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앙

그리스도인입니까?(7)

생명있는 신앙 2012. 7. 5. 11:23

그리스도인입니까?(7)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밖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하는 것이라( 2:2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지난 주에 이어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예수께서 사울에게 하신 말씀이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바울 사도가 하나님 아들을 믿는 믿음이라는 의미는 바로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는 말씀에서 사고가 시작 되어질 것입니다.

이것은 중생과 아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중생이란?

하나님께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8:3, 4:4, 4:4)”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사람을 활동하게 하실때 말씀으로 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세기 1:28)“ 이 말씀은 사람에게 처음 들려온 지식이고 사람으로 하여금 지성이 처음 지식을 생성하게 하는 감각입니다. 흔히들 사람들이 간과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흔히들 가볍게 생각하고 지나치며 미처 생각하는 아주 중요한 내용을 살피지 않고 말씀의 뜻을 이해하려는 실수들에 의해 진리를 왜곡하거나 아직 진리에 이르지 못한 부족한 지식들을 말하는 경우들을 보게 됩니다. 창세기 1:28의 말씀이 그렇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지음을 받은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그다지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지나칩니다. 그러나 진리의 동산을 거닐고 진리의 열매들을 모아다가 사람들의 영혼에 양식으로 배불리게 먹이려면 동산안에는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한발을 내 딛어도 사람들의 영혼을 만족 시키기에 풍족한 진리들이 산재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우둔함은 진리의 동산안에서 하나의 진리의 열매도 발견하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에 나와서 세상 지식으로 사람들의 영혼을 채우려고 헛수고를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지나치는 진리에 대해서 제가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라고 말씀하신 의미를 분명히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에는 엄청난 비밀들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조용히 가슴을 열고 말씀을 묵상해 보세요.

영혼의 지성에 말씀을 반영시켜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 보려고 하십시요.

하나님과 사람이 보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사람은 지음을 받았으나 아직 활동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숨만을 쉬고 있는지 배만 오르락 내리락 하는 모습을 상상하십시요.

그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보십시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처음 지음을 받은 아담이라고 생각하십시요,

하나님께서 지음을 받은 여러분에게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반응이 나타나지요?

여기에서 두부류의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한 부류는 그 말씀을 두 귀로 들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 부류는 말씀을 듣지 못했다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너무너무 중요한 지식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이 지식만큼은 반드시 기본적으로 이해하여야 된다고 권합니다.

이 지식을 알지 못하고 결코 모든 성경에서 많은 부분의 깊은 진리의 지식을 얻어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진리의 지식을 얻은 것 같지만 그 지식이 아직 진리에 이르지 못한 지식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서는 1,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 2,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가?, 3, 본문의 말씀에 대한 지식은 어떻게 사람에게서 생성되었는가?라는 문제를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살펴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사람은 피조물입니다.

사람들은 창조주와 피조물인 사람과의 관계와 대화가 아주 자연스러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 대화 하였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들이 참 하나님을 만났는지에 관하여 대화를 해 보면 신뢰할 수 없는 주장들을 늘어 놓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 그들이 만난 하나님은 자기 안에 있는 자기 지성이 생성한 지식의 하나님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존재론적인 인식에 있어서 아주 무지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대로 하나님은 영이시니(4:24)’라고 말씀하신 의미를 살펴 보더라도 육체를 가진 사람과 영이신 하나님과의 구별된 존재적 구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 관계를 가지며 대화를 하는데 있어서 여러가지 문제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라는 말의 의미는 육체를 가진 사람과 구별되며 사람과 같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연적 인식론을 근거해서 사람과 하나님과의 만남은 물론 특별한 관계이지만 만남 자체로서는 자연스럽게 서로 인식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존재와 인식의 구조가 다른 하나님과 사람과의 만남, 혹은 서로 인식을 가지는 것이 만남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이런 만남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존재론적으로 볼때 하나님은 영이시고, 사람은 육체를 가진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인식’(이 말을 사람이 생각하는 영적이라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라고 할때 사람의 영적인 상태와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대비의 오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과 사람의 영은 같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영은 창조주의 영이고, 사람의 영은 피조물의 영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영은 초월적이지만 사람의 영은 육체와 연합하여 하나가 되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안에서 지식을 생성하지만 사람의 영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자연적으로 지식을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두가지의 조건에 만족되어야 영이 지식을 생성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감각에 의해 반영받은 표상이 있어야 하고, 또다른 하나는 표상을 조명해주는 선재하는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은 감각된 표상과 선재하는 지식의 조명이 없어도 지식을 생성할 수 있으나 사람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지식을 생성하는데 있어서는 조건적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과 사람의 영은 존재론적인 구조에 있어서 완전히 구별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이 만났을 때 인식의 개념에 있어서  사람은 하나님에 육적 감각을 가지고 그 감각에 의해 표상을 영혼의 지성에 반영하여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그 지식에 대하여 영혼의 감성에서 지각을 가질때 하나님을 만났다는 인식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은 사람과 같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인식을 위해 필요한 어떤 조건이 요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지식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사건들에 관하여 이미 예견하실 뿐만 아니라 인지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만남이라는 특별한 관계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말하는 계시는 하나님의 전체의 창조 사역에 있어서 특별한 섭리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므로 나타나는 특별사역인 것입니다. 결국 사람은 육적인 감각을 의존하지 않고는 인식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자기 안에 있는 지식이 이미 모든 것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사람의 입장에서 자기 생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며 참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육적 감각에 의해 표상을 가지짖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영혼에서 지식을 생성하여, 지평을 넓혀가는 지적 성장의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자기 안에 가지고 있는 지식 즉 영혼의 지성에 새겨져 있는 이미 지각된 지식을 다시 표상으로 하여 그 지식이 함유하고 있는 무지와 결함의 부분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가지거나 다자간의 지식들을 표상으로 하여 더 깊고 다양한 지식을 생성하여 확장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지식의 지평을 넓혔다는 것은 생각하여 더 깊은 지식을 생성하여 지각함으로 이미 가진 지식의 의미를 더 자세하게 인식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서 감각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지식을 생성하여 지각을 가진 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런 대상에대해서 인식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은 진실한 의미에서 참 진리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영이신 하나님에 관한 감각을 가질 수 없습니다. 존재적 구조에 있어서 허용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자기의 의지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하나님에 대한 만남의 감각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사건들은 특별한 것입니다. 그 특별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사역에 속한 것입니다. 이 사역들이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이며 이런 시각에서 볼때 비로서 모든 성경이 완전한 진리이며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씀을 하시려면 먼저 사람이 자신에 대한 감각을 가지도록 하셔야만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감각을 가지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물을 눈으로 보거나 어떤 소리를 귀로 듣거나 손으로 만져 감각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이런 육적으로  감각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피조물이 자신을 감각하도록 특별한 기능을 더하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 기능적 역할을 하도록 하는것이 최초 지음을 받은 사람에게 부여하신 하나님의 형상이고 형상안에 본유지식이 있었습니다. 그 지식은 사람이 육적으로 감각하고 표상을 지성에 반영하면 그 표상을 조명하여 표상에 대한 지식을 생성하여 지각하고 전인으로 인식하게 하는 것입니다.  즉 사람이 육적인 감각을 가지면 그 감각에 대해 표상을 가지고 지성에 반영하여 모든 객체들에 대한 인식을 갖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는 인식을 가지려면 육체로 감각을 가지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사람의 육체가 하나님에 대한 감각을 결코 가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을 감각하도록 특별한 계시를 주셔야만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느낌을 가질 수 있도록 말씀으로 나타내 주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 이끌려 가서 환상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보좌와 영광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 그리고 성자 예수님도 보았습니다. 그 예수님이 말씀이신 하나님이신 것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1:3)”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1:1)”와 함께 기록한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실때 비로서 하나님이 감각되어지고 지각을 가지므로 인식되어지는 것이므로 일반적으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났다고 말하는 것은 참 진리일 수 없으며 이것은 기독교내에 있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가인과 노아, 에녹, 아브라함, 야곱, 모든 신앙의 자손들을 비롯하여 모세와 선지자들, 그리고 사도들을 살펴 볼때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만난 것은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책에 기록하여 남겼습니다.

그것이 성경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나 주시는 사건은 일반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에게 있어서 아주 특별한 사건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일컬어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계시라고 말하는데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시를 통하지 않고 직접 하나님을 만났다거나 음성을 들었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에 관하여 아주 무지한 사람들의 주장인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하기를 그때에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 말한 것처럼 우리시대에는 말하지 아니하시니 라고 분명히 말씀하셨고, 신학적으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말씀을 하셨다면 하나님의 계시가 추가되어야 하는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계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사역을 진행하시는 과정에서 사람에게 하나님에 관하여 인식이 가능하도록 드러내 주시는 특별한 사건으로 그 사건은 당사자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하여 모든 인류에게 함께 계시한 것으로, 당사자는 당시 시대에서 하나님을 만났으나, 나머지 모든 사람들과 오늘 우리에게는 성경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을 읽는 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불교에 심취하여 12년동안 등을 방바닥에 대지않고 산 사람이 성경을 7회에 걸쳐 통독했다고 했습니다. 그가 성경에서 많은 진리들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나님을 만났나거나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회개하는 삶으로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마치 가인과 같이 완고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셨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끝끝내 하나님께로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그가 성경을 읽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만난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믿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읽을 때부터 회개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며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돌이켜 그리스도인이 되거나 복음을 듣기만 해도 신자로 돌아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7번 씩이나 통독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믿음을 가지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두번째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가?

성경을 보고 읽는 사람이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나, 교회에서 목사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다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보거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어떤 상태에서든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보았지만 대부분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객체가 되신 하나님은 사람이 인식할 수 있도록 영혼의 감성에서 지각되어야 의지를 통해 전인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지각되지 않은 어떤 객체라도 사람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천사들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천사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셨으며 사람과 같이 육체를 가진 것이 아니라 영으로만 지어졌습니다.  그들은 피조세계에서 한 부류로 구분됩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존재에 관해서 아무도 선뜻 말할 수 없습니다. 천사의 존재를 목격한 사람도 없습니다. 성경으로만 천사를 만난 사람들이 증거되고 있습니다. 천사들이 사람들에게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사람들이 자신이 만난 존재가 천사라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명을 받들어 사람들에게 보냄을 받은 천사를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므로 하나님의 명령은 사람들에게 전달되지 않고 하나님의 사역은 성취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존재인 천사와 사람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의 영혼의 감성에서 천사가 지각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명을 받은 천사가 헛수고를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시고 사람에게 천사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영혼의 감성에서 지각할 수 있는 지식을 갖게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떤 상태에서든지 영혼의 감성에서 지각되지 않은 지식은 아무리 지식으로 생성 되었어도 지식이 되지 않습니다. 지식은 지성에서 생성되지만 생성된 지식에 대한 지각을 가지지 않으면 그 지식이 지성에 새겨지지 않고 의지를 통해 육체의 감성에 반영되지 않으므로 전인으로 인식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셨을 때 그 천사가 사람에게 감각되고 인식되려면 육체의 감각을 통해 표상이 생성되어지고 그 표상이 영혼의 지성에 반영되어 이미 경험을 통해 가진 지식이나 타락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 안에 부여하신 본유지식에 의해 조명을 받고 지성에서 조명받은 바대로 지식을 생성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성된 지식은 감성으로 보내어져 지각된 후 지성에 새겨지고 의지를 통해서는  전인의 기관인 마음에 반영되어 인식을 갖게합니다.  본유지식 안에는 하나님에 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창조에 관하여, 사람에 관하여 라는 지식이 있습니다. 천사는 하나님도 아니고, 하나님과 관계하는 종교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기 때문에 창조에 관한 지식에 있고, 본유지식이 표상을 조명하면 동일한 지식이 조명을 하여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지식이 생성되어지고 감성에서 지각을 갖는 것입니다. 하지만 타락으로 인해 본유지식을 상실하게 됨으로 육체의 감각에 의해 천사가 감각되고 표상이 지성에 반영되지만 이를 조명하여 밝혀줄 지식이 없으므로 인식할 수 있는 지식을 생성하지 못하고 천사를 천사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감각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낮아지셔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자신을 보이셔야 하는데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보이실수 없으므로 말씀하셔서 들을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있어야 하나님을 감각하거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인식할 수 있는 지각을 가지게 되는데 사람이 타락함으로 인해 하나님에 관한 어떤 지식도 가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시거나 계시를 주실 때 사람이 스스로 지식을 생성하도록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조명하셔서 말씀을 그대로 지성에 지식으로 새기시고 감성에서 그 말씀대로 지각을 가짐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이 자기의 지식과 같이 인식되게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모든 신앙의 지식 가운데 이 지식이 가장 중요한 지식이 될 것입니다. 실지로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가장 중요한 부분일 수도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을 드린 가인을 생각해 보십시요.

가인은 하나님을 만났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계시하시고 말씀을 들을 수 있게 하셨으나 그는 끝까지 하나님을 외면하고 불순종하고 말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나 성령께서 가인의 영혼에 조명하시지 않으므로 인해 가인이 하나님을 자기의 지식으로 인식한 것입니다.

가인의 하나님은 지역적인 하나님입니다.

가인은 자기의 세상에서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갈 수 있습니다.

일정한 지역으로 가면 그곳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을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결국 가인은 타락한 세상의 문화를 생산하는 조상이라고 불리웁니다.

반대로 아브라함을 보십시요.

아브라함은 아직 아브람때에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시는 그 말씀에 따라 완전히 사로잡혀 그 말씀대로 살아갑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심으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그의 영혼의 지성에 채워져 갔습니다. 훗날 그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의롭다 인정을 받을 때 그의 지성은 하나님의 지식으로 가득채워져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히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실때 성령께서 조명하셔서 아브라함의 영혼의 지성에 말씀을 지식으로 새기고 감성에거 지각을 갖게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성령의 역사가 있었습니까?

진정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말씀에 사로잡힌 사람으로서 성령의 조명하심이 우리의 영혼에 비춰주셨습니까?

복음을 들을 때 우리가 죄인인 것을 깨닫고,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이 우리의 죄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 성령께서 조명하심으로 우리의 영혼의 감성에서 분명하게 지각되어 거부할 수 없는 말씀으로 받고 전인으로 인식한 것입니까?

아니면 듣고 이해하는 지식으로 받았습니까?

세번째 본문 말씀 지식은 어떻게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 생성되는가?

지금 우리가 이해하려고 장문의 글을 읽고 있는 주제의 본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최초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는 사람이 되었으며, 행동하게 하는 원인이 무엇인가?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자연론자들의 말과 같이 지음을 받았든지 아니면 자연적으로 생겼든지 사람이 자연적으로 생각하고, 지식도 가지며, 감각도 가지고 시행착오를 거치며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1:28)”고 먼저 사람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때 사람은 이 말씀을 어떻게 들었는가? 지음을 받자 마자 자연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려 왔는가?

사람이 처음 인식을 가지는 것을 지적인 열림이 생겨나는 때라고 말합니다. 이는 어린 아이가 성장하던 가운데 세상을 객체에 대한 감각을 가지는 순간이라고 합니다. 이때부터 사람은 체계적인 인식을 하기 시작 하는데 이런 순간이 있기 전까지는 경험을 통해 지식을 축적하고, 독립적 존재로 자기지식을  생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첫사람 아담은 지음을 받고 자기의 지식을 생성할 수 있는 경험을 가지지 이전까지 어떤 경험적 지식도 가지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아직 삶에 적응된 사람이 아니라 단순히 지음을 받은 존재로서 있기 때문에 생동하는 사람이 되도록 삶의 시작을 주셔야만 했습니다.

말씀으로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은 사람에게 말씀으로 살도록 말씀을 주십니다.[1] 이 말씀이 없으면 사람은 영원히 행동하지 못하거나 짐승과 동물과 같은 존재가 되었을 것입니다.

비로서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 첫 지식이 새겨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명령이 아니라 행동하게 하는 지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 성령께서는 그 말씀을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 조명하셔서 사람으로 하여금 감성에서 지각을 갖도록 했습니다. 그 말씀은 사람의 지성에 생성한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강제적으로 새겨진 하나님의 지식이었던 것입니다. 이 말씀으로 인해 사람은 지적인 열림을 갖게 되었고 육체의 오감에 감각을 가지게 되었으며 보는 것마다 인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짐승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감각적이고 감정적이어서 감각에 의해 반응하는 존재였으나 사람은 감각된 것으로부터 지식을 생성하여 인식하는 존재였습니다. 이렇게 사람은 살수있는 존재가 되었는데 이런 근거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말씀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 말씀에 의해 사람이 일어섰고 영혼의 지성에서 지적인 활동을 하고 감성이 지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이 말씀을 기억하지 않을 지라도 이 말씀은 사람의 영혼을 움직이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만약 이 말씀이 없으셨다면 사람이 지음을 받은 상태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지적이 감각을 갖지 못함으로 그냥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바울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영혼에서 사람을 중생하도록 작용하는 역할에 관하여 사울이였던 바울에게서 다시한번 살펴 볼 것입니다.
바울이 주님을 만나 말씀을 들은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들었을 때와 같습니다. 이것은 사로 잡힘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울(바울)의 영혼의 지성에 지식으로 새겨지고 감성에서 지각을 가져 자기지성이 생성한 지식처럼 인식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영혼의 지성에서 자기의 지식으로 조명한다면 자기의 지식을 생성하게 되고 그 지식에 의해 지각을 갖고 인식을 하게 됩니다. 가인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실때 그 말씀이 가인의 육체의 감각에 의해 표상화 되고 지성에 반영하였으나, 성령께서 조명해 주시지 않으므로, 자기가 가진 지식으로 조명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자기 지식을 생성한 후 지각을 가진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지식으로 감각된 하나님의 말씀을 조명하여 자기가 인식할 수 있는 지식을 생성하여 지각을 가진 것과 성령께서 조명하여 말씀대로 지식을 지각하여 인식한 지식은 문자적 표현은 같을 수 있으나 그 지식의 내용에 있어서 진리의 지식과 왜곡된 지식이라는 차이점을 갖게 합니다. 하나님에 관해서도 그렇습니다. 가인의 지식에서는 지역적인 한계내에서 존재하시는 하나님으로 인식합니다. 자기가 만난 하나님을 자기의 지식으로 조명하여 지식을 생성한대로 지각하고 인식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성에 새겨지고 지각을 갖게 됨으로 자기 지식과 같이 인식을 하지만 그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을 사로잡아 사람안에 거하고 사람을 최초 지음을 받은 사람의 상태로 다시 중생케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울(바울)은 말씀에 사로잡혀 중생했습니다. 사람이 중생하는 분명한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조명에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울(바울)에게는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성령이 조명하셔서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 지식으로 새겨져 감성에서 말씀대로 지각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인 지식이 사람으로 행동하게 함으로 말씀대로 사는 사람으로 중생하였으나, 가인은 그의 지성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기지 못하고 자기 지식을 생성하여 하나님을 인식함으로 중생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 사울(바울)은 자기 영혼의 지성에 가진 자기 지식들의 조명으로 자기 지식을 생성하던 것으로부터, 예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난 후 새겨진 말씀이 감각된 표상들에 관한 조명을 합니다. 처음에는 그 지식이 수가 비록 작지만 점차 하나님에 관하여 알아감으로 지식을 증가하여 결국은 옛 자기의 지식은 조명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지식이 지성에서 대부분 조명함으로 더욱 깊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자기 지식을 생성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의 지성안에 하나님의 지식이 자랄 수록 바울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합니다.
본래 그는 예수를 선지자로 보았거나 아니면 이단의 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평범한 한 사람으로 뛰어난 인격을 가졌거나 사람들에 의해 추종을 받는 한 사람으로 분류했고 유대에 해로운 존재로 여기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옥에 가두기 위해 교회를 핍박했었고, 예수를 철저하게 배척했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를 만난 이후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단순히 하늘로부터 자신에게 비춰주시는 기적적인 사건을 보는 것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어떤 거부할 수 없는 지식이 그의 영혼의 지성에서 확고하게 생성되어 지각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인식하게 된 어떤조건이 무엇인지 우리는 궁구하며 찾지 않으면 안됩니다.
바울은 로마에 보낸 서신 서두에 복음에 관해서 설명하면서 그동안 유대 학문으로 보았던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개념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하였습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으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1:2~4)”

이와 같은 지식이 바울에게서 나오게 된 근거는 무엇입니까?
이 지식은 성령께서 바울의 지성에 조명하심으로 지각되어 갖게된 지식입니까?
우리는 그렇다고 말할 수 도 있습니다.
성령께서 바울에게 조명하여 지각을 갖게한 그 지식이 자기의 지식을 생성하도록 조명하므로 지각된 지식을 생성하였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이 지식을 알수 있었던 것은 자기 자신을 먼저 진리대로 아는 지식을 가졌습니다. 이 지식이 성령의 조명에 의해 가진 것이든지 아니면 자기의 지성으로 생성한 진리의 지식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떤 상태에서든지 자기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과, 이 세상에는 한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3:10) 예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유대인들은 이방 죄인들과 같이 아니하여 율법대로 의롭다함을 얻고 자칭 선민으로 구별된 백성이며,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는 자부심으로 살았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난 이후 그의 지성에 새겨진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라는 말씀은 너는 틀렸고 크게 잘못하고 있다는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결국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율법의 지식에 의해, 의롭다고 판단하여 예수를 핍박하던 모든 행위가 오류이며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가진 지식들이 잘못된 것이라는 판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뭔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것이 무엇인가?
바울에게 제기된 문제는 하나님 앞에서의 의였던 것입니다.
율법의 의가 완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율법의로 흠이 없는 삶을 살아온 자신들의 삶에 결정적인 판단을 받게 되었는데 너희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줄을 아는고로 우리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2;16)”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셔서 행하게 하시고 율법대로 온갖 행위를 지켜 살면 의롭다고 인정을 받고, 그것을 근거로 교회를 잔해하고 없애려고하는 행위가 결국은 예수를 핍박하는 행위라는 사실로 인해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주신 율법을 다 지켜 행하는 이스라엘과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관계인가? 라는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율법의 의와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대비 된 것입니다.



 

[1][1] 8:3, 4:4, 4:4 :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살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