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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믿음 2ㅡ3, (창 22:8)

생명있는 신앙 2013. 1. 7.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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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믿음 22, ( 22:8)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 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 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오늘 저는 이 본문의 말씀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에 관한 한 획을 그어 여러분의 믿음과 아브라함의 믿음을 살펴 보려고 합니다.
수없이 많은 이야기들이 있고,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많은 감동들이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본문으로 인하여 저에게 감동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성령께서 다른 설교자에게 주시든지 아니면 다른 기회에 저와 여러분께 감동을 주시려고 남겨 둔 것 인지는 모르지만, 저의 영혼에서는 성령의 조명이 찬란하게 비춰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춰주는 조명에 비해 저의 지성에 반영된 경험된 그 무엇이 없기 때문에 더 많은 감동된 지식이 생성되지 않기 때문에 지각을 갖지 못하여 풍부한 설명을 드리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
확실한 것은 저에게 육체적인 감각을 통한 경험적인 표상이 없거나 아니면 공부를 하지 않았았기 때문에 더 많은 감동된 지식을 가질 수 있는 그 무엇이 반영되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저의 사유를 넓혀 지식들로 표상을 만들어 반영하도록 노력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제 노력이 부족하여 충만한 조명에도 불구하고 지식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제 모습을 볼 때 마다 이 자리에 서 있는 내가 너무도 비참하고 원통합니다. 입도 있고 지성도 있으며, 지각할 수 있는 영혼의 감성도 있으나, 성령께서 우리를 충분히 거듭나게 하시는 감동된 지식을 조명해 주셔도 저의 영혼에서 지식이 생성되지 않은 것은 알고자 하는 노력이 부족하고 열심히 성실하게 살지 않았기 때문에 충만한 성령의 조명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얻는 지식은 극히 미미한 정도 분이라는 것입니다
.
이런 문제로 인해 저의 영혼은 항상 견딜 수 없는 아픔이 있습니다
.
그래서 저는 주님께 이 불충한 죄인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할 뿐입니다. 그리고 극히 작고 미미한 지식을 들고 이 자리에 선 저는, 오늘 이 자리가 사형 판결을 받은 사형수가 형 집행을 당하기 위해 형장의 단 위에서 최후의 순간에 마지막 소원을 마치고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는 자와 같은 마음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단을 내려갈 때 여러분의 마음을 만족할 만한 지식을 주지 못하였다고 돌팔매 질을 당한다 해도 할말이 없습니다. 저의 심령은 이와 같이 가난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사도가 말한 가르침을 기억하며 그 삶이 나의 삶이라는 사실로 용기를 얻어 이 자리에 서게 됩니다
.[1]

오늘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직접 말씀을 드릴 내용이 있기 때문에 저를 심령이 가난한 상태가 되게 하셨습니다. 제가 영적으로 이렇게 가난할 때 여러분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서 충만한 날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영혼의 상태에 따라 성령께서 직접 조명하시는 역사를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최초 사람 아담에게 어떻게 짐승을 잡을 것인지 명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 드려라고 명하셨다면, 범죄한 최초사람 아담에게 짐승을 잡으라고 명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
사람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어떤 방법으로든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시면 종교적인 행위를 할 수 없으므로, 반드시 말씀하셔야만 사람은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통해 아브라함의 행위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
만약 아브라함이 믿음의 사람이 아닌 오늘날 우리였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
아마도 오늘의 통상적인 사회적인 규범을 먼저 떠올릴 것입니다
.
이 세상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에 모든 사고를 이 세상의 규범과 정의를 하나님보다 먼저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도 이 세상의 규범에 반하면 옳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도 원하시지 않은 일이라고 자의적으로 판단할 것입니다
.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대는 우리의 신앙 마져 세속적 규범과 윤리에 완전히 묻혀있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규범도 역시 마찬가지로 반 기독교적이고, 전혀 하나님과 조화되지 않은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집중하지 않고, 영혼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았습니다
.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이방종교들의 행위를 보고 배운 것 처럼, 세상의 질서 속에 파묻혀 있습니다
.
그러나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
그의 영혼은 하나님을 향하여 집중하고 있습니다
.
그는 그것을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
자신의 삶 속에 함께 거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있었고
,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끌고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나가게 했을 때
,
새로운 땅 가나안에 도착하여 두려움에 싸여 있을 때
,
기근을 피해 애굽에 내려갔을 때
,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목적을 알게 되기까지,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계시며 움직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당시 사회의 구조와 같이 한 부족을 이루어 하나님을 드러내시는 것이었습니다
.
아브라함은 부름을 받은 이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고, 적절한 때에 자기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해주시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알려주셨기 때문에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아갔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끌어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한, 목적을 분명하게 알수 있었고 그 사실은 창세기 15장에 아주 잘 나타납니다
.
창세기 15장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십니다
.
그리고 아브라함은 자신과 함께 하시고, 종종 자신에게 나타나 말씀해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친근감을 갖게 됩니다
.
이로 인하여 아브라함은 당시 여러 부족들이 가진 종교와 비교를 하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상당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됩니다
.
아브라함은 이전에 듣지도 보지도 못한 종교적인 신과의 직접적인 관계는 이 세상에 다른 부족들에게서는 전혀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고, 들어보지도 못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이로서 자신의 종교에 대한 우월적인 면들을 발견하게 되었을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모든 인생에 문제가 있듯이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었습니다
.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자기 부족이 안정적으로 거할 수 있는 터전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아브라함 자신에게 주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4대후를 약속하십니다
.
이렇게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으로부터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진 새로운 부족이 이 세상에 터전을 잡고 세우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 것입니다
.
아브라함이 인식하기는 하나님은 아직까지 이 세상에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셨는데, 자신을 택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삼으시고 자신의 나라를 세우시려는 것입니다
.
이런 생각은 당시 부족사회가 가진 종교적인 인식이었습니다
.
그렇지만 아브라함에게는 다른 면이 있습니다. 모든 부족들은 그 부족의 장이 종교를 선택하였으나, 아브라함과 같이 신과의 실제적인 관계에서부터 부족종교를 선택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질적으로 아브라함을 재외 한 다른 모든 부족들의 종교는 하나님과 같이 살아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2]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주위의 다른 부족들과의 종교적인 구별은 신과 사람 사이에서 누가 종교의 주도권을 가진 존재인가? 라는 차이점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버지 데라와 함께 있을 때, 주위의 여러 부족들이 신을 구매하는 것과 자신에게 나타난 신과의 차이점에 대해서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신 진정한 목적을 알았습니다
.
그것은 타락한 사람이 사는 세상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한 민족과 국가를 세우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택함을 받은 아브라함을 통해 사람에게 존재하시고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아브라함의 전기를 읽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의미를 기억하면서 읽어야만 합니다
.
그를 떠나지 아니하셨고 아브라함 일생은 하나님의 눈동자에 동영상으로 상영되고 있었고, 아브라함은 동영상대로 살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누구라서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부름을 받은 날부터 그의 영혼의 지성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져 조명하여 새겨진 말씀대로 지식을 생성하여 영혼의 감성으로 지각하였습니다. 최초사람 아담의 아들 가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을 때는 자기 지식이 하나님의 말씀을 조명하여 자기지식을 생성하였는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을 때는 성령께서 조명하심으로 인하여 말씀대로 자기지식을 생성하고 지각을 가진 것은 분명히 구별됩니다
.
이 말씀은 여러분에게 자주 말씀을 드리지만 참으로 쉽게 이해 되도록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주 이 말씀을 쉽게 설명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만 이런 말씀을 드릴 때마다 제 마음은 어렵습니다
.
다시 말하자면 가인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자기지식을 생성하여 인식한 것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자기 지식으로 생성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인식하는 것은 아주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

결론적으로 살펴 보면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생 아벨을 죽이고 살인자가 되어 결국 하나님을 떠나갔지만, 아브라함은 한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사로잡혀 옛 사람으로부터 점차 벗어나 거듭난 새로운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눈동자에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거듭난 아브라함의 삶이 동영상으로 비춰져 우리에게 보여지고, 하나님은 눈동자에 들어온 아브라함을 보시고 즐거워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아브라함을 통해 우리의 자세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우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마치 가인과 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벗어나서 떠나가는 뒷 모습만 보일 뿐인 것 같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우리가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비참이요. 슬픔이 됩니다.
아무도 도움을 받지 못하는 어두움의 땅에 스스로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버림을 받아 쓰러져 간 것과 같이, 하나님의 얼굴이 보이지 않은 그곳에서 우리의 영혼은 긍휼함을 받지 못하고 비참과 고통 가운데에서 가슴이 매어지는 눈물을 흘리거나 힘이 없이 쓰러져 가고 마는 것입니다.

말씀에 사로잡힌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그는 마치 아무런 감정이 없는 사람과 같습니다.
자식을 재물로 바쳐야 하는 그런 슬픈 상황인데도 얼굴에 섭섭함이나 원망스런 감정을 숨기고 있습니다. 아니 그의 영혼의 지성으로부터 하나님의 결정에 대한 부정적인 지식이 마음으로 반영되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단단히 붙잡혀 있었기 때문에 그의 감정 마져도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을 보십시오.
당신을 죽이시려는 유대의 관원들과 대제사장들, 그리고 빌라도에게 사형판결을 받으시는 자리에서 자기를 변호하려는 생각을 조금도 가지지 않으시고 당당히 서계십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어떤 판결에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순응하는 굳은 각오를 가지신 분처럼 담담히 서계십니다.
오히려 자기를 심판하고 있는 세상의 권력을 가진 빌라도를 아주 긍휼히 바라보시면서 자비의 마음으로 앞으로 세상 사람들이 그를 향하여 퍼 붓는 저주를 불쌍히 여기시며 아파하시고 계십니다.
예수님께는 두려움이 조금도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그의 영혼의 지성에 찬란하게 비취고 있었기 때문에 앞으로 다가올 어떤 일에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아신 지식이 예수님의 마음을 충만하게 반영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도 이와 같은 마음으로 아들 이삭을 재물로 바치기 위해 데리고 모리아산을 오르고 있습니다.
이제 이삭의 등에 이삭을 태울 나무를 지우고 지정하신 재단을 향하여 오르고 있습니다.

아브람과 아브라함,

아브람이 70세에 갈대아 우르에서 부름을 받고 86세에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13년이 지났습니다.

아브람 나이 99세가 되자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아들을 낳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때 99세였고 아내 사래는 89세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아들 이삭을 낳기 전에 아브람에게 아주 중요한 한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의 아들을 주시기 전에 행하신 일을 잘 살펴 보고 오늘 우리의 신앙에도 결정적으로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이라고 하라고 하시고, 사래는 사라라고 새 이름을 지어주시는 것입니다. 나이 100세가 다된 사람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이름과 함께 새로운 세계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사람이 기력이 진하여 쇄하여지고 자기의 의지대로 살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그 시기를 계기로 해서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살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때에 이르러 새로운 역사를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주는 의미는 자연의 본성으로 태어난 죄와 정욕의 열매인 우리는 혈기가 왕성하고 살아있는 상태로서는 결코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지식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혈기가 왕성하여 자식을 얻을 수 있을 때에는 종의 자식이라고 생산하여 자기마음대로 하나님의 뜻을 이뤄보려는 자기욕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86세에 사래의 몸종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았는데, 그의 후손은 역사가 진행해 온 동안 이스라엘의 적이 되어 2010이 지나간 오늘까지 이삭의 후예를 대적으로 여기가 자기들의 하나님을 조직하여 열심히 섬기는 모습이 두렵고 무섭기만 합니다.

우리는 이들에게서 죄의 열매인 정욕의 아들들과 이스라엘에게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보게 됩니다. 물론 오늘날의 이스라엘은 이미 타락의 극치를 넘어 죄의 정욕의 아들들보다 더 타락해버린 자기중심의 신앙에 빠져 버렸으나 분명하게 이름으로는 그 지식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이 지식을 새롭게 재련하여 우리의 영혼에 새겨 넣어야겠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해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정욕으로 말미암은 아들을 약속의 아들로 주시지 않기 위해, 아브람과 사래를 새 사람으로 불러야 했습니다.

예전에는 아브람아!  하고 부르셨으나 이제는 아브라함아!라고 부르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이름은 옛이름이 아니라 새 이름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육신의 아버지께서 새 이름을 주셔서 그 이름으로 불러도 우리의 마음이 옛사람으로부터 벗어난 느낌을 갖는데, 하나님께서 친히 이름을 지어주시고 그 이름을 부르실 때 당사자의 마음은 어떠하겠습니까?

아브람을 아는 사람들은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모릅니다.

이 이름은 하나님과 아브람만 아는 이름이었습니다.

이제 아브람은 세상 사람들과 자신의 부족들에게 자기의 새 이름을 말할 것입니다.

앞으로 내 이름은 아브라함이다. 아브람은 옛 이름이이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는 결코 옛 사람 아브람을 부르시지 않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 앞에서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브라함만 있을 뿐입니다.

86세에 낳은 이스마엘은 아브람의 후손이지만, 이삭은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이처럼 이스마엘과 이삭은 부모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완전히 하나님의 사람 아브라함에게 주셔서 낳게 하신 것은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세상으로는 아브람이라는 옛 사람과, 하나님 앞에서 아브라함이라는 두 사람이 하나의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다.

아내 사라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도의 말을 생각합니다.
내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할 줄을 내가 아노니. 7:18” 라고 말한 대상은 분명히 옛 사람입니다. 이 옛사람은 죄의 정욕의 사람이고 죄의 열매의 사람입니다. 곧 아브람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거듭나기 이전 사람 곧 세상과 관계된 옛 사람과 관계된 죄의 열매인 정욕의 사람입니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 7:21)”는 새로 거듭나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는 아브람의 영혼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지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게 되는 강권적인 역사가 있는 새사람, 은혜의 사람으로서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는 새 이름으로의 사람을 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의 아들 이스마엘과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신분이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삭을 약속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은 후 자기에게 일어난 사건들을 살펴 보면서 자기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에 관하여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날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영혼이 인식하는 여러 날들에 관하여는 알 수 없으나 그 놀라운 일을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스스로 믿을 수 없는 사건임을 잘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 일은 자신에게 행하셨던 것에 대해서 여러 날 감동했을 것입니다. 그리고서야 자신의 아들인 이삭이 어떤 아들인지 자신만의 느낌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에게 다가 오셔서 함께하시고 새로운 삶을 주신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신가 하는 의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수 차례 나타나셔서 말씀해주시고, 고비의 순간에서도 자신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언젠가부터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든든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의 모든 소망이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한마디로 아브라함은 완전히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곧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 불순종하는 삶은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사람과 같은 상태였습니다.
의지적으로 더욱 완전한 모습을 보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 안에는 모든 사람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이 사람이 지음을 받았을 최초 때의 사람으로 부여된 체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육체로 감각한 모든 것을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분유지식이 조명해 줌으로 인해 모든 것을 진리대로 인식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14:10)”내 안에 계신 아버지라고 말씀하신 것이 성경에 7회에 걸쳐 기록되어 있고, “내 말이 스스로 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14:10)”  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곧 아브라함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실지로 아브라함은 이미 여러 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자기의 영혼의 지성에 새겨져 모든 생각과 감각의 표상들을 조명해 줌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본유지식의 조명과 같은 역할을 해서 완전하게 조명해주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바르게 조명해줌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의지를 드러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재물로 바치라 명령에 조금도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지 않고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있어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 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자주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우리의 영혼의 지성에 새겨짐으로 인해 영혼을 점령하고,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인 옛 사람대로 조명을 받아 우리의 영혼의 지성에서 지식을 가지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온전히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이런 사람이 되어 여러분 앞에 서서 진리만을 선포하고, 이 진리를 통해 여러분의 영혼을 새 사람으로 지어져 가는 놀라운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1] 고전 2:3 “너희 가운데 거할 때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2]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다양한 종교 가운데 자기의 기호에 따라 종교를 선택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택하여 백성을 삼은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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