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연구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롬3:5) 14

생명있는 신앙 2013. 9. 22. 05:00

왜 내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입니까?” 라고 강하게 부정하였으나 생명이 삼킨바 될 때 비로서 자기가 예수를 죽임으로 그 생명이 자기에게 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악을 대항하여 싸워서 이기려고 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눈으로 볼 때 죽으러 보내어진 것입니다. 복음의 문을 넘지 않고, 우리가 생명에 삼킨바 되지 않고는 결코 알 수 없는 이 신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에서 쏟아져 나오는 분노와 하나님의 아들들을 향한 미움이 폭포수와 같았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살려 둘 수 없을 정도로 분노했고, 급기야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온전히 구별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사람이 사람을 서로 죽이고 피 터지는 아비규환이 될 처지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이 육체와 소통하는 것을 막지 않으셨다면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 이전에 이미 스스로 파괴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존재!

생명이 되어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

만물 중에 하나가 되어 우주 가운데 우뚝 설 수 있는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

그것은 축복중의 축복입니다.

탄생하고 싶다고,

존재하고 싶다고,

아니 태어나고 싶다고 태어나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존재를 만드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생명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어머니와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탄생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탄생 속에 감추어진 이 비밀은 우리의 부모와 가족이 그토록 반기고 기뻐한 축복이 결코 아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축복 속에 감추어진 그 비밀은 축복이 아니라 비참이었고, 우리의 미래는 밝은 것이 아니라 어두움뿐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존재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우리를 향하고 계시지 않았고, 은총으로부터 멀어진 존재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실상 하나님의 계획과 무관한 존재처럼 있다가 다시는 나타나서는 안되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수많은 우리의 선조들과 형제들의 영혼들이 죽음너머 고통의 땅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도 아니고, 태어나서 존재하다가 그 길을 택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우리와 같이 이 땅에 태어난 것이 비극 자체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처럼 비참한 운명 속에서 비극을 안고 태어난 슬픔을 극복할 수 없었는가?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땅에 있게 한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모든 책임을 지우고 계셨고, 우리를 이 땅에 있게 한 원인으로 인한 댓가를 충분히 만회할 수 있도록 많은 기회를 주었으나 하나님의 아들들이 완강히 왜면 함으로 우리가 구원에 이르지 못한 슬픔으로 고통의 길을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

우리를 존재하게 해준 것은 감사하지만 오히려 우리에게는 엄청난 비극을 안겨준 원수인 것입니다.

우리의 탄생은 우리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이 정욕을 일으켜 낳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 것은 뚜렸한 잘못을 우리에게 행하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정욕을 일으켰기 때문에 우리에게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그들이 정욕을 일으키지만 않았어도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복음의 문에 들어서서 문을 열어젖히기 위해 손을 내밀어 밀었을 때 우리의 손에 묻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보던 십자가 처형의 현장을 이제야 이해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완강하게 우리의 행위를 부인하려고 했으나 이제 보니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은 우리 자신이었던 것이 너무도 분명히 이해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미워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우리는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조금도 자비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긴 채찍을 휘둘러 주님의 몸을 흩 뜯었고,

주님께서 고통을 당하실 때 우리는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고 잔인하게 손과 발을 못 박았습니다.

우리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살다가 지옥에 가는 그것 때문에 더 잔인하게 고통을 가했습니다.

결코 편안하게 죽는 것을 볼 수 없어서 끝까지 잔인하게 죽였으며, 피 한 방울을 남기지 않고 모두 땅에 쏟아 살지 못하게 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미움과 분노를 하나님의 아들에게 다 쏟았으며 우리의 마음이 찢어지는 슬픔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 너무도 싫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더 이상 미움과 분노가 사라졌습니다.

쏟아낼 것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한없이 한없이 슬퍼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일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앞날에 있을 일이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저 분노를 쏟아내고 허전하게 앉아 있을 뿐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쳐 죽일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시지 않으신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 때 하나님께서는 말리지 않으셨습니다.

아들을 죽이고 있는데도 도와주시려 하시지 않으시고 그저 얼굴을 돌리셨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막상 아들을 내어 주셨으나 분노를 쏟아내는 우리들에게 분노하시지 않았습니다.

그의 본성에 악이 없으신 하나님은 우리를 내리치실 어떤 방도가 전혀 없습니다.

악이 없으시기 때문에 하실 수 있는 일이라고는 슬퍼하시는 일 뿐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하여 얼굴을 돌리시고는 두 팔을 벌리시고 우리에게 초청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버림받은 출생,

지옥을 예정 받은 비참한 운명,

하나님을 결코 알 수 없는 무지와 결함의 지식을 가진 왜곡된 사람,

죄 밖에 지을 수 없는 죄의 본질인 사람,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정욕을 일으켜 낳은 운명적인 존재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두 팔이 벌려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있는 미움과 분노를 쏟아내게 하시려고 아들을 내어주셨고,

우리가 아들에게 모든 분노를 쏟아내고 미움을 쏟아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스스로 우리의 모든 분노를 쏟아 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도록 도와주신 하나님에 의해 우리는 미움을 쏟아내고 분노를 쏟아냄으로 하나님과 화목된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의가 숨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본래 자기백성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자기들의 행위를 깨닫고 다시는 죄에 메이지 않고 정욕을 일으키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이 스스로 죽음을 택해야 했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십자가에 죽게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고, 그들이 스스로 정당한 사람들이라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