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이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기시고(롬4:3) 4.
그래야만 지식과 사람과의 관계를 이해되고 교육이나 지식을 전수 받은 사람에게 그 지식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파악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사람의 상태를 살펴보겠습니다.
아담은 범죄 후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나는 가인이고 다른 하나는 아벨이었습니다.
이들이 장성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제사를 드릴쯤이 되었을 때 큰 아들이 작은 아들을 죽이는 인류 최초의 살인을 보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있는 아담에게는 차마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을 경험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이 아담에게 있어서 예방할 수 있는 그런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실지로 지음을 받은 아담의 최초 상태로서 영혼의 지성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어서 모든 객관적인 사건들에 관하여 본유 지식의 조명으로 밝히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인과 아벨, 그리고 셋을 낳은 때에는 타락으로 인하여 본유 지식이 사라졌고, 지성이 어두운 상태에 빠져버린 범죄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무지가 그의 영혼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인과 아벨에게 일어난 사건을 예방하기 위한 조치를 취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었습니다.
만약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가인이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그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살인이 발생하지 않았으며, 아벨의 죽음이 없었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생식을 위한 정욕은 지극히 질서롭게 나타날 것이고, 그들이 욕구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에 따라 태의 열고 닫힘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허용에 따라 계획된 아들만 낳게 됨으로, 가인의 탄생은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가인을 낳은 것은 하나님의 선이 그의 영혼에서 적용되지 않은 상태였고, 이로 인하여 질서롭고 조화로운 상태가 영혼의 지성에 조명되어짐으로 육체의 정욕을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 형상에 있는 본유지식의 조명을 받지 못함으로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지식이 영혼에서 일어나 행위하도록 마음에 반영됨으로 끓어오르는 정욕을 제어하지 못하고 가인을 잉태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일반인도 지성에 육체의 정욕이 반영되어 행위를 드러내려는 욕구가 일어날 때 이를 인식하여 억제하는 능력을 얼마든지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이를 억제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광란의 도가니가 되어버릴 것이지만, 지금 이세상은 이미 그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범죄한 아담으로부터 오늘 우리에게 이르기 까지 지성은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이 깨어져 그 완전히 기능을 상실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가인의 살인 사건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은 충분히 납득이 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그들은 정욕의 두려운 결과를 알았을 것이고 그 무서운 충격을 다시 경험하지 않기 위해 정욕이 끓어오를 때에 절제하였을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그들에게 다시 임하여 셋을 잉태하여 낳았고, 그에게 다시는 가인과 같은 상태를 만나지 않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는 관심으로 양육하여, 여호와 하나님에 관한 교육을 했을 것이며 자기의 존재와 하나님에 관한 관계를 소상히 가르쳤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담은 이미 그 영혼의 지성에 진리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객관적인 객체의 표상이 아닌 이미 가진 지식자체로서는 무지와 결함을 함의하지 않은 완전한 지식을 인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지식으로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표상을 가지지 않고 지성에 이미 생성되어진 그대로 지식을 인식하기 때문에 대부분 진리에 입각한 지식이었을 것이고 이 지식을 셋에게 어떤 방법으로든지 교육하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해서 아담은 셋에게 하나님에 관하여 말하였고 그 하나님은 사람들과 같이 지음을 받은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계신 존재라는 지식을 전달하였을 것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최초 사람 아담이 범죄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본유지식에 의해 아담의 지성이 생성하여 불렀던 이름으로서 지식일 것이 분명합니다. 만약 이 이름의 지식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그 때가 처음이었다면(출3:13~14) 그 이전에 여호와 하나님으로 불리는 것에 대하여 많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은 지음을 받은 존재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는 호칭이었고 이 호칭에 대한 의미를 모세에게 분명히 밝혀줌으로 그 거룩한 이름의 의미가 온 세상에 택자나 불택자들이나 구별이 없이 분명하게 밝혀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이름을 중심으로 사람들에게서 다양한 이름을 가진 지식들이 생성되어졌고, 그 이름에 따라 다양한 의미들이 부여됨으로 거짓 신들이 조직되어지고, 그 이름에 따라 신들의 형상들을 만들어 지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최초의 하나님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지만 형상이 없고 사람들에게 기억되기 쉽지 않았기 때문에 전승으로 회자 될 뿐 섬기는 대상으로 선택 받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은 사람만 가능하였고, 그들은 거룩한 제사장의 그름으로 구별된 사람들이었고,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아담 안에서 계획되어진 사람들만 따로 구별하여 만나 주심으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남겨지게 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창조 계획에 속하지 않은 정욕으로 말미암은 사람의 아들들은 하나님에 관한 종교를 가질 수 없었고, 이들의 존재가하나님의 허락에 의하여 이 세상에 존재로서의 영광을 누릴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존재로서의 허락을 받은 그 존재는 영혼이 함께 존재의 영광을 누릴 수 있으나 그들의 영혼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지지 못함으로 인해 육체를 벗어난 영원한 삶에서는 비극적인 삶밖에 다른 삶을 가지지 못하는 비참한 운명적 존재일 뿐입니다. 아담의 타락의 가장 큰 범죄는 바로 하나님의 계획에 속하지 않은 정욕의 아들을 생산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들도 사람입니다.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창조에 속한 사람으로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육체와 영혼이 창조 계획에 속한 사람과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다만 그들에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결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욕의 아들들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서 가인을 통해 잘 알았을 것입니다. 가인은 하나님을 직접 만나고 하나님과 대화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영혼의 지성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생성을 받아 가진 지식은 완전하지 못한 무지와 결함을 가진 지식의 하나님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먼저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를 아벨은 알았는데 가인은 몰랐다는 것이고, 아벨은 자신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자기가 해야 할일이 무엇인지 알았는데 가인은 오직 자기의 욕심에 매어버린 삶을 살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은 이 세상 어디든지 안 계신 곳이 없는 무소부재이신 하나님이심을 알지 못하여, 당시 자기가 살았던 곳을 떠나면 하나님을 떠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떠날 수 있다고 인식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한다 해도 진리대로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는 원인이 영혼의 지성이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지식의 조명을 받지 못하는 점들인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창조 계획에 속한 사람은 다릅니다. 그것은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진리대로 알 수 있는 지식을 가짐으로 하나님을 존재하시는 하나님 그대로 아는 지식을 가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영생의 조건입니다(요 17:3). 사람의 영혼이 영원히 존재하지만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영혼은 그 영혼의 지성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진 자만이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자들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까?
사람은 본질에 있어서 스스로 지식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 형상에 있는 본유지식의 조명에 의해서만 지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람의 범죄로 인한 타락은 곧 하나님의 형상의 깨어짐과 본유지식의 상실로 지식의 조명을 받지 못한 상태가 되어 진리의 지식을 생성할 수 없게 된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타락 이후의 모든 사람 곧 하나님의 창조 계획에 속한 사람이나 정욕의 아들들이나 동일하게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직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으려면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사람에게 오셔서 조명해 주셔야만 합니다. 성령께서는 스스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어 조명하십니다. 그러나 성령의 조명의 결과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곧 하나님의 선이 하나님의 사역의 기준이 되기 때문에 이 기준에 따라 조명을 받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역의 결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은 질서롭고 조화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질서롭지 않고, 조화에서 어긋난 결과로 말미암은 상태에서는 성령께서 조명하실지라도 그 결과가 진리대로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 창조 계획에 속한 아들들에게는 성령의 조명하심에 의해 하나님을 진리대로 알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동할 수 있으나, 창조 계획에 속하지 않은 허락에 의한 사람들에게는 성령께서 조명하시지만 왜곡되고 어긋난 지식으로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가인과 아벨에게 나타난 하나님에 관한 인식이었습니다.
결국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이름의 지식이 아담의 아들 셋으로부터 사람들에게 전수 되고 알려지지만 하나님의 창조 계획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진리대로 인식되어지고, 정욕의 아들들에게는 하나님이 왜곡되게 이해됨으로 다른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므로 각각 다른 하나님이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인류가 대를 거듭하며 이 세상 존재하면서 하나님은 사람의 지성에서 조직되어 다양한 모양으로 만들어져 다양한 종교가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류에게 최초의 종교는 여호와 하나님이었으나 타락한 사람이 하나님에 관한 왜곡된 지식을 가짐으로 인하여 거짓된 수많은 종교들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
그 이름은 타락하기 이전에 아담이 하나님을 호칭하여 지어진 본유지식의 조명으로 인하여 불려진 이름입니다. 이 이름이 많은 종교들이 생겨난 이후에 구별되기 위해서 불려진 지어진 이름이 아니라 모든 종교보다 가장 먼저 있었던 최초의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아브람이 이 이름을 벧엘과 아이사이에서 부른 것은 큰 의미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냥 여호와 이름을 부른 것이 아니라 전승으로 전해져온 그 하나님, 모든 종교위에 뛰어난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 자신을 세상에서 분명히 구별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아브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조금씩 조금씩 발전해 나아가고 아브람의 영혼의 지성은 전능하시고 가장 먼저이신 여호와 하나님에 관한 신앙이 성장해 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