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연구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려(롬3:26) 9,

생명있는 신앙 2013. 12. 24. 07:14

하나님께서 이렇게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에 의를 요구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도록 기대하셨던 것입니다.

만약 사람이 자기의 의지대로 행하지 못한 일반 피조물들과 같은 존재였다면 하나님의 요구는 부당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의가 무엇인지 모르고 자신의 존재의 의미조차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들에게 있어서 삶에 대한 책임의 의무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삶을 고민하지 않습니다.

옳은 것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선이 무엇인지 더욱 모릅니다.

그들의 존재는 자기들의 삶과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존재하니까 살았다가 어느 시간에 이르러 죽음을 맞이해도 아무도 그의 죽음에 슬퍼하는 존재가 없습니다.

그들을 지으신 하나님조차도 그들이 살았다가 죽는 죽음에 대해서 마음아파 하시지 않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존재했다가 사라지도록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삶에는 의미가 있고, 삶의 목적이 있으며,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향하여 왜 살아야 하는지 스스로 자문하여 목적을 세우고, 도덕을 준수하며 살아야 하는 책임을 가지며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속박이라고 생각하고 이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려고 합니다.

얼마나 어리석은지 모릅니다.

그들이 벗어나려고 하는 그 자유라는 것이 사람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단순한 피조물들의 삶이라는 지식이 지성에 없기 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추구하는 것에 대한 판단을 가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욱 이 지식을 가지지 못하는 것은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실지로 사람으로서의 삶의 의미와 목적, 그리고 실천은 하나님의 아들들에게만 주어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에 비한다면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서 거저 생명을 얻은 존재이고, 한마디로 잉여의 자식들입니다. 모든 이방인들인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주어졌던 사람으로서의 존재적 가치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분명히 재외 되어졌고, 피조 세계에서 존재로서의 의미가 부여되지 않은 무가치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모든 이방인들을 향하여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서는 외인이요, 세상에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2:12)”라고 말한 것입니다.

더욱이 그리스도께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것으로 말하나니(8:44)”라고 말씀하심으로 사람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관심밖에 있는 사람이라는 선을 그으셨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이 말씀들은 모든 사람을 향하여 죄인으로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도의 사상에는 분명히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구별이 있었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께서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까지 개혁교회는 이방인과 이스라엘에 대한 구별된 표시를 제거하고 성경을 해석해 왔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가지지 않고 언약을 말하였으며, 하나님의 창조계획에 속한 지식을 가지지 않고 창조를 말해왔습니다. 무슨 의미에서인지 알 수 없으나 그들은 자기들의 존재의 근거를 하나님의 창조의 근거에 억지로 매달아 두려고 안간힘을 써왔습니다. 실지로 개혁교회에 속한 우리의 존재의 근거가 하나님의 아들들의 범죄로 인한 정욕이라는 사실을 거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루속히 개혁교회가 이 근거에서 성경해석을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사상의 깊은 곳에 연결되어 있는 최종의 고리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상의 깊은 곳에서 이어진 사람이라는 존재의 근거들에는 분명히 창조 계획에 속한 이스라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의 고리는 벗겨지고 이방인의 고리가 연결되는 뒤바꿈이 있었습니다. 이때가 다메색 도상에서 그리스도에게 사명을 받은 때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계획에 따라 이렇게 바뀐 것이 분명히 아닙니다.

그가 수차 말한 것처럼 참 감람나무는 베임을 당하고 돌 감람나무가 그 자리에 접붙임을 받은 것을 비유로 말한 것처럼, 참 감람나무는 이스라엘이었으며, 그들은 범죄로 말미암아 버림을 당하였으며, 반대로 죄로 말미암아 태어난 이방인들이 참 감람나무의 뿌리에서 나오는 진액을 받아 마시는 접붙임을 받은 것이 창조 계획에 있었던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 계획은 이스라엘이 범죄 함으로 인하여 버리실 것을 계획하셨고, 그로 인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계획을 가지셨는데 그것이 구원 사역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사상을 가질 수 있었고, 이방인을 향하여 구원사역이 복음으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 복음을 전하는 일에 온 생애를 다 바친 것입니다.

다시 우리는 복음이라는 주제를 언급하게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그 말씀에 대한 진리를 발견하려 할 때는 복음이라는 주제가 항상 떠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일하시는 수단이 복음이고, 복음을 통해 사람을 새롭게 하시며, 복음으로 사람을 부르시며, 복음으로만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17)”라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가 자기의 지성에서 이 지식을 생성하고, 지각하고 인식한 후, 스스로 경험을 우리에게 선포한 것에 대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가 경험한 이 지식은 단순히 느낌이나 혹은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형제들을 향한 살을에이는 것 같은 고통과 끊어지는 아픔,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버림받은 거절감으로 매우 이겨나가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지성이 가진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진 이스라엘이라는 지식이 생겨난 이후로 하나님 사랑의 물줄기를 바꾸는 사역에 전심을 쏟게된 것은 바로 그 지식이 그를 붙잡고 사역을 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