당사자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을 원수로 생각하고 영원한 저주에 처해지는 비참한 상태로 존재하게 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을 원수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정확하게 바라보았습니다.
에베소서 2:11~17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여기에서 유기자들에게서 드러나는 미움의 본질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미움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원망과 그 원인을 있게 한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분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불신자들을 향하여어찌하여 너희가 나에게 분노하느냐라고 항변하고 자기의 무죄를 결코 주장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무죄를 주장할 지라도 그들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욕정의 결과로 말미암아 가인과 모든 사람들이 아벨을 죽임과 같이 미움과 질투와 시기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죽일 것입니다.

아벨은 자기의 죽임이 억울한 죽음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벨은 바로 이 지식을 알았을 것입니다.

아담 아버지와 하와의 욕정으로 인하여 낳은 형제인 가인,

하나님을 만나고도 알지 못하는 원인이

아버지 아담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죄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 죄는 자신도 가지고 있는 인류 공동에게 일어난 유기적 관계에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아담의 죄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아벨이 이와 같은 폭넓은 지식을 가졌다고는 단언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아벨의 행위가 의로울 뿐이라고 성경이 말합니다.  

성령께서 그의 영혼에서 조명하여 주심으로 인하여 그는 가인에게 무한한 사랑을 드러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벨의 피를 의로운 피라고 말합니다.

 

아벨은 자신은 죄를 짓지 않았으나 우리의 죄가 저를 있게 했고우리의 죄가 저들을 영원한 지옥으로 몰아넣게 했다는 사실을 지식으로 알지는 못한 것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나님 앞에 이르렀을 때,

이 지식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어 주시지 않으면 결코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라는 사실 앞에 크게 두려워 떨었을 것입니다. 자기의 피로는 결코 저들의 죄를 용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면 지금 지옥에는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여 눈을 들어 세상을 보십시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하나님의 아들들의 죄로 말미암아 이 땅에 수많은 사람들로 태어나 영원한 지옥의 고통의 세계에 빠졌으며또 빠져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에 대한 무한한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지옥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죄가 아니면 존재할 필요가 없었는데 아담안에서 우리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예비) Reserve Plan에 속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가인이 분노하여 아벨을 쳐 죽이는 것은 자기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린 아벨에 대한 미움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가인 자신이 깨닫지 못하거나 느끼지 못한 자신을 존재하게 한 미움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아들들을 향한 분노인 것입니다.

가인의 지성에서 생성된 지식은 자기 혼자 제사를 했다면하나님이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아벨이 제사를 같이 드린 것을 미워했고자기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린 아벨에 대한 열등감의 지식이 생성되었으며자기가 아닌 또 다른 비교되는 존재 있는 아벨에 대한 질투로서 눈에 보이는 아벨을 미워했지만 이렇게 의식되는 모든 지식은 사실의 본질에 대한 심각한 왜곡 지식입니다.

실지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가장 중요한 본질은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를 세상에 있게 하여 지옥으로 보내지는데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분노였던 것입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기쁨인 아벨을 빼앗아 감으로 인하여 다시는 하나님께서 아벨로 인하여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하려는 마음으로 그것을 실행하였습니다

이것이 모든 불신자들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질투의 화신인 분노와 같습니다.

자기를 이 세상에 있게 한 원인에 두고그 근원이 되게 하신 하나님에 대한 미움으로 방향을 맞추어 가는 것입니다.

원인은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욕정을 일으킨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있지만 그 책임을 하나님으로 향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아담 안에서 선택 자들인하나님의 아들들의 행위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하나님의 아들들의 죄의 행위인 욕정으로 말미암아 지옥을 향하는 수많은 유기자들을 있게 하고불신자들이 분노하고 미움을 일으키고 세상을 혼란하게 한 원인이 자신들의 온갖 정욕으로부터 생성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자손들을 낳지 않을 수 없습니다.

후손들은 낳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허락된 작정이며 결국 영원히 존재하려는 사단 자기자신의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에는 그들의 후손 가운데 선택 받은 자녀를 작정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지옥에 갈 수 밖에 없지만 필연적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야 하고 이 세상에 태어남으로 영원히 저주의 비참속에 고통을 당해야만 하는 영원한 멸망의 비참을 피할 수 없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의 아들들은 어떤 것이 욕정이고어떤 것이 선택의 결과인지를 알 수 있는 지식이 없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그들이 또 욕정을 일으켜 죄의 열매들을 얻는데 피할 수 없습니다. 죄는 하나님의 아들들에게서 제거된 것 같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섭리하심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욕정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작정에 의한 아들을 낳아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택함을 받지 못한 아들을 낳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그들이 자유를 누릴 권리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착각을 버리고 욕정에 불태워진 인생을 즐길 것이 아니라선택의 자녀들만 열매로 얻을 수 있도록보다 더 좋은 감성으로 만족을 누리는 관계에서 타락으로 인한 정욕을 이해한 그리스도인들은 부부간의 사랑이 반드시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사랑에도 철저하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동침하려면 반드시 하나님께 기도하고 도움을 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우리의 사랑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아들의 열매만을 얻도록말입니다.

 

여러분 자신들을 살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오기 전 4천년 동안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고 했으나, 택함 받아 구원을 얻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택함을 받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복음이 보내어지지 않았고, 그 태어난 모든 사람은 지옥의 고통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드디어 때가 되어 복음이 이 땅에 들어 왔고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우리는 우리 이전에 수많은 여러분의 친혈족들이 영원한 멸망의 비참을 겪은 결과적 산물입니다.

그들은 여러분들 때문에 지옥에 가면서도 이 땅에 태어나야 하는 운명입니다. 그들이 이 땅을 살아야 하는 필연적 사명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있고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듣지 못해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우리 조상들을 여러분 때문에 필수적으로 태어나게 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이세상에 있게 하여 구원을 받도록 브릿지 역할을 하신 조상들의 모든 분들에게 생명을 다 드려서 감사해야 합니다. 아니 죽기까지라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들이 우리곁에 계시지 않기 때문에 사랑을 표현할 수 없지만 우리 주위에 있는 우리 형제들을 사랑하되 성경이 말씀하신 계명처럼 죽기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 뿐만 아니라 복음을 듣고도 하나님을 믿을 수 없는 유기자들을 사랑하되 죽기까지 사랑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14절에는 우리의 예정은 창세전 그리스도안에서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의지하여 우리의 출생의 뿌리를 살펴 보십시요.

우리가 이 땅에 있기 까지 여러분 각자의 조상들이, 아니 이 땅에 들어온 저의 조상으로부터 38대가 되었습니다.

이 모두와 주변 모든 사람들이 저를 이 땅에 태어나기 까지 그들도 역시 생명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었어야 합니다. 저를 계획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말입니다.
저는 이것을 볼 때 도저히 개혁주의 예정론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지속적으로 성경이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들은 너를 위해 이 땅에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필요적 존재라는 사실에 순복 하게 될 때 내가 세상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 선택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집약된 주제에 몰입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과 관계된 사람들, 하나님의 작정을 살펴 보세요.

왜 우리가, 우리를 정욕의 열매라고 말합니까?

 

주님께서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버려졌을 때, 우리들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대신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있게 된 우리의 형제들인 유기된 자들을 자기의 친자식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그들을 사랑해야만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실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누가 유기된 자들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자기도 욕정의 열매들이지만 그들을 구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을 일단 하나님의 자녀로 여기고 그들을 사랑하되 죽기까지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들이 침 뱉고 조소를 일삼으며이루 형용할 수 없는 비난의 화살을 쏘아 대고 욕을 할지라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할 일은 오직 한 가지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 해야만 합니다.

극한의 상황에 이르러 그들이 우리를 버리고 죽음에 이르게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죽어 숨이 끊어져 가면서도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들을 이 세상에 있게 한 죄의 정욕을 일으킨 것에 대한 용서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벨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을 죽이는 그 죽음으로 속히 천국에 이른다면 우리에게는 실지로 커다란 유익입니다

우리가 죄에 더욱 물들이지 않고 조금이라도 깨끗한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설 수 있으니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천국을 속히 주어지도록 그들의 비난과 분노가 일어나도록 해서는 안되는 것이지만 우리가 그들의 분노에 일향 용서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덮어줄 수 있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이고 그리스도인 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우리가 저들을 있게 한 그 책임을 결코 벗어버릴 수 없고그들이 이 세상을 살고 이 세상을 떠나는 그날에 하나님의 아들들의 죄로 말미암아 태어나지도 않아도 되는 인생으로 태어나서 지옥을 가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그들이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죄의 인생을 살아야 하는 슬픈 인생을 살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여러분이 이해한다면 그들을 향하여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명확하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있게 한 저들을 죽기까지 사랑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계명으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라고 하셨고, 바울과 사도 요한은 형제를 사랑하기를 죽기까지 하라고 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