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이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여기시고(롬4:3) 9,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사람의 행복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존재 자체가 최고의 행복입니다.
이 존재가 하나님의 계획과 허락이라는 서로 다른 근원에서 비롯되지만 존재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 인생은 행복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존재라 할지라도 자기 자신을 인식 할 수 있는 지식을 가진 존재는 동물과 같은 감각적인 존재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행복입니다. 동물들이나 다른 생명체들은 하루살이와 같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존재이지만 사람은 자기 안에 영혼이 있어 삶의 내용의 지식이 영원히 그의 지성에 기록된 상태로 가지고 인식한다는 것이 다른 생명체와 구별됩니다.
사람의 탄생이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하나님의 아들들이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범죄로 인하여 정욕을 일으켜 잉태하게 된 허락으로 말미암은 정욕의 아들이든지 그것으로 영원한 생명을 가진것입니다. 물론 그 생명이 하나는 비참과 비극이지만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원한 행복을 더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존재된 행복을 누리고 있는 이 상태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속히 파악하고 우리에게 가장 신속하게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피는 것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우선적인 문제를 찾아 해결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의 존재에 대한 의미를 찾으려 하지도 않고 존재가 자기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조차도 관심이 없습니다. 자신의 존재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조차도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밑도 끝도 없는 이상적인 질문은 자기의 지성을 괴롭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피곤해 합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인데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최초 지음을 받은 상태로 그대로 있었다면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이 있고 그 형상 안에 있는 본유지식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가 하나님의 목적에 있다는 것을 잘 조명하여 줌으로 그 지식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가질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타락은 하나님의 형상을 깨뜨리는 비극을 가져와 본유지식의 조명을 받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목적뿐만 아니라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비롯한 하나님의 존재자체 까지도 인식할 수 있는 지식을 갖지 못한 어두움에 빠져 버린 것입니다. 이로서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으며 왜 존재하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며, 죽음이후에는 어떻게 되는지 자신의 존재 자체의 의미에 대한 지식이 전무 한 상태에 빠져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나타나시고 그의 삶속에서 하나님을 인식하도록 하는데 있어서 30여년 동안을 함께 동행 하시면서 그의 삶을 개입하심으로 드디어 믿음을 갖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한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 사람으로 하여금 믿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인내하심이 더 놀라운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의 삶을 잊고 하나님의 지식을 갖도록 순식간에 변화를 주실 수 있는데 그렇게 하시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는 선이라는 원칙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원칙에서 어긋나게 하실 수 없습니다.
아무도 비난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이 그 선에서 어긋나게 행하심으로 자신에게 비난 거리가되는 것을 참으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시지만 스스로 선의 규칙을 벗어나는 행위를 하실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으로 하여금 인내하시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람에게는 30년 동안 믿음을 위해 관심과 보호를 쏟아 부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믿음의 기간이 얼마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저의 기준으로 볼 때 18세의 청년 때에 하나님을 알기 시작했으니 40년 동안 믿음을 향한 삶을 이어 왔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은 참고 인내하셨으며 기다리셨습니다. 아브라함처럼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되도록 무한한 은혜를 저에게 쏟아 부으셨습니다. 그동안 저는 수없이 많은 불신앙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범죄의 삶을 살았습니다. 나의 영혼의 지성에는 죄의 지식들로 가득 채워져 있어서 하나님의 선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어떻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잘되어지는 인생을 살까 하는데 관심뿐이었습니다.
그래서 힘든 인생의 삶에 놓이면 불평하고 원망하며,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하고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말을 서슴치 않았던 일이 나 자신을 부끄럽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순간으로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부어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무엇인지 보이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믿음은 하나님의 영향이 아닌 사람 스스로에게 나오는 것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믿음 이것은 사람에게 나오는 값지고 정금 같이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실 때 사람에게 나오는 믿음의 행위는 하나님의 마음을 너무 흡족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지으신 피조물에게서 나오는 믿음의 행위를 보고 당신의 온 마음이 기쁨에 취해버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에 그 것을 그에게 의로 여기시는 것은, 믿음이 하나님의 마음을 해아릴 수 없는 큰 만족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까?
나는 도저히 믿는 다고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나의 삶은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그 무엇도 없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정말로 부끄러운 존재입니다.
죄인중의 죄인입니다.
누구보다 더 많은 죄가 내안에 있어 나를 죄 속으로 이끌리고 죄밖에 행하지 못하는 추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다만 하나님의 용서만을 구할 뿐입니다.
이런 저에게 믿음이 있다고 말씀하시고 기뻐하시면서 저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풀어주시니 감당할 수 없을 뿐입니다. 오히려 부끄럽기 한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