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기둥

영혼구원1, ( 벧전 1:9 )

생명있는 신앙 2013. 1. 29. 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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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 1:9)

 

1. 복음이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복음이라는 말은 기쁜 소식, 복된 소식이라고 합니다. 이 복된 소식은 예루살렘에서 발하여( 24:47) 사람의 귀에 전파되고 다시 사람의 입에서 발하여 귀로 전파되는 반복적인 전파에 의해 사람에게 전해져 왔습니다.

사람의 귀에 전파된 복음은 사람 영혼의 지성에 새겨지고, 지성에서 조명하는 작용적인 역할에 의해 사람으로 하여금 복음에 대한 자기지식을 생성하게 합니다. 이렇게 생성된 지식이 사람의 전인인 마음에 반영되어 복음을 인식하게 되는데, 사람이 감각하거나 지식의 궁구를 통해 전인에서 인식을 갖는 과정은 영혼의 지성과 감성을 거처 사람의 전인의 대표 기관인 마음에 반영하는 아주 신비스러운 작용입니다사람은 영혼과 육체가 결합하여 하나의 전인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영혼과 육체는 각기 인격을 가지고 있고, 각각의 역할에 따라 충실히 작용함으로 전인 안에서 유기적인 하나의 작용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을 통해 인식하는 모든 지식은 자기 영혼의 지성에서 자기 지식으로 생성되어 영혼의 감성이 감각을 가짐으로 지각되고 지각된 지식이 전인의 마음으로 반영하여 비로서 인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이 사람에게 인식될 때 영혼과 육체의 작용적 기저는 이와 같습니다.

사람이 귀를 통해 복음을 듣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행위가 예전과는 다른 변화된 사람으로 드러나는 행위에 대한 지식을 봄으로 느끼게 된 것을 감각과 함께 표상화하여 영혼의 지성에 반영합니다영혼의 지성은 반영된 그 표상들에 관한 일치한 지식을 찾기 위해 자기가 가진 지식을 조명하게 됩니다. 이때 자기에게는 이미 일치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그 지식에 의해 곧바로 감성으로 반영하고 그 지식을 전인의 마음에 반영하여 인식하게 합니다. 그러나 전혀 새로운 행위와 지식을 귀로 듣거나 눈으로 보게 됨으로 지성에서 그 보고 듣는 표상에 관한 지식을 조명 받지 못하면 지성은 비슷한 지식을 생성하게 됩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일이 분명히 있었던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가인이 하나님을 만나고 그가 만난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에서 드러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가인은 자기가 만난 그 하나님을 실재 그대로 인식하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은 가인이 인식하는 하나님은 말씀하신 하나님이시지만 그 하나님에 관한 바른 지식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부터 나타나기 시작했고,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아벨을 죽이거나,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하고 떠나가버리는 것에서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두 제사의 구별은 하나님을 아는데 있습니다. 가인이 아는 하나님은 가인의 지식에서 드러나 있었기 때문에 그가 인식하는 대로 제사를 드렸고, 아벨이 아는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아벨의 지식에서 드러났습니다이것은 가인의 영혼의 지성에서 조명하는 지식이 가인과 아벨은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음을 받은 인류가 생산한 첫 아들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의 작정에 부합하는 그들의 본성대로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작정과 관계하여 가인은 본 모습대로 아벨은 본 모습대로 드러나도록 하셨습니다두 사람은 한 어머니의 뱃속에서 자라고 한 아버지로부터 태어난 아들이지만 완전히 구별된 사람입니다. 형상과 성격 그리고 행동과 작용적인 인식능력이 구별될 수 없이 동일하게 작용되는 사람이지만 가인은 허락에 의해 태어났고, 아벨은 아담을 지으실 때부터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까지 그리스도안에 작정된 작정된 아들이었습니다.

작정은 창세전에 이미 견고한 계획으로 아담으로부터 그리스도에게까지 완전하게 세우셨기 때문에 특별한 섭리가 아니고는 바꾸어질 수 없습니다. 여기에 특별한 섭리마저도 작정에 포함되기 때문에 작정과 허락, 곧 허용적 작정에 의한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서는 변할 수 없는 창조의 질서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질서에 따라 가인과 아벨은 태어났는데 가인은 허락에 의해 태어난 사람인 반면 아벨은 작정에 의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작정은 하나님의 창조의 중심이 되는 계획이고, 허용적 작정은 창조로 말미암아 생겨난 피조물들이 변화를 일으켜 작정으로 말미암은 질서를 무너뜨리는 부조화가 발생하였을 경우로 인한 결과들을 허락하심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함으로 인하여 일어난 결과적인 사건과 그 사건으로 인하여 일어난 모든 것으로, 사람들은 죄인이 되었고, 죄인으로 말미암아 일어날 모든 일들을 미리 아시고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최초 인류 아담과 하와의 범죄가 가인을 낳게 했고, 가인은 모든 타락한 죄인의 시조가 된 것입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가인이 직접적인 원인의 죄인은 아닙니다. 그는 죄의 열매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죄의 열매로서 생산한 모든 아들과 딸들이 동일한 죄의 열매입니다. 이 죄는 타락한 사람에게 솟아나는 정욕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
하지만 세상은 하나님의 작정을 중심으로 창조가 완성되는 것입니다비록 최초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허락된 사건들이 발생할지라도, 그 허락은 반드시 작정의 결과에게서 나오고 또한 작정도 역시 허락으로 말미암은 결과에서 성취되어 갑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에게서 태어난 가인과 아벨이 태어났고, 가인은 허락으로 말미암은 사람이고 아벨은 작정에 의한 아들로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간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작정으로 말미암은 아들이 허락에 의해 얻은 아들 가인에게 죽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다른 아들을 주셨는데 그가 셋 이었습니다.
분명히 아벨은 하나님 창조 작정에 의해 태어난 사람이지만, 아담과 하와의 범죄 때문에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 반드시 드러나는 피조 세계를 오염시켜 버렸습니다. 이처럼 인류의 조상 자신이 오염됨으로 세계가 오염된 것이지 자신은 오염되지 않고 세계가 오염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오염되었기 때문에 그들로 말미암아 태어난 아들들도 오염된 상태로 태어났고 그가 부모로부터 물려 받은 결과는 그의 영혼의 상태에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

1)    하나님의 창조와 사람

 

자신의 존재의 구성이 영혼과 육체의 결합으로 구성되었음에도 자신 안에 영혼의 상태를 인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각종 과학의 연구를 이용한 의학이나 생물학, 인체 과학을 통해서도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고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원자력을 이용한 방사선 검사를 통해서도 영혼은 결코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과학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영혼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과연 영혼은 존재에 대한 만족시킬 만한 답이 없는가요?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기독교의 존재는 허구라는 것을 잘 알 것입니다
.
기독교는 영혼에 관심을 갖는 존재이며, 영혼을 구원하는 종교이고, 교회가 집중하는 모든 일은 바로 영혼 구원에 있습니다.

육체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직접적으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생물학적인 과학이나 혹은 의학적으로나 사멸해가는 물질을 되살리는 기능은 없는 것입니다. 유일하게 한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영혼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혼을 어떻게 살릴 수 있습니까
?
그것이 바로 복음뿐입니다.

복음이 아니고는 결코 영혼을 살릴 수 없고 영혼을 살리지 않고는 사람의 구원을 말할 수 없습니다. 영혼을 살렸을 때 육체의 삶 곧 사람의 인생의 변화가 있고, 그 삶은 최초에 지음을 받은 창조주의 목적에 따라 살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영혼을 구원하는 종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영혼을 어떻게 구원하는가?” 그 작용에 관하여 성경이 분명히 언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읽은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구체적인 지식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지식과 사람의 지식은 지식을 언어로 변화하는 같은 코드를 사용하여 언어로 변환된 지식이지만, 사람이 성경의 말을 본래의 의미대로 인식하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이것을 가장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는 것이 가인과 하나님에서 분명히 볼 수 있고[1],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라( 8:47)”라고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사람과 들을 수 없는 사람을 구분하심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말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지식으로부터 말씀으로 나온 것이고, 사람의 말은 사람의 지식에서 생성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지식과 사람의 지식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식으로부터 나온 말씀을 사람의 지식으로 이해하려고 할 때 사람의 자기지식이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하게 합니다. 가인이 하나님을 만났을때 그의 영혼의 지성에는 하나님의 지식이 없고 자기지식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자기지식으로 이해했습니다. 사람의 자기지식은 하나님의 지식과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자기지식대로 사람이나 혹은 성인중의 하나로 인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지식을 가져야만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게 되고, 가인이 자기가 만난 하나님을 참 하나님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지식을 가지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참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일반적인 종교관으로 으로 이해하거나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교훈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지식을 가지심과 같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도 자기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피조물인 사람이 어떻게 지식을 가지고 지식을 내는지 구조적인 작용 기저에 관해서 알아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흙으로 육체를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사람이 생령이 되게 했습니다
.
여기에서 생령인 사람의 역할에 관해서 알아야 합니다
.
처음 만들었을 때 사람은 어떤 상태로 있었을까요
?
누워있었을까요?

아니면 세워져 있었을까요?

이런 피조물인 사람이 놓여져 있는 자세에 관하여는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어떻게 활동을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연론자들은 사람이 활동하는 작용적인 기저를 순수하게 자연적이라고 말합니다. 자연히 생각하고, 감각에 대한 반응하는 활동을 한다고 합니다. 태어날 때 부터 자연적으로 감각을 가질 수 있는 상태로 태어났고, 그 감각에 대하여 자연적으로 인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의학적으로나 생물학적인 연구에 의하면 뇌의 역할과 사람의 몸 속에 있는 호르몬의 영향에 의해 자연적으로 인식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물론 이 말은 절대적으로 틀리지 않습니다. 자연주의자들의 말은 마치 진리처럼 들려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짐승이나 살아서 활동하는 생물체에 대해서 적용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을 살아 활동하는 짐승과 같은 생물체와 같은 것으로 보고 심지어, 사람은 한 생명체의 진화로부터 시간의 흐름에 의해 변화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을 진화론이라고 합니다
.
그러나 사람의 활동은 생물체가 활동하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 사람은 팔을 뻗어 내밀어 손으로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움직입니다. 단순히 생명 활동을 하는 짐승들과 다른 그 무엇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활동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사람의 활동은 짐승들과 모든 생물체들이 감각에 의한 활동하는 것과 다른 독특하게 사람만 할 수 있는 활동을 합니다. 그것은 자기 안에 지식을 가지고 그 지식에 의해 활동하는 능력입니다. 그것이 지식으로 사회를 구성하고 문화를 창조하며 물질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가졌고, 심지어 그 지식이 호르몬을 작용시키는 기능적인 역할을 하여 총 제적으로 사람의 활동을 제어하는 지식을 생성하고 지식에 대한 지각을 가지고 그 지식을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지식으로 객체들과 소통하고 관계를 발전시키며, 문화를 만들어내고, 세계와 우주, 물질세계를 넘어 형이상학적인 범위까지 지식화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지식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을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
지식이 없는 사람은 살아서 활동하는 것이 짐승과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짐승과 같이 감정으로 살수 있으나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가 가진 지식의 범위 내에서만 살아가는 것입니다
.
결국 지식은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이 되게 하고, 문화를 창조하고, 사회를 구성하는데 있어서 사람다운 사회를 조직하게 합니다.

지식이 없는 사회는 힘과 세력의 감정에 의해 조직될 수 밖에 없고 감정에 의해 움직이는 짐승들과 같습니다. 어떤 상태에 있든지 사람은 지식에 의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지식이 하나님의 형상다운 사람을 만드는 것이지만 사람이 어떤 지식을 가졌느냐에 따라 사람의 종류가 달아집니다.
이런 부류들을 우리는 수없이 많이 보았습니다. 한 예로 공산주의자들은 유물사관이라는 지식에 잡혀 있고, 민주주의 자들은 모든 사람의 개개인의 인격을 존중하며 국가의 조직적인 통치의 힘이 국민에게 있다는 사상으로 사람의 인격존중이라는 지식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람의 생명 활동의 구조에는 반드시 지식의 역할이 있습니다.

아주 간단한 기쁨과 슬픔과 추상적인 의미를 가진 지식 까지도 감각을 가지면 그것을 지식화하고 지식은 사람의 육체에서 반응하도록 합니다. 곧 감각을 지식화 해서 인식을 가지는 존재가 사람입니다. 이것이 짐승과 완전한 구별을 가진 피조물인 것입니다. 놀랍게도 사람이 이런 지식에 의한 생명 활동으로 인해 창조주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하나님을 인식하는데 있어서는 하나님의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결국 사람은 지식에 의해 생명활동을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아직 감각을 갖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해하기 쉽도록 이제 막 태어나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는 어린아이를 생각하거나, 의식을 잃고 침대에 누워 잠든 채로 있는 사람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겠습니다. 이 사람이 의식활동을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 까요? 어린아이에게는 성장해서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 지적인 능력(인지능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또한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에게는 의식이 돌아오도록 깨어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처음 지음을 받은 아담과 하와가 지음을 받은 그 순간 곧바로 활동을 했다고 생각을 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이 활동을 하도록 어떤 특별한 일을 하셔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
처음 지음을 받은 사람은 그들이 살게 될 터전 위에 놓여졌고, 아직 활동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숨도 쉬고 온몸에 피도 흐르고 활동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가 되었으나 아직 감각을 갖지 못하고 활동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도 있어서 조금도 흠이 없이 완전한 준비를 마친 상태로 놓여져 있지만 활동만 하지 않은 상태로 놓여져 있습니다
.
자연론자들은 사람이 자연적으로 태어났고, 원인자로 부터 진화되었기 때문에 완전한 상태에 놓여져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창조론은 바로 이점에 있어서 분명한 주장을 달리합니다.

지음을 받은 사람은 지음을 받은 그 상태에서 자연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지음을 받은 후 하나님께서 활동하게 했을 때, 비로서 활동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육체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활동하도록 하셔야 했습니다. 그것이 곧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2] 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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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에게 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지식이 언어로 변환되어 사람을 향하여 말씀하여 진 것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1:28)”
이 명령은 하나님의 지식이 말씀으로 변환되어 사람의 육체의 감각을 통해 영혼의 지성으로 들어왔고, 그때 비로서 지음을 받고 부여 받은 하나님의 형상에서 지성에 들어온 하나님의 말씀을 조명하였고, 조명을 받은 그 대로 사람이 비로서 자기지식을 생성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이렇게 영혼의 지성에서 자기지식을 생성하고 그 지식을 감성에 반영하여 감각됨으로 지각을 갖고 한편으로 지성에 새겨지고 다른 한편으로 사람의 전인 기관인 의지의 집인 마음에 반영되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자기인식을 가진 것입니다. 이런 지식은 철저히 하나님과 피조물인 사람을 진리대로 인식할 때만 가지는 지식입니다.

 

지성과 지식


우리는 여기에서 아주 중요하게 살펴 보아야 할 것은 영혼의 지성에서 일어난 작용에 관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진화론 자들이나 자연주의자들에게서 사람은 자연스럽게 자기지식을 생성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사람이 되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지식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철저하게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으셨기 때문에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피조물이라는 정확한 정의를 벗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피조물은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지으신 분의 조력에 의해서만 할 수 있습니다. 지식은 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심으로 지식을 주셨기 때문에 비로서 영혼의 지성에서 작용이 일어나 사람이 자기지식을 생성하게 되었습니다.

지음을 받은 사람은 완전한 상태로 지음을 받았고, 그가 생명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놓여진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 활동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활동은 지음을 받은 상태에서 자연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지식을 생성하고 지각한 다음 지식에 대한 인식을 가졌을 때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지식을 가질 수 있도록 지식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지음 받은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것이었고, 그 말씀이 생육하고~다스리라( 1:28)”라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은 사람의 육체의 오감 가운데 어느 기관에 의해 감각되었고 그 감각은 곧 바로 영혼의 지성에 반영되었습니다. 지음을 받은 사람의 영혼의 지성은 비로서 처음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육체의 오감에 의해 감각이 반영되었기 때문인데, 그 감각이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지성은 그 말씀을 그대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성이 감각된 말씀을 인식하기 위해서 영혼의 감성에서 지각을 갖고 지각된 지식이 인식할 수 있도록 전인의 기관에 반영 되어야 하는데 감각된 표상 그 자체로는 인식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곧 그 감각의 표상을 밝혀 그 정체에 대한 지식을 자기지식으로 생성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영혼의 지성은 육체의 오감으로부터 감각된 표상을 반영받게 되면 그 표상에 대한 지식을 내야 하는데, 자기 안에 감각된 표상에 대한 지식이 없으므로 모든 지식을 가진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셔야만 사람이 그 표상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인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지식을 하나님의 형상 안에 본유지식으로 부여하셨고, 그 본유지식에는 하나님에 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창조에 관하여, 사람에 관하여모든 것을 조명해 줄 수 있는 지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육체가 감각하고 표상을 지성에 반영하면 본유지식이 조명하여 표상에 대한 정체를 밝혀주고 지성은 본유지식이 밝혀준 대로 자기지식을 생성하여 영혼의 감성에 반영하고, 감성은 지식에 대하여 지각을 가지고 전인에 반영하여 인식하게 합니다
.
이렇게 지성은 지식을 생성하는데 아무런 근거도 없이 자기 스스로 지식을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표상에 대한 정체를 밝혀준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본유지식의 조명에 의해 지식을 생성하는데 이 지식이 곧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주신 본유지식의 조명을 받지 아니하고는 결코 지식을 가지지 못하는데, 자연주의자들이나 진화론 자들은 사람이 어떤 지식의 조명이 없이도 스스로 지식을 생성하여 가질 수 있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고,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에서 조차 이와 같은 지식의 정체에 대해서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창조와 사람의 지식에 대한 의문조차도 가지지 않고 자연주의자들의 주장과 같이 사람이 창조로부터 자연적으로 스스로 지식을 가진 존재로 태어났다는 관념을 가지고 아무런 주장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런 기독교 안에서 조차 관심이 없었던 사람과 지식에 관한 분명한 지식을 인류의 조상의 첫 아들 가인과 아벨에게 분명히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가인과 아벨을 구별하여 하나님의 제사에서 밝혀 주셨고, 하나님을 대면한 가인에게서 분명히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 나타난 지식에 관한 구별은 그들이 우연히 자기의 지식대로 제사를 드렸는데 그 결과가 구별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에 관하여 구별된 지식을 가진 두 사람의 행위를 나타냈고,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아주지 않은 것은 가인이 하나님을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지식대로 하나님을 향하여 제사를 드린 반면, 아벨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가 무엇인지 알았고, 하나님을 알고 뜻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원하는 대로 제사를 드린 결과였습니다. 그러므로 제사에서 나타난 하나님에 관한 가인의 지식과 아벨의 지식이 뚜렷이 구별되었고 그 결과도 다른 것입니다. 또한 가인은 하나님을 하나님 본질대로의 지식을 가진 것이 아니라 자기의 지식대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졌고, 하나님을 제멋대로 아는 그 지식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떠나는 실수를 범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가인이 하나님에 대하여 잘못된 지식을 가진 것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실지로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무소 부재하시기 때문에 피조물이 하나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가인의 의식에는 하나님이 어느 한 지역에 국한해서 거하시는 분으로 인식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에 관한 바른 지식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훗날 가인에게서 나타난 지식들이 타락한 사람들의 의식 속에 지속적으로 생성 되어짐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약속을 하실 때 십계명중 1~3계명이 요구하셨습니다.

 

영혼

지금까지 우리는 영혼 안에서 일어난 지성의 작용에 관하여 설명을 듣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태어나서 세상에 존재하는 상태로 사는 동안 영혼에 대한 인식을 갖지 못한 상태로 살다가 죽음을 맞이 합니다.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영혼의 존재에 관한 질문을 하면, 분명하게 답할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이 영혼과 육체의 결합으로 말미암아 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육체에 대한 감각은 있으나 영혼은 영이기 때문에 감각을 가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한가지 정보를 듣게 됩니다.
육체에 감각되지 않은 존재에 대해서 존재 여부를 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입니다.

영은 육체로 감각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존재여부에 관하여 논란이 있습니다.

불신자들이나 이방인들은 항상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육체에 어떤 감각으로도 느낌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지거나 접촉한 것이 아니고, 냄새를 맡은 것도 아니며, 눈으로 보지도 않았습니다. 심지어 가인처럼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않았습니다. 물론 맛으로 하나님을 감각 한다는 것은 더욱더 불가능한 일이지요. 아무튼 그들은 하나님을 감각으로 느낌을 가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설령  감각을 가진다 해도 그들이 느끼는 감각대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지 못하고 가인처럼 하나님 아닌 다른 하나님을 지어내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없거나 다른 하나님일 뿐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자기 안에 있는 자기의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 조차 인정하지 않습니다. 철저히 사람은 육체뿐인 상태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으므로 그 처한 비극적인 상태를 모르고, 비참에 처한 운명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혼은 그 사람들의 자기지식을 생성하는 일을 하고 그 생성된 지식을 보관하고 반복적인 감각에 대한 인식을 가지도록 조명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지식에 관한 기능적인 역할을 영혼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혼이 없는 사람은 의식을 가지지 못하고 영혼과 육체가 단절된 사람도 의식을 가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최초 창조 되었을 때, 영혼과 육체로 지음을 받았고, 이 둘이 결합하여 하나의 개체인 완전한 존재로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람은 육체와 결합된 체로 이 세상을 생존하여 살다가 노화되거나 혹은 사고, 질병 등의 원인에 의해 죽을 때 영혼은 육체를 벗어남으로 분리되게 됩니다. 이때 영혼이 빠져나간 육체는 썩어 흙이 되고 영혼은 영원의 세상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영원의 세상으로 돌아가는 영혼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영혼에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식이 없습니다. 예수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천사가 무엇인지도 아는 지식이 없습니다. 이런 영혼이 천국에 이르게 되었다면 그 영혼이 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아하
!
육체로 살아 있는 날 동안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지지 못한 영혼이 영원한 세상으로 돌아갔을 때, 그 영혼이 느끼는 충격적인 사태를 결코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
하나님을 모르고 무질서하며 조화롭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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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지 제멋대로 자기가 가진 지식대로 행동하게 되니 고집스럽고 제멋대로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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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영혼이 천국을 난장판 만드는 것은 물론 결코 질서를 잡을 수 없는 혼란스런 곳이 되고 말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천국의 안녕과 질서를 위해 하나님을 모르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영혼을 부득이 지옥에 가두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지옥은 영혼으로 하여금 자기가 가진 자기지식대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무시무시한 고통을 주어 고통 속에 머물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꺼지지 않은 불 속에 쳐 넣는 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영혼은 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식으로 지식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형이상학이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영혼의 뛰어난 능력 때문에 육체를 벗어난 영혼들이 영원한 세상에 이르렀을 때 심각한 위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영혼으로 하여금 지식을 더 이상 생성하지 못하고 가지지 못하도록 고통 속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고통을 느끼는 동안은 영혼은 다른 지식을 생성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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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타락과 죄


사람은 육체와 영혼의 결합에 의해서 완전한 전인으로 지음을 받았고, 영혼의 지성에는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본유지식이 빛을 발하여 사람의 육체에 찬란하게 반영되므로 참으로 아름다운 존재가 되고 모든 피조물보다 탁월함이 드러냈습니다. 본유지식의 조명은 지성에서 지식을 생성하고, 생성된 지식에 대하여 지각하여 전인에 반영함으로 육체로 하여금 지식대로 행하게 하는 질서로움과 각각의 기능들의 조화로운 작용에 의한 아름다움으로 빛나게 하고 사람의 탁월함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피조물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질서를 깨뜨릴 수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셨기 때문에, 그 깨뜨림으로 인하여 더욱 아름다움을 드러내도록 작정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에게 주신 행위명령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불순종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하나님의 형상은 깨어졌으며, 형상 안에 있는 본유지식을 잃어버렸으며, 지성은 즉시 어두움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4;18, 59:9).
아담의 영혼의 지성에는 타락하기 이전까지 본유지식에 의해 생성되고 지각된 지식만 가지게 되었고, 그 지식은 지극히 작았으므로 계속되는 삶 속에 부딪히는 수많은 상황들과 많은 객체들에 대한 조명을 받지 못하므로 지식을 가질 수 없거나 왜곡된 지식을 생성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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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한 아담은 즉시 한가지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앞에 다가오시는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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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순종하기 이전에는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본유지식의 조명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감각할 때마다 무한히 기쁨을 가졌으나, 이제는 기쁨의 감각은 송두리채 사라지고, 전혀 새로운 두려운 감각이 일어났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소리는 듣고 감각하여 표상을 영혼의 지성에 반영된 상태에서 본유지식의 조명을 받을 수 없으므로, 이미 가졌던 지식의 조명에 의해 지식을 생성하지만,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감각되시는 것이 언제나 일정한 상황이 아니므로 매시 마다 표정과 감정, 느낌이 동일 할 수 없는 다른 감각 때문에 것입니다.  상황이 달라진 표상들에 의해 무지와 결함이 함께 반영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불순종한 것에 대한 진노하실 것에 대하여 지성이 지식을 생성하여 영혼의 감성에 반영하므로 감성에서는 불순종에 대한 진노와 무지와 결함을 함의하여 생성된 지식에 의해 두려움을 지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지각된 지식은 그대로 전인에 반영함으로 두려움을 인식하게 하므로 그 인식으로 인하여 두려워 떨게 되어 자신을 감추려 한 것입니다.

 

이렇게 본유지식을 상실함으로 인하여 영혼의 지성에 어두움이 지배하게 되자 사람은 더 이상 본유지식의 조명으로 말미암은 진리의 지식을 생성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범죄한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서 생성한 모든 지식은 무지와 결함을 함의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지식은 조합되고 만들어지되 결코 진리에 이를 수 없는 거짓된 지식 뿐이었습니다.

사람은 더 이상 진리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고, 그의 영혼의 지성은 언제나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거짓된 지식만을 생성하며, 이 지식에는 하나님의 관념이 전혀 새겨지지 않은 거짓된 죄의 본질들만 생성합니다. 이렇게 지성에서 생성된 지식인 죄의 본질들을 감성으로 지각하고 전인에 반영하여 지식대로 행하는 모든 행위에는 선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무질서하고 조화롭지 못한 더러운 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8:21)”이라고 했고, 사도는 로마서 3: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라고 말했으며, 예수께서는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자요 그 속에 진리가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 장이요 이는 저가 거짓말 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8:44)”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가인은 하나님을 만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자기의 판단과 의지대로 행동한다. 그것은 그가 이해하는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보이신 계시를 그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원인은 가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조명하는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체계와 같지 아니한 것이다. 

[2] 신명기 8:3, 4:4,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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