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롬4:1) 3
아브람은 왜! 세겜 상수리 나무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나 그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그 지역을 벗어났을까요?
그에게 선경 지명이 있어 그 땅은 자기가 누릴 땅이 아니라 후손들에게 주어진 것을 알았을까요?
우리는 아브람의 경험을 우리 자신의 경험으로 느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집을 나서 가나안에 이르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단순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연속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의 사건 중심으로 나열되고 변화의 환경과 삶의 상황을 살펴보지 않으면 우선 우리의 사고에는 우선적으로 믿음이 의식되어 굳건한 믿음으로 살아온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삶의 현장을 대입하면 믿음은 보이지 않게 됩니다. 아브람의 삶에 대한 의지와 목표 그리고 자기의 부족을 향한 강한 집념으로 하루 하루 살아가는 현장에서 믿음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심오한 사고가 아니면 불가능 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교회에서는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을 향하여 나아가는 아브람을 향하여 믿음이 좋은 사람이며, 믿음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일반적으로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 아브라함의 상황을 대입하여 경험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아브라함이 되어 보는 것입니다.
데라의 아들이고 부족장의 아들로서 부족의 한 부분에서 자기의 역할을 하는 어떤 위치에서 편안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나중에 부족장이 될 형과 잘 소통하여 관계를 잘 유지하기만 하면 그의 삶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죽는 날까지 행복은 보장받는 삶이 주어진 운명을 가진 사람입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에게 있어서 인생의 문제는 형하고의 갈등을 재외하면 아무 문제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그에게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내 사래와의 관계에서 후손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에는 아브람과 사래와의 관계를 일편단심의 애정 소설처럼 생각하는데, 당시 사회의 관습에는 아브람의 무자식의 문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고 보편적인 사람에게 있어서 애정 소설 같은 삶은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얼마든지 자식을 가지지 못하는 사래 외에 다른 여자에게서 후손을 가질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아브람에게 있어서 사래와의 관계에서 후손이 없는 이유가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요? 첫째는 하나님의 간섭이 있었고, 그로 인하여 아브람에게는 마음을 사래에게만 집중하게 된 어떤 원인이 있었으며, 둘째는 아브람의 성격과도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확실하지 않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를 찾는 것은 아직 이릅니다. 그러므로 그의 성격에서 문제를 찾는 다면 그는 자기의 위치와 환경에서 충분히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격이 당시 사회의 개념으로 볼 때 일반적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래가 아기는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아버지 데라가 다른 여인을 아브람에게 붙여주려고 했으나 아브람이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거절하여 사래만 기대하고 있으면서 후손의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으로 본다면 아직 믿음이 없는 아브람에게 하나님의 섭리는 지속되고 있었던 것이 너무도 분명하지만 우리가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미리 아시고 사람에 대해서도 아시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택자, 곧 하나님의 아들들과 정욕으로 말미암은 허락에 의한 아들을 다 아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택자인 아브람에게 그 자신도 알지도 못하는 삶을 간섭하시고, 마음을 붙잡아 하나님의 성결한 아들을 만드시기 위해 섭리하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이와 같이 개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 개인의 삶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의식으로나 혹은 삶에서 드러나지 않지만 미리 아시는 하나님의 전지함으로 인하여 미시적으로 제약을 받아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적인 삶을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일이고 아브람 개인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아프고 고통스런 인생의 문제이지만 실지고 그의 고통하나 하나에도 하나님의 간섭과 삶의 계획 그리고 그의 운명에 대한 설계도 같은 섭리가 있습니다. 놀랍게도 그 운명적인 삶이 우리의 의식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의지가 행하려는 모든 행위를 우리의 책임으로 돌리시고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부당함을 말하려 할 것이지만, 실지로 하나님의 깊고 오묘하신 섭리는 우리에게 분명한 책임을 돌리실 이유들이 너무도 확실하게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부여하신 영혼과 본유지식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브람이 분유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기의 삶에 계획된 인생을 아주 잘 알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삶대로 살려고 열심을 다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본유지식을 상실한 상태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계획하신 일을 전혀 모릅니다. 그의 영혼은 마치 하나님과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처럼 세상을 살고, 자기의 운명을 자기가 만들어가는 사람처럼 살아가지만 실지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큰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 계획은 아무에게나 설계한 것이 아니라 아브람에게만 계획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아직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식을 가지기 이전까지의 모든 삶이 자기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대로 살 수 밖에 없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여러분 가운데도 이런 운명적인 삶의 경험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래의 태를 열고 닫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절대적인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미시적 시안으로 해석하려 하면 사람들은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들에 대한 계획을 가지셨다면 우리가 굳이 어떤 목적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가만히 있어도 시간이 가면 자동적으로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심은 그 사람을 향한 계획인 것입니다.
그 사람의 삶과 하나님의 계획은 결코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아주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에는 우리가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이 되는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고 우리가 살아야 하는 양태인 것입니다. 우리가 부지런하면 부자가 될 수 있고 게으르면 가난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각기 자기 삶이 기준이 있고, 행복과 불행은 자기 의식의 기준에 따라 각기 다른 것입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그 모양과 형태가 각각 다르고 질도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한 끼의 식사와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가족만으로 행복을 느끼고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대궐 같은 집에서 많은 하인들을 부리고 살면서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브람에게 부족을 형성하고 땅을 차지하며, 나라를 세울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는 것은 그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가족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계획이고, 그가 행 불을 느끼며 사는 삶의 환경을 바꾸는 것은 아브람의 몫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