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이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기시고(롬4:3) 6,
세상은 결코 교회가 기대할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으신 주님의 몸이기 때문에 세상을 구원하는 힘과 능력을 드러내야 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연약하고 힘이 없습니다.
방비도 없고 능력도 없을 뿐만 아니라 무능하기 이를 대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 교회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고 교회에서 세상을 통치하시는 힘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살펴봐야겠습니다. 그래야 우리의 실망되고 좌절된 아픈 마음과 힘이 없어 세상을 두려워하는 삶에서 진정한 승리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아브람을 맞대어 있는 성벽 안에 거하시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을 모시는 전도 만들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거하실만한 전도 짖지 않았습니다. 그는 광야의 목동입니다. 양과 소를 이끌고 이곳 저곳 다니는데 하나님의 전까지 가지고 다니려면 그 큰 고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전을 지으라 하시지 않았습니다.
또한 왜 나를 모시지 않느냐고 불만을 토로하시고 아브람에게 징계를 내리시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보지 않아도 함께 계셨고 어디를 가든지 그곳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람을 보시고 그에게서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간절할 때 나타나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을 부를 때 무한히 기뻐하시고 홀로 눈물을 감추셨을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것은 세상이 수백번 뒤바뀌는 것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하나님을 찾을 수 없습니다.
사람안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하나님을 부른다면 그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새겨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부른다면 그 하나님이 진정으로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인지 점검해봐야 합니다.
만약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의 지성이 조직하여 만든 하나님일 뿐입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을 부를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은 그의 지성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새겨졌고 그 지식이 하나님을 부르게 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을 보십시오.
사방으로부터 위협이 존재하고, 언제 닦칠지 모르는 적들의 연합군으로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하여 편안하지 못합니다. 그는 정말로 도움이 필요합니다.
누가 나타나서 그의 방패가 되어주어야 하고, 그를 지켜주는 어떤 힘이 있어야만 마음이 편안할 것입니다.
아브람에게는 하루하루가 숨맊히는 삶의 연속입니다.
지금 자기가 있는 그 땅이 자기소유가 아니기 때문에 그곳에 성을 쌓을 수도 없습니다.
성을 쌓으려 하면 땅주인이 와서 뭣하느냐고 물을 것이고 그 땅에서 나가라고 할 것입니다.
아브람은 여러번 하나님을 만났지만 자기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인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나타나서 뭔가 길을 제시하고 삶의 방향을 가르쳐 주었던 신은 수많은 신들 가운데 한 신 정도로 이해했을 지도 모릅니다. 아직까지 그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는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유일신 하나님이라고는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입니다.
신은 한분뿐이고 그 하나님이 나에게 나타나 주셨으며, 그 하나님이 나를 이곳에 이끌어 왔다는 확신을 가졌다면 아브람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세상에 있는 이유를 어느정도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며 자기의 위치에 대해서도 인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의 사명이 무엇인지 알고 그 사명을 따라 살기 위해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며 당당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아브람에게는 그런 신학적 체계를 가진 신앙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다시 나타나주셨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말라, 나는 네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깊이 묵상하고 그 의미들을 상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실 때에는 그저 단순이 나타나셔서 한마디 하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나타나셔서 아브람이 놀랄까 해서 두려워말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 아브람의 상태가 아주 심각하고 두려움에 빠져 있기 때문에 그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를 주시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너의 방패라고 하신 말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씀은 두려움과 연관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상태를 훤히 알고 계십니다.
그의 생각과 그의 앉고 일어섬, 그에게 일어나는 일들, 그리고 그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들을 다 아시고 계십니다.
아브람은 느끼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그 얼굴을 아브람을 향하여 아브람과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초라하고 위험하며 언제 적들이 나타나서 횃불을 던지고 달아날지 모르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나 거기에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전능하시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아브람은 그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은 그와 함께 계셨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을 만났지만 그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르고 있습니다.
오늘날 신앙인들이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교회에 계십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우리를 만나시고 말씀하십니다.
교회에서 우리에게 두려워말라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방패가 되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교회는 위험에 노출되어있고 세상의 공격에 속수무책인 초라하기 이를 대 없습니다.
그 교회 안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의 가정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성도들과 함께 거하시고 성도들의 가정에 거하십니다.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초막이라도 성도가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모시고 살고 있고 하나님은 성도에게 가까이 계십니다.
여기에 무슨 능력이 필요하며 힘이 필요하고 세상을 이길 작전과 위엄과 계락이 필요합니까?
하나님이 함께 계심으로 성도들은 이미 세상을 이긴 사람들입니다.
이 교회를 보십시오.
세상에서 보기에 아무힘도 없습니다.
세상이 덤벼들어 무너뜨리면 한순간에 무너져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으로 방패를 만들어 세상의 공격을 비웃음이 되게 하실 수 있을 까요?
우리가 아는 하나님이 이런 분이십니까?
하늘에서 금가루를 내리고,
성도로 하여금 승리하는 삶을 살게하고,
화려한 궁정에서 성도의 삶을 즐기도록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부유하고 화려한 성공적 인생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골을 넣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그런 신앙의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은 모두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 오히려 한점 먹은 상대방을 위로하시고 그에게 미안해 하시는 분입니다.
결코 세상적인 관점에서 성도의 행복을 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런 성공주의 와 신비주의 신앙과 하나님은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가 발견한 것은 아브람의 장막을 향하여 적들이 횃불을 들고 다가와 던져 불을 지르고 달아나도 하나님은 손으로 그것을 막지 않으십니다.
교회가 위협을 당하고 슬픈 일을 만나도 하나님은 그 위협과 슬픈 일에 대항하여 이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아브람을 사랑하는 하나님은 세상 이방인도 똑같이 사랑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삿대질을 하고 온갖 모욕을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듣고만 계십니다.
모두 당하시기만 하실 뿐입니다.
그것은 아브람을 사랑한 만큼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것은 하나님은 아브람의 적들인 이방인들고 함께 계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람과 함께 거하시는 것입니다.
초라하고 보잘것없으며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떨쳐버리지 못하게 하는 위험한 초막에,
하나님은 함께 거하시며 그들의 방패가 되어주신다고 선언하십니다.
실지로 적들이 달려와 공격을 하여도 아무런 힘이 되지 않으시지만 하나님은 당신이 너의 방패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교회가 무엇인지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마치 여러분의 인생을 행복하게 보상해주는 곳으로 알았지요?
교회는 결코 그런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곧 분풀이, 화풀이, 대상이고 온갖 고통과 슬픔을 하소연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적대적인 행동을 하면 결코 안전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당장 불안과 두려움이 휩싸입니다.
당장이라고 불태우고 달려가 교회에 피를 흘리는 아픔을 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과 싸워서는 결코 안됩니다.
아브람이 그렇게 했더니 그의 영혼이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하여 맞아주고, 짓밟혀주고, 죽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교회 안에서 그렇게 받으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교회가 무너져 버릴 것 같고 흩어져 버릴 것 같도록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럴수록 교회는 더욱 강하고 견고하고 세상을 향하여 더 큰 사랑을 드러낼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세상의 분노를 다 받으시는지 여러분은 이미 잘 알 것입니다.
여러번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렸기 때문에 별도로 말씀을 드리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는 교회는 세상사람들의 눈에 볼때 힘이없고 연약하며 보잘것없으며 무너져 버리는 초막과 같지만 실지로 그 초막이 세상의 분노를 다 받으시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입니다.
예수께서 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까?
'복음이 모습이 드러나는 곳, 마굿간, 베척을 받으심, 왜면 당하심,버림을 받으시고, 죽으시기 위해 내어주심을 당하심, 그리고 이방인의 손에 죽으심 바로 부활하기 이전까지의 모습이 교회'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이 교회에 있고, 여러분의 삶에 슬픔가 아픔과 괴로움과 두려움이 있지만 그모든 것을 하나님이 함께 받으시고 여러분을 쉬게하시고 싶으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이 교회에서 여러분과 함께 거하시는곳, 곧 두려워 떨고 있는 아브람과 함게 거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