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것을 역리로 쓰며(롬1:26)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버려 두셨으니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역리로 쓰며(롬 1:26)
사도는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버려두셨다고한 그 욕심이 욕정을 말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여인들이 욕정을 순리대로 쓸 것이라는 말이 무엇을 말할까요? 그것은 여인을 향한 어떤 편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수도 있을 것입니다? 남자가 당연히 정욕을 불일듯일어나 세상을 더럽히는 일들을 행하여 죄의 세상을 만들어버리지만 이에 여자들도 동승하여 함께 타락하되 상식적으로 판단하기에 지나친 행동들이 여성에 대한 언급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말을 말합니다.
여인들이 순리대로써야 하는 것을 역리로 쓴다는 말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지, 그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당시 사회적인 상황도 살펴 보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뒤 문장을 살펴 볼때 여인들이 정숙을 요구하는 사회적 통념에 비추어 지나친 자유가 통념에서 벗어난 지나친 자유로 보였고 성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지나쳤다고 판단되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히브리적 사고에서 볼때 노예나 혹은 자유인일지라도 어느 한 사람에게 예속되어 있는 사람들에게서 볼 수 없는 지나친 여인의 자유가 사도의 눈에 비추어진 모습이 상식을 벗어난 모습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의 생각이 아닌 성경으로 보면 사람이라는 본질에서 이 문제는 선포되어지고 있습니다. 여인들도 동일한 사람이지만 그들이 정욕으로 인하여 상식에서 벗어난 상태가 나타난 것은 사람의 타락이 야수들과 비교해서 인식할 수 있도록 말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 본질에 있어서 지식으로 살도록 지음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 야수들에게서 보면 알듯이 지극히 감각적인 존재입니다.
그 감각적 존재를 초월해서 지식으로 살도록 지으셨다는 것은 욕정이 지식에 의해 지배를 받아 조절이 가능한 존재로 지으신 것입니다.
흙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라는 점에서 사람과 동물은 같습니다. 동일한 정욕이 있으며 그 정욕으로 인해 생물체는 삶을 유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야수들에게 지식을 주시지 않았으므로 이 정욕의 한계를 자체안에서 스스로 조절하도록 하셨습니다.
지식이 삶의 양태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정욕이 나타난 것은 지식이 정욕으로 하여금 욕구를 체우도록 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지식을 가지지 않은 야수들의 경우 정욕이라는 이 지식이 그들에게 없으므로 일어났다가도 자연스럽게 조절되었던 것입니다.
식욕, 욕정, 기타 여러가지의 욕구들은 그들에게서 일어나면서 그들은 그것이 정욕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배가고프면 먹을 것을 먹고, 먹는 동안 배가 부르면 먹는 것을 중단합니다.
짐승들은 무한정 음식믈 먹는 것이 아니라 항상 적당하게 양을 채우고는 음식먹는 것을 중단합니다.
만약 이런 욕구가 지식의 지배를 받는 다면 그들은 필연적으로 먹는 욕구를 조절하는 지식의 지배를 따르게 될 것입니다. 수많은 논리와 연산 그리고 대비와 통계가 정욕을 지배할 것이고 이로인하여 선하지 못한 지식에서는 편견을 가진 지식에 의해 결과를 드러낼 것입니다.
이것의 한예로 사람이 음식에 대한 편견을 가짐으로 필연적으로 질병을 가져오게 됩니다. 무질서와 부조화 이로인하여 사람에게 주어진 고통과 저주는 스스로의 삶의 양태에서 얻은 결과인데 그 양태가 바로 편견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질서롭고 조화로운 삶은 편견과 아집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 자체가 진리의 삶이고 진리는 지식입니다.
짐승들은 이 지식을 가지지 않았고 감정의 지배로 삶의 양태를 이루어갑니다. 그래서 짐승은 사람들이 말하는 문화를 창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다릅니다.
사람에게 있는 지식은 영혼의 지각에서 느끼는 또 하나의 감정으로 인해 육체가 느끼는 즐거움을 영혼에서도 동일하게 느끼려는 욕구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혼의 감성인데 이 감성이 지각으로 느껴집니다.
영혼의 감성은 사람의 모든 행동을 일으키는 지식을 지각하여 전인으로 보내 전인으로 하여금 행동하게 하는데, 사람의 육체가 음식을 섭취하면 그 음식에 대한 육체의 즐거움을 지식으로 지각하여 동일한 감정을 가지려고 합니다. 이것이 사람이 음식을 섭취하는데 있어서 더 나은것, 더 좋은 것을 추구하는 욕구를 생산해 냅니다. 이것은 지식으로부터 추구 되어진 욕구인 것입니다.
이런 욕구들이 지식으로 말미암아 더 많은 욕구들을 추구하게 되었는데 모든 사람이 욕정에 대해서도 동일한 경향을 갖기 때문에 성에 관한 욕구가 지식에 의해서 다양한 양태를 가지게 됨으로 세상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결국 이런 경향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람의 타락은 진리 지식의 부재로 말미암아 것잡을 수 없는 무질서와 부조화로 빠져버린 것입니다.
야수들의 암컷들은 정한 시기가 되면 자연적으로 발정이 일어나고, 그 발정으로 인해 생식 활동이 일어납니다. 이들은 사람들과 같이 시시 때때로 욕정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 욕정이 생식을 위한 것으로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숫컷들도 암컷들을 향해 시시 때때로 정욕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것도 역시 발정의 시기가 아니면 정욕을 채우려는 행위를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정욕이 아니라 생식을 위한 욕구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의 영혼은 정욕에 대한 지식을 가집니다. 그리고 그 지식이 영혼의 감성을 자극하여 만족을 채우려는 욕구를 수시로 발산하여 행위를 일으킵니다. 사람과 동물은 지식을 가진 존재와 가지지 않은 존재의 구별을 가지고 있으며, 이 지식의 역할이 사람에게 어떤결과를 가져왔는지 분명히 알수 있게 합니다. 동물은 감각에 반응하는 존재이지만 사람은 감각에 의하여 지식으로 인식하여 반응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감각도 지식으로 인식을 가지며 지식으로 감각에 대한 욕구를 불러옴으로 감각적 욕구보다 자기 인식을 통한 욕구를 무한정 가질 수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모든 피조물과 구별된 존재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는 여인들이 사람으로 동일한 욕정을 일으켜 무질서하고 정욕적인 사람이 되어 결국은 세상에 하나님의 작정과 관계없는 죄 때문에 허락된 정욕의 아들을 많이 낳아 지옥으로 가는 사람들의 숫자만 늘리는 결국은 죄를 더 쌓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사도는 여인들이 성적 정숙을 요구하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여자들에게만 요구되는 것은 아니지만 드러내 놓고 성적 욕망을 추구하는 것은 옳지 못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사람들로 계획된 사람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원하시는데 여인들의 성적인 욕구는 이런 계획된 아들들보다는 정욕의 아들들을 더 많이 생산할 수 밖에 없는 슬픈 결과를 얻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2013, 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