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롬3:22) 5,
“그 성에 의인 오십명이 있을 지라도 그곳을 멸하시며 그 오십의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시지 않으시리이까?(창18:24)”
앞에서 하나님의 의에 관하여 여러번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에 관하여 분명한 지각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까하여 오늘 한 시간 더 준비 했습니다. 우리는 의를 ‘사람으로써 지켜야 하는 옳은 행위’라고 정의합니다. 이 정의에는 옳은 행위를 말하기에 앞서 분명하게 “사람으로써”라는 말을 문법적으로 ‘격조사’를 덧 붙였습니다. 이는 어떤일의 수단이나 도구를 나타낼 때 쓰는 말입니다. 그 러므로 앞에 붙은 격조사 ‘사람으로써’는 ‘옳은 행위’ 곧 ‘의’에 관한 행위를 말할 때 그 주체를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짐승에게 의를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개가 아무리 충성을 다하고 성실하며 옳은 행위를 하였어도 개에게서 의를 말하여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개는 사람과 같이 지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감정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항간에는 의로운 개라는 명칭을 붙여 칭찬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사람의 입장과 개념으로 보니 개가 의로운 행위를 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붙여진 칭호이지 본질상 개에게 의로운 행위를 요구하는 개념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마땅히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으로써” 옳은 행위를 하고 살아야 하는 개념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 할 때에는 세상에는 사람답게 사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사용되는 말인 것입니다. 만약 모든 사람이 의롭다면, 의로운 사람이라는 말이 필요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너무도 엄청난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개혁교회가 말해 온 하나님의 의에서 더 나아가 깊은 의미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사도에게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사전적 의미에서 의를 말하려고 합니다. 이것을 도입의 문제라고 지적할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도입에 있어서 문제가 된다면 그 의미를 살펴볼 때 해소 되리라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의를 “사람으로써 지켜야 하는 옳은 행위”라고 정의된 개념으로 접근해 봤습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쉽게 접근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곧 “하나님으로써 지켜야 하는 옳은 행위”라고 정의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객관자인 입장에서 판단하기 때문에 자체가 불경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득이 하나님으로써 지켜야 하는 옳은 행위라는 개념에 적용하여 의미를 이해하려고 합니다. 이 작업은 실지로 사람의 영혼의 지성이 행하는 일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저와 함께 이 의미들을 살핀다면 여러분의 지성의 작용이 저와 여러분이 공동으로 작용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성령께서 조명하여 우리의 지성에 비추도록 한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에 있는 본유지식이 비춰줄 수 있다고 생각할 때 반드시 하나님의 선이 우리로 하여금 모든 오류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은 질서롭고 조화로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최초사람에게 주신 본유지식도 하나님의 선으로 조명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에 대한 지식을 가질 때 이 선으로부터 적합한 지식들만 지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지켜야 하는 옳은 행위'라고 말하는 것은 실지로 하나님의 선에 매우 부적절한 의미가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행위가 곧, '의'이기 때문에 어떤 행위를 구별하여 의롭지 않은 행위를 전제하고 별도의 어떤 행위를 의롭다고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구별은 하나님의 선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지켜야 하는 옳은 행위’라는 말 자체가 하나님께는 올바른 적용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모든 행위가 의이기 때문에 이런 말을 쓸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사도는 왜 하나님의 의라고 구별하여 말하였습니까? 사도가 이렇게 말하는 것부터, 그 행위를 새로운 일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창조로부터 지금까지에서 더하여 라는 의미를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의의 본질을 알려고 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이 비춰주는 것은 “하나님을 끌어내려 죄인인 사람의 개념으로 동등하게 생각하고 의를 찾으려는 시도”를 가지고 있는 우리에 대해서 하나님을 이미 죄의 수준으로 낮춰 버리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결국 타락한 죄인은 하나님까지도 동등하게 자기의 개념으로 판단하고 인식하려는 추악하기 이를 대 없는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의 본질을 알려고 하는 시도는 하나님으로써 지켜야 하는 옳은 행동을 찾으려는 시도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선하시다”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는 선을 벗어난 어떤 행위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악이 하나님께 있다는 생각조차 하시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선뿐입니다. 그 선의 본질은 질서롭고 조화로운 것이므로, 하나님의 모든 행위는 선입니다. 이것이 사람에게 향하여 질 때는 사랑으로 드러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접대하고 소돔을 향하여 가시는 길에 뒤를 쫒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돔 땅이 악으로 가득차 있어서 심판하러 가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말합니다. 하나님 그곳에 의인 오십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을 멸하려 하십니까? 하나님은 그곳에는 의인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오십이 있다면 멸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또 다시 질문을 합니다. 그곳에 오십중에 오인이 부족하면 부족함을 인하여 멸하시렵니까? 하나님의 대답은 동일했습니다. 내가 거기서 사십오인을 찾으면 멸하지 않겠다. 아브라함은 계속해서 사십, 이십, 십까지 내려갔습니다. 인간의 한계를 보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급히 가셨고 아브라함은 더 이상 하나님을 쫒지 않고 돌아서 자기 집으로 갔습니다. 아브라함은 왜 하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까?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그에게는 더 이상 어떤 말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곳에 의인이 하나도 없다면 아니 다섯을 말했다가 다섯마져 없다고 말씀하신다면 그는 아주 실망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조카 롯 때문에도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실은 아브라함 자신도 조카에 대해서는 그다지 의롭다고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마음의 한 구석에는 그들의 재산이 부요해졌을 때 롯이 욕심을 가진 것으로 인해 약간의 섭섭한 마음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말하면서 하나님의 의를 언급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의와 아브라함의 의를 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은 증명할 수는 없으나 아무리 악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들 가운데는 의인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개념들을 전제로 한다는 점과 하나님께는 행위의 기준이 선 뿐이시기 때문에 질서롭고 조화롭로운 것을 기준으로 판단하신다는 점에서 다른 점을 극명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우리는 그를 통해서 우리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타락하고 더러운 곳이라 할지라도 그곳에는 반드시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는 기본적인 판단으로부터 사고합니다. 이것은 뚜렷한 기준이 없는 자기중심으로 편중된 이기적 사고에서 출발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모든 판단에 선이라는 뚜렷한 기준이 있으나 사람에게는 선은 없고 감정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지식적인 기준으로 판단하시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받아 하나님처럼 지식으로 판단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감정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조화와 질서라는 명확한 기준을 적용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모든 판단은 감정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모든 행위가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선보다는 죄로 말미암아 그 형상을 상실하게 됨으로 인하여 육적 감정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사도는 육의 생각이라고 했고(롬8:3~9, 갈5:16~19),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육신이 됨을 밝혀 주셨습니다.(창6:3) 결국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따라가면서 소돔 사람들의 멸망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감정으로 판단한 것인 반면, 하나님께서는 선이라는 분명한 기준으로 판단하신 것이므로 지식을 기반으로 하심으로 판단은 동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지 않았다면 그 형상에 있는 본유지식이 그들의 영혼을 조명함으로 인해 결코 지적으로 판단하는 기준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은 그 결국에 합치할 만한 어떤 정점에 이르지 못하고 서로의 갈길로 돌아서게 되는 것은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가 아주 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말할 때 하나님께서 지키셔야 하는 어떤 분명한 행위를 요구하는 사고로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는 선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도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를 살펴 볼 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기존에 가지셨던 선에서 더하신 선으로 관심을 가지시고 또 하나의 일을 하심으로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의지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것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이방인에게 내어주어 모든 죄를 그리스도에게 덮어씌우고 죄를 죽이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죄에 대한 분명한 해결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을 향하여 왜 죄를 짓고 우리를 낳았느냐고 반문하거나 분노할 필요가 없고, 하나님의 아들을 직접 죽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대하여 왜 우리가 태어나도록 허락하시고도 지옥으로 보내시는 억울함에 대해 말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태어남과 존재됨은 억울합니다. 우리는 죄의 열매로 태어났기 때문에 정상적인 조건을 갖지 못한 체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싫로 우리는 태어나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dl 정욕을 일으켜서 우리를 잉태하지 않았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시고 하나님의 아들들은 그 아들을 이방인들에게 내어주심으로 모든 부당한 죄와의 관계는 청산되어졌고, 이방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죄에 대해서 억울함을 말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들의 죄 때문에 독생자를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보내셔야 했고, 하나님의 아들들은 자기들의 죄로 인하여 태어나 불행에 처해진 이방인들에게 자기를 죽이도록 자신들을 내어주어야 했는데 무지하여 이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참 하나님의 아들을 이방인들에게 내어준 것입니다. 이로써 하나님과 이방인들과의 관계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완전히 화목 되었습니다.(롬5:10) 이것이 사도의 생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