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for Gospel, (로마서 1:1)
복음은 긴급하게 전하여 져야 할 소식입니다.
오늘도 쉬지 않고 복음을 들고 길을 나서서 집집마다 대문을 두드리고, 문이 열리면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소식을 전하러 왔습니다. 복음을 들으세요." 라고, 말하며, 병상에 누워있거나, 길거리에서 만나는 사람이나 혹은 직장에서 동료들에게 하나님께서 보내신 복음을 전해져야 합니다.
이 기쁜 소식은 촌각을 다투지 않고 긴급하게 전하여져야 합니다.
사람마다 주어지는 기회는 다르지만,
어떤 사람에게 한번 들려지고 다시는 듣지 못하고 이세상을 하직하는가 하면,
매일 복음을 접하고 복음과 같이 살면서도 진작 복음을 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며,
평생 동안을 복음을 가진 사람과 아침을 나누고, 함께 잠자리에 들며, 한 침상에서 꿈을 나누어 꾸며, 한울타리안에 함께 살면서도 한번도 복음을 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고, 그 복음을 듣고 변화받는 일은 반드시 죽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누구든지 복음을 말해야 하고,
외쳐야 하고,
드러내야 하며,
들려지며 설명되어야 합니다.
복음이 사람의 영혼에 심겨지고,
복음으로 사람이 거듭나고,
사람을 살게하는(복음의 역동성)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영혼은 사람에게 있지만 무형적으로 유형적인 육체와 하나인 실체이기 때문에 육체안에 있으면서 육체로하여금 지적 삶을 표현하도록 근거를 제공하는 기관입니다.
영혼은 그릇과 같아서 그 안에 무엇이 담기느냐에 따라 사람의 품격이 달라집니다.
진리가 담긴 사람은 진리의 사람이 되고,
거짓이 담긴 사람은 거짓이 됩니다.
복음이 담기면 복음의 사람이 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전해진 복음이 받은 사람의 영혼에 심겨져서 복음의 사람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람은 영혼에 담긴 지식 정보로 행동하고 사고합니다.
사람이 행동하는 것은 지식 정보들의 유기적 활동이 육체로 드러나 표현되는 것이고, 지식들의 개체가 유기적 연산으로 행동하려는 지식을 찾거나 생성하는 것이며, 지적표현은 자기존재 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시고,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영혼이 지식을 가지고 그 지식으로 살도록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영혼에 있는 지식은 그 사람의 삶의 활동 범위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흔히 나누는 말로 "사람은 아는 만큼 행동한다"라고 합니다.
비유를 하자면, 들에 있는 짐승들은 육체로 활동하며 살지만 영혼이 없기 때문에 사고하거나, 지적행동을 하지 못하고, 지적행동으로서 가장 중요한 의식인 "자기의 존재의식"을 가지지 못합니다.
사람과 동물과의 다른점은 영혼을 가졌느냐, 가지지 않았느냐, 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영혼을 부여하시고, 지적인 존재로 지으신 것이 하나님의 형상이며, 사람은 자기의 영혼안에 가진 지식만큼이나 혹은 지식의 종류에 따라 지적인 존재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영혼에 없는 지식으로 행동하거나 사고할 수 없으며,
거짓의 지식뿐인 영혼이 진리의 삶을 살게할 수 없고,
진리 지식뿐인 사람이 거짓으로 살수 없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영혼안에 있는 지식으로 산다는 것은 그 지식의 한계내에서 완전히 자율적이고, 자유의지를 가진 피조물인 동물과 구별된 탁월한 존재입니다.
처음 지음을 받은 사람은 피조물로부터 구별된 완전히 자율적인 존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지식을 생성하고 그 지식으로 행동하도록 지으셨으나 그 행동에 제한을 주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자기지식을 생성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의 조명으로 말미암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안에는 이미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지식들이 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지시한 어떤 과일에 대해서 명확하게 인지하려면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과일과 아담이 인지한 과일이 동일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아담이 동일한 사물을 동일한 코드에 의해 동일하게 지적인 명칭이나 행동의 사실들을 인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코드는 사과라고 하는데 아담의 지식코드로는 포도라고 하면 하나님과 사람간의 소통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고의 지적코드와 동일한 지식을 가지도록 하나님께 있는 본래지식을 사람에게 부여하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안에 있는 본래지식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독특한 하나의 언약을 맺으셨는데 그것이 바로 행위 언약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시는 기본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하시니 만물도 선하고, 하나님께서 완전하시니 만물도 완전하게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완전과 선은 수레에 달린 두 바퀴이고, 수레를 끄는 것은 지식입니다.
이것이 완전한 조화를 이룰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 세상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세가지 원칙에 의해 사람을 지으시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온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게 했습니다. 이 세가지 원칙 중에 어느 하나라도 본질로부터 벗어나 변질되거나 왜곡되며, 흠이 있을 경우 사람 전체는 심각한 부패로 빠져 들게 됩니다.
선은 곧 질서롭고 조화로운 것이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완전함입니다.
이는 자율적이며 절제를 의미하는 말로 피조물이 함의하는 행위능력으로 선과 악을 행하는 능력입니다. 이중 어느 한편만을 행하는 편향된 기능만 가진다면 이는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수동적인 존재가 되어 완전하지 못한 존재인 것입니다.
세 번째는 선과 완전을 이끄는 지식입니다.
수레 바퀴가 한편은 선하고 다른 한편은 완전하기 때문에 질서롭고 조화로운 상태에서 완전히 자신의 능력에 의해 나오는 것이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피조세계 존재의 원리입니다.
피조세계는 이 원리에 따라 하나님께서 사람의 영혼에 부여하신 하나님의 형상안에 있는 본래 지식에 따라 행동하고 사는 것이 완전하게 자율적인 존재이면서 피조물되는 것입니다.
피조물이란 자기 스스로 삶을 시작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피조물은 창조자와 구별됩니다.
창조자는 존재의 근원이 자기자신에게 있으나, 피조물은 존재로서 만들어져야 하고, 낳아야 하고, 있게 해야 하고, 되어져야 하기 때문에 자기에게 존재의 근원이 창조자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피조물과 창조자와 구별입니다.
완전하게 만들어진 사람이 선하게 존재하도록 시작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생명이고, 그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안에 있으며, 말씀은 지식을 함의합니다.(요1:1~4)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생명에 담긴 지식은 두 가지였습니다.
그것이 선악과를 동산 중앙에 두어 언제든지 그 나무를 볼 때 마다 자기 행위를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순종하며 절제하도록 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피조물인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무시하여 동산중앙에 있는 선악과를 따 먹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살게 하는 생명이신 하나님 말씀을 스스로 거절한 것, 곧 하나님 말씀을 떠난 것입니다.
그 한 행위로 인하여 그에게 나타난 결과는 생명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생명을 잃어버린 상태가 되자 실지로 육체의 행동을 제어하는 지각까지도 혼동을 초래하게 되었고 결국은 정욕이 일어났습니다.
타락한 사람은 그 정욕으로 죄의 열매들을 생산함에도 제어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고, 하나님의 창조 계획과는 무관한 무수히 많은 하나님을 알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전혀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이 태어나게 되었으며, 일 인하여 사람들에게는 심각한 비극이 밀려오게 된 것입니다.
처음 조상 아담은 첫사람 가인과 아벨을 낳았습니다.
이 두사람에게 나타난 현상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진 사람과, 하나님을 만나고 대면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본성 그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태어났습니다.
그들이 가인과 아벨이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과 대화했습니다.
자신의 행위에 대한 경고도 받았고, 범죄후 심판으로 말미암아 두려움에서 위협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위로의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제 멋대로 하나님을 상상하여 대적하였고, 심지어 동생 아벨을 죽이고 하나님을 떠나 영원한 죄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사람에게 나타난 것은 자기 절제능력 상실과 영혼의 지성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을 뿐만 아니라 갖지도 못함으로 하나님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름에서 오는 결과는 이 세상을 피로 물들게 하는 악의 소굴이 되고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우며, 살인하고 미워하는 광란으로 세계가 되게 하였습니다.
최초 조상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고 거부함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누구라도 하나님의 생명으로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죄를 범하였고 하나님을 떠나 있으며 무지와 어두움에 빠져 있는 정욕으로 인하여 죄의 열매로 태어났습니다.(롬3:28)
이런 저주 아래 있는 사람에게 복음이 들어 왔습니다.
복음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범죄한 사람의 죽음을 대신 죽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라고 말씀하심과 같이 사람으로 영생을 얻게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대신 죽어주심으로 사람을 살리려는 것입니다.
복음의 참된 의미는 "죽어야 할 사람을 대신해서 하나님께서 죽으시고 사람을 살게하신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사람이 죽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죽으셨고, 하나님께서는 이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죽지 말고 생명에 동참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지식이며 생명 그 자체 입니다.
이 지식은 사람들이 육체의 귀로 듣거나 눈으로 보거나 혹은 만져서라도 감각되어져야 하고 그 다음 하나님의 성령이 조명하셔서 그 사람의 영혼에 새겨져야 합니다.
이 지식은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안에 있는 사람의 지식과 코드 자체가 다릅니다.
이 지식은 본래 자연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의 지식과 결코 융합되지 않습니다.
이 복음의 지식이 사람의 영혼안에 심겨지면 그 지식과 동일한 코드인 지식들이 새롭게 조직되어져야 합니다. 이미 가진 타락의 본성으로 비롯된 지식들과는 유기적 연합이나 연산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반드시 생명이 있는 지식들을 새롭게 받아야 하고, 이 복음 자체가 새로운 지식을 추구하기 때문에 사람은 복음의 지식안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 복음으로 인하여 인지하는 능력이 생기면 비로서 자기의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되고 이미 살고 있었던 지난날들의 자신을 볼수 있게됩니다. 이 능력은 복음의 눈이 자신의 영혼안에 있는 복음이 아닌 지식들의 정체들을 보게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사람을 새롭게 태어나게하는 새사람을 조직하는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사람의 영혼에 심겨지기를 바라고 있고, 복음을 받은 사람은 이 지식은 다른사람의 영혼에 심겨지도록 부지런히 전해야 하는 사명이 있게 됩니다.
이 복음이 달음박질하여 우리에게 들려져야 합니다.
이 복음이 사람을 살게 하는 하나님의 생명이고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2013, 02,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