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된 의(롬4:11)
아마도 아브람은 잠을 이루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승리에 취해서 즐거워할 여유가 전혀 없었을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예전에는 편안하게 자기의 몸을 안식할 수 있는 장막이었으나,
이제는 그 장막이 초라하기 그지없고 자기의 생명을 의지하기에 너무 보잘 것 없었습니다.
아브람이 승리에서 얻은 값진 재산은 전리품과 명예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상황과 위치, 그리고 자신의 생명의 소중함을 안 것입니다.
발을 디디고 서 있는 그 장막은 결코 자신을 보호하기에 안전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높은 성벽을 건축하고 견고한 망대와 보초병들을 두고 자기를 지키게 했습니다.
사람이 모든 것을 얻었을 지라도 자기의 생명을 잃는다면 모든 것이 허무할 뿐입니다.
만약 하나님은 계시지만 사람이 없다면 천지는 아무런 가치를 드러내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이 있어서 천지의 가치를 높이고 아름다움을 말할 때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이 빚나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왔는데 그가 그 승리를 보전할 수 있는 삶을 잃어버린다면 그 승리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람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추구하는 진정한 목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존재의 영광을 이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고 하나님의 면전에 영원히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높고 높은 보좌의 주위에 둘러싸인 피조물들이 노래를 들어 보십시요!
존재의 근원과 존재의 영광의 노래입니다.
이십사 장로들이 영광의 보좌에 둘러서 자기의 면류관을 하나님의 보좌 앞에 던지며 노래하기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은 존재함이 노래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존재도,
그의 전쟁에서 승리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만나주시는 결정적인 인식을 위해 주어진 사건이고,
아브라함이 자신의 정체성을 알게 된 결정적인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믿음은 자기 영혼이 자신을 가장 분명하게 인식하는 순간으로부터 의식입니다. 이 의식은 하나님의 지식이 사람의 영혼의 지성을 조명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가장 순결한 진리의 지식을 가진 상태인 것입니다.
이 순결한 지식은 영혼이 파산선고를 할 때 비로서 나타나는 현상인데, 이때가 바로 아브람에게 있어는 커다란 위기로 두려움을 느끼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아브람은 견고한 성읍을 가진 적들의 공격에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온 생각이 그들의 움직임에 집중되고 영혼은 그 집중에서 자유를 얻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영혼의 모든 움직임은 멈추어 있고, 온통 자기를 보호하려는 생각에 집중되어 있으나 자기의 연약함과 역부족인 상태는 아브람을 절망에 빠뜨리게 합니다.
영혼은 이처럼 자기에게 자신의 상태를 밝게 보여줌으로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깨닫게 합니다.
사람에 이런 상태를 만날 때 한가지의 뚜렷한 현상을 나타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의지, 곧 신을 의뢰하는 마음을 나타내게 됩니다.
곧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절대적인 힘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존재에 대한 의지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데 Calvin 선생은 이를 종교의 씨앗을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심어두셨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절대적 존재를 의지하려는 마음은 감각에 의한 반응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성이 없는 모든 동물들도 자기의 존재의 보호에 대한 위기감이나 혹은 위협 등에 반응하는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의 존재 자체로 자기를 보호하려는 감각적 반응을 드러내지만 종종교적인 반응 곧 자기 이상의 절대적인 존재에 의지하려는 반응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이를 종교의 씨앗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교의 씨앗은 절대적인 존재이든지 아니면 다른 존재이든지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어떤 존재에 대한 의지 드러낼 수 있는 지식이기 때문에 동물들의 감각과는 다른 점에서 종교의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씨앗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람 자체 안에 심겨져 있어서 사람으로 반응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영혼 안에 심겨진 지식뿐인데 이 지식은 하나님께서 영혼에 어떤 점처럼 표시함으로 그 표시가 반응하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것을 사실이라고 한다면 신학에는 또 다른 엄청난 혼란을 가져오는 풀 수 없는 실타래를 만드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별도로 자기이상의 절대적인 존재를 의지하도록 영혼이 어떤 무엇을 새겨두어 사람으로 하여금 절대자나 혹은 신을 향하여 반응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지식이 종교의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이 믿음을 얻는 것은 자기의 영혼에 하나님의 지식이 조명함으로 인하여 영혼이 인식할 수 있는 하나님의 지식을 생성하여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지식을 가진 때부터 소돔의 전쟁에 개입되기 까지 자기 안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지식의 조명을 온전히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때까지 아브람은 여러번 하나님과 대면하고 만났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므로 하나님의 지식을 영혼의 지성에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듣게 된 하나님의 말씀들이 아브람의 영혼에 결정적으로 조명하여 아브람으로 하여금 절대적인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는 순간이 위기를 느끼는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아브람은 아무에게도 자신을 맡길 수 없는 두렵고 혼란스런 시간에서 떨고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다가오셨고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이때 아브람은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새롭게 인식하였을 것입니다.
아무도 없는 어두움 속에 한줄기의 빛이 내려와 아브람을 밝게 해주는 것처럼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새롭게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들려온 말씀은 자기를 잘 알고 계시는 친근한 분이 용기를 복 돋아 주는 힘과 같았습니다.
“두려워 말라”
“나는 네 방패니라”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모든 사람이 아브람처럼 인생의 위기에 처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방에 우겨싸인 인생의 문제들 앞에 앞을 보아도 뒤를 보아도 답이 없는 초라한 순간에 놓은 운명처럼 절대적인 존재를 바라는 그런 마음을 가진다면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두려워 말라”
이는 아브람에게 있어서 승리에 취한 기쁨의 시간이 아니라 사방의 적들로 둘러싸인 위험스런 환경에서 천막을 장막으로 하고 하늘을 지붕삼아 모래 사막에 놓인 시랑이의 한끼 음식으로 족하는 존재일 뿐인 연약한 아브람에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처럼, 인생에 지치고 낙망한 우리에게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인 것입니다.
오늘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
아브라함의 머리에는 그동안 자기를 인도하신 모든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을 것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자기를 부르시고 말씀하셨으며, 세겜 땅 모래 상수리 나무에 이르렀을 때 다시 말씀해 주셨고, 기근으로 인하여 애굽에 내려갔는데 아내를 잃을 뻔한 위기에서 건져주셨으며, 헤브론에 옮겨와 사는 날 동안 자기와 함께하시고 조카 롯을 구해오는데 지켜 주신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아브람의 영혼에서는 위기를 느낌으로 인하여 잡다한 거짓된 지식들이 조명하지 못함으로 온전히 하나님과 함께한 지식들만이 영혼을 조명하여 더욱 하나님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신앙은 영혼이 절대자에 대한 선명한 지식을 더 많이 가지고 그 지식에 의해 전인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거짓된 신앙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거짓된 지식이 그 사람의 영혼에서 가득 채워지게 조명함으로 거짓된 신을 의뢰하는 전인의 반응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은 오늘 여기에서 우리의 영혼이 우리와 함께 하셨던 지난날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하는 지식의 조명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보호하셨으며 오늘 우리에게 다가온 위기에서 우리를 보호하시는 약속을 듣고 그 약속의 말씀으로 인하여 우리의 전인이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