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연구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롬1:16)

생명있는 신앙 2013. 3. 24. 19:47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나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것은 가장 치욕적인 범죄를 저지르고 처형당한 사람을 메시아라고 변증하고 다니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에게나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부끄러운 것이 복음이며 구원의 능력이라는 것은 성령의 도움이 아니고는 타락한 상태의 사람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지식입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아들을 보내셨고, 사람은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으며, 하나님의 아들은 본래 죽으실 수 없는 생명이시기 때문에 다시 살아나 부활하셨고,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시고 승천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복음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에는 엄청난 비밀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그 비밀은 정말로 충격적이고 놀라우며 사람으로서는 어떤 희망도 갖지 못하게하는 절망에 빠뜨리는 내용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죽인 것입니다.

이 충격적이고 놀라운 내용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느 누구도 구원을 보장받을 수 없는 완전하고 철저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벗을 수 없습니다. 원죄를 믿지않고 죄가 없다고 부인하는 사람도 사람이 하나님을 죽인 것에 대해서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사도 베드로의 말을 인용하여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를(행2:23, 36, 4:10, 5:30)"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까지는 충격적인 감각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며, 성자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의 영혼이 절대적인 확신하지 못하고, 사람과 동등한 존재적 인식을 가지기 때문에 더욱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죽인 것을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영혼에서는 이 사실이 충격적으로 지각되지 않기 때문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의인이, 좋은일하다가, 하나님꼐서 선한마음을 가지고 자기를 희생하여 죽으신 것 전도로 생각되는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말하든지 사람이 하나님을 죽였다는 사실에는 세상에 그 어떤 사건보다 더 충격적입니다.  

사람들이 이 충격적인 사실에 대해서 마음에 놀람과 두려움으로 받아들이고 인식할 때, 비로소 하나님앞에 죄인인 자신을 다시 발견하게 되고, 교회에 나아갈 때 마다 가슴을 찢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버렸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멸시하고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고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피를 쏟아내고 죽게 했습니다. 

실상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죽게 했습니다. 죽을 수 없는분을 강제로 죽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아들이 여러분에게 폭행하고, 죽여 버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와 같은 일은 사람이 행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죽인 하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행한 일을 모두 용서하시고, 그 일의 비밀을 말씀하셨고, 요한 사도가 말한 것 처럼 "영접하는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요1:11)"  

사람들은 십자가에 죽은 예수는 극악무도한 죄를 범하였거나, 아니면 불평등하고 불합리한 세상에서 힘없이 살다가 사람들에게 공격을 받아 힘없이 희생을 당하였든지, 권력을 잡은 사람들의 시기로 인하여 배척을 당하였다는 판단으로 불쌍히 여기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기들의 무지로 인하여 저지른 하나님께 대한 엄청난 폭거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버림을 죽임을 당했다고 측은히, 불쌍히, 긍흘히 여겨주며 눈물을 흘리는 많은 사람을 보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들은 예수 죽이는 일에 동참하지 않았고, 당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서로 소통하여 한마음으로 예수를 죽임으로 예수께서 수난을 당하셨다고 말합니다.
고난 주간을 만난 모든 교회들이 예수의 수난을 기리는 마음으로 자기들도 그 고난을 체험하려는 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들은 성경이 말하는 의미와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너무 문자적으로 해석한 나머지 참 의미를 간과하고 보이는 의미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 보다는 문자의 내용을 지나치게 추구하여 감추어진 비밀에는 충격적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동참하려는 마음을 갖는 다면 그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을 회개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마음을 찢고 모든 기쁨과 즐거움을 거절하고 재옷을 입고 석고대죄하는 마음으로 얼드려야 합니다. 2000년전에 사람이 하나님께 어던일을 행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 일은 나와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되면 억지로라도 내가 하나님을 죽였다 라는 마음을 가지고 자기의 마음을 찢는 고통을 경험하려는 진실한 마음으로 가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기 이전까지는 적대적이고, 증오심을 가지고 미워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고는 그의 십자가의 의미가 완전히 새롭게 이해되었을때, 본래 옛사람인 타락한 본성인 지식이 뒤바뀐 것이 아니었습니다. 옛 사람은 오히려 자기의 영혼 안에 그대로 남아있지만, 또 다른 지식이 자기영혼에 심겨지고 그 지식으로 새롭게 태어남으로 옛사람의 판단과 지식이 아닌 심겨진 복음의 지식에 의한 지각으로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사도가 자신을 통해 세상사람들에게 보여준 복음에 대한 인식은, 세상사람들이 볼 때 부끄러움이지만, 구원을 얻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을 분명히 경험하였고, 그것이 주는 기쁨은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바꿀수 없었습니다. 그의 영혼안에 복음이 심겨져 있고, 그 복음으로 말미암은 새 사람이 점점 자라고 있으며, 옛 사람과의 갈등으로 인한 오류로 부터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갈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는 자신이 유대인의 최고의 학부에서 수학하고 미래가 보장었으며,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는 사람으로서,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십자가를 멸시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미워하는 십자가가 자기의 삶의 모든 것으로 바꿔놓았습니다.

이 십자가가 그의 영혼에 심겨지고 성령께서 심겨진 복음을 조명하게 되자 사람이 하나님께 대하여 행한일이 지각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십자가에 죽이는 사람, 이 행위를 통해 그가 느끼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대하여 엄청난 죄를 저지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작정하여 존재하게한 하나님의 아들들로,  그 아들들이 죄를 짓고 정욕을 일으켜 지옥으로 갈 영혼으로 생산된 이방인들도, 함께 짝하여 하나님의 원수가 되고 하나님을 거절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무슨일을 했는지 말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지 않을 수 없엇습니다. 
이 회개의 복음이 선포될때 이를 믿는 사람들에게 나타는 놀라운 결과가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유대인 우월사살으로 유대인만 하나님의 지성소를 거닐수 있는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되었으나, 그들이 하나님을 십자가에 죽이므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구별이 없어졌습니다. 이제 어디에서든지 누구든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고 주로 고백하고 자기의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이제까지 죄의 정욕으로 말미암은 이방인들과 창세전에 작정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구별이 사라졌습니다. 
그것이 사람이 하나님을 죽인 이 엄청난 충격적인 사건이 복음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도는 이전까지 복음이 가진 능력이 무엇인지를 몰랐습니다. 
오히려 복음으로하면 하나님과 원수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영혼에는 세상 사람들이 이해 할 수 없는 성령의 조명하심이 그의 지성의 세계를 밝게 조명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엄청난 죄를 저지른 사람을 용서하시는 큰 은혜를 베푸신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에게 말씀하셨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하나님이심을 하늘의 보좌에 나타나 보이셨습니다. 그 보좌에서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자기의 지식과 학문을 바탕으로 볼때 자기의 행위가 가장 의로운 것이라고 판단하던 그것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어두움에 깊이 빠져 있었는가를 보게 되었고, 자기와 유대의 경건하다고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한 행위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인 그들이 하나님을 죽였던 것입니다.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 사실을 말하지 않을수 없었고,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사도가 "유대인과 헬라인이라고 말할 때", 본래 유대인 우월 사상 곧 선민 사상에 완전히 젖어 있는 사람이었던 때를 기억했을 것입니다. 

유대주의 입장에서 이방인 곧 헬라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버림을 받았고, 하나님도 없는 지옥에 갈 쓸모없는 존재들이며, 그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 존재하는 것은 행복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불행하고 비참한 존재들일 뿐이라는 사고로 가득채워져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매일 자신들이 드리는 소제와 경건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는 시간들은 이방인들이 따라갈 수 없는 절제된 생활이며 휼륭하고 본받을 만한 삶이였지만, 하나님도 없고 하나님에 대해 관심도 없었으며, 존재를 인정하지도 않았던 이방인들이 얼마나 하나님께 대하여 비참한 존재인가 생각했었습니다. 

이런런 점으로 볼때 이방인들은 버림을 받았고, 상대할 가치도 없는 존재이며,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거추장스러운 걸림돌들이었으며, 그들의 삶은 비참함 자체였을 뿐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성전에 들어가 보면 이방인에게 허락된 것은 거룩으로부터 분리되었으며, 수많은 금지구역이 있었고, 어떠한 상태에서든지 유대인의 구역을 침범하거나 하나님의 전에 있는 것들을 함부로 만질수도 없었으며 이런 규범들을 범하게 되면 인정사정 없이 죽어야 했으며. 그들에게는 인권이라는 것이 부여되지 않았고, 구원이 있다는 생각은 입밖에 꺼낼수도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하나님의 아들"관하여 이해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커다란 테마가 그의 영혼에 밀려오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복음이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도록 영혼을 조명하게 됨으로, 이방인이라는 존재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보였던 것입니다. 이방인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죄를 범하고 정욕을 일으켜 잉태하여 낳은 아들들로서 하나님께서는 이를 미리 아시고 허락 하심으로 세상에 있게 하셨으나, 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들의 반열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허락에 의해 태어난 죄의 열매들의 불멸하는 영혼들이 거할 별도의 구역을 만드셔야 했는데 그곳이 지옥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음을 조건으로 자기들의 죄를 회개하게하고 구원에 이르므로 천국에 이르게 했지만, 죄로 말미암아 동일한 정욕에 의해 죄의 열매로 태어난 이방인들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들의 영혼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찾지 못합니다.

그런데 사도의 영혼에 복음이 조명됨으로 새롭게 알려진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이방인이나 이스라엘의 차별을 거두어 버리셨고, 이제는 누구든지 복음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기업을 얻게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큰 용서를 사람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멘

 

2013, 03,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