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아들의 의식
하나님의 아들의 의식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정체성의 지식이 영혼의 지성에서 조명되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로써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의식을 갖게 됩니다.
이것은 복음이 우리의 영혼에 새겨진 후 그 지식으로 의식을 가질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의식을 갖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객관적 시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런 의식에서 하나님 아들의 범죄로 인한 죄 의식과 그 결과들을 선명하게 의식하는데, 가장 먼저는 자신의 정체성과 본성에 대한 이해가 있어서 회개를 드러내고, 다음으로 모든 범죄 중에 가장 심각한 의식을 가질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정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과 관계없는 이방인들을 생산한 범죄에 대한 의식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이 의식은 아담과 함께 유기적의식으로 하나님 아들로서 보편적 의식입니다.
그런데 지금가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방인의 존재에 대한 하나님의 아들의 책임의식을 배우거나 들어본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이런 신학적 주장들이 생소합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지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의 범죄와 연관시켜 생각하는 것은 이 블로그에서만 들을 수 있는 이야기 일 것입니다.
저는 정욕의 아들로서 죄의 열매인 이방인을 하나님의 창조 계획에 따라 아담 안에 작정된 사람과 구별하는 주장들을 이어 왔습니다. 이것이 사도가 말한 약속의 아들과 종의 아들,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사상, 하나님의 아들들과 하나님도 없는 자의 사상이라고 말해왔습니다.
실지로 이와 같은 사도의 사상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범죄 후 정욕을 일으켜 하나님의 창조 계획에 속하지 않은 이방인을 낳았다는 사상은 기독교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내용들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내용들처럼 느껴지고 전혀 다른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성경과 먼 이야기처럼 들려질 수 있지만 놀랍게도 이는 사도 바울의 영혼에서 밝게 조명되어 밝혀진 지식들인 것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사람의 영원에 심겨지고 의식화되면 그 의식이 곧 하나님의 아들의 의식이고, 이방인들에 관하여 자기가 그들을 이 세상에 존재하게하고 그들이 지옥으로 가는 데에 구해낼 수 없는 아무런 힘도 없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의 정욕에 대한 죄를 통곡하며 부르짖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아들을 아담의 후손들인 이스라엘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들은 아담 안에 계획된 하나님은 창조계획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아담은 이 땅에 오자마자 죄를 범하였고, 정욕을 일으켜 이방인을 낳았습니다.
이방인들은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로부터 태어났음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의 아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하나님의 창조 계획에 속한 이스라엘과 분명히 구별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율법적으로 제정하신 할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의 지성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식을 가지느냐 가지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는 마음의 할례로 구별됩니다. 그래서 사도가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롬2:29)” 라고 했고, 모세도 “할례는 마음에 있고(신 10:16)”라고 분명히 언급했던 것입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지 못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사도는 “그때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나라 밖에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2:11)” 라고 당당히 선언하여 이방인들의 비참에 처한 정체성을 분명히 언급함으로 이스라엘과의 구별을 분명히 선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개혁교회 안에서 사도의 사상과는 전혀 다른 가르침이 2천년 동안이나 이어져 왔습니다. 그 사상도 사도의 주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과 이방인과의 하나를 말하는 사상입니다. 개혁교회는 사도 바울의 사상을 크게 왜곡하여 이스라엘과 이방인과의 분명한 구별을 없애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계획과 허용에 관한 구별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십자가로 인한 하나로 주장하여 온 것입니다.
물론 하나가 된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이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에 속한 아들들로 인정되고 받아들여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출생의 본질까지 하나인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의 사상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창조계획에 속한 아담의 자손이고 이방인은 아담의 자손이 죄를 범하여 정욕으로 잉태하여 태어난 허용에 의한 정욕의 열매, 곧 죄의 자식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속한 자녀들과 계획에 속하지 않았으나 생겨난 허용에 의해 존재한 사람과는 분명한 구별이 있습니다.
그 구별은 영혼에 새겨진 지식에 명확하게 나타납니다.
이 또한 마음의 할례의 적용에 분명히 드러납니다.
사람의 영혼은 받아들이는 지식과 받아들이지 못하는 지식이 있습니다.
본래는 아담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주셔서 그 형상의 조명에 의해 지식을 가지도록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타락하고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 안에서 깨어저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사람이 지식을 가질 수 있도록 조명하는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지식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자 감각되어진 경험들에 대한 지식을 하나님의 형상에 의해 이미 조명 받아 생성한 자기지식이 무지, 혹은 결함을 더해진 지식을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얼게 생성된 지식은 모든 아담이 타락후 그의 후손에게까지 가진 지식이고, 곧 무지와 결함이 함의된 왜곡되고 거짓된 지식입니다.
타락후 사람에게는 참 지식과 거짓 지식이 공존하게 되었습니다. 참된 지식은 하나님 형상 안에 있는 지식에 의해 조명을 받으므로 생성한 지식을 말하고, 거짓 지식은 참된 지식에 무지와 결함이 함의 되어 생성되어진 지식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참지식과 거짓 지식 두 가지가 극명하게 구별되어 있고, 사람이 타락함으로 스스로 결코 참된 지식을 가질 수 없게 되었으며 모든 사람의 지식은 거짓된 지식 뿐입니다.
이 지식에는 하나님을 진리대로 아는 지식이 전혀 없고, 어떤 방법으로든지 하나님을 진리대로 알 수 있는 지식을 가지지 못하며, 혹, 사람이 하나님을 만날지라도 자기 안에 있는 자기지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기 대문에 반드시 왜곡시킬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타락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면 참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거짓된 하나님을 만들어 낼 수 밖에 없습니다.
아담의 아들 가인이 그랬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며 죄에 대한 경고를 들었음지만, 자기 안에 있는 자기 지식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여 왜곡된 지식만 가지게 된 것입니다. 가인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는 제사를 드린 원인이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지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이스라엘이나 이방인이나 모두가 타락하여 참된 진리의 지식을 가지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제 성령의 조명하심이 아니고는 결코 하나님을 진리대로 인식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이스라엘에게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방인에게 나타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이 질서를 벗어난 그 일을 결코 하실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성령의 조명을 달리하여 이방인에게 주고자 하실지라도 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가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하게 하려 함이라(롬11:11)” 라고 한 사상의 배경은 하나님의 아들의 오심과 구원은 이방인과 전혀 관계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향한 대속의 희생을 위해서 오신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절하였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지음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을 완강하게 거절하는 것을 아셨고, 이에 대한 계획을 그리스도의 구속안에서 가지셨으나, 본질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방인에게 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