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인자를(시편51:1)
다윗 왕에게는 필연적으로 회개할 수 밖에 없는 요소가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영혼에 새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선지자 나단이 다윗의 죄를 책망할 때 그 책망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의 영혼에 선재하는 지식이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일 때 성령의 감동으로 인하여 말씀으로 인한 새 사람의 지식을 갖게 되는데 그것이 회개의 지식인 것입니다. 만약 책망이 아닌 다른 말씀이라면 당연이 그 말씀에 따른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자기지식을 생성하여 가질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다윗에게 선포된 말씀은 다윗의 죄를 책망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영혼에서 자기의 죄를 깨닫는 사람의 본성은 말씀으로 인하여 새롭게 거듭난 사람(성령의 생각)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발견한 것은 한사람 다윗 안에서 서로 양립되는 두 사람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는 타락한 본성인 지식으로 구성된 사람과 다른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의 조명으로 생성하여 거듭난 다윗(성령의 생각의 사람)입니다. 이것은 시편 51편을 고백하는 다윗에게서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교묘하게 우리야를 암몬사람의 손으로 죽이는 살인을 저지르는 (육신의 생각의 사람)이중적인 다윗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만일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7:21)”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자리에서 누구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십니까?
짜증나고 원통하고 분노를 저지르는 옛사람의 이야기를 많이 듣기를 원하십니까?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사람으로 살고 그의 말씀 듣기를 원하십니까?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여기에 온 것은 우리의 거듭난 영혼으로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한 가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우리의 옛 사람은 결코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우리를 결코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의 본성은 거짓입니다(요8:44). 그렇기 때문에 거짓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과 결코 어울릴 수 없는 것입니다. 옛사람은 타락한 본성의 지식으로 모든 지식에 무지와 결함을 함의하고 있는 거짓된 지식의 사람을 말합니다. 이 사람은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듭난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한 사람으로 영혼이 성장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귀에 들려진 말씀이 선지자 나단이 대언하는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교회의 설교자는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야 합니다. 단순히 성경을 자기의 지식으로 해석하여 설명하거나 육적 사람을 자극하는 감정적인 설교가 아니라 여러분의 은밀한 것을 밝히고 거듭난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이 듣고 깨어나도록 전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반응을 보십시오?
“엘로힘 헤세드 로브 라함 마하 폐샤” 라고 발음합니다. 이를 단어대로 한다면 하나님 많은 자비를 불쌍히 여기시고, 씻으시고, 반역,을 이런 뜻입니다. 여기에서 폐샤는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죄로써 반역, 범죄를 의미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기본적인 죄는 “하타”인데 이곳에서 “폐샤”는 반역이라는 뜻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고백은 내가 하나님께 반역을 행하였는데 나를 불쌍히 여겨 이를 지워주시고 자비와 호의를 베풀어 주소서 라는 탄원입니다.
반역은 죄 중에서 무거운 죄입니다. 권위에 도전하여 권력을 바꾸려는 역적 행위로 역사상 이런 범죄를 가볍게 다룬 나라가 거의 없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행위를 이렇게 표현한 것은 자기의 행위가 하나님을 멸시하고 완전히 무시하였으며 선지자의 말씀대로 그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모든 것을 채워주었으나 다윗은 그 주신 권력을 이용해서 자기의 욕구를 채웠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다윗에게 밧세바가 필요하다면 선한 방법으로 얼마든지 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기의 모든 것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멸시하고 우리야를 권력을 이용해 죽이며, 백성들의 눈을 속이고, 은밀히 행한 악행을 역으로 존경받고 칭찬을 받는 일로 둔갑하는 행위가 온전하지 못한 반역의 행위라고 보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것을 지각한 것입니다.
얼굴을 들고 일어설 수도 없는 추하고 부끄러운 자신을 보면서 그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자비를 베푸시고.
어젯밤 잠자리를 들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지냈습니다.
월요일 아침부터 일어난 위의 통증이 멈추지를 않아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5일째가 되었는데 더 힘들어지고 고통스러워서 바로 이것이 지옥의 고통이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했습니다. 그래서 매일 올리는 메시지를 못 올릴 정도로 고통스러웠으니,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고통 속에 헤매느라 어떤 생각들도 낼 수 없었습니다. 억누르는 고통이 쉬지 않고 계속되어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갖게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이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작은 고통 때문에 삶을 포기할 정도로 괴롭고 아픔을 겪으며 인내하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지 못한 영혼이 죽음을 만나 이생을 벗어나면 바로 이와 같은 고통의 날을 몇 일이 아니라 영원히 처해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이 고통의 순간순간이 치가 떨렸으나, 이로 인하여 한 가지 놀라운 일이 깨달아져 이내 고통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죽음은 행복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내게 있어서 죽는 것은 고통의 사람이고, 영원한 세상에서는 가지고 가지 않을 고통의 사람을 벗어난 다는 것을 생각할 때 육신을 벗은 영혼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영광스런 하나님을 분명히 뵈옵게 된다는 사실이 그냥 기뻤습니다. 이 기쁨은 육체의 어떤 만족을 가진 기쁨과 같지 않았습니다. 영혼에 스며드는 전율하는 감각은 고통 중에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말할 수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처럼 육신의 장막을 벗고 하나님 앞에 나아간 영혼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인하여 영원히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내가 이 고통에서 지금 죽으면 나의 영혼에 있는 하나님을 아는 복음이 나를 하나님께로 인도해 가는 구나! 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그리스도를 위해 죽어가는 순교자들이 죽음의 고통을 태연하게 이기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자기들을 괴롭힌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는 초월적인 경험을 가질 수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진 사람이 죽음으로부터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라는 것을 다시한번 확신 있게 깨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웃과 형제들의 영혼을 치유해야 하는 책임이 있는 사명이 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께서는 영혼에 관심이 있고 그 사역의 중심은 영혼에 있었습니다.
다윗의 영혼!
더러운 죄악의 욕구가 사로잡아 거짓된 탐욕에 빠져버렸고, 정직한 우리야의 목숨을 조금도 불쌍히 여기지 않고 마치 자기의 소유물처럼 마음대로 처리해버렸고, 그의 모든 삶이고 삶의 힘이 될 사랑하는 아내를 빼앗아 자기의 품에 품고 육구를 불태우며 백성들에게는 추악함을 숨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혼을 치료하시기 위해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으로 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찾아오실 하나님!
말씀을 보내셔서 우리의 영혼을 어루만지시고, 죄악으로 말미암은 타락한 지성의 사람을 잠재우고 심겨진 말씀의 새사람을 일깨워 주실 것입니다.
지성에 부딪히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는 우리의 더럽고 추악한 죄를 회개하며 고백할 수 있는 것이지 옛사람을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그 영혼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가인처럼 완악한 모습으로 변명하고 대적하며 그 앞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영혼은 거듭난 지성(성령의 생각)에 의해 거짓된 타락의 지성(육신의 생각)이 욕구에 사로잡혀 행한 자기의 행위를 깨닫고 그 추악한 죄가 자기에게 어떤 결과를 주었는지 알게 합니다.
거듭난 지성(성령의 생각)은 이로 인해 자기가 멸망에 처해질 수 밖에 없는 상태에 처해져 있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선 위기의 상태를 확인한 것입니다.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변명으로 일관하고 하나님을 대적한 것은 그의 영혼에 거듭난 지성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의 행위를 두려워하고 이를 숨기고 피하고 감추려하며 변명하여 어거지를 쓰며 우겨들려 하지만, 다윗의 영혼 있는 거듭난 지성은 욕구에 사로잡혀 행한 자기의 행위로 인하여 하나님을 무서워 구원을 요청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인자를 따라”엘로힘 헤세드,
하나님의 본성을 헤세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거듭난 지성(성령의 생각)으로 그가 인식하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첫 아들 가인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변명하느라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모릅니다.”
그러나 다윗은
“당신은 자비로우신 분이시고 자비 자체이십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가인과는 다른 표현을 내는데는 그 영혼에 하나님을 알고 있는 지식을 가진 거듭난 지성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얼마나 아시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영혼에는 거듭난 지성이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