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연구

할례의 표(롬4:11)

생명있는 신앙 2014. 6. 11. 06:41

 

할례의 표(4:11)

 

아브람에게 드러난 행위는 아직까지세상의 어느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지식의 하나님이시라(삼상 2:3), 하나님의 영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 까지도 꿰뚫어 보시고 영혼의 깊은 곳이라도 충분히 살피실 수 있습니다(4:12). 그러나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영혼 존재 여부도 알지 못합니다. 이는 타락이 극에 달하여 어려서 생각부터 죄만 짓는 것을 보시고 영혼이 육체와의 소통을 차단하셨기 때문입니다.(6:3)

아브람에게는 어려서부터 얻은 영혼의 지식이 거짓뿐이었는데 전쟁의 승리에서 돌아와 자기를 돌아보고 있는 아브람의 영혼에는 진리의 지식이 주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에서 일어나는 지식들이 전인에 반영하는 지성의 활동을 보시고 계십니다.

우리의 영혼이 진리의 지식을 생성하여 전인에 이 지식들이 반영하면 우리의 삶의 행위는 진리의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의 모습을 드러내 보일 때 우리의 참과 거짓은 우리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하게하는 지식이 진리인지 아니면 거짓인지에 따라 우리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영혼의 지성에서 일어나는 지식에 따라 하나님의 판단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두 가지의 지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는 거짓되고 타락한 본성으로 말미암은 타락한 지식과,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진 말씀인 진리의 지식입니다. 타락한 지식은 지성이 자기 지식의 조명으로 생성한 지식인 반면, 진리의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의 조명으로 생성한 지식입니다.

사람은 언제든지 이 두 지식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지성이 하나님의 지식으로 말미암은 조명으로 진리를 생성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설령 하나님의 아들들이 진리의 지식으로 살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지라도 본성의 타락으로 말미암은 죄를 결코 벗겨지는 것은 아닙니다.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판단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바로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 영혼의 지성이 생성한 지식과 그 지식을 전인에 반영하여 행동하게 하는 이 과정을 보시고  전인에 반영된 진리 지식으로 행동을 하게 되면 이를 판단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람의 영혼에서는 자신의 환경을 적나라하게 비춰주는 조명에 의해 이 위기에서 건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전무 하고, 자신의 모든 것이 풍전등화와 같은 경각에 놓여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이처럼 아브람이 느끼고 있는 자기 정체성 발견은 자기 타락한 본성의 지식으로 부터가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그동안 하나님을 만나고 그 말씀을 듣고 삶속에서 간섭하시는 순간순간 경험한 하나님의 도우심이 영혼의 지성에서 조명되어졌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전까지 하나님의 간섭과 경험이 없었다면 롯을 구하고 승리의 개가를 부르고 귀환한 개선장군이 아직 닥쳐오지도 않은 그런 상상에 결코 사로잡히지 않거나, 전혀 예측하지 못하는 무지에 빠져 교만과 오만으로 충분히 날뛰었을 것은 분명합니다. 이런 생각은 누가 봐도 지혜가 없는 사람의 행위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당시의 자기의 상황을 정확하게 들어다 보았고 미래를 예측하고 자기의 무능함과 연약함에 영혼이 전몰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타락한 자기지식이 지성을 조명한 것이 아니라 아브람의 영혼에 받아들여진 하나님의 말씀과 지식이 자기를 조명하여 지혜를 갖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의 기자는 모든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부터 나온다고 말하고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28:28) “지혜를 얻는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3:18) 하였으며, “슬기로운 자의 지혜는 자기의 길을 아는 것이라도 미련자의 어리석음은 속이는 것이니라”(잠언14:8)고 했습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눈이 아브람을 살펴보더라도 어떤 것이 지혜의 삶인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승리에 도취하여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를 속이는 타락의 본성인 자기지식의 조명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자기의 상황과 미래의 위험을 예측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아가는 지식의 조명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자신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 앞에서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무릎을 꿇지도 않았고, 하나님을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다가가셨고, 그를 만나주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처음 믿음을 가진 조상에게 그가 찾지도 않았는데 다가와 주셨고 만나셨으며 그를 구별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창조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으로 하여금 확실히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표를 가지게 했습니다. 그것은 언약입니다.

우리는 언약신학에 관하여 많은 연구들과 신학적인 발전들을 보고 있습니다.

성경이 언급한 언약은 아브람 이전에도 있었으나(9:11) 그것들이 사람들에게서 잊혀지고 말았습니다.

사람 영혼의 지성에서 전인에 반영하는 지식으로 살기 때문에 그 지식이 참이냐 거짓이냐에 따라 사람이 달라지는데 본성적으로 사람은 타락했기 때문에 거짓을 기본으로 하여 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언약을 굳게 붙잡고 살 수 없었습니다.

오래전에 노아에게 주셨던 언약은 사람들에게서 잊혀졌고 아브람에게는 생소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언약이 사람에게 잊혀 졌을 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잊혀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언약을 바탕으로 아브람에게 언약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자신에게 언약을 주신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면서도 그 언약을 지킬 수 있는 지혜를 가지지 못하였습니다. 여전히 지성에서는 거짓된 옛 지식이 아브람을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종의 아들 이스마엘을 생산하여 가지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지만 저는 분명하고 단호하게 말씀을 드립니다. 아브람이 사래의 몸종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단순한 허락입니다. 만약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여러분은 스스로 혼란스런 신학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이 이 문제의 갈등을 해결할 수 없어서 한 가지 제안을 했는데 그것을 허용적 뜻곧 그렇게 할 것을 아시고 죄를 허락하기로 이미 작정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저는 이 문제에 관하여 적절한 곳에서 구체적으로 설명을 드립니다.(기독교교리요약)

아브람이 이처럼 우를 범하므로 한 가지 또 다른 구별을 주셨는데 그것이 할례입니다. 그러나 할례를 받은 것이 하나님의 아들의 징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에 합당한 사람을 명확하게 지목하셨는데 그가 이삭이었던 것입니다.(창세기 17:19).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약에 관하여 더욱 분명히 하시기를 창세기 19:21에서 내 언약은 내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삭과 새로운 언약을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소급하여 아브람의 가정에 있는 모든 남자들의 표피를 배는 할례 의식을 가짐으로 언약을 세울 것이지만 그 언약은 이삭과 세우시겠다고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사도가 로마서에 말하는 할례,

우리는 그 할례의 시작이 어디에서인지, 그리고 그 언약은 누구를 근원으로 하는지 분명하게 보고 있습니다.

아브람에게 세운 언약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언약이었는데 그 언약은 아브람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세우신 언약이라면 이삭과 세운 언약은 아브람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언약을 근거로 해서 할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언약인 것입니다.

할례가 믿음보다 결코 앞서지 못합니다.

아브람은 믿지 못하였을 때 의롭다 칭함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그의 믿음이 아니라 그 영혼의 지성에서 진리의 조명으로 자기 정체성을 발견하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다가가심으로 그의 믿음이 의롭다고 판단 받아진 것입니다.

할례는 결코 믿음을 앞서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이 할례를 받음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받은 세례, 믿음으로 인정을 받은 교회의 등록, 이런 것들이 실지 믿음을 앞서지 못합니다.

할례는 그 사람안에 있는 지식으로 말미암은 반응, 곧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마음에 받아들이고 행동으로 반응하는 것에 대한 확실한 보증과 같이 인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할례는 그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증거의 표식으로서 행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게는 난지 8일만에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이는 그 아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식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여러분 영혼의 지성에서 진리의 조명을 받은 지식이 전인에 반영하여 행하는 행위를 말함으로 그 행위가 의롭다함을 받는 하나님의 판단에 근거 되어야 합니다

만약 타락된 본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인정을 믿음으로 보는 것은 마땅히 근절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를 판단할 능력이 어디에 있을 까요?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일정한 교육 의식을 통해서 신앙에 관한 지식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지키고 순종하기로 약속한 사람에게 행할 수 밖에 없고, 그 대상자의 믿음이 하나님께서 판단하신다고 믿으르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이후의 할례의식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대로 살지 않거나 교회의 책망에 순종하지 않으면 불신자로 여길 수 밖에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