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연구

모든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롬3:22) 3,

생명있는 신앙 2013. 11. 20. 06:32

이렇게 복음은 지속적으로 기록된 성경을 통해 우리의 영혼에 조명되어지고, 우리의 정체성과 십자가에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바라보게 합니다. 사도는 이런 이유 때문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1:17)’ 라고 말하고, 그 의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증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에 조명되어진 복음은 먼저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분명한 진실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이 죽음에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죄로 인한 정욕과 그 정욕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하나님의 아들들의 죄의 열매 곧, 사도가 표현한 대로 율법 없는 자(고전 9:21), 곧 하나님과 원수인 하나님도 없는 자들인 약속의 언약들에 관하여 외인(2:12)인 이방인과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주 언급을 했었지만, 이 사상은 아담과 하와를 이어 가인과 아벨을 통해 우리에게 분명히 증거하고 있고 가인과 아벨과의 관계를 통해, 특히 가인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우리의 정체가 너무도 분명히 보입니다. 창세기 4:4~5에 나타난 바와같이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나타나셨을 때 아니, 나타나시지 않으셨을 지라도, 가인에게 말씀하셔서 하나님을 인식하도록 하셨는데, 가인의 반응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인에게 말씀하시듯 말씀하셨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가인의 기사를 살펴보면 곧 이해가 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시듯이 우리에게 말씀하셨다면, ‘하나님을 안 믿을 사람이 누가 있느냐?’라고 반문 할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게중에는

그래도 나는 믿지 못하겠다아니면, ‘내게 보여주고 만지게 해주어야만 믿을 수 있지, 듣는 것만으로는 결코 믿을 수 없다!’ 라고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면 믿겠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것을 면밀히 살펴보면 가인은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최후에 선택한 것은 오늘날 우리가 믿고 있는 신학적인 사상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가인과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잘잘못과 하나님의 권고하신 말씀을 뒤로하고 최종적으로 가인의 선택을 볼 때 드러나는 것입니다. (4:17)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성경을 기록한 필자의 주관적 의식에서 언급된 말일까요? 아니면 가인의 사상일까요?

전통적으로 우리에게 가르쳐온 신학은 가인의 사상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지식을 가르쳐줌으로 우리의 지식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무소부재의 사상입니다. 이 사상인 지식은 진리이고 변개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광의적으로 하나님은 우주보다 크시고, 대 우주와 자연이 아무리 넓고 광활하여 수 억만 광년의 공간적인 넓이를 가질지라도 그 끝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을 벗어나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람이 어디를 가든지 그곳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얼굴이 사람을 비추고 있는 것이 우리의 신학적 입장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가인이 하나님을 떠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분명히 가인의 사상에서 나온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가인은 하나님의 영역은 제한되어 있고, 그 영역을 벗어나면 하나님을 떠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가인이 하나님을 만났을 때, 그 하나님에 대한 자기의 영혼에서 인식한 개념이 일반적으로 진리이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갖지 못하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곧 정욕의 아들의 정체성을 드러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아담으로 말미암아 작정한 하나님의 아들과 그 아들들이 죄를 범하고 정욕을 일으켜 잉태하게 됨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여 태어나게 하신 허락에 의한 사람들과의 분명한 구별을 드러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두 구별은 가인과 아벨을 통해서 계속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벨의 죽음입니다.

가인과 아벨,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가인의 행위는 일반적 개념에 있어서 미움 분노, 질투 그리고 악의가 솟구치고 원수의 개념으로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반면 아벨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은 것을 언급하지 않지만, 단 한 가지 자기의 형제이고 한 피를 물려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근원이 다른 형제인 까닭에 가인의 미움과 질투의 대상이 되고 원망의 대상이 되어 맞아 죽는 것으로 우리에게 조명되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조명에 대해서 많은 진리들을 간과하여 왔습니다. 그 내면에 드러난 수많은 진리들을 볼수 있는 안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진리를 접할 때마다 우리는 진리에 대한 지나친 주관적 의미만을 부각시키는 어리석음을 범하여 왔습니다. 실지로 아벨의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조명하시는 성령의 사역은 진리의 의미를 극대화하여 이 한 장면을 통해서 가인의 정체와 아벨의 정체 그리고 그들의 영혼에서 일어나는 지성의 역할을 상세하게 비춰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세 관계, 곧 하나님, 가인과 아벨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명백한 진리는 하나님의 선의 완전하심, 그리고 선의 행위인 사랑, 하나님의 관심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의 조명을 하나님과 가인, 그리고 아벨의 사건 현장에 조명하여 객관적으로 살펴보자면, 하나님께서 가인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아벨을 보내어 주십니다.

이 보내심은 단순히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내어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 내시고 43년 동안 광야를 지나게 하시고 마침내 요단강을 건너 길갈에 진을 치고는 모든 건장하고 힘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리고 성 사람들에게 내어주는 것(6:1~15, “사람들은 이 의미를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가려 본 의미를 발견하지 못함”),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없고 율법이 없는 이방인인 우리에게 죽이라고 내어주는 것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또한 이삭과 이스마엘, 야곱과 에서를 구별한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에 속한 사람과 이방인의 의미를 알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 미움, 원수, 이런 악에 속한 의미들이 어디에서 나오고, 왜 완전하신 하나님의 피조세계에 드러나야 하는지 그 근원들을 확실히 이해 할 수 있고 하나님과 아벨의 입장에서 가인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드러나는 것은 가인은 그의 영혼의 지성에서 하나님을 본질 그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에 존재를 부정할 수 없으나 본질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의 영혼의 지성에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진리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만남과 관계를 통해 자기지식대로 하나님을 인식하도록 지식을 가질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반면에 아벨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의 제사를 통해 그의 영혼이 하나님에 대해하여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지는 알 수 있는 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를 드렸고, 순순히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여 자기의 죄로 인하여 속죄의 죽음을 당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 죄가 놀랍게도 죄로 말미암은 행위의 결과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죄로 말미암은 행위의 결과란?’

여기에서 죄는 아벨이 직접적으로 지은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죄는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것을 말합니다. 그의 결과를 신학적으로 영혼의 죽음이라고 말하지만, 이는 실지로 정확한 의미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혼이 죽었다라는 의미를 문자적으로 이해한다면 사람에게 영혼이 죽어버린 상태를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영혼이 죽었다라는 개념에 비추어 육체가 죽었다 라고 표현하는 것은 동일한 의미를 말할 것입니다. 사람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실지로 어느 하나가 죽으면 그것은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반드시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영혼이 죽었다라는 말은 영혼의 기능이 비정상적인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혼이 비정상적인 상태가 되었다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본래 하나님의 형상은 영혼 안에 있습니다. 영혼은 인격적 기능에는 지성, 감성, 의지가 있는데 바로 이 지성에 하나님의 형상에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식을 가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받은 지식, 본유지식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스스로 지식을 생성할 수 없는데, 이 본유 지식이 지성에서 조명함으로 사람의 자기지식을 생성하게 됩니다. 영혼의 죽음은 바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깨어짐으로 지성에 있는 본유지식의 조명이 사라져 버림으로 사람이 진리대로 지식을 생성하지 못하고 항상 왜곡된 지식을 생성할 수 밖에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에게 있어서 죄로 말미암은 행위의 결과라고 할 때 죄는 아담이 범죄함으로 아벨의 영혼에는 하나님의 형상의 조명을 받지 못한 상태가 되었고, 이 상태를 통해 아담과 하와가 정욕을 일으켜 가인을 낳았는데, 그 가인을 위해 하나님께서 아벨을 보내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아벨이 가인에게 내어줌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인과 화목하게 하시려는 것으로, 이스라엘 군대를 여리고 성에 내어주어 화목하시려는 하나님의 뜻과,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어주시는 것과 같은 의미였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복음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작정이 아닌 정욕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가인,

그의 영혼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식을 가지지 못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람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푸셔서 아벨을 내어주셨으나 가인은 그 사랑을 알지 못하여 아벨을 질투하여 미워하고 원망하며 하나님을 싫어하는 본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 본성을 통해 가인의 영혼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가인의 영혼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영혼은 자신의 탄생을 저주하고 분노를 땅속 깊은 곳으로부터 온 세상을 녹여버리는 뜨거운 불덩어리처럼 솟구쳐 오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인의 영혼이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인식은 전인적으로 가인의 지성에 인식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영혼만 아는 것일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아들들을 향하여 드러내는 분노를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태어나지 않았어야 합니다. 우리의 결국은 지옥의 불을 지피는 나무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이세상에 아무리 휼륭한 업적을 남긴다 해도 그 결국은 지옥뿐입니다. 우리는 지옥을 갈 수 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사람을 만드실 때 아담을 만드시면서 그 후손들을 계획하신 그 계획에 들어 있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잉태 되는 그 순간부터 버림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미래가 없는 불쌍한 존재들입니다. 놀랍게도 가인의 영혼이나 우리의 영혼은 이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이 사실을 우리의 전인에게 인식하게 하려고 하지만 그 사실에 대해서 직접적인 육체의 경험을 갖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전인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까닭없이 하나님을 미워하고 하나님의 아들들을 더욱 미워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존재하게 하고 무책임하게 우리를 버리기 때문에 우리가 분노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거울처럼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12절에 언급하기를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라고 했고,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 되었던 너희(1:21)”라고 표현함으로 이것이 사도의 사상의 중심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그는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목하시려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범죄하여 정욕을 일으켜 우리를 낳은 것을 인하여 그 죄에 대한 대가로 자기가 죽어주심으로 대속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우리가 죽인 것입니다.

우리를 이 세상에 있게 하고, 결국은 지옥을 향하여 가게 한 것에 대한 분노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들을 미워하고 그들을 향한 미움으로 하나님께서 내어주신 아들을 죽인 것입니다.

만약 그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우리의 희망도 끝입니다.

이렇게 완전한 죄를 대속함으로 최초에 죽으리라 말씀하신 그 대로 하나님의 아들들은 지음을 받았다가 죽음으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 죄의 결과였고, 이것이 율법의 마침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를 죽음에 두실 수 없었습니다.

바로 이 일이 새로운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을 향하여 정욕의 열매들이 분노와 미움을 드러내 죽인 것이라면 죄도 같이 죽었습니다. 이제 그 사람에게서 더 이상 죄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세상의 모든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죽는 다면 결국 세상은 끝나고 이 세상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작정과는 관계없는 정욕으로 잉태되어 하나님에대해서 전혀 알 수 없는 사람들만 남아 멸망시킬 수 밖에 없는 더러운 세상만 남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그 나라를 보여주었는데 바로 바로 에덴 동편 놋땅, 하나님의 없는 가인의 왕국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복음의 의미를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살펴 나갈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와 믿음, 이 두 가지의 주제들이 계속해서 로마서를 장식해 가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 사상은 우리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사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이 역사의 배경에서 나타난 것을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누가 바울 사도의 생각의 깊이를 이해하겠습니까?

성령께서 조명하심을 받은 자가 아니고 누가 그 의미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깊고 넓은 바다 위에 떠다니는 조그마한 조각배가 바다를 다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조각배위에 붙어 있는 조그마한 먼지 같은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나오는 완전하심에 대한 지식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랑에 빠집시다.

그리고 그 사랑을 힘입어 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그 사랑을 드러내 보이는 삶을 살아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