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아들2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3)
하나님의 아들2 /행 22:8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3)
8,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갈라디아 4:22-31)
이번 주는 지난 두 주간의 말씀 가운데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잉여의 자식에 관한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아직도 진리로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하여 이 주제를 준비하였고, 희미하게 비춰졌던 지식을 확실하게 그림으로 지식을 얻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무엇보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말씀을 들을 때 성령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조명하여 주심으로 여러분의 영혼에 분명한 지식으로 새겨져 믿음으로 확신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만난 바울의 마음 속에서는 지금까지 자기가 열심을 내고 있었던 하나님을 향한 종교가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헛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열심으로 그리스도를 핍박하고 있었는데 하늘의 보좌에서 자신을 드러내신 예수께서 자신은 나사렛에서 태어난 예수라는 말씀을 들을 때 중심을 잡고 일어설 수 없는 절망스런 아픔을 느꼈을 것입니다.
아마도 여러분들도 한 두 번은 그런 감정을 가질 때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즉 자기가 믿고 의지하는 종교이든지 과학이든지 어떤 철학이 진리가 아니라는 어떤 증명들이 나타나 자기의 확신을 꺾을 때 느끼는 감정일 것입니다.
사울에게 있어서 이런 감정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겪었던 그런 절망감보다는 훨씬 더 컷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절망하는 사울을 잘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을 대적한 사람이요, 자기의 의에 열심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율법의 의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이었습니다.
도덕적이고, 지적이며, 완벽한 종교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변화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자기 자신의 잘못된 열심과 지식들을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사울이라는 한 사람에게서 두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변화되지 않은 사울과 변화된 바울입니다.
이 두 사람은 예수에 대해서 아주 잘아는 사람입니다.
전자는 자기 지식의 개념으로 예수를 알고, 후자는 성령의 조명으로 말미암아 자기 영혼에 새겨진 지식으로 예수를 인식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에도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 것을 저는 잘 압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지식의 개념으로 예수를 알고 존경심을 갖고 종교심도 갖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예전에 사울과 같이 아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개념에서 자기지식으로 예수를 알되 그 의 영혼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조명되어지지 않은 사람입니다.
육체를 따라 난 자와 성령을 따라 난 자.
그래서 우리는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언급한 말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기록된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그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왕 노릇 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때에 육체를 따라 난자가 성령을 따라 난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갈 4:22-29)
바울 사도는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을 육체의 아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곧 우리가 말한 정욕의 아들이요 죄의 열매인 아들입니다. 그러나 이삭을 약속의 아들이라고 하고 성령으로 난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씨로 작정한 아들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하갈이 아들을 낳을 것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이삭만을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오해하고 스스로 그 약속을 성취하려고 노력하여 아들을 얻었습니다.
사람 생각으로 가능한 상태를 기회로 하여 아들을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이용하여 인간적이 방법을 적용한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오히려 재앙이 그들에게 임하게 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우리는 이스마엘의 영혼이 미움과 질투과 분노를 드러내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삭이 탄생하고 그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빼앗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대로라면 자신은 하나님의 관심 밖에 있는 존재입니다.
충분히 낳지 않아도 되는 자식이었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빼앗기는것도 모자라서 버림을 받기까지 비참한 처우를 받았습니다.
자기에게 부여된 아들로서의 정당한 모든 권리를 빼앗겼습니다.
어느 누구도 충분히 알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잉여의 자식이요 죄의 정욕의 자식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마엘의 영혼에서 일어난 반응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자기의 영혼의 미래의 비참에 대한 절망에 대한 비밀을 알 것입니다.
그의 종말의 고통이 지금 육체로 느끼고 전인으로 인식한다면 그 파괴적인 인생으로부터 쏟아지는 분노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를 태어나게한 아버지 아브라함을 미워합니다. 아버지가 정욕을 일으키지 않앟았다면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정욕으로 자기를 낳게한 것은 자기에게 행운이 아니라 저주를 준 것입니다.
약속의 아들인 이삭과 하나님마져도 원수처럼 미워합니다.
모든 원인이 하나님의 아들의 범죄 때문이지만 자신의 영혼의 운명이 저주라는 사실때문에 하나님과 범죄한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증오로 분노하고 미움과 원망이 하늘을 찌를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미움과 증오와 분노가 어디로서 나오는지 분명히 알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이땅에 태어난 것이 죄의 정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약속을 입지 못하고 태어난 원인입니다.
제일의 원인은 하나님의 아들의 범죄 때문이요, 두번째 원인은 하나님의 아들이 정욕을 일으켜 낳지 않아도 되는 자식을 낳았고, 이렇게 태어난 죄의 열매이고 정욕의 열매인 우리들이 이새상을 살다가 필연적으로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사실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울의 영혼,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살기가 등등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들의 생각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로 살아간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 할 수 있게 됩니다.
예전에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잉여의 자식이고 필연적으로 지옥을 향하여 달려가는 정욕의 열매였습니다.
다메섹으로 가고 있는 사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마음에는 예수에 대한 미움과 살의가 가득합니다.
그의 마음에 전심을 다하여 섬기는 하나님을 향한 강한 충성심은 예수를 향한 강한 미움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왜곡된 신앙과 죄의 열매인 운명적인 비참함 속에 처해 있는 영혼의 분노가 사울에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반면 예수를 만난 이후 사울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즉시 나타난 반응으로는 예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은 나타내지 못하지만 그 만남으로 인해 사울의 인식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이 생성되지는 않았으나 그가 예수께 잘못하고 있다는 분명한 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이 추구했던 지식과 종교와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도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이와 같았습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을 원수로 알았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알수 없이 하나님이 싫었고, 괜히 하나님의 아들을 미워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죄의 열매인 우리의 영혼이 드러내는 존재의 향기였을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미움과 분노와 증오의 향기만을 뿜어내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에 그 향기가 젖었을 것입니다.
그런 우리가 사울이 예수님을 만난 것처럼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사울은 예수께서 직접 사울에게 나타나셔서 만나 주셨으나 우리는 우리에게 전해준 복음을 들을 때 진리와 함께 거하시는 성령께서 진리의 복음을 우리의 영혼에 새겨주심으로 그 복음의 지식이 우리의 영혼의 지성에 빛을 비추어 우리의 마음이 변하여 하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됨으로 사울의 삶이 바울의 삶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유기자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삶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제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갈 2:20)’
스스로 자신은 죽고 자신 안에 그리스도를 담은 그릇이 되어 그리스도의 삶을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삶
예수 그리스도는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사람의 정욕으로 말미암은 탄생이 아니라 사람으로 보냄을 입으셨기 때문에 오신분입니다. 보내심을 받으셨다는 것은 보내시는 분의 의지와 뜻을 가진 사명을 가지셨다는 것을 의미하고 사명이 없는 보내심은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본질로는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이시지만 위격으로 서로 다른 신분이시기 때문에 같은 뜻을 가지시므로 사명을 가지시고 오실 수 없습니다. 성부의 뜻이 곧 성자의 뜻이시고 성령의 뜻이시기 때문에 같은 하나님 안에서 같은 뜻을 가지고 보내시는 것은 이해의 개념에 있어서 사람의 수준으로 언급될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성자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일이 곧 성부 하나님의 일이시고, 뜻하시는 것이 곧 삼위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이것을 공동으로 성취하신 것이라고 보는 관점들은 모두가 인간의 의식에 이해 되는 개념으로 말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삼위 하나님은 성경에 분명히 계시되고 일하시는 것이 다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께서 각기 시대에 따라 일하시는 것으로 나타나고 하시는 일이 구별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사람의 수준으로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타락한 죄인의 상태에서는 더더욱 하나님의 본질에 관한 지식을 가진다는 것이 쉽지 않으며, 성령께서 조명하여 주신 사람마다 그 지식이 차이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아는 것은 그 사람에게 상급이 되고 아는 만큼 하나님으로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당신을 사람으로 낮아지시기를 한결같이 원하셨기 때문에 성자 하나님께서 자원하여 아들이 되셨고, 피조물로 낮아지시는 것을 후회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피조물인 사람의 옷을 입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옷을 입으시려 오시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대로 세상을 사랑하셨고, 특히 사람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셨으니”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우리는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신 그 사랑 만큼이나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알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더 큰 감화를 갖게 되고 하나님께 자신을 더욱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초 지음을 받은 사람의 상태는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 받음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시고 그 사람을 아시기 때문에 지식을 주시지 않았다면 지음을 받았을 때부터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는 정상적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아들께서 이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고 하나님의 기쁨은 영원하였을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최초에 주신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본유지식의 조명에 의해 삼위 하나님을 분명히 알았을 것이고 하나님을 별도로 알아야 하는 지식의 필요성이 없을 것입니다. 그 지식은 사람으로 하여금 지식으로 생성하도록 조명하여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타락은 하나님을 알게 하는 지식을 상실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사람과 함께 거하시지만,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므로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만 얻을 뿐 기쁨을 되돌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사람을 다시 살리시려고 은혜를 베푸시고 사랑으로 나타나셨으며, 그 사랑이 하나님께서 사람의 옷을 입고 사람의 모양으로 낮아지신 사람으로 오시는 것이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반드시 죽을 것인데 죽을 사람을 살리려면 죄지은 사람을 대신해서 죽어주는 방법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신을 버리시는 보내심을 입음은 사람을 향한 무한한 사람을 드러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를 되살리려 오신 그리스도를 알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부어주셨던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었고, 형상 안에 있는 본유지식을 상실함으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조명해주는 지식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질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사람의 타락한 상태는 사물의 본질에 관한 지식을 가질 때 본질에 관한 분명한 지식을 가지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난다 할지라도 그가 만난 하나님을 하나님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지식으로 지각된 자기 지식의 하나님을 인식하는 기현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인이 분명히 모든 인류에게 드러내 주었습니다. 즉 가인이 하나님을 만났고,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만난 하나님의 본래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충고를 무시하고(창 4:6`7), 자기 지식으로 속일 수 있으며(창4:9), 하나님을 떠날 수 있습니다.(창4:16)
이는 가인의 의식 속에 지각된 하나님은 대등한 관계의 존재 이상으로 지역적 환경에 제약을 받는 존재로서 신에 불과했었습니다. 이것이 가인이 실재로 하나님을 만났으나 그의 인식에서는 만난 하나님을 자기지식으로 인식한 하나님의 모습으로 만나주신 실재 하나님과는 다르게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반드시 거듭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
그래서 하나님을 본래대로 알 수 있는 지식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타락한 사람의 죄를 해결해야만 하고, 사람에게 본래 주셨던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 되어져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이런 일이 결코 가능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생명체로 존재하려면 단순이 숨쉬고 온몸에 피가 흐르고 있는 생물적 존재로서 유지된 상태로 있는 것을 생명체로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하고, 움직이고, 자기의 의지로 활동하며, 타자와 관계를 가지며, 사물을 인식하는 활동을 하는 존재이어야 합니다. 사람이 이런 존재가 되려면 자기 영혼의 지성에서 지식을 생성하고, 생성된 지식에 의해 전인의 마음에서 인식되고 자기 지식으로 자기 의사표시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지식을 생성하여 자기지식으로 갖는다는 것은, 지음을 받을 때 자동적으로 지식을 생성하도록 지음 받았다고 주장하는 창조론, 자연스런 환경에 의해 진화 과정에서 지식을 생성할 수 있도록 변화 되었다는 자연론은 아닙니다. 사람이 생명체로서의 존재이기 위해서는 자기 스스로 지식을 생성할 수 있어야 하는데, 자기가 스스로 생성할 수 없고 그 지식을 생성할 수 있도록 참 지식의 조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 참 지식을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주셨으며, 하나님의 형상이 그 지식을 담고 있었고, 그 지식이 본유지식으로 “하나님에 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사람에 관하여, 창조에 관한” 4가지의 지식이었던 것입니다. 이 지식은 사람이 육체로 감각을 가질 때 그 감각을 표상화하여 영혼의 지성에 반영하면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본유지식이 표상을 반영하게 되고 반영된 표상에 대한 지식을 조명하여주면 영혼의 지성은 지식을 생성하고 그 생성된 지식을 감성에 반영하여 지각을 갖고, 지각된 지식을 지성에 새기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인의 마음에 보내 사람으로 활동하고 지식대로 표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는 것은 바로 최초 지으신 바대로 회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범죄한 사람을 범죄하지 않는 사람으로 되돌리는 것인데, 깨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원래대로 회복하는 것으로, 자기 스스로는 불가능하고 오직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해주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사람을 진토에 버려두시지 않으시고 온 마음을 사랑하셨습니다. 사람을 죄로부터 회복시키기 죽음의 저주를 풀어 주시기 위해 한 계획을 가지셨습니다. 저주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에서 죽음입니다.
최초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두려운 저주를 무시하고 그 나무의 실과를 먹었고, 그들에게 죽음이라는 심판이 임하게 되었으며, 그들이 죄를 지은 상태에서 정욕을 일으켜 후손들을 낳았기 때문에 그 후손들은 죄를 가진 죄의 열매로 태어나 동일하게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는 의미는 실질적인 죄를 범하기 전에 그들이 탄생할 때부터 죄에서 태어난 죄의 열매인 것입니다.
죄의 열매라는 것은 죄라는 나무의 행위의 결과로서 열매임으로 인류의 조상으로부터 태어난 모두는 최초 창조 상태에서부터 결함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열매는 선이라고는 한 점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상태이고, 이 상태에서 벗어나 최초 지음을 받을 때 주어졌던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하는 것입니다.
보내심을 받음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죄의 열매인 사람의 모양으로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사람의 정욕으로 잉태하여 오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거하시고 하나님이 아버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죄가 없으시고 죽으실 필요가 없는 분입니다.
만약 예수께서 우리와 같이 정욕으로 태어났고 죄가 있으시다면, 그분의 십자가 고난은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키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자기의 죄 때문에 죽는 것 뿐입니다.
바울과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는 “만약 진정으로 예수께서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면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죽도록 두시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죽으심은 하나님께 범죄한 자기의 죄 때문이며, 모든 사람들이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는 것처럼 죽었으므로 “자기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함으로 신성을 모독한 그 죄가 자신을 십자가에 죽게 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지은 죄값을 대속하여 치르기 위해서 사람이 되셔야 했고, 사람과 동등하게 살아야 하셨고, 그 다음에는 사람처럼 죽으셔야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고통을 당하시는 것을 깊은 동정심을 가지고 눈물을 흘리고 아파하며 ‘하나님께서 주도 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셨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손에 사형 틀을 쥐고 온몸을 실어 눌러 죽게 하는 심판의 집행자, 악한 행위의 조성자로 오해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수많은 하나님의 행위를 보게 됩니다. 그 가운데 심판자, 진노하시는 하나님, 보복하시는 하나님 등을 읽을 수 있습니다. 진노와 보복 그리고 심판에 희생당하는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을 주는 것은 악행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판단은 자기의 악행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공의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그런식으로 말하자면 이 세상에 살아남을 사람은 모든 사람이 진노의 사형 틀에 피흘리면 죽어야 하는 죄인들입니다. 최초 지음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떠남으로 하나님의 창조의 아름다운 자신의 모습을 파괴하고 진노를 샀습니다. 그런 악행을 행한 사람들이 심판을 받아 죽음이라는 고통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정욕을 일으켜 후손들을 생산해냈습니다. 그 후손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잠재울 죄를 행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보란 듯이 하나님을 거절하고 외면하며 돌이켜 떠나가고, 악한 마음을 일으켜 동생을 쳐 죽이는 살인을 저지르고도 뻔뻔스럽게 자기의 보호를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미워하고 원망하고 열등의식을 갖고 스스로 고통의 함정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들을 하나님의 창조의 본성대로 살게 하는 지식이 영혼의 지성에서 사라지고 없기 때문에 무지의 어두움에 노출되어 죄만 행하고 악행만을 행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그리고 분노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하나님의 근본적 속성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직접적인 악을 행하실 수 없는 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진노를 표현하시는 행위들은 악한 사람들이 악을 행하도록 묵인하심으로 사람에게 진노를 행하시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도하신 것이라는 의미는 결코 용서 받지 못한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 될 수 있는 중대한 실수입니다.
예수께서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진노가 아닌 형용할 수 없는 큰 사랑 때문에 정욕의 열매로 태어난 사람들,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분노로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도록 내어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보내심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고, 그 지음을 받은 사람을 아들이 되게 하시고 그를 무한히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아들에 대하여 원망과 미움 분노로 가득찬 사람들의 영혼을 잠재우기 위해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의 영혼은 영원한 심판의 저주로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자신을 존재하게 한 하나님의 아들의 죄의 정욕을 미워하면서, 그 정욕으로 인하여 자신들이 태어났고, 궁극적으로 지옥에 가서 영원한 고통의 당하는 자식을 낳게 한,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한 분노입니다.
이것은 죄의 열매로 존재하는 사람들의 영혼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미움입니다.
누가복음 20:9~15을 보면, 예수께서는 이것을 비유로 적절하게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조성한 포도농장을 새로 주고 타국으로 가서 오랫동안 계셨습니다. 때가 이르러 종들을 보내 소출의 얼마를 빌려준 소작료를 받으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포도 농장을 임대한 사람들이 주인이 보낸 종을 마구 때려 피를 흘리게 하고 돌려 보냈습니다. 돌아온 종을 본 주인은 또 다른 종을 보내 소작료를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더 심하게 때려 병신이 되게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주인은 다른 종을 보냈습니다. 갈수록 가관입니다. 임대를 얻은 사람들은 주인이 보낸 사람들을 오는 대로 때려서 죽이고 병신을 만들고 돌려 보냈습니다. 이렇게 되면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장 군대를 끌고 가서 그들을 박살내고 그들에게 복수하여야 할 것이 아닙니까?
이번에는 아들을 보냅니다.
그러시면서 내가 아들을 보내니까 저들이 아들을 보고 소작료를 낼 것이다.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상황이 어찌 되었습니까?
포도 농장의 농부들은 아들이 오는 것을 보고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우리가 그의 유업을 가지자 라 하고 아들을 아예 죽여 버렸습니다.
전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패한 것입니다.
진노가 아니라 피만 흘리고 무참히 깨어졌으며 아들까지 잃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저히 상대 할 수 없는 상대가 사람인 것이고, 사람은 악을 행하는데 아주 능숙한 존재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사람들이 그토록 악을 행하는데 보복하지 않으시는 가요?
아들을 죽이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보복하시지 않습니다.
왜그런가요?
여기에서 우리의 지식과 하나님의 지식의 차이점을 볼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보복하십니다
아주 강한 무기로 사람들에게 보복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악행을 무기로 보복하는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악하기 때문에 우리의 시야에서 진정하고 참된 강한 무기를 볼수 있는 안목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참된 지식이 없는 우리의 악함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포도 농장의 농부들을 한없이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떤 행위를 해도 복수하시거나 진노하시거나 혹은 당신이 가셔서 맞아 죽으셔도 그들을 사랑하시는 것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보복하시는 무기는 고작 사랑입니다.
우리가 고작 사랑이라고 표현하는 이 무기는 우리의 눈에 고작이지만 실지로 무슨 악행보다 강하여 모든 악행을 이기는 강력한 힘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왜곡되게 이해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정도 사람을 사랑하시다가 지나치면 진노하시고 분노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지금까지 심판을 미루고 계신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악행을 하는 저는 천벌을 받을 것이다.”
“저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오래 참아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지 않고 더욱 복 받고 사업이 잘되고 자녀가 잘되며 돈이 많아 부자가 되는 것을 보면서 머지않아 심판을 받을 거야,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는 거야,”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 칭하는 분들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은 거듭나야 합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하나님 앞에서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고 죽임을 당할 만큼 위협을 당하고, 아픔을 당하는 슬픔이 있을지라도, 여러분이 거듭난 사람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영혼에 새겨져 그 말씀에 인도를 받고 있는 사람이라면,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으신 것은 곧 세상으로 하여금 죽으시기 위해서 보냄을 받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정하셨으나 심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관심을 거두시면 세상은 자기들끼리 미워하고 원망하고 분노하여 죽이고 깨어지고 망가져 버리게 됩니다. 세상은 죄의 열매인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분노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에 사람이 사람을 보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일 수도 있다는 판단으로 미워하고 원망하고 죽입니다. 영혼의 이런 분노는 사람의 전인으로 느끼거나 인식하지 못하도록 막아 두셨으나 영혼에 있는 죄의 속성들이 전인에서 나타나 죄를 드러내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을 미워하는 이 세상에 아들을 보내셨던 것입니다.
이제 비밀을 아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악인들이나 이방인이 고통을 주어 죽게 함으로 우리의 동정을 받게 하는 고난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볼 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미워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여러분의 영혼을 조명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주시는 중생의 사건이 있기 전에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미워했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것 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직접 행한 일이 아니라고 반문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영혼은 2000년전 이방인의 영혼과 함께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도록 했고,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죄로 말미암아 여러분을 낳았다고 원망하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아직도 여러분의 영혼의 한구석에는 여러분이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거듭나 있는 여러분 자신을 한없이 미워하고 있는 것입니다.(롬 7:18~22)
여러분에게는 두 마음이 서로 싸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정욕의 열매인 육체를 따라난 자신과 다른 하나는 성령으로 난 자신이 서로 격동하는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물결치는 파도와 같이 흔들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을 깊이 사모하는 마음으로 열심을 가졌다가 내일은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미워 견딜 수 없는 미움을 발산하는 악인이 됩니다.
미움은 죄의 열매의 영혼이 세상을 향하여 발산하는 미움이고 그것이 곧 사단의 존재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계획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음을 받은 사람이 타락하면 이런 사람이 태어날 것도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계획에 들어 있지 않은 유기자들, 육체의 열매들이 잉여의 자식인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의 최초의 조상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창세전에 계획에 의해 존재하도록 작정된 사람들도 육체의 열매인 잉여의 자식들과 동일한 과정으로 태어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의식으로는 잉여의 자식인 유기자와 작정으로 말미암은 선택자들을 구별할 수 없습니다.
작정으로 말미암은 선택자들도 죄로 말미암아 유기자와 동일한 죄의 열매의 상태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곧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이들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지식에 의하면 유기자나 작정에 의한 선택자나 아무런 구별이 없이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자신의 거듭나게하는 영혼에 성령의 조명에 의해 심기는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지지 않은 중생 이전의 상태는 모두 잉여의 자식의 상태로서의 죄의 열매와 동일한 상태인 것입니다.
사울이 이런 상태에서 세상을 향한 충성된 종이 되어 그리스도를 핍박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네가 핍박하는” 이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이 그의 영혼에 들려지고 성령께서 무슨 말씀이든지 그 말씀을 영혼의 지성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넣어 거듭나게하자 사람은 지난 자기의 삶과 자기가 알았던 모든 지식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잉여자로서의 자기의 삶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르게 보는 이 진리의 지식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집중하여 들으셔야 합니다. 그 때 성령께서 우리의 영혼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거듭난 사람으로 살도록 기대하여야 합니다.
기도하겟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