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입니까?(4)
인간의 상태
지난주 이 내용을 마무리 하려고 무척 신경을 쓰고 작성을 했으나 너무 분량이 많아 부득이 한주간 더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지난주에 이어서 “아벨의 죄가 가인으로 하여금 아벨을 죽이게 했다”라는 설명을 마치고 계속해서 “자기 몸을 버리신” 에 관한 말씀을 더 진행해야하는데 그 분량이 아주 많을 것 같아서 한번에 다 마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몸을 버리신 대속적인 죽음에 관한 희생에 관한 부분이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아주 초보적인 지식을 설명합니다. 그래서 분량이 아주 많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초보적인 지식이라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반드시 이 지식을 알아야만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자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그런 지식은 아닙니다. 이 지식이 아니어도 믿음만 있으면 충분히 구원에 이를 수 있으나, 이 지식은 신자에게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지고 신앙의 삶에서 견고한 진을 가지는 휼륭한 지식이며, 이 지식이 주는 유익은 아브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을 때 말씀을 들은 것과 같은 결정적인 소명의 확신를 주는 아주 큰 유익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앞에서 이 지식을 말하려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단순히 한 사람의 가치있는 희생이 아니라 죽으셔야 하는 분명한 진리의 지식으로 여러분이 크게 확신을 갖도록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임무는 아주 중요합니다.
그의 임무는 “성도를 설복시키지 않으면 자기가 설복을 당할수 밖에 없다는 전투적인 사명을 가지고 정해진 단에 서게 됩니다”. 전투적 사명을 가진다는 것이 성도를 설복하고 이기고 승리하기 위한 단이 아닙니다. 그들의 명예와 영광, 학식과 능력, 그리고 현란한 지식을 드러내라고 세움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을 때 그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습니다. 따라서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 그 단에 선 것입니다. 그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들에게 전하여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는 것이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단에 선것은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그 뜻을 성도들이 분명히 인식하고 그 뜻으로 말미암아 설복을 당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선 단은 아무나 침범할 수 있는 단이 아닙니다.
오직 보냄을 받은 사람에게 허락된 단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대사가 되어 말씀을 듣는 사람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진리를 아주 쉽게 풀어외쳐야 합니다. 그는 그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으로부터 음성을 듣지 않으면 안됩니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는 그가 깊은 영성으로 하나님을 접촉하는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환상을 경험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그 진리에 깊이 잡혀 있을때 그 진리를 충분히 인식하고, 이해하고, 납득하고, 그 진리로 인해 자신이 충분히 감화를 받고, 자신이 그 진리대로 어떻게 살 것인지를 충분히 이해할때 그는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설교자가 이렇게 하나님을 충분히 만났을 때 그가 외지는 말씀은 진리가 되지만 그 진리는 성경과 같이 원초적인 진리가 아니라 성경에서 파생된 진리의 지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자기가 외치는 그 진리의 말씀에 반응 할 때 까지 외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의 목적은 어떻게든지 진리를 전하여 여러분을 설복시키고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알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 때 여러분의 마음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지각하는 감정이 생기고, 여러분 자신이 무한이 연약하다는 확신을 갖게 되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음성을 듣기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느낌을 갖고, 당장이라고 하나님께 여러분 자신의 상태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진리의 말씀을 듣고 성령께서 조명하심으로 인해 하나님을 만나는 지각을 가질때 여러분의 입은 하나님을 향하여 열리게 됩니다. 영광을 노래하고,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감사가 저절로 나오고, 여러분의 죄를 사하시려고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예전에 가지지 못한 큰 감정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행동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설교자가 아무리 외쳐도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한다면, 그 설교자는 자기의 임무를 다하지 못한 슬픔으로 인해 크게 눈물을 흘리고,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더욱 회개하고 슬퍼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단을 내려와서 눈이 해어지기까지 진리를 찾으려고 진리의 서고를 향하여 발걸음을 옮기고 자기에게 맡긴 양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전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인해 더욱 씨름을 할 것입니다.
견디기 힘든 고독을 느끼며, 정욕이 이는 밤을 살을 꼬집으며 홀로 지새고, 진리를 올바르게 설명하기 위해 몸부림을 칠 것입니다. 그렇게 피나는 노력으로 진리를 찾으면 돌아오는 단에서 매마른 대지위해 쏟아지는 단비와 같이 진리를 솓아낼 것이며,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면 그 두렵고 두려운 그자리가 형장의 틀과 같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런 일이 오늘날 교회에서 일어나지 않는 것을 개탄하면서 심한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에서 진리가 선포되지 않는데 어떻게 교회안에서 성령이 역사하시며,
인간의 삶의 윤리와 도덕과 인간성을 부추키는 설교가 있는 곳에 어떻게 하나님께서 거하시겠습니까?
아마도 하나님께서 예배드리는 장소에 오셨다가 “내가 주소를 잘못 봤나”하고 그 예배당을 나가실 것입니다.
저는 이런 예배당에서 행해지는예배를 너무 많이 참석해 봤습니다.
하나님께서 오시지 않아서 인간들이 자기들끼리 아직 오시지 않은 하나님께 미리 예배를 드리고는 시간이 되었다고 다 흩어져 버린 예배당에 조용히 다녀가시고는 교회를 사랑해서 눈물을 흘리는 연약한 사람들에게 부스러기 은혜만을 주실 뿐입니다.
저는 지난주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회개라는 것을 말했습니다.
회개는 두가지 면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영혼에서 일어나는 작용으로서 하나님께서 외치시는 말씀을 성령께서 조명하심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그 말씀의 지각을 가지고 말씀대로 행하게 하는 작용적인 것과 둘째는 성령의 작용에 의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갖고 반응하는 것입니다. 전자는 영혼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후자는 전인으로 일어나는 지식으로 인하여 드러나는 행위입니다.
사람은 타락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영혼의 지성에서 생성하는 모든 지식이 죄의 본질입니다. 지식은 사람으로 하여금 활동하게하는 원인이기 때문에 지식이 없으면 활동하지 못하고 활동하지 못하는 존재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식물과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나 식물과 같은 존재가 지식이 없이 활동 할 때는 감각과 감정에서 나타난 반응일 뿐입니다. 동물이나 짐승들은 단순히 육적인 감각과 감정에 반응하여 활동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지식에 의해 활동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식이 진리일 경우 그 사람의 행위는 하나님의 뜻에 아름다운 행위를 드러냄으로 활동하는 존재 자체가 아주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아닌 행위는 행복하지 못하거나 행복을 느낀다 하더라도 일시적 만족을 줄 뿐 영원하지 못합니다.
행위는 감각적인 행위와 지식을 기반으로하는 행위로 나누어 질 수 있는데 전자는 동물들의 행위를 의미하고 후자는 사람의 행위를 의미합니다.
사람의 불순종은 지성에서 생성한 불순종의 지식을 영혼의 감성이 지각을 가지고 의지를 통해 육체의 마음에 반영하여 육체로 행위를 드러내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체가 행위를 하는데 있어서 감각에 의존한다면 그 행위는 동물적인 행위이고 영혼의 감성에서 지각한 지식에 의존한다면 그 행위는 사람의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감각에 의존한 행위를 하도록 지으신 것이 아니라 지식을 의존하여 행동하도록 지으셨습니다. 사람의 모든 행위는 지식에 있는 것이지 단순한 감각에 의해 행위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불순종은 영혼의 지성에서 이미 생성한 지식이지 단순한 감각에 의해 드러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죄는 영혼의 지성에서 생성한 지식이고 그 지식에 관한 감성에서 지각을 가지고 의지로부터 마음에 반영하여 지식대로 행위를 드러내는 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인’은 법정적인 선언일 뿐만 아니라 상태를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롬 3:28)”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죄를 짓지 않은 처음 지음을 받았을때 첫 활동의 시작을 어떻게 하는지 성경의증언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처음 지음받은 사람에게 지식이 없고, 생성되지도 않습니다. 사람은 지음을 받은대로 있고 지식이 없으므로 활동하지 않은 생태로 있으므로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 어떤 지식이든지 주셔야 했습니다.
첫 말씀이 있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말씀하시지 이 말씀이 사람이 처음 듣는 지식이었고 처음 접한 지식이었습니다.
그럴 지라도 이 말씀이 하나님께서 어떤 의도를 가지시고 말씀을 하시지 않았다면 그 말씀이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 새겨질 지식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실지로 아담이 지음을 받았을 때 자연에서는 수많은 소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혹시 눈을 열고 있었다면 하늘을 보았든지 아니면 자연을 보았든지 그의 눈에는 사물이 보였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아직 활동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저 만들어진 상태로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영혼의 지성이 아직 작용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사람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는 없지만 감각을 가질수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 말씀이 귀로 들려지고 영혼의 지성에 전달되어지고 새겨졌습니다. 이 말씀은 처음 사람에게 들어온 지성의 작용을 일으키는 말씀이었고 지식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범죄하고 타락한 사람들의 영혼에 그대로 남겨져 있어서 모든 사람이 이 말씀의 결과들을 드러내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영혼에 처음 들어왔고, 사람은 가장 먼저 이 지식을 지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처음 지식을 접하였을때 사람은 지적인 열림을 감각적으로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어린아이가 자라서 세상을 향하여 지각을 갖는 그런 지적인 감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때 비로서 사람은 세상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육체에 감각된 모든 감각을 지식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지식으로 인하여 사람의 눈이 열렸으며, 눈은 수많은 세상의 사물들을 감각으로 보고, 그 본 것들을 영혼의 지성에 표상으로 반영하며, 지성은 눈으로 본 그 표상들을 받은것으로 마무리하지 않고 그것을 인식하기 위해서 지식을 생성합니다.
본래 사람이 지음을 받았을때 모든 감각들을 자연적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모든 지식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감각들을 표상화하여 그 표상을 인식할 수 있는 지식을 생성하여 지각을 가진후 인식하도록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이 내용은 깊은 사고를 요구하기 때문에 많은 반복으로 이해되도록 하겠습니다.) 곧 자기 안에 없는 지식은 육체가 오감을 통해 감각하여 표상을 가진다 하더라도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흔한 말로 알지 못하거나 기억되지 않거나 감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쳐 지나가버린 감각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육체의 오감을 통해 감각된 감각을 표상화하여 영혼의 지성에서 지식을 생성하고 감성에서 지각을 가진 다음 인식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식이 없이는 어떤 행동도 할 수 없고 행동하는 모든 것은 지식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므로 사람이 행하는 모든 행동이나 인식은 반드시 지식에 의해 감성에서 지각을 가짐으로 행동으로 나타나거나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최초 사람 아담은 아무런 지식을 가지지 못하였을때, 지음을 받은 생태에서 하나님의 말씀하시고그 말씀을 들으므로 비로서 활동하는 존재가 되었고, 그 활동을 통해 감각을 가질 수 있었으며 모든 감각은 표상화하여 영혼의 지성에 반영하여 감각에 대한 지식을 생성하고, 생성된 그 지식을 영혼의 감성에서 지각을 가진후 한편으로는 지성에 저장하고 한편으로는 지식에 의해 반응하는 활동을 하도록 사람의 마음에 보내어져 반응하는 활동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이 사물에 대하여 보거나 만지거나 듣거나 맛을 보며 냄새를 통한 감각을 가지면 그 감각이 표상을 가지고 표상을 영혼의 지성으로 반영되면 즉시 지식이 생성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을 가지지 않았던 경험되지 않은 감각은 지식이 없으므로 인식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인식하기 위해서 지식을 생성하는데 있어서 자연적으로 지식이 생성되어 인식을 가진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로서 진화론자들이나 자연주의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사람은 인식하는 능력에 있어서는 초자연적이며 신적인 완전한 존재로 표현됩니다.
다시말하자면 지식을 가지지 않은 표상에 대해서도 자연적으로 지식을 생성하고, 그 생성된 지식은 개개의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생성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동쪽에 있는 사람이 서쪽에 전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생성하는 지식과 동일한 규칙을 가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실지로 그렇게 지식은 생성되고 있습니다.
다시말하자면 사람이 인식하는 구조적인 형식이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람의 구조적인 인식체계가 동일하게 적용되어지고 있는가?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동서양의 사람이 서로 다른 환경과 조건에 의해 존재를 시작하고서 동일한 인식체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이것이 바로 사람이 객관적으로 사물을 인식하는 체계의 조직과 구조를 조직하심으로 그 조직에서 지식을 가지고 지각하며 활동하는 것이며, 그 모본이 된 지식이 최초로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 주어짐으로 사람이 인식할 수 있었고, 지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라는 말씀이 귀를 통하여 감각되어지고 영혼의 지성에 표상으로 반영되자 그 지식이 영혼의 지성에 지식으로 새겨졌고 사람은 곧 눈을 열고 세상을 감각할 수 있었으며, 그 감각에 의해 표상이 영혼의 지성에 반영되어 작용하자 사람이 활동하는 존재로 생존을 시작한 것입니다. 이제 눈으로 보거나 듣거나 감각을 가지면 표상이 영혼의 지성에 반영되고, 영혼의 지성은 반영된 표상에 대한 지식을 얻기위한 작용이 일어납니다.
이때 영혼의 지성에서는 표상에 대한 지식을 자연적으로 생성하지 않는다면 그 방법이 무엇이냐?
어떻게 지식을 생성하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자기의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했습니다. 물론 이 형상은 외형적인 모양뿐만 아니라 내면에 영혼의 구조적인 형태도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중요하게 하나님의 형상은 외형적인 모양보다 영혼의 구조에 더 큰 위치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영적인 존재를 드러내는 데 있어서 전적으로 영혼의 구조에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는 사람 영혼의 중심인 지성에 하나님의 형상의 중심을 차지하도록 하였고, 지성에 사람이 지식을 생성할 때 표상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가지신 지식을 사람의 인식 수준으로 맞추어 두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감각을 통하여 표상을 가지면 그 표상에 대하여 조명하여 줌으로 조명을 통하여 지식을 생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표상을 조명하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안에 있는 분유 지식인 것입니다.
본유지식과 타락
구체적으로 사람이 어떤 사물을 보는 감각을 가지면 사물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물을 인식하려면 사물에 관한 지식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 지식은 영혼의 지성에 있고 지성은 본 사물에 대한 지각을 가진후 감각을 통해 육체의 감각에 반영함으로 인식을 가지고 표현이 가능한 지식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물을 이해하기 위해서 사물 자체를 영혼의 지성에 넣는 것이 아니라 표상을 영혼의 지성에 반영하고 반영된 표상을 이해하도록 지식을 생성하여 감성에서 지각을 가지고 마음에 반영하면 육체가 감각을 가지므로 인식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사물을 인식하는 복잡한 과정을 통해 영혼이 생성하는 지식으로 인식하는데 이때 생성되는 지식은 사람이 자연스럽게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안에 있는 근본적인 지식 곧 본유지식의 조명에 의해 생성하는 것입니다. 이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되었으나 하나님의 지식과 동일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으나 하나님의 지식으로부터 생성되어 사람에게 주어진 지식으로, 피조물인 사람에게 충분히 완전한 지식으로 본유지식이라고 합니다. 이 지식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부여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가 직접 사람의 지식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이 조명하여 주고, 이 조명에 의해 사람이 자기의 지식을 생성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부여된 지식에 의해 행위로 반응하는 존재라면 사람으로서의 자율성을 현저히 침해하여 궁극적으로 사람의 모든 행위는 자율성을 상실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사람을 완전한 자율성을 가진 존재가 되게 하기 위해서 조명에 의해 스스로 지식을 생성할 수 있도록 하시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가 아는대로 완전하시며 충만하십니다.
지식에 있어서도 완전하시고 충만하시며 부족합니 없습니다.
이런 사람의 표현은 진리이면서도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지극히 인간적입니다. 사람은 완전하신 하나님을 사람의 지식으로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완전하심은 하나님만이 표현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완전한 지식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피조물의 한계에서의 완전한 지식으로 사람에게 적용되는 완전한 지식을 별도로 주셔야만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안에 있는 지식으로서 본유지식입니다. 이 본유 지식에는 하나님에 관하여, 하나님에 대해여, 창조에 관하여, 사람 자신에 관하여, 이 네가지의 지식이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사람으로 완전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조명해주는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지식을 조명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진리의 지식을 생성하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부여된 지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타락은 하나님의 형상안에 있는 본유지식을 상실하게 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상실하여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하나님에 대하여 어떠한 지식도 가지지 못함으로 하나님께 대한 종교와 경배를 거부하고, 창조에 관한 지식을 가지지 못하므로 창조에 속한 모든 지식을 잃어버렸고, 사람 자신에 관한 모든 지식을 상실함으로 사람과 자신의 존재조하 알지 못하는 비참한 상태가 된 것입니다.
결국 사람은 모든 것을 알지 못하는 무지의 상태의 사람이 되었고 지적인 어두운 상태가 되고 만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상태가 현저하게 무지한 상태의 사람이 되어 버림으로 인해 지성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중대한 사태가 발생한 것입니다.
타락 이전에는 육체의 오감으로 감각되어 영혼의 지성에 반영된 모든 표상에 대하여 지식을 생성하여 인식을 가지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안에 있는 본유지식의 조명함으로인하오 탁월하고 완전한 진리의 지식으로 생성하여 영혼의 감성이 가진 무한한 기쁨과 즐거움의 지각을 가졌지만(이는 앎이라는 기쁨이다.), 타락 이후에 즉시 표상에 대한 조명이 사라지고 어두워짐으로 인하여 무지가 들어왔고 영혼의 감성은 극도로 불안을 경험하고 무서움과 혼란, 그리고 형용할 수 없는 많은 무지들로 인한 어두움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표상에 관한 인식을 갖지못한 무수히 많은 감각들은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방향을 잃은 나침판과 같이 혼미한 상태가 되고 그의 영혼에는 무지가 엄습하여 온통 어둡게한 것입니다.
그결과 사람은 스스로 죽음의 결말을 맞이할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람의 타락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완전하게 지으시고 그를 에덴동산에 이끄시고 그곳에서 땅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동산의 각종열매는 내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6~7)” 라고 명하셨습니다. 이것을 행위언약 금지언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행위언약을 주시는 것은 사람이 자율적인 존재로 지음을 받은 것을 확실히 하신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감각적 존재로 사는 동물같은 존재가 아니라 영혼의 지성에서는 조명하는 지식에 의해 무한한 지식을 스스로 생성하고, 생성되는 지식에 따라 감당할 수 없는 무한한 일들을 능히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이처럼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지식을 스스로 생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율적인 존재가 됨을 아시므로 오히려 이런 가능성이 얼마든지 스스로 선을 이탈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창조가 원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 올 것을 아셨기 때문에 이런 결과에 대하여 사람이 스스로 더욱 완전함으로 이르기를 원하셔서 선을 이탈하지 않도록 별도의 명을 하심으로 사람이 스스로 그 명하신 명령의 지식에 의해 더욱 선에 이르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은 완전한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모습과 내면의 형상을 닮은 존재였습니다. 그 형상이 지식을 스스로 생성할 수 있도록 지음을 받음으로 인해 하나님과 같은 존재에 이르기 까지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능력을 아셨기 때문에 이들이 선을 이탈한 행위들로 인하여 죽음을 맞이할 경우를 대비해서 별도의 장소를 만드셨는데 그 장소가 지옥입니다. 지옥은 사람의 영혼이 불멸하도록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범죄함으로 인하여 육체와 분리된 영혼을 관리하기 위한 처소입니다. 이 처소의 필요성은 영혼의 기능에 관계가 있습니다. 영혼은 육체와 분리되면 물론 부활을 가지고 육체를 덧입는 과정이 있지만 이런 과정을 당연히 겪는 것이기 때문에 생략하고 그 기능으로 인하여 타락한 영혼의 지성에는 본유지식을 상실하여 진리의 지식을 생성할 수없기 때문에, 영혼은 자기 지성에 있는 지식들간의 상호 관계를 통해 새로운 지식을 생성하게 됩니다. 다시말하자면 지성에 있는 지식이 어떤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지식을 생성하는데 지식들간의 상호 조명으로 인해 전혀 기대하지 않은 지식을 생성하고 결국은 영혼이 의지를 행할 수있는 지식도 생성할 가능성을 배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영혼들로 인해 하나님의 피조 세계는 더욱 혼란스러울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불멸하는 영혼들이 지성적인 활동을 갖지 못하도록 부득이 지옥을 만드셔야만 한 것입니다.
성경은 이 지옥을 불타는 곳, 곧 불 못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눅:16:24,계 20:14, ) 이 불못의 불은 어떤 불인지는 알 수 없느나 영혼이 불의 온도의 감각을 가질 수 있는 불입니다. 사람이 생존하는 동안에는 육체를 통한 감각을 가졌으나, 육체가 죽어 흙으로 돌아감으로 더이상 감각을 가질 수 없으므로 영혼이 느낄수 있는 불을 만드실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지옥의 불이고 사람의 이성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의 고통으로 하여금 영혼이 지식을 생성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지각을 가지지 못하도록 고통이 주는 정도는 결코 사람이 감당하기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이런 고통에 가두어 둠으로 살아 있을때 육체의 오감이나 선재하는 지식에 의해 가졌던 모든 지식들이 죽음이후 영혼에서는 더이상 추가되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성령과 진리로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통해 구원을 받은 신자는 어떻습니까?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의 영혼에서 일어난 일을 기억할 수 있습니까?
타락의 근본을가진 사람 영혼의 지성에는 처음 지음을 받았을 때 주어진 본유지식이 없으므로 어두워져 있고, 오직 타락 이전에 가졌던 지성이 생성한 지식만이 본유지식을 대신하여 조명하는 상태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타락한 사람은 본유지식의 조명을 받지 못함으로 결코 진리의 지식을 가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최초에 지으신 목적대로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의 상태는 앞에서 말씀을 드린 것처럼 하나님에 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창조에 관하여, 사람 자신에 관하여 아무런 지식을 가지지 못함으로 모든 지식에 대해서 어두워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모르고,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께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창조된 모든 만물에 관한 아무런 지식도 없으며, 자기 자신에 관하여도 전혀 모르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무지하고 어두움에 싸여 있는 존재인 사람의 본성입니다.
본유지식을 잃어버린 사람은 이제 모든 사물과 육체의 감각에 대하여 스스로 지식을 찾거나 생성해야 합니다.
이 사람에게 하나님을 말해 보십시오. 그가 하나님을 알수 있겠습니까. 설령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식이 없는데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람은 어떤방법으로도 하나님을 알 수 없을 뿐만 아라 하나님에 관한 아무런 지식도 가지지 못하고 설령 누가 하나님을 가르켜 준다 할지라도 받아들이거나 결코 스스로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받아들이며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를 베푸셔야 되는 일입니다. 어두움에 처해 있고, 무지에 빠져 있으며 구원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다가 오셔서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영혼의 지성에 말씀대로 새겨주시거나, 아니면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 성령께서 그 복음을 조명하심으로 인하여 지성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생성하는 기적이 일어날 때 사람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이렇게 생성된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는 3가지의 반응이 따라옵니다. 즉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해야하는가, 그리고 자신의 상태가 무엇인가? 그리고 만물이 어떻게 지음을 받았는가에 관한 확신이 동반되어 지식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사람을 찾으셨을때 말씀으로 찾으십니다. 그래서 사도가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말한 것이며, 말씀이 택한 사람을 찾았을 때 진리의 성령은 역사하셔서 그가 듣고 있는 복음을 조명하심으로 지식을 생성하므로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직까지 한번도 듣지 못한 말씀일지라도 그가 복음을 듣고 있을때 그 복음에 관한 들은 말씀을 표상화하여 자기의 지식으로 조명하려고 하지만, 자기에게 이미 가진 선재한 지식에는 복음의 말씀을 조명할 수 있는 지식이 없으므로 복음을 들을 때 자기 임의로 지식을 생성하여 이해함으로 이런 이해는 결코 믿음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복음을 들을 때 조명하시면 성령은 복음을 이미 알고 계시므로 그 아는 대로 지성에서 지식을 생성하고 지각을 갖게 함으로 복음을 본래의 의미대로 받아들이고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영혼에서 일어난 지식을 통하여 믿음을 일으키는 작용은 어떤 지식이 들은 말씀의 표상을 조명하느냐에 따라 믿음이 일어나기도 하고 일어나지 않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을 이 말씀을 전할 때 성령께서 각 사람의 영혼에서 조명하져 주심으로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말씀대로 조명을 받아 진리의 지식을 생성하여 지각을 가지므로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영혼의 지성에서 일어나는 작용을 이해하고 어떻게 지식을 생성하는지 이해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일은 사전에 여러분이 어떤 준비를 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아무리 노력을 할 지라도 여러분의 영혼의 지성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조명이 일어나도록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말씀을 전하는 자가 복음의 참된 진리를 전파할 때 성령께서 각 사람의 영혼에 그 진리를 조명하는 것이지, 진리가 아닌 비슷한 복음을 성령께서 조명하셔서 믿음을 일으키는 일을 결코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에서는 모두 성경을 읽고 성경을 강해하고 있습니다.
설교자들은 성경을 강해하고 성경을 읽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의미들을 풀어 설교하고 있습니다.
설교자들이 성경을 강해하고 설교한다고 해서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성경을 읽고 성경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가만히 들으면 진리와는 전혀 동떨어진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한결 같이 말합니다.
여기에서 말씀을 전해도 여러분들이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준비된 마음으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요, 말씀을 들으려는 뜨거운 마음이 없으며, 정성도 없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는 열린 마음으로 오지 않았기 때문에 제가 이렇게 외쳐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다고 선포합니다.
그 선포를 들을 때 우리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절망스럽습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전혀 준비 되지 않은 상태로 왔으니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 이름으로 감히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이 어떤 상태로 왔든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을 만나면 분명히 하나님에 대하여 어떻게 할지 그 지식이 여러분의 지성에서 생성되어 여러분을 새로운 사람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준비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고 난후라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러분이 어떻게 왔든지 전혀 걱정 하지 마세요,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은혜를 베푸시려고 말씀을 보내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여러분은 노력하지 않았으나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은혜를 베푸실 준비가 다 되어 있습니다. 이제 설교단에서 진리만 선포되면 성령께서는 선포되는 진리를 여러분의 영혼의 지성에 조명하셔서 거부할 수 없는 말씀으로 여러분을 사로잡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사람의 노력으로 받아지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전해지는 그 곳에 성령께서 찾아오심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진리가 있는 곳으로 가십시요.
산상수훈을 듣던 수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정리하고 목욕 제개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왔을 지라도 그곳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께서 심판을 받으실때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외쳤을 것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만나기 위해 왔고 성령께서 그들의 영혼에 조명하였는데 그들은 그것에 관한 지각을 가지지 못하였습니다.
아주 슬픈일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강단에서는 오직 진리만 선포되어져야 하고 하나님께서 교회에 복을 주시는 것은 설교자로하여금 진리를 전하게 하는 것이 복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그자리에 있기를 원합니다.
자 이제 우리가 원하는 말씀을 듣기를 원합니다.
저는 이 시간 성령께서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에게 조명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들으십시요.
사도 바울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자기 몸을 버리셨다”고 합니다.
누구를 말합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저는 지금 그분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가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여러분 가운데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시는 분이 이미 많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다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어떤 분은 이미 알고 있는 그분을 왜 소개하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보십시요.
오늘은 길었습니다.
그래서 다음으로 넘겨 그리스도인입니까?(5) 에서 계속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