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치 아니한자를 의롭다 하심(롬4:5)2,
율법 주의적 그리스도인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상당수가 유대인의 율법주의적인 신앙을 답습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율법주의 사상은 단순히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율법주의 사상은 선택에서 비롯됩니다.
선택은 구원관이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혈통주의적 근거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 받은 사람은 누구든지 신앙의 유무,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지, 신앙을 가졌거나, 할례를 받았으며, 이스라엘의 법을 준수하며 사는 이스라엘 땅에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해서 구원받은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생지주의적인 것도 아니고 개개인의 선택에 의한 것도 아니고, 오직 혈통주의인 것입니다. 이 혈통주의가 오늘날 개혁주의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조건을 “믿음”으로 라고 바꿔졌습니다.
개혁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조건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아니고는 아무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믿음에는 여러 가지 폐단이 나타났습니다.
실지로 하나님의 성령에 의한 신실한 믿음이 아닌 가짜 믿음이 그리스도인이라 칭하는 사람들에게 많이 나타났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세상사람 처럼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세상사람 보다 더 사악하고 거짓된 사람들이 교회 안에 득실 거렸습니다. 이런 상황에 이르자 성경으로부터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는 믿음(야 2:17,18,20,26)”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다, 라는 믿음에 대한 허점을 찾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라는 거울이 사람에게 나타나 사람을 비춰 사람의 본성을 밝혀 주는데, 그 거울이 언제나 변함없이 사람의 본 상태를 비추는 것이 아니라 상태와는 전혀 다른 왜곡된 상을 만들어내는 또 다른 마술 같은 거울을 발견한 것입니다. 결국 믿음이라는 거울 앞에 사람이 자기를 비춰볼 때 자기가 아닌 다른 형상을 나타내는 것과 또 다른 거울은 사람의 상태를 가감 없이 분명하게 비취주는 거울이 존재하는 것 같이 믿음이 서로 다른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존재하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시작되었던지 사람에게 있는 믿음은 참과 거짓이라는 두 개의 믿음중 하나입니다.
이것이 사람에게 드러난 어떤 지식으로 정의될 때, 참과 거짓으로 구분 되지 않고 하나의 의미만을 드러내는 진리가 아니라, 믿음이라는 지식에 참과 거짓이 있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의 믿음이 참인지 거짓인지 그 정체를 확인하고, 항상 자신을 성찰해야할 필요성이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가운데 어떤 이는 거짓 믿음을 가졌으면서도 참 믿음을 가진 사람처럼 위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기 자신도 모르는 체, 자기가 참된 믿음에 속하여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의 슬픔에 대해서 뭐라 말을 할 수 없고, 우리의 형제가 이런 비참에 처하는 것을 결코 바라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고 이 교육을 통해 자기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확인해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형제들아 나는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일 즉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빌3:13~14)”고 고백합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주 권면하신 것과 같이 "전심을 다하여(수22:5, 왕상2:4)"라는 의미에서 비롯된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라는 이 말은 오직 하나만을 분명히 나타내는 진리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믿음에는 온갖 왜곡된 지식들이 달라붙어 다양한 모양의 형태들로 옷을 갈아입고 참 믿음과 거짓 믿음의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통해 그가 잡아야 하는 푯대가 무엇이며, 무엇을 향하여 전심전력으로 진력하는지 살펴야합니다.
실지로 믿음은 하나인데 사람에게 나타나는 믿음은 각기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믿고 다른 사람은 저렇게 믿습니다.
어떻게 믿든지 믿기만 하면 됩니다.
믿으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역사하시지 않아도 당신이 믿음으로 고백하면 당신은 믿는 것입니다.
당신이 그렇게 믿으면 천국은 당신 것입니다.
어떻게 믿든지 믿는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며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믿음을 가지십시오.
그 믿음이 여기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당신의 죄 때문에 죽었습니다.
이것이 길거리에, 아니 광장에, 여러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좌판에, 가계(교회)에, 있지 않습니까?
가져가십시오.
여기 복음서 안에 있습니다.
이 전도지에도 있습니다.
가져가세요.
제발 가져가시고 천국을 가지세요.
가져가면 당신에게게도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주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오늘날 교회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나눠주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 믿음을 가져가지 않습니다.
이제 믿음은 가치가 없어졌습니다.
귀한 것이 아닙니다.
길거리에 교회의 앞마당에, 사람들이 드나드는 가판에, 전시장에, 널려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믿음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망가진 믿음
왜냐하면 믿음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가 그 믿음이라는 거울 앞에 섰을 때 자기의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비추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비추는 망가진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은 초대교회때 부터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여러분중에도 '나는 망가진 믿음을 가지지 않았다'고 확신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알고 있습니다.
누가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도 그 믿음을 고치려 하지 않은지 파악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번 권면하고 가르치며 애를썼습니다.
그리고 마치 내 영혼처럼 진을 쏟는 수고를 무수히 많이 했습니다.
침 믿음으로 돌이키라고 무수히 많은 시간을 허비하며 가르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믿음이 진짜라고 고집하고 있습니다.
참된 믿음
저는 자주 말했습니다.
“당신에게 있는 믿음은 진짜가 아니라 가짜이다. 당신은 지금 가짜 보석을 손에 쥐고 있다. 진짜는 바로 당신 앞에 있다.”
“그것을 잡으세요.”
자 이렇게 팔을 앞으로 향하고 온 몸을 그 믿음을 향하여 펼치고 온 마음을 그 믿음에 모으고 믿음을 향하여 돌진하십시오.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믿음만 바라보세요. 그리고 그 믿음을 향하여 전심 전력하세요.
믿음은 당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 앞에 있습니다.
당신이 다른 생각을 하고 마음을 다하지 않으면 믿음은 당신 앞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당신은 또 믿음을 찾으로 헤매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 믿을 향해 돌진하는 삶이 바로 믿음입니다.
참된 믿음은 앞에 있는 믿음을 잡으려고 믿고 달려가는 그 믿음, 앞에 있는 믿음과 당신을 일으켜 믿음을 잡으려고 전심 전력을 쏟게하는 그 믿음은 하나인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여러분을 일으켜 진력하게 하고, 잡으려는 앞에 있는 그 믿음이 하나가 아니면 그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아직 믿음을 잡지 않았으나 믿음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믿음이 두 개가 아닙니다.
하나입니다.
그 믿음이 당신 안에서 부터 당신 밖에까지 있는 것입니다.
안에 있는 믿음은 사람으로 하여금 믿음을 잡도록 힘을 일으키고 진력하게 하고, 밖에 있는 믿음은 당신의 온 마음을 집중하도록 이끄는 믿음입니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이 그 믿음을 잃어버리면 믿음은 여러분으로부터 멀어져가고, 여러분은 인생의 초점을 잃어버리고 거짓된 세상에서 방황하게 됩니다.
오직 믿음을 향하여 당신을 세우세요.
그리고 그 믿음을 향하여 진력하세요.
여러분이 그 믿음을 잡는 그날........................!
바로 그날............................!
여러분이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의 영광을 하나님 앞에서 누리는 복된 날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바로 이 영광스런 날을 준비해놓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때 여러분은 한 장면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한 보좌가 있고 보좌에 앉은 이가 있을 것입니다.
보좌의 주위에는 온갖 보석이 둘러 있고, 보좌도 있는데 이십사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금관을 쓰고 보좌에 앉아 있을 것입니다. 보좌로부터 나오는 소리, 보좌 앞에 켠 등불, 보좌 앞에 펼쳐진 수정과 같이 맑은 바다, 사자 같고, 송아지 같으며 얼굴이 사람 같고, 독수리 같은 여섯 날개를 가진 짐승들이 합창하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전능하신이여, 전능하신이여 전에도 계시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오실이라” 하여 살아계신 하나님께 세세토록 영광을 돌릴 때 이십사 장로들이 일어나 보좌앞에 앞드리며 자기의 면류관을 드리고 경배하며 이르되, “우리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지으심을 받았나이다”(계시록4장) 하는 것을 볼 것입니다.
우리에게 밀려오는 영광과 감동과 그리고 기쁨을 감당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생명으로 지음을 받았고 존재하는 이 영광을 부여받은 이 기쁨은 무엇으로 다 갚을 수 있을 것입니까?
이것이 여러분이 진력하여 “믿음”을 잡은 그날에 있을 경험 일입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개혁주의 교회의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믿음을 아주 값싸게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목사들이 믿음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곧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성령의 의도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거짓확신을 사람들에게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거짓 믿음을 가진 사람도, 아직 믿음이 없는 사람도, 믿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도, 모두에게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라고 확신을 주고 마치 주머니에 집어넣을 수 있는 것을 쑤셔 넣어주는 것처럼 나눠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서 의무를 잘 지켜 행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복을 주신다고 선언합니다.
이 선언을 믿어야 할까요?
우리는 믿음에 관하여 말합니다.
이스라엘 곧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선택하셨고 그들의 조상이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이고, 에서가 아니라 야곱이고, 그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그들의 조상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들의 조상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음으로 구원이 그들의 것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구원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들의 목표는 구원을 받은 그들이 하나님께 잘못하여 징계를 받아 나라를 잃고 설음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이런 그들의 상태를 회복해 주실 메시아가 오실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정말로 기다려야 할 분은 그런 메시아가 아니라 구원하는 메시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오늘날 개혁주의에 속한다고 스스로 말하는 교회들과 이단적 복음주의(신비주의, 세속주의, 이머징, toronto 블레싱)을 재외한 스스로 건전하다고 주장하는 복음주의에 속한 교회들이 유대적 율법주의 신앙을 답습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들은 구원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구원 받은 그들이 복을 받지 못하는 어려운 형편에 있기 때문에 더 나은 형편을 위해 교회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의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복을 줄 차례입니다.
이는 마치 유대인들이 잃어버린 나라를 회복하고 다윗과 같이 평화스런 왕이 나타나 이스라엘을 통치함과 같이 온 세상을 통치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가르치는 것은 잘되십시오.
행복하십시오. 복을 받으십시오.
열심을 다하여 섬기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반드시 복을 주실 것입니다.
문제가 있습니까?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당신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아브라함의 후예입니다.
축복받은 자녀입니다.
그 축복을 누리세요. 왜 모르세요. 하나님께서 큰 복을 주셨는데 말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가르쳐 주는 지식입니다.
교회가 아니지요.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