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아들 1, "주여뉘시이니까? 3"
행 22:8 (주여 뉘시오니까? 3)
5, 이에 대제사장들과 모든 장로들이 증인이라. 또 내가 저희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을 받게 하려고 가더니,
6, 가는데 다메섹에 가까이 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
7, 내가 땅에 엎드려져 들으니 소리가 있어 가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8,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우리는 지난주 자기의 의를 이루기 위해 열심으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사울이 빛에 의해 꼬끄라지고 자기의 이름을 부르며 “왜 나를 핍박하느냐” 라는 말을 듣게 되는 상황에서 일어난 사울의 갈등을 살펴 보았습니다.
혼란스러운 상황이 아닙니까?
원수처럼 미워해야 하고 하나님을 향한 열심에서 공의로운 일이라는 판단으로부터 자기의 대적인 예수께서 자신 앞을 가로막고 방해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빛의 조명이 시작될 때 사울의 영혼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조명하심으로 심겨져 인식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사울에게 인식되는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의 힘으로 재어할 수 있는 분이 아닌 어떤 초월적인 존재임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신 안에 있는 옛 자아는 자기의 영혼 안에서 자기의 의지와 지식에 의해 인식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조명으로 인식되어진 그 지식을 대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분이 과연 누구인지 자기의 의지로 알려고 하는 인식의 충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변화되지 않은 가인에게 자신을 드러내시며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울에게 당신을 드러내시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영혼에 심겨진 하나님에 관한 의식은 예전에 자신이 알았던 그 의식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혼란스런 상황에 처해있습니다.
이처럼 자기지식이 진리를 깨우칠 때 나타나는 반응은 깨어짐입니다.
자기지식은 진리의 조명을 받으면 자기가 얼마나 어두움에 처해있는지를 알게 되고 자신의 처한 그 어두운 상태에서 자기자신은 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저느 오늘 주여 뉘시오니이까? 라는 제목의 마지막 시간으로 사람의 영혼에 진리가 조명될 때 나타나는 반응으로 자기가 깨어지는 현장을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자기 지식
저는 여기에서 지식과 사람과의 관계를 말씀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드리려면 몇 날 몇 일이 필요한 주제입니다. 이미 그 내용에 관해서는 저의 블로그를 읽어보신 분들은 어느 정도 이해하시고 계실 것이라 생각해서 개략적인 말씀을 드립니다.
지식은 무엇이며 어떻게 생성이 됩니까?
자연주의자들에 의하면 지식은 사람이 진화의 과정을 통해 자연적으로 생성된 지능에 의해 발전적으로 진화되어 온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지식은 사람과 구별된 어떤 조건에 의해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이 진화되는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지식을 생성하게 되었고, 사람이 집단으로 사회를 구성하며 살아오면서 관계를 통하여 서로 통용이 가능한 조직적인 체계로 발전하였다고 합니다.
놀랍게도 창조론을 주장하는 기독교 안에서도 역시 자연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논리의 서두를 잘라내고 사람이 지음을 받을 때 지식을 생성할 수 있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은 언어의 조직에 있어서 구별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자연주의자들의 주장과 같은 의미를 입니다.
전자는 진화라는 시간에 의해 지식이 발전되어 조직체를 갖춘 지식으로 발전해 온 것으로 사람이 오랫동안 사회적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지능이 진화되어 지식을 생성할 수 있게 되었고 인식할 수 있는 기능이 발달한 것이고, 창조론에서는 사람이 지음을 받을 때 지식을 생성할 수 있는 지능을 가진 채로 지음을 받았고 인식할 수 있게 된 것으로 그 기능에 의해 자연적으로 지식을 생성하고 인식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결과적으로 창조론이나 진화론의 주장은 사람에게는 ‘스스로 지식을 생성하는 지능’이 있어서 그 기능에 의해 인식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것입니다.
다만 자연주의자들의 주장은 사람의 변화에 따라 오랜 시간 동안 진화되어 오늘날의 사람들이 가진 지능으로 발전해 왔다고 말하고, 창조론 입장에서는 지음을 받은 그 기능으로 지금의 조직적인 지식들을 생성한다고 함으로 이 둘은 지금 사람들이 지닌 기능이 구별되지 않고 있는 것의 근원을 달리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이 지능에 의해 스스로 지식을 생성함으로 진화론자들이 생성하는 지식이나 창조론의 입장에서 생성하는 지식이 구별되지 않고 그 기능에서 지식을 생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식을 생성하는 기능의 근원이 자연주의 입장에서 진화론이냐 아니면 창조론이냐 하는 것은 말 장난에 불과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식을 생성하는 지능도 중요하지만, 그 지식이 진리인지 진리가 아닌지 이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창조론이나 자연주의자들이나 주장하는 대로 지식을 생성하는 지능이 자연적인 환경에 의해 진화 되었든, 아니면 하나님에 의해 지음을 받은 것이든 지능이 지식을 생성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생성된 지식에 관하여 진리 여부를 구별할 근거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모든 지식은 사람이 지능에서 생성하는데 그것이 진리 여부를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발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람은 결코 진리의 여부를 판가름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여기에 기독교인들은 “사람이 생성한 지식은 진리를 판가름 할 수 없다. 그러면 진리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객관적으로 판단하여 보실 수 있는 창조자 하나님만이 진리를 구별하실 수 있을 뿐이다.” 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 주장은 정말로 바른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진실한 신자나, 혹은 진실하지 않은 신자라도 능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 측면에서 볼 때 충분히 객관성이 결여된 주장입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면 모든 사람이 이를 수긍하고 받아들여야 하는데 진화론자들은 그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진화론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고 말하는 그런 주장은 편견에 불과한 것입니다.
보십시오.
사람은 지식에 의해 활동하고 움직입니다.
지식이 없는 사람은 활동 할지라도 동물이나 짐승에 불과합니다.
사람이 지식을 가지지 못하면 그는 사람일 수 없습니다.
인류의 역사의 한편에 불행하게도 짐승들의 보호를 받고 성장하여 짐승처럼 살았다 간 사람이면서 짐승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불행하게도 그들의 기록에 대한 확실한 증명을 얻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깝지만 이런 이야기들은 전설이나 혹은 사람이 지어낸 이야기들이 아니라 사실이었으나 우리에게는 확실한 증거로 제시되지 않는 다는 점이 아쉬운 점들입니다.
바로 늑대 인간들과 같은 이야기들입니다.
이들은 사람으로 태어날 때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의 후손으로 태어났습니다.
겹치는 불행에 의해 환경적인 요인이나 사회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는 안타까운 일이 그의 생애를 가름하는 순간에서 사람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버려지게 되었습니다.
이는 늑대의 보호가 없었으면 죽었을 것이지만 그를 발견한 짐승이 물어다가 생명체인 사람에게 젖을 물려 살려 한 우리에서 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전설이지만 로마를 세운 로물루스와 레무스도 암늑대에서 자랐다는 소문이 나오게 된 근거는그 전설이 사실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도 같은 곳에서도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 원인은 사람이 원치 않은 아이를 낳으면 정글에 갖다 버리는 풍습으로 말미암았을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들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지식이 없습니다. 자연론자들에 의하면 사람에게는 지식을 생성하는 지능이 발달되어 오늘날과 같은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데 정글에서 자란 늑대 소년에게 지식이 주어지지 않은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요?
그들의 지식은 늑대의 삶으로부터 배운 짐승의 지식입니다.
그들도 분명히 영혼은 있으나 지식으로 살지 아니하고 그들이 보고 듣고 경험에 의해 얻은 짐승의 삶으로부터 얻은 지식으로 짐승과 같이 살다가 이세상을 떠났습니다.그들은 분명히 아담의 후손이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인생을 살아야 했던 것은 사회가 그들을 배척한 원인입니다.
이들 중 대부분은 태어날 때 중병을 가졌거나 혹은 온전하지 못한 상태로 태어났다고 판단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든지 오늘날에는 증명되지 않은 전설과 같은 이야기이지만 사람이라는 존재가 가진 지식에 대해서 시사하는 점들이 있다는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어떻게 활동하며, 생각하고, 문화속에서 문화를 누리며, 창조하며, 삶을 사는가? 그것은 지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지식에 관하여는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려 해도 끝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처음 지식을 가진 것은 자연주의자들에게서나 오늘날 일부 창조론자들에게서 결코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지식의 근원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지식을 이해하도록 생성하는 자기 안에 있는 지식 생성 기능이 어떻게 생성되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최초 사람을 지으시고 그 지음을 받은 사람이 무지로 말미암아 혼란스런 상황을 당하는 것을 원치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본유지식에 모든 것을 상세히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은 파괴되었고 부여 받은 지식은 깡그리 상실함으로 현재와 같이 ‘하나님도 모르고, 하나님께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지도 모르고, 창조에 관해서도 모르고, 사람자신에 관해서도 모르는 무지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설령 사람이 이런 것들을 궁금해서 알아보려고 해도 이를 확인 할 수 있는 근원지식인 본유지식이 없기 때문에, 궁구하여 찾은 지식이 진리인지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감동된 사람들을 보내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고 성경은 사람이 이를 모르는 것을 상세히 설명하여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이 성경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 또한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이 아니고 오직 그것을 믿음[1]으로만 가능하고, 믿는 사람이 자기지식으로 믿는다고 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치심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든지 복음에 관하여 설교를 들을 때 바로 이와 같은 근본적인 지식에 의해 깨어있는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자신에게 받아들이거나 혹은 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식은 최초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그 지식이 사람의 영혼에 심겨져 새겨지고 새겨진 지식이 또 다른 지식을 생성하도록 조명함으로 지식은 새로운 지식을 생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지식이 생성되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지식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영혼의 지성 안에 지식을 생성하는 규칙이 일정한 방법대로 생성하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성한 지식은 사람이 각기 달라도 각기 생성하는 지식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대로 지식을 생성하기 때문에 서로 이해가 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함으로 타락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지식의 근원인 본유 지식은 상실되었습니다.
그러면 사람은 어떻게 지식을 생성하게 됩니까?
타락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최초지식을 상실하였으므로 더 이상 지식을 생성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타락하기 이전까지 사람 영혼 안에서는 본유지식이 활성화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지식을 생성하게 했고, 그렇게 생성한 지식은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영혼이 지성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때 생성한 지식이 아주 작은 부분일지라도 새로운 지식을 생성하도록 조명함으로 지식을 생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조명하는 지식은 본유지식과 같이 완전한 지식을 생성해 주지 못함으로 인해 모든 지식에는 모르는 부분에 대한 무지와, 부족한 부분에 대한 결함이 함의한 지식만을 생성하게 됩니다.
이 지식이 타락한 사람의 자기지식입니다.
이처럼 자기지식은 완전하지 않고 항상 무지와 결함을 함의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지식들이 반복적으로 지식을 생성할수록 무지와 결함의 범위는 많아져 가는 것입니다.
타락한 모든 사람들의 지식은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지식이고, 그 지식은 하나님에 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창조에 관하여, 사람 자신에 관하여 아무런 지식을 제공하지 못하므로, 모든 지식에는 위와 같은 본유지식의 조명에 의해 필연적으로 생성될 의미들이 함의되지 않은 죄의 지식이 되고, 사람은 무지와 결함을 함의하는 이 지식으로 활동을 함으로 그 지식은 죄의 지식인 곧 죄의 본질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사람입니다.그도 지식에 의해서 활동하고 생각하고 존재합니다.
지식은 아는 것이고 그 아는 것을 표현하는 것을 의지라고 하는데, 의지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아는 것을 자기의 행동으로만 표현하는 것은 의지에 의한 행동이라면, 이것으로 관계를 가진 사회적 존재로서의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지식을 표현하는 기능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언어입니다.
제가 지금 제가 알고 있는 신앙에 관한 지식을 여러분에게 언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에는 이 언어를 이해하는 사람도 있고, 너무 장황하게 설명을 하니까 지루해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아는 지식, 우리가 진리라고 믿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설명 드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울이었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고 있을 때, 그는 자기가 아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아는 것은 예수는 하나님의 율법에 어긋난 선지자로 에루살렘에서 이단자로 규정되어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그가 십자가에 죽는 것은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었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처형을 당한 예수가 부활하였다고 떠들더니 결국은 유대에 큰 위협이 되는 단체가 되어 온 세계에 퍼지고 유대의 정통성을 위협하게 되자 이를 박멸하기 위해 나선 자칭 의로운 사람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지금 그 앞에 나타난 분이 누구입니까?
그가 바울인 사울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이제 좀 이해가 될 것 같습니까?
사울은 자기의 지식을 가진 체로 빛 가운데 나타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확실히 알아볼 수 없습니다.
그의 지식에 의하면 예수는 하나님을 모독한 죄인입니다.
그는 자기 죄로 죽은 것이 분명하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자기 앞에 나타난 그분은 누구입니까?
빛 가운데 나타나서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옳지 않다고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견고하게 자기만의 성을 쌓아 든든한 방패가 되었던 지식들이 여리고 성이 무너지듯이 와르르 무너지는 장면을 보십시오.
저는 오늘 여러분의 견고한 자기의 성이 무너지기를 제발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영혼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라 하신 그 말씀이 새겨져서 거듭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말씀이 여러분의 영혼을 조명하여 그 동안 자기의 성을 쌓았던 자기지식이 거대한 바람에 물러가는 먹구름과 같이 어두움이 걷히고 하늘로부터 맑고 밝은 태양 빛이 내리 비취는 것처럼 여러분의 영혼을 밝혀주는 역사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사울이었던 바울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기 직전입니다.
그는 이제 자기지식으로 마지막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참인지 거짓인지 대면하여 확인할 것인데 그의 영혼에 자기지식으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결코 바르게 볼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사 빛으로 그의 영혼을 둘러 비취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여 뉘시오니이까?”
사울은 자기에게 말씀하신 그 분을 알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자기 지식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를 알아볼 수 없습니다.
주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라 할지라도 자기 지식으로는 예수님을 결코 알아보지 못합니다.
성령께서 조명하시는 빛이 아니고는 결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사울에게 나타나셨고, 성령께서 사울의 영혼을 조명하셨습니다.
자기가 보았던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으신 그분이 지금 자기의 일을 막아서서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사울은 사면 초가 상태에 있습니다.
평생을 한길만 향해 달려온 그의 삶과 열심이 헛된 것이고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결코 부서지지 않은 견고한 성을 쌓은 미련함을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 지식으로 인식되면서부터 거짓된 자신을 보게 된 것입니다.
“주여 뉘시오니이까”
절규에 가까운 소리로 사울은 주님을 향하여 소리쳤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왔다고 생각했고,
하나님 안에 머물러 있다고 믿었던 날들에서,
우리는 먼 길을 정신 없이 달려왔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있었습니다.
사울과 같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의를 이룬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앞을 가로막는 주님께서 우리 앞을 가로막고 계십니다.
성령의 조명으로 빛을 비추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왜 나를 멸시하느냐”
그때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언제 우리가 주를 멸시하였나이까”
우리의 대답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 하실 것입니다.
“너는 나를 위한 것이라고 열심으로 하지만, 그것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너를 위하였고, 나의 뜻과는 전혀 상관이 없이 너의 행복만을 기대하고 열심을 냈지”
우리의 신앙은 얼마나 계산적입니까?
얼마나 우리는 우리 중심의 생각만 합니까?
사울이 바로 그렇게 했습니다.
모든 것을 눈앞에 둔 사울의 입장에서는 이제 성과를 올려야 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보는 기록적인 일들이 그에게 필요했기 때문에 그는 모든 불의를 하나님의 의라고 생각했고, 주님을 대적하는 일을 자기의 명예를 위해 과감히 행한 것입니다.
그런 그가 자기의 모든 것이 무너져가는 자기 무너짐 앞에 절규하는 것입니다.
주여 뉘시오니이까?
이 절규의 뒤편에는 자기의 명예가 무너져가는 타락한 비참한 인생이 나락을 향해 떨어져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가다랴 지방에 귀신들인 사람속에 들어 있는 군대 귀신이 자기의 집을 떠나야 하는 운명적인 심판 앞에 절규하는 것 같습니다.
갈 곳이 없었고,
거처할 것이 없었습니다.
사람속에 거하는 귀신은 이제 사람에게 들어가는 것을 허락 받지 못할 것을 알아차리고,
다른 사람에게 들어가기를 청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근처에 있는 돼지 떼들에게로 들어가기를 청하였고 영혼이 없는 감성뿐인 돼지 떼에 들어가자 돼지들은 그 귀신들을 감당하지 못하고 물속으로 들어가 몰사하고 만 것입니다.
자 이제, 완고하게 걸쳐 있는 우리의 빗장을 풀어야 할 때가 아닙니까?
견고하게 빗장을 걸고 들어 앉아 있는 우리의 타락된 본성을 주님 앞에 내놓고, 겸허히 심판을 받아 우리를 죽이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주여!
우리의 영혼에 오셔서 말씀을 새겨주시고 그 말씀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시옵소서.
우리의 영혼에 말씀의 빛을 조명하셔서 우리가 진리 안에 거하게 하옵소서,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조명을 받는 새 사람을 입게 하옵소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전 5:17)”라고 사도가 선언한 것이 우리에게 임하게 하옵소서.
우리 영혼의 고통을 들으시고 이제 주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소서
시편 기자가,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새롭게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시 104:30)” 라고 말할 때 하나님의 하시는 미래의 일을 보았습니다.
여호와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 지며, 여호와는 자기 행사로 인하여 기뻐 하실지로다.(시 104:31)
주여 그 일이 오늘 우리에게 임하게 하옵소서,
우리는 부족하며 주님의 보시기에 합당하지 못한 죄의 열매요, 정욕의 열매입니다.
우리 영혼의 울부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소서,
우리를 대속해서 죽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나이다,
우리의 믿음을 헛되이 하지 마옵소서!
우리를 새롭게 지으시며 새로워지는 지면을 우리에게 주옵소서,
이 땅 위에 어느 누가 주님의 지으심이 없이 스스로 새로워 질 수 있습니까?
오직 주님밖에 없나이다.
우리는 우리의 장로들의 경배를 아나이다.
그들이 면류관을 주 앞에 던지며 노래했습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 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지음을 받았나이다.” 라는 고백이었습니다.
우리가 소망하기는 그들의 노래가 주님께서 우리를 지으시는 것을 찬양하는 노래가 되게 하옵소서.
오늘 우리를 새로 지으시고 영광의 찬양의 노래를 받으소서”
아멘,
[1] 여기에서 믿음 참된 믿음을 의미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당신의 지식인 말씀을 사람 영혼의 지성에 새기시고, 사람의 영혼은 그 새겨진 지식으로 지성 활동을 함으로 새로운 지식을 생성하고 그 생성된 지식에 대한 지각을 갖고 인식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새겨주신 말씀이 아닌 자기 지식으로 믿는다고 인정하는 의식활동에 의한 믿음은 참된 믿음일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