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라는 논쟁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가 먼저냐? 사람이 먼저냐?라고 질문한다면 이는 대답하기 난감합니다.
물어볼 것도 없이 사람이 먼저 있고 사람이 사회를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먼저 있으나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사회입니다.
이 사회가 천국이냐 아니면 지옥이냐 하는 것은 사람의 영혼 안에 있는 지식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천국을 건설하도록 지식을 주셨던 것입니다.
천국은 그리스도의 나라입니다.
물질로 구성된 생물학적으로 정의된 나라가 아닙니다.
영혼의 거처입니다.
바로 영에 의해 구성된 나라입니다.
물질로 구성된 현재 우리가 처한 사회는 바로 우리의 영혼에 있는 지식들이 만들어낸 세상입니다.
영혼의 나라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 안에 있는 지식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세상인대 그 세상은 그리스도께서 왕이 되시는 나라입니다.
다른 말로하자면 우리의 세상은 거짓과 왜곡된 지식이 왕인 세상이라면 그리스도의 나라는 진리가 왕인 세상입니다. 우리가 가게 되는 그 나라는 천국이고 그리스도가 왕인 나라라면 진리의 세계이고, 그 사회는 진리에 의해 구성된 진리의 나라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나라는 진리를 가진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고 진리를 아는 사람만이 회원의 자격이 되는 사회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제가 된 여러분!
지금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진리의 그 나라를 소망하면서,
우리의 영혼에는 진리를 향한 갈급한 심정으로 삶을 생각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진리 때문에 죽고 사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진리가 아니면 결코 발을 들여 놓지 않겠다는 그런 강한 의지로 타락한 우리 자신을 날마다 십자가에 걸어 놓고 살지 않습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14:27,막 8:34, 마10:38, 16:24)”
실지로 우리는 그런 삶이 무엇인지 조차 잘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자기십자가를 지는 것인지 알지 못하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뿐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대양을 항해하는 선박에 사람과 화물이 함께 바다위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예기치 않은 상황이 벌어져 대양한 가운데에서 풍랑을 만났고, 배안에 있는 모든 화물들이 ㅏ다 한가운데로 내 던져지고 사람들의 재산들이 바다에 수장되어져야만 했습니다.
그것뿐만 아닙니다.
사람들까지도 바다에 던져지고 여행을 한 가족도 역시 모두 흩어져 바다에 수장 되었습니다.
간신히 보트를 내려 바다에 던져놓고 가족 중 한 청년이 사력을 다해 간신히 보트 위에 올라 몸을 던져놓고 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보트 위에는 이미 서커스에 이용되는 작은 곰이 올라 있었고, 바람에 출렁 거리는 사이 호랑이 한 마리도 보트를 붙잡고 기러오를 태세였습니다.
청년은 간신히 구한 자기 생명이 호랑이 밥이 될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한발로 보트의 난간을 붙잡은 호랑이는 사력을 다해 몸 절반이 올랐고, 청년은 그 호랑이가 측은하게 여겨져 보트에 오르는 것을 도와줬습니다.
작은 구명보트 안에는 운명적 만남을 각기 다른 세 동물이 함께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생명은 구했으나 언제 호랑이 밥이 될지 모르는 운명 속에 처해져 있는 세 동물은 한시도 긴장을 풀 수 없습니다.
슬퍼할 여유도 없고,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상황도 아닙니다.
오른 쪽에는 호랑이가 왼쪽에는 곰이 버티고서 서로 기회를 보며 슬근 슬근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그들의 삶의 반경은 10평도 안 되는 구명보트 갑판 위 뿐입니다.
배를 집어 삼킨 풍랑은 잔잔하고 하늘의 구름이 걷혔습니다.
구원받은 기쁨을 생각할 여유도 없이 노려보고 있는 호랑이과 곰과의 사이에서 잠이 달아나 버렸습니다.
얼마간 잠을 못 잤을까요?
아니 잠을 자는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고개를 돌리면서 노려보는 호랑의의 눈초리를 마주칠 때 마다 간이 서늘했습니다.
야속하게도 하늘은 맑게 게이고 태양 빛은 따갑다 못해 찌르도록 내리 쬐이고 있었습니다.
노려보는 호랑이의 눈에서는 영혼을 찌르는 두려움이 나오지만 하늘의 태양에서 내리 쬐이는 뜨거움은 바늘을 끝에 달아 눌러 찌르는 아픔이었습니다.
목도 마르고
긴장도 더해지고
다리에는 힘이 없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사이 피비린내가 벌어졌습니다.
배가고픈 호랑이가 잔잔한 바다의 틈을 이용해 곰과의 사투를 벌리더니 이내 한발로 곰의 얼굴을 가격하고는 쓰러진 곰을 물어 뜯고는 갑판위에 피를 쏟아내게 하더니 부드러운 부분부터 물어뜯어 먹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살아갈까요?
희망이 있습니까?
구명보트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소리를 지른다고 호랑이가 자비를 알까요?
그가 내일을 압니까?
곰을 잡아먹고 배불리고 힘을 기른 호랑의 다음 상대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 다음은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모릅니다.
무지
영혼이 없는 호랑이의 행위를 심판할 자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도 바로 이와 같은 운명적 삶을 가진 세 동물들의 각축장이 되고 있습니다.
호랑이를 끌어 앉고 재앙에서 구명된 것을 기뻐할 수도 없고, 가족을 잃은 슬픔에 빠질 수도 없습니다. 죽음이 경각간에 놓여 있고, 언제 어느 때 갈기갈기 찢긴 호랑이 밥이 될지 모르는 비참한 운명이 예정되어있습니다.
타락한 사람이 던져진 구명보트 위에 우연히 구원되었으나 사람을 잡아먹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지식이 없는 짐승이 사람을 잡아 먹으러고 노려보는 세상을 살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지식이 없는 세상에서는 사람들은 잡혀 먹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청년은 살 수 있는 터전이라고는 10평이 안되는 구명보트 위 뿐이지만 결코 안전하게 긴장을 놓고 편히 쉴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청년은 가라앉은 배에서 쏟아져 나온 잔해들을 건져 모았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엮어 또 다른 보트를 만들었습니다. 모든 면에서 한계를 가진 보트에서 주어 모은 조각들로 보트를 만들면 얼마나 튼튼하게 말을 수 있겠습니까?
충분히 짐작이 갈 정도가 아닐까요?
금방이라도 풀어져 바다 속으로 빠져버릴 수 밖에 없는 위험천만의 보트가 아니겠습니까?
육지라면 든든한 나무들을 배어다가 밧줄을 엮어 물이 오르지 않을 튼튼하게 만들 수 있겠으나, 파산된 배에서 떠다니는 조각들을 모은 것이 보트가 될만한 것이겠습니까?
간신히 호랑이의 공격을 피할 수 있도록 만 할 뿐입니다.
그것도 그리 오래 피할 수 없습니다.
오랫동안 피해있으면 바다의 차가운 온도 때문에 저체온으로 죽을 수도 있습니다.
더 많은 조각들을 모으고 구명보트로부터 떨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묶어 호랑이를 피해야 했습니다.
보트 안에 있는 먹을 것 일부를 옮기고는 호랑이와 떨어져 있어야 했습니다.
발을 디디고 설 수 없을 정도로 허술하게 엮어졌으나 그 곳은 호랑이가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므로 간간히 잠을 잘 수도 있습니다.
이 청년에게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망망 대해에서 호랑이와 생존경쟁을 벌이며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가 그렇게 산다한들 무엇이 그에게 희망이 되겠습니까?
몇날 며칠을 재대로 먹지 못해 허기가 졌으며, 곰을 다 호랑이는 이제 사람마져 잡아먹으려고 시시각각 노려보고 있는 상황인데 삶이 어디에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고 왜 사투를 벌이며 삶에 집착해야 하는 것입니까?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죽음과 삶과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먹히지 않으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하고 살기 위해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이제라도 생명줄을 놓기만 하면 그에게는 삶으로부터 자유가 밀려 올 것입니다.
인생이란 촛대위에 붙여진 한줄기의 촛불과 같습니다.
바람에 휘날리다가 꺼지면 인생은 끝나는 것입니다.
수많은 꿈을 가진 사람들이 휘몰아치는 풍랑을 이기지 못하고 수장되었습니다
삶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깊은 바다 속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아무도 그들을 찾는 이 없습니다.
더 이상 생존세계는 그들의 터전이 아닙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디론지 한없이 흘러가던 보트는 호랑이와 청년을 사람이 살지 않은 무인도 섬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먼저 보트의 밑바닥이 모래 사장에 걸려 호랑이기 육지를 향하여 날쌔게 뛰어내려 처음 만난 숲속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습니다. 보트에 메달린 청년도 여러날 만에 모래 사장에 발을 디딜수 있었습니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호랑이는 얼굴을 돌리고 숲으로 아주 들어갔고 청년은 주위를 살피며 숲속을 향하여 한발 한발 발을 들여 놓았습니다.
이 섬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습니다.
몇몇 작은 짐승들이 있고 새들의 낙원이었습니다.
그다지 큰 섦은 아니었으나 호랑이와 청년이 살아가기에는 부족하지 않은 섬이었습니다.
오랜 후 청년은 불을 지펴 매일 연기를 높이 올렸고, 멀리서 섬앞을 지나가는 커다란 화물선에서 보트가 내려지고 구원을 요청하는 청년에게 다가왔습니다.
청년은 혼자 구출을 받았으나 남겨진 호랑이가 살 수 없을 것이라는 걱정이 있었으나 데리고 갈 수는 없었습니다.
청년을 실은 보트가 육제에서 멀어질 때 호랑이가 숲에서 나와 청년을 배웅하는 듯 했습니다.
혼자 남은 호랑이는 그 섬에서 살다면서 여러 작은 짐승들을 잡아먹고 살다가 늙으면 그곳 작은 짐승들의 밥이 될 것입니다.
청년은 자기의 이 경험을 책에 남겼고, 그 책이 Life 였으며, 영화화 된 사연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글을 읽으면서 무엇을 느꼈습니까?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큰 배가 대해에서 수장되는데 아무런 간섭을 하시지 않은지 생각해 보시지 않았습니까?
두 번째 호랑이와 곰과 사람이 한 구명보트 위에 올라탔는데 그곳에서의 그들의 사투가 안전하고 편하도록 보호 해 주시지 않았을까요?
세 번째 그 구명보트가 무인도에 도착한 것은 하나님의 인도였습니까?
우리의 신앙 싸이클은 우리의 편위와 안위, 그리고 우리 삶의 행복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내가 믿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일하시고 나를 지켜 보호해주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설교자들은 말합니다.
사람이 어려움과 고통과 고난에 처하게 된 이유는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