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연구

육신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롬4:1) 4,

생명있는 신앙 2014. 1. 28. 07:35

그렇다면 갈대아 우르에서의 아브람과 가나안에서의 아브람의 차이점을 생각해 보세요.

갈대아 우르에서는 아버지의 품안에서 사는 것은 더할 나위없는 행복한 삶입니다. 야망이 없는 삶, 있는 상태 그대로 충실한 삶은 고통스러울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보호해주고 편안하게 지켜주며 생활에 풍족하고 부족함이 없는 삶일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에게 야망이 있습니다. 아버지처럼 살고 싶고 세상을 지배하는 삶은 아니지만 사람다운 삶이 어떤 것이라는 지식이 영혼에서 솟구쳐 그의 의지를 때린다면 그는 결코 아버지의 품안에서 행복을 누리는 삶을 살지 못합니다. 그의 영혼은 쉬지 않은 갈등으로 괴로워하고 자기의 삶을 향한 끊임없는 도전을 향한 생각들로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영혼에 있는 어떤 지식이 그렇게 살도록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지로 아브람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영혼의 지성에 들어갔고 그 말씀이 그를 사로잡아 흔들고 있었습니다. “너는 고향과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12:1)”

아브람은 야망이 원지도 모르고, 그의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의 영혼에서 솟구치는 지식에 의해 몸과 마음이 움직여 자기의 편한 삶을 찾아 집을 나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란 바로 자기의 영혼에 들어온 말씀이 그를 흔들고 그를 지배하여 그로 하여금 말씀대로 따르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브람은 그 말씀이 그를 지배함으로 자기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집을 나섰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인도할 때, 하나님께서 매 순간마다 나타나셔서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라고 몰아가시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에 들어온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향하여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사람의 마음을 요동하게 하고 움직이게 함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나아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브람은 자기 마음에 평온을 찾아 길을 나서게 되었고, 결국 가나안 땅에 세겜 모레 상수리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아브람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사역은 동일합니다.

복음을 우리의 영혼에 심으시고 복음이 우리를 요동하고 움직이게 함으로 우리가 복음이 원하는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신자들(복음이 자기 안에 심겨진 참 신자)의 마음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무엇인가에 억눌리고, 답답하며, 짓눌리는 것 같은 어두움에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 설교를 들으며 기도를 해도 만족함을 누리지 못하고, 뭔가 쫒기는 것 같은 불안이 지배하며 안정을 찾지 못하고 갈급함과 아픔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영혼 안에 있는 복음이 그를 부르고 있는데 그 복음에 의해 그가 행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오늘날 사회구조 환경에서는 복음을 따라 행동한다는 것이 아브람과 같이 집을 떠나거나 이사를 자유롭게 갈 수 있는 그런 것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또한 복음이 그를 부른 다는 것은 목사나 선교자 혹은 전도자다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영혼을 사로잡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충만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급함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 시대와 오늘 우리의 신앙의 환경은 전혀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집에서 우리의 영혼에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진 상태인 반면, 사도가 4장에서 말하는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집이 아닌 이방의 세계에 속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다가가 그의 영혼에 당신을 심기신 것입니다. 곧 아브람의 아버지는 이방 우상 종교를 섬기는 사람인 반면, 오늘 우리는 실지로 자신의 환경이 우상에 깊이 빠져 있을지 모르지만 교회라는 울안에 속해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땅을 회복하실 때는 이미 이 세상의 소유권한이 우상세계에서 그리스도께로 이전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우상들은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시는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소유를 거역하고 예전에 자기의 신을 회복하려는 독립투사와 같은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고 이 세상의 소유권이 이미 이전되어 버렸음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지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아직 회복되지 않은 땅을 기경하여야 하는 공통적인 사명을 가지고 자기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새겨진 복음의 삶을 살도록 복음이 그 안에서 역사함으로 그의 영혼이 평온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복음이 그 안에 새겨져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확신에 가득 채워진 이상상태를 보인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영혼에 심겨져 거듭난 신자가 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견고하게 자기 확신으로 만족을 누리고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세상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왕자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는 매사에 모든 일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서 주셨고 함께하셨기 때문에 복이 자기에게 임하였다고 말합니다. 즐겁게 교회를 나아가고, 기뻐하며 쉽게 감동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주의력 같은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성경을 주의 깊에 읽지도 않고, 양을 채우기 위해 무조건 읽어대고, 성경을 얼마만큼 읽었다고 자랑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복음을 자기지식으로 조명하여 영혼의 지성에 복음의 지식이 빛을 비취지 못하게 하는 타락한 이스라엘과 같고, 율법을 열심히 지켜 행함으로 자기들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스스로 판단하며, 하나님을 만난 가인과 같은 사람들로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가나안으로 이끄시려고 자기의 영혼 안에서 복음의 빛을 비추어도 강제로 자기의 지식으로 복음이 빛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빛을 가리워버린 사람들입니다. 아브람이 이런 부류의 사람이라면 결코 갈대아를 떠나지 않습니다. 곧 자기의 영혼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려 가지 않고, 아버지 집에서 형을 멸시하고 자기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부족의 족장이 되어야 한다고 왜곡된 해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를 자기 재산 물려주듯이 아들이나 사위에게 교회를 물려주고, 예전 사사시대나 고대 교회 시대에도 그랬으니 우리가 그렇게 해도 된다고 성경을 들고 자기의 정당성을 입증하려 사람을 설득하여 누른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선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는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