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으로 우리조상이 된 아브라함(롬4:1)
아브람은 하란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내게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라고 말하셨고 아브람은 그 말에 이끌려 아버지로부터 독립하여 부족을 형성하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로 목표를 정하고 마침내 가나안에 이르렀는데, 하나님께서 다시 그에게 나타나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을 다시 듣게 된 것입니다.
이때 아브람은 확실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종교에 귀의된 상태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성경을 이해하거나 해석할 때 아브람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종교적인 귀의 상태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고, 귀의 한 상태라고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성경에 나타난 말씀을 이해하면서 그 상황을 주관적으로 판단 할 뿐입니다.
성경은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이를 의롭게 여겼다고 인정하시는 때는 이로부터 수년이 지난 후입니다. 그동안 아브람은 가나안에서 기근을 만나 애굽에 내랴 갔다가 다시 소돔 전쟁에서 조카 롯을 구하는 일을 경험하였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서도 아브람은 아직 분명하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때 하나님을 믿는 부족의 왕인 살렘 왕 멜기세댁이 아브람에게 축복하고 전리품의 10분의 1을 드리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은 아직 하나님에 대해서 분명한 지식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사람들은 아브람이 하나님을 직접 만나고 음성을 듣기 까지 했는데 하나님을 모를 리가 있으냐고 반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반문에는 어떻게 답을 말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질문에 대해서 아브람의 행동을 함께 연구해 보자고 제안을 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아브람이 믿음을 갖기까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형성하게 된 여러 동기들을 살펴보면 한 가지 귀중한 답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고 믿음을 얻기까지 하나님에 대한 집중적인 교육을 받아야 하고, 그 교육으로부터 자신의 현재 상태에서 반드시 변화되어야 한다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확신을 요구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에서 아버지의 품안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음성으로 말씀했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이 음성으로부터 아브람의 결정적인 믿음을 가진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지로 하나님과 아브람과의 관계는 단순히 부르시는 소명 외에 어떤 종교적 관계를 가진 것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이 아버지의 품을 떠나 갈대아 우르를 떠나기는 했어도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종교를 택한 것은 아닌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만약 그렇게 된 것이라면 아브람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부족의 종교를 하나님을 절대적인 신으로 받드는 하나님 중심의 부족이 된 것이 아니라 아직 막연하게 자기에게 나타나 말씀하신 하나님에 대한 희망에서 비롯된 행동이었을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는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당시에 대부분의 신들은 우상들로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하나님이라는 우상이 있어 하나님을 대변할 수 있는 형상을 가진 종교가 아니기 때문에 여호와 종교는 공개적으로 알려져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브람뿐만 아니라 그 누구에게서도 여호와의 종교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없었던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에게는 하나님에 관하여 알 수 있는 지식이 전무한 상태인 것입니다. 만약 있었다면 자기가 하나님을 만난 경험을 확실히 하기 위해 그 부족을 찾아갈 것이고, 자기가 만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으려 했을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소명을 받은 아브람은 갈바를 알지 못하고 집을 나서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는 마음을 가졌고(히11:8), 드디어 가나안에 이르렀는데 그곳 상수리 나무에 이르자 하나님께서 다시 그에게 나타나 주셔서 지금 있는 그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므로 아브람에게 하나님 자신을 다시 인식시키는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아브람은 두 번째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졌지만 아브람은 하나님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을 가지지 못한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은 두 번째 만나 주셨습니다.
이 두 번의 만남으로 아브람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졌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직 아브람은 자기가 만난 하나님에 관한 어떤 지식도 확실히 가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어떤 지식을 주신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당시 아브람의 상태, 단편적으로 종교에 관한 인식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아브람은 아직 하나님에 관하여 온전한 지식을 가진 상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생각하기를 아브람은 당시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종교적 지식을 가진 상태였을 것으로 판단합니다.
아마도 이를 다르게 해석하여 아브람이 마치 휼륭한 믿음을 가진 상태의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의 의견에 반대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아브람이 아직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진 상태가 아닌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주셨고, 그를 부르신 것이라고 말함으로 아직 그에게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없는 상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없다면 그에게 나타난 행위는 무엇입니까?
그가 하나님을 만났어도 그는 여전히 이방종교의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아브람이 이방의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가진 당시 사람들의 종교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확실히 말할 수 없지만 아직 아브라함은 자기가 아는 어떤 우상을 신으로 받들고 의지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에 관한 구체적인 지식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가나안의 상수리나무에 이르렀고 하나님께서 그 땅을 주시겠다고 지시하여 주심으로 인하여 아브람은 그곳에서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아브람이 하나님께 드린 첫 번째 제사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때 아브람의 마음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이런 문장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그곳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항 12:6)”
여기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을 이미 거주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단순히 가나안 사람이 거주하는 것을 밝히는 의미가 아닙니다. 즉 그 땅에 가나안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의 땅을 아브람에게 주시겠다고 역속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단순히 하나님께서 그 땅을 주신다는 의미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대한 이런 우리의 자세는 진리의 의미를 축약시키고 구체적으로 진리를 탐구하는 자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사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땅을 아브람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에 대해서 받아들이는 아브람의 입장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라면 어떻게 할까?
저라면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제 갖 태어난 신생 부족이 주위에 온갖 시랑이들이 우글거리는 사지에서 살아남아 이미 터전을 잡고 있는 가나안 사람들의 터전에 도착해서 쉬고 있는데 하늘에서 자기에게만 들리는 음성이 이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동안 우리는 아브람이 하나님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을 우리보다 더 많이 이해하고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은 큰 믿음을 가졌고 하나님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고 있고, 하나님께서 자기의 일을 주관해 주신다고 믿는 그런 신앙인으로 알고 있습니다. 성경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주석가들의 주석이나, 성경 연구서, 신앙서적, 영화, 드라마, 혹은 소설책에서 아브람은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이미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가진 돈독한 신앙인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본 성경에 의하면 아브람은 아직 하나님에 관하여 많은 지식을 가지지 못했으며, 한번 만난 관계인데 세겜 땅 상수리나무에서 다시 만남으로 두 번째 만난 관계일 뿐입니다.
사람이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내가 이렇게 해 주겠다고 한다고 해서 좌우 관계를 살펴보지도 않고 막무가네로 행동합니까?
그렇다면 말대로 한다고 가정하겠습니다.
세겜 땅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아브람은 목축업을 하는 사람인데 가나안 사람도 목축을 하는 사람인지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가나안 사람은 목축을 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다양한 사람들의 집합일수도 있고 아브람처럼 떠돌아다니는 목축업자 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가나안 사람이 먼저 그곳을 점령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 땅을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신다고 하셨을 때 아브람의 생각은 어떠했을까요?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상황이 있을 수 있고, 예상했던 대로 일수도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근사치에 갈 수 있는 모든 상황들을 고려해서 판단해야 합니다.
종교적인 상황에서 아브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아직 분명하게 인식을 가진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이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먼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아브람에게 있어서 갈대아 우르의 신들과 가나안의 신들과의 관계성입니다. 아브람은 분명히 유일 신앙을 가진 사람은 아닙니다. 당시 시대적인 상황에 의한다면 다신론적인 사상을 가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가나안의 신과 갈대아 우르에서의 신과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했을 까요?
우리는 이런 문제점부터 분명히 이해하고 다음 벧엘과 아이사이에서 제단를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과 분명하게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 하나님을 만났을 때 모든 것을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유일신앙을 가지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있고 불교도 있고, 다른 우상 신들도 있습니다.
이런 신앙적 지식이 한동안 이어집니다.
그러다 하나님에 관하여 지식을 가질 때 비로서 이방신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는 지식을 가지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갈대아 우르에서 만난 하나님이 가나안에서 만난 하나님과 일치하다는 생각을 가지기 까지 한동안 어떤 확신들이 있었어야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그것을 확신시키기 위해 분명히 언급하십니다.(창15:7)
그러므로 가나안에서의 하나님과의 만남은 아브람에게 있어서 가나안 신과의 만남일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가서 아브람이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게 되었을 때 그때 자기에게 나타난 하나님이 바로 갈대아에서 나타난 하나님이라는 지식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당시 종교의 사상으로 볼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각자의 생각에 따라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람은 세겜 상수리나무에서 오래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타나 이 땅을 주시겠다고 했으니 그곳에 머물러 그 땅을 소유하는 것이 중요할 탠데 아브람은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그 땅을 벗어납니다. 이것이 주는 의미가 매우 의미 심장합니다.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듣고 이제 그 말씀대로 가나안에 이르러 그곳에서 지시함을 받은 내용에 따라 주실 땅을 지명하여 주셨는데, 그가 갈대아에서 받은 말씀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왔다면 세겜에서 말씀을 받은 것에 대해 더 큰 확신을 가지고 그 땅을 차지하려는 어떤 의지를 가질 것이지만, 말씀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제단을 쌓고는 곧 바로 그 곳을 벗어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이 바로 의미 심장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