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연구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언약(롬4:14)

생명있는 신앙 2014. 6. 24. 05:31

 

믿음이 있고 그의 영혼에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식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소통이 가능한 상태,

이것이 신앙의 시작인 것을 창세기 15장은 증언하고 있고, 사도는 하나님께서 이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 하나님을 이해하고 알 수 있는 지식이 새겨져 있으며, 그 지식들이 지성을 조명하기 시작할 때 비로서 사람에게는 진리의 지식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지식을 직접적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식을 타락한 본성의 지식이 조명하면 진리를 거짓지식이 조명한 것이 됩니다.

영혼의 지성은 지식을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자기지식을 생성하는 기관인데 지식을 생성하는 방법은 먼저 지식의 대상이 감각을 통해 반영되고 선재하는 지식이 조명하여 감각된 반영물에 대한 지식을 메칭시킵니다. 그 과정에서 메칭되지 않은 대상은 인식하기 위해 지식을 생성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재하는 지식이 없는 영혼의 감각 대상은 지성에서 지식을 가지지 못합니다. 결국 영혼안에 지식으로 선재하지 않은  감각되어진 객관적 실체에 대하여는 지식을 갖지 못하므로 지식이 없으면 사람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관하여나 혹은 대하여의 모든 지식은 처음 사람이 자기지식을 가질 수 있도록 하나님의 형상안에 두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범죄는 하나님의 형상을 깨드리게 됨으로 모든 지식이 제 기능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개혁교회에서는 비록 사람이 범죄하였을 지라도 조금이나마 지식은 남아 있어서 하나님의 지식이나 진리를 가질 수 있는 씨앗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주장은 결코 옳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믿음은 조금 씨앗처럼 남아 있고 그 흔적들로부터 시작되는데 하나님의 은혜의 빛의 조명에 의해 믿음이 가능하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 개혁교회는 스스로 오류의 씨앗을 뿌리고 복음주의자들의 자의적 해석에 의한 신인협력(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고 그것을 사람이 받아들임으로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협력함으로 나타나는 믿음)설을 비판하는 오류를 범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개혁교회의 진정한 교리는 전적 타락을 말합니다. 비록 작은 실수들이 있지만 아직 밝혀내지 못한 우리의 실수들로 인정하고 오늘 그것들을 수정하는 것입니다. 

전적 타락은 우리안에 하나님의 형상은 완전히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여 어떤 점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은혜에 협력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을 갖기 위해 어떤 노력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우리의 교리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혼의 지성에 진리를 조금도 가지지 못하였으므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영혼을 사로잡지 않으면 우리는 구원에 이를 수 있는 믿음을 가지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믿음이 일어나기 전까지 우리의 영혼에는 모든 지식이 거짓되고 왜곡된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지식 뿐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진리의 지식이 들어왔습니다.

바로 이때가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때입니다.

아브람의 영혼에는 아직 진리의 지식이 없고, 거짓되고 왜곡된 지식만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시므로 진리의 말씀이 아브람에게 들려진 것입니다.

사람이 객체의 소리를 들으면 그 소리는 지식으로 지성에 반영되고 지성은 그 지식을 이해고 인식 가능한 자기지식을 생성하기 위해 본래 가지고 있는 자기 지식을 조명하여 유입된 지식의 내용을 생성하고 이렇게 생성된 지식으로 인식합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에 들을 때는 그 들려진 진리의 말씀을 자기안에 있는 거짓된 지식이 조명하여 인식할 수 있는 자기지식을 가진 것입니다.

우리도 처음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들을 때는 그 지식들을 거짓으로 조명하여 인식할 수 있는 거짓된 자기 지식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사람이 객체를 감각하여 그 대상을 지성에 반영 되었을 때 그것을 인식하기 위해 조명하는 지식에 따라 인식할 수 있는 지식이 진리의 지식이든지 아니면 거짓지식이 되는 것입니다. 

진리의 지식의 조명으로는 진리의 지식을 가지고, 거짓된 지식의 조명으로는 그 대상이 진리일지라도 거짓된 지식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불신자 곧 자기안에 진리의 지식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거나 혹은 하나님의 복음을 들었을때 그 감각한 하나님과 진리를 자기안에 있는 거짓된 지식으로 조명하여 인식하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을 진리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우리가 그 말씀을 듣고 이해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모순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을 가지지 못하였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든지 우리가 가진 모든 지식은 하나님의 진리의 지식이라고 거짓으로 조명하여 거짓 지식으로 생성하는 오류투성이 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같지 않습니다.

그 범위가 존재에서부터 행위와 사상에 이르기 까지 모든 점에서 다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고 사람은 창조주로부터 지음을 받은 존재입니다.

이는 존재론적으로 엄격한 구별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이 다릅니다.

언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동일한 언어적 구조를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언어가 갖는 의미와 내용은 완전히 구별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고 들었을 때 그 말씀을 우리가 액면 그대로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참이시고 진리이시며, 우리는 거짓이기 때문에 그 코드가 분명히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그 말씀이 그대로 우리의 지성에서 인식되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지식이 우리의 영혼에 선재하고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조명해 주는 역할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곧 우리 영혼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조명되어 인식할 수 있는 지식을 생성해야 진리대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영혼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오 가감이 없이 지성에 새겨져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옥토밭에 뿌린 씨앗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지성에 하나님의 말씀이 뿌려지고 그 뿌려진 말씀이 지성에 새겨지면 그 말씀이 지성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에 대해서 감각할때 조명하여 우리로 진리의 지식을 생성하게하고 그 생성된 지식으로 반응하여 행동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지성에는 이미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에 관한 지식들이 새겨지고, 새롭게 들어오거나 생각하여 반영된 지식을 조명함으로 인식할 수 있는 자기지식을 생성되는 그 지식으로 전인이 행동되어지는 것입니다. 

창세기 15장에서 두려워 떨고 있는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아브람은 아직 자기 지성에서 지금까지 자기가 듣고 경험한 하나님에 관한 지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 타락한 본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워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 그대로 아브람에게 적용되지 않았고 아브람은 자기를 포기하고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후계자를 도와주시기를 청한 것입니다.

이런 아브람의 생각은 하나님께서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신 의미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말입니다.

곧 진리를 거짓이 조명하여 거짓된 지식을 생성함으로 부정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곧 이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은 아브람에게 새로운 생각을 갖게하는 아브람 자신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가지신 계획이었습니다.

이때 아브람의 지성은 그동안 듣고 경험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지금 들려온 말씀을 조명하여 진리대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신뢰하는 마음이 일어났고 드디어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믿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것입니다. 즉 지성에서 일어난 작용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그동안 듣고 경험한 하나님과의 관계로 인한 이미 가진 지식들의 조명으로 새로운 지식을 가진 것입니다. 이 작용이 진리와 진리의 작용으로 의로운 것이고 이렇게 생성한 지식은 진리의 지식이었으며 이 반응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자기의 마음을 드러낸 행위가 아브람의 믿음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소통이 가능한 상태에 이를 때 비로서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게 됩니다.

언약은 이처럼 사람과 하나님과 소통이 가능할때만 주어집니다. 

아무 때나 내가 너와 언약을 맺겠다 하신다고 해서 언약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언약은 쌍방이 충분히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개혁교회에서는 종종 하나님의 일방적인 언약을 강조하는 때가 있습니다.

즉 사람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진리대로 인식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신다는 주장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언약을 세우십니다.

곧 일명 계약을 체결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