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롬2:18)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롬2:18)
"여화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자를 지혜롭게 하며(시19:7)."
사람이 피조물 중에 으뜸인 것은 지식을 육체의 감정에 이입되도록 하여 느끼고 조절하며 선과 악을 분별하는 존재입니다.
지식이 없는 짐승은 감정만으로는 선악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은 지식을 가진 영혼이 없기 때문입니다. 감정은 객체와 주체가 접촉하여 느끼는 것으로 행동을 유발하지만 사람은 지식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지식으로 선악을 분별하며 행동하는 것입니다.
지식은 영혼에서 생성되고 육체에 보내어지면 육체는 특정한 호르몬을 분비하여 지식에 따라 반응하며 행동하므로 선한 지식은 선한 감정을 느끼는 호르몬이 자극을 받아 육체의 감정에 반영되어 느낌에 의해 행동하고, 악한 지식은 악한 감정을 느끼는 호르몬이 자극하여 악한 행동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지식은 이처럼 사람의 영혼에서 생성되어 사람을 활동하게 하는 원인이므로 그의 영혼에 생성된 지식에 따라 사람의 행위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지식이지만 이 율법은 행위언약이라고 부르는 금과 명령과 같지 않고, 이방인들의 마음에 양심으로 새겨져 있다고 사도가 말한 것을 살피면, 율법은 타락하기 이전에 가졌던 본유지식의 조명으로 영혼의 지성이 생성한 지식에 함의 되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 안에는 이미 본유지식으로 율법이 있었고, 사람이 타락하였을 때 이 지식을 상실하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율법을 다시 주심으로 사람의 영혼은 소생을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시 19:7)
율법의 말씀을 들을 때 영혼이 소생한다는 것은 최초사람의 잃어버린 율법을 다시 찾은 것과 같은 상태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어두움에 처해있는 영혼이 하나님 형상 안에 있는 본유지식에 함의한 율법의 조명을 다시 받음으로 최초 지음을 받은 사람과 같이 영혼이 회복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시편기자가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한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본래 완전한 사람을 위해 주어진 지식이었고, 사람은 범죄로 말미암아 이 지식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본유지식에 율법이 있었고, 타락하기 이전에 완전한 상태에 있었던 아담과 하와의 지성에서 생성한 지식에는 율법의 지식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이 타락함으로 모든 지식안에 함의된 율법은 사람에게서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다시 말씀해 주심으로 거울이 되어 드러났고, 이스라엘이 받기 이전에 이방인들이 가졌던 법률들이 지식에서 반영되어 드러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사도는 바로 이것을 이방인의 마음에 새겨진 율법이라고 말하였고, 거듭난 우리의 영혼에 복음이 새겨지고 그 복음이 조명하여 생성된 지식들에서 진리들을 유추하거나 발견하는 지적인 작용들에 의해서, 진리를 탐구할때 어느 정도 결과들을 얻으며, 이미 생성된 지식들에 함의되어 있는 지식들을 이끌어 내는 탐구작용이 곧 영혼의 작용인 것과 같이, 이방인들이 최초 사람의 지식을 함께 물려 받았으므로 그 지식 안에 함의 되어 있는 율법의 의미들을 이끌어내어 자기들의 법률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이 최초 사람으로부터 물려 받은 지식을 궁구하여 생각하지 않아도 본성에서 율법의 지식이 양심으로 드러나는 것은 최초 사람이 본유지식의 조명에 의해 지식을 가졌기 때문이며, 그 지식 안에 율법의 의미들이 함의 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방인이나 이스라엘이나 할 것 없이 모든 지적인 의식을 가진 사람에게는 기본적인 양심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가 말하는 마음에 새긴 율법이란 인류가 처음 가진 최초 지식에 함의되어 있는 지식입니다.
사람의 영혼은 진리 지식에 대한 선호하는 감각을 갖고 있습니다. 좋은 느낌,평온한 마음, 즐거운 생각, 기쁨 등은 완전한 진리로부터 느끼는 지각과, 불완전한 지식에서는 슬픔, 어두움, 불안, 미움 원망을 지식으로부터 느끼는 것입니다.
타락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지각을 가지면 어두웠던 영혼이 소생하는 기쁨을 가지고 밝은 빛에 들어온 사람처럼 밝아집니다. 이것은 지음을 받은 본성의 회복으로부터 영혼이 소생하는 느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각하는 영혼은 선에 대한 감각으로 인해 율법에 대하여 친근감과 기쁨을 을 같게 되고 평온한 마음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은 율법이 본래 깨어진 하나님의 형상에 있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시는 것은 타락한 하나님의 아들(작정의 아들)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고 순종을 요구하시는 것과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회가 아니라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는 율법이 구원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를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도움을 구함으로 약속하신 메시아를 믿음으로 살게 하는 것이고, 둘째로 타락한 하나님 아들들의 영혼을 향한 긍휼히 여기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율법은 이방인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선택하고 작정하신 아들들과 이방인들과의 관계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1) 율법이 구원을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최초에 하나님의 형상 안에 본유지식으로 있을 때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울을 벗어나지 않고 안전한 삶으로 행복을 누리게 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게 되자 그들을 마치 우주인이 우주 안에서 스스로 우주복을 벗어버린 상태가 된 것처럼 그들을 보호하는 모든 안전장치가 벗겨져 버린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들은 마음대로 활동을 할 수 있으나 그들을 살게 하는 생명줄을 벗어버렸으므로 반드시 죽을 수 밖에 없고, 그들의 삶은 자유스럽지만 자기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고통스런 삶을 살 뿐입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그들이 죽어가는 고통스런 삶속에서 자신만을 살기 위해 이기적인 마음으로 살아갈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면서 궁극적으로 그들이 스스로 벗어버린 안정장치를 기억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전장치는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았을 때 주셨던 것을 분명하게 사람들에게 보여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들들은 자신들이 처한 비참한 상태와 우주를 떠도는 미아처럼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이 순간을 살다가 죽어버리는 그들로 하여금 안전장치를 벗어버린 자기의 행위와 처지를 깨닫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롬 3:20)로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은 그들을 어떻게 지으셨으며 왜 지으셨는지를 보여주시고, 지금이라도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시려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2) 율법은 타락한 하나님의 아들들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하신 사랑을 보여주신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택된 아들들의 가족이지만 이들이 모두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바와 같이 이스라엘이 바다모래와 같이 수가 많을 지라도 남은자만 구원을 받는다(사1:22, 롬9:27)고 말한 의미가 바로 그들 가운데 구원을 받는 자와 받지 못하는 자는 이삭의 아들 에서와 야곱으로 분명히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도 구원을 받지 못한 타락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에게서 이들의 성실함이 나중에 심판 후 영원한 지옥에서 영혼이 당하는 고통의 농도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약속의 자녀들의 가족에 있는 택함 받지 못한 사람들이 자기들의 지식으로 율법을 이해하여 성실한 삶을 살아 자기 영혼에 세상 지식을 많이 가지지 않으므로 지옥에서는 그 만큼 가벼운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옥을 만드신 이유는 영원히 존재하는 영혼이 이 세상에서 육체로 사는 날 동안 가졌던 지식으로 심판을 받고, 그 지식 때문에 어떤 사람은 고통을 당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을 누리게 된다고 지난 시간에 말해 왔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빈손으로 왔기 때문에 빈손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빈 상태로 왔으나 그 지성에 지식을 가득 채워 돌아가게 됩니다. 영혼은 지성에 새겨진 지식으로 자신의 정체를 인식하고, 그 자신이 왜 지옥의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는데, 그것은 자신 안에 있는 지식이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있어서는 안 되는 왜곡되고 거짓된 지식뿐이고 이것이 활성화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지식의 활성을 갖지 못하도록 고통을 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영혼은 고통을 당하느라 지식이 활성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타락한 사람의 왜곡된 지식은 조화롭지 못하고 질서롭지 못하기 때문에 선을 이루지 못합니다. 이 지식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되고 결국은 걷잡을 수 없도록 타락한 이 세상처럼 만들어 버릴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 지식이 영혼으로부터 나오지 못하고 활성화 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은 영혼에게 고통을 가하여 그 고통으로 인해 지식이 활성화 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모르는 지식을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지옥에서의 고통은 더욱 심합니다. 그 사람의 영혼에는 세상의 거짓된 지식이 많이 새겨져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부정적인 지식들로 많이 채워져 있기 때문에 이 지식들이 활성화되지 못하고, 이 지식들로 다른 지식들이 생성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그 영혼이 배나 더 고통을 당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에 어울려 살면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 치우쳐 있다 보니 세상의 지식을 상대적으로 더 많이 가질 수 없는 사람이 그 상태로 지옥으로 떨어졌을 때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식들이 하나님 나라에서의 부정적인 생각들이 생성할 수 있는 정도가 미미함으로 그 사람의 고통은 상대적으로 약한 정도일 뿐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열심이 복음을 전하여 사람을 교회로 인도하는 것은 택한 사람이든지 택함을 받지 않은 사람이든지 관계하지 말고 교회를 채워야 합니다. 그런 후 교회에서는 율법이든지 성경을 열심히 가르쳐 그 사람으로 세상지식으로부터 멀어지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게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