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연구

율법으로 말미암아(롬2:11)

생명있는 신앙 2013. 4. 29. 19:57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자는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 하는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망하리라.(2:11)

 

사도는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구별된 관점을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지금까지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라는 개념으로 구별 없이 설명 해왔고 따로 분리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공통된 관심으로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분명하게 구별의 벽을 헐어 내리는 깊이 있는 설명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가장 뚜렷하게 이방인과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구별시키는 율법에 관하여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들이시기 전 광야에서 나라의 기틀을 잡으시면서 주신 법입니다. 이 율법은 이스라엘에게만 주었고 다른 이방인의 어떤 나라에도 주신일이 없습니다. 이것이 곧 이스라엘과 이방인과의 구별이었습니다.

율법은 무엇이며 어떤 역할을 하는가요?

우선 사도의 관점에서 율법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한 구별된 징표였을 뿐만 아니라 관계를 가진 증거였습니다. 사람이 율법아래 태어났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아들의 반열에 속한 사람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가진 사람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만 있었던 것입니다.

이방인에게 있어서 율법은 어떤 역할을 나타냅니까?

한마디로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율법은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주위의 이방의 사람들 가운데 율법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구약시기 동안에 그들 가까이에서 두 부류의 이방인이 이스라엘과 상관하고 있었는데 하나는 지금의 모슬렘인 이스마엘의 후손이고 다른 하나는 가나안의 불레셋이었습니다. 더 먼 지역으로 팔레스틴을 벗어나서 애굽과 바벨론, 그리고 북쪽으로 다메섹을 중심으로 하는 또 다른 문명으로 발전하여 민족을 형성하고 있는 사회가 있었으나 율법은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되었지만 이스마엘과 에서의 후손과 가나안 땅의 본래 주인이었던 팔레스틴 사람들에게 상반된 관계로 영향이 미치고 있었습니다.

팔레스틴에게는 적대적인 증오의 대상인 반면, 이스마엘 후손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장자인 자기들에게 먼저 나타나 주신 분으로 관계를 주장하고 있는 반면, 에서의 후손은 자기들이 약속의 아들 이삭으로 부터 정상적으로 장자로 태어난 자기들은 이스마엘과 같은 후손이 아닌 정상적인 하나님의 과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주장으로 하나님과 스스로 관계를 이어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실지로 이스마엘은 이삭보다 14년이나 먼저 태어난 아브라함의 아들이지만 사래의 몸종 하갈에게서 났고, 에서는 정상적인 약속의 아들 이삭에게서 났으나, 객관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삭의 기업을 잇는 자는 동생 야곱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정통이라고 주장하지만 육체의 혈통으로 에서 족속들이 약속의 후손으로 장자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의 형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혈통을 잇는 장자로서, 이삭의 아들 에서는 자기들이 장자라고 서로 주장하면서 하나님을 자기들의 편으로 이끌어 가려는 싸움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인간 편에서 볼 때 한 하나님을 서로 자기들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면서 실질적으로 형제들 간의 커다란 싸움이 수 천년을 이어 계속되고 있는대, 오늘은 그것이 하나님의 율법이 야곱의 후예들인 이스라엘에게 광야에서 주어진 것과는 반대로 이스마엘과 에서의 후손들에게는 후대 세대에 나타난 이슬람의 창시자에 의해서 유일신을 알라라 주장하면서 아랍과 에서의 모든 후손들을 개종시켜 흡수하고 유대교의 구약 율법을 대부분 그대로 흡수하여 종교를 창시한 것입니다. 실지로 모하메드는 주후 7세기 경에 명상을 통하여 천사 가브리엘에게 계시를 받게 되었다고 주장함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처음 그는 약 40여명까지 전도하여 이스람 종교를 만들었으나 그가 이스마엘의 후예로서 꾸라이시족의 하심가문에서 570422일 메카에서 태어났고 양치기로 시라아를 오가면 무역상을 하는 사람으로 기독교와 유대교를 접함으로 유대인들로의 배척과 유대인들의 경전에 드러난 자기의 조상에 대한 진실을 알고 이로부터 직접적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이슬람을 창시된 모하메드에 의해 창시되면서 페르시아를 비롯하여 아프리카 애굽, 그리고 시리아에 이르러 다메섹까지 광범위한 종교의 군으로 발전하여 세계3대 종교중의 하나가 되어 이삭의 형 이스마엘과 야곱의 형 에서의 모든 족속을 전도 흡수하여 실질적으로 역사에 등장하기는 한 뿌리에서 태어난 3대 종교중의 하나로 드러나지만 실지로 사도시대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습니다.

어떤 객관적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자기들 중심으로 이스라엘 역사를 만들고 출애굽을 한 이후 그들의 독특한 방식에 따라 광야에서 율법을 만들어 그것으로 나라를 세우는 기틀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며 율법을 수여해주신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회의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고는 얼마든지 유추할 수 있는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이 생각의 근본적인 문제는 역사에 등장하여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고 계시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과 피조 세계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직접적인 사역에 대한 전면적으로 부정적 시각에서 비롯되었고, 종교가 신의 계시와는 전혀 관계없으며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으로부터 출발한 사상입니다. 그들은 마치 이슬람의 경전에 나타난 구약성경의 유사성만을 가지고 마치 유대교와 기독교와 같이 한 뿌리에서 서로 다른 종교가 등장 할 것처럼 이해되고 가르쳐지고 있으나 실지로는 하나님의 계시와는 관계가 없이 사람의 사상에서 유대의 종교와 기독교를 인용하여 만들어낸 종교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사상에 배태하여 세상에 나온 모든 종교적인 갈등을 해결 할 수 있는 유일한 문제는 교리적 접근이나 성경의 계시를 중심으로 하는 사상으로 설명하기 보다는 하나님과 사람사이에서의 객관적인 계시가 가장 우선해야 합니다. 놀랍게도 많은 기독교 신학자들은 아브라함이나 사도 바울이 개종하기 이전에 믿음으로부터 출발하여 하나님이나 그리스도를 만났다거나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주셨고 복을 주셨다는 주장을 서슴치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하기를 그들이 믿음을 갖지 이전에 하나님의 계시가 먼저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관하여 아무런 지식도 없고 심지어 있어도 왜곡된 지식을 가지므로 적대시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의 인생을 돌이키게 했고, 그들의 시각을 되돌려 놓으심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세상에 드러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용하여 세상에 당신의 모습을 보이신 것과 같이 모든 종교들과 같이 종교가 사람의 의식을 통하여 사상에서 얼마든지 만들어지고 나올 수 있으나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나타나주셔서 부르심으로 인하여 우리의 변화를 이끌어내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나 주시지 않으시고 부르시는 소명이 없다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으며,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그리스도 만나는 사건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 우리의 의식의 변화도 알 수 없는 그 신비한 순간에 하나님의 소명을 받게 되었는데 그것은 우리가 전혀 의식하지 못하였을 때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아주 잘 말하였습니다. 사람의 회심은 모든 것보다 우선 하나님의 소명으로부터 출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는 소명보다 결코 앞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가지라고 말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그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게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우리 자신으로부터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면 기꺼이 그 일에 사용되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보여 그들이 우리의 삶과 행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남으로 믿음이 일어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시나이 반도를 방황하던 동안 시내산에서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이 율법은 사람의 사상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이제 율법이 사람에게 필요했으며 그 역할이 무엇인지 사도의 말을 통해서 밝혀 볼 필요가 있습니다.

213, 04, 29 TORONTO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