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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상속자(롬4:14)

생명있는 신앙 2014. 7. 3. 07:45

어느 누가 인생의 아픔과 고난에서 자유스러운 사람이 있습니까?

겉으로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을 지라도 속사람은 온갖 문제와 괴로움을 앉고 속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정욕이 아무리 강해도 근심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근심에 깊이 빠지면 정욕도 싫고 쾌락도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술을 만들어 먹게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술은 사람의 근심을 잠시라도 있게 만드는 효능이 있습니다.

근심과 두려움,

이것들은 사람의 폐부와 간과 심장을 갉아 먹고 자라납니다.

이것들은 점점 커져서 처음에는 아주 작은 근심에도 심하게 압박을 느끼고 괴로워하다가 이것들이 자라나 커지면 처음 두려움 정도는 쉽게 견디게 됩니다. 이것은 사람의 간장의 폐부가 이미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어서 적응력이 생겨난 것인데 큰 두려움이 다가올수록 간장의 폐부는 타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되면 간과 폐부는 타고 말라서 굳어지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사람에게 돌이킬 수 없는 심각한 상태를 가져오게 하여 결국은 이것으로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광야에 장막을 치고 소와 양들을 이동시키며 살아야 하는 목자들은 언제나 양들을 사냥해가는 이리때 들과 신경전을 벌이지만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람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최고의 위기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자신을 온전히 추스릴 수 없는 상태에 빠졌습니다.

실지로는 그를 해하려고 공격해오는 적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곳에서 자기가 당한 복수를 위해서 준비하고 있을 지라도 아직은 자기에게 위협이 되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현제 자기의 상태에서 두려워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브람은 세상에서 자기의 위치를 보고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보는 시야가 들어온 것입니다.

처음 아브람의 지성에 세상에서 자기의 위치를 보게 되었고, 자기가 한 낮에 있었던 일이 자기의 상태를 보여준 것입니다.

차라리 조카 롯을 구하려 가서 패하여 희생을 당하고 왔다면 지금의 두려움이 문제가 되지 않았고 슬픔이 대신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슬픔보다 더 무서운 근심이 그를 압박하니 그의 심장은 자기를 감당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러 심하게 압박되어 짐을 이룰 수 없는 처지가지 이른 것입니다.

아무지 주위를 둘러봐도 자기가 믿고 의지할 강한 세력이 없습니다.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할 상대가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이런 위기의 순간에 우리가 처해 있으며 도움을 요청할 수 없는 상태에 홀로 놓여 있습니다.

아픔과 근심에 몸부림을 치며,

좌절의 쓴 맛을 경험하면서 절망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누구의 위로도 우리의 근심을 해소해줄 수 없으며, 조여 오는 심장의 압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새아침을 만났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의 적들에 에워싸여 공격당할 수 있는 근심과 괴로움을 호소해야 합니다.

도와줄 협력자라고는 아무도 없는 막막한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가 행한 지혜 없는 행위로 인해 우리의 간장과 폐부를 썩어가게 하고 있습니다.

어젯밤 근심을 이기지 못하여 잠에서 깨어나지 않기를 희망하고 잠자리에 누웠지만 야속하게도 아침은 밝아왔습니다. 둥근 지구는 걸려 정지할 장애물이 없었던지 아니면 우리가 지구위에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지 아주 열심히 아니 충실하게 자기의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아니면 다른 행복을 누리는 사람을 부러워 나를 전혀 보지 못하는지 알지 못하지만 나에게 야속한 시간을 계속해서 몰아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을 떠야 했고 또 다시 근심과 싸워야 했습니다.

아무 일도 못하고 두려움과 고민에 빠져 있게 됩니다.

떠나지 않은 근심과 괴로움으로 적들의 마음을 녹여줄 유일한 해결책들은 도저히 마련되지 않습니다.

바람소리에도 놀라 소스라치고,

근심은 변하여 고통이 되었습니다.

전쟁에 능한 사내는 무엇이라도 뚫고 우리의 심장을 박을 수 있는 무기를 등에 매고 사정없이 말의 등을 후려 갈리면서 히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쏜살같이 내달려 우리를 향하여 오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저들의 공격을 결코 막아낼 수 없을 것입니다.

전쟁을 모르는 목동이고, 싸움을 모르는 연약한 사람입니다.

매일 조금씩 훈련을 했지만 그것이 저들 앞에서는 애들의 소꿉장난에 불과한 놀이정도였습니다.

 

!

이 연약한 존재!

여기에 왜 있습니까?

왜 태어나 이 시련을 맞아야 합니까?

나는 과연 이 세상과 어떤 관계가 있으며, 무엇 때문에 역사에 기록되지 않고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을 삶을 살아갑니까?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고, 나를 지으셨다면 왜 이런 시련 앞에서 살도록 만드셨습니까?

지나간 나의 삶의 행위가 정당하지 못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은 일일지라도 우리의 짧은 생각으로는 그것이 옳고 정의롭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닦아도 닦아도 마르지 않은 터진 샘처럼 두 볼을 적시고 목까지 흘러넘쳤습니다.

 

수많은 인생들은 이 슬픔에서 해어나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통을 이기지 못하였으며, 도움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한결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이 고통에 대해서 누구란 말인가?

왜 나는 이 고통을 벗어날 수 없는가?

과연 내가 이땅에 존재하게 된 원인이 무엇이며 나에게 주어진 이 고통이 무엇때문인가?

이런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하고 이 세상을 하직했어야 했습니다.

아브람이 서 있는 가나안의 그 땅에는 아브람과 같이 강한 적들을 대적했다가 안개와 같이 사라져 보린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흔적은 찾을 수도 없고 아브람에게 그 어떤 경고도 주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은 누가 자기와 같은 고통 속에 빠졌는지 알지 못하고 동일한 고통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사막의 한 가운데에서,

내리 쬐이는 뜨거운 태양을 밭으며,

어떻게 될지 모르는 가족들을 생각하며,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고 포기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두려움과 공포를 만난 인생은 도움을 청할 상대를 떠올려 봅니다.

그들이 자기의 위기를 능히 건져 낼 수 있는지 계산해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처럼 괴로움과 공포에 사로잡힌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그에게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의 증언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하셨다고 분명히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직 아브람에게만 나타나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우리는 왜? 라고 질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발 저는 여러분에게 왜!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나타나시지 않으시고 아브람에게만 나타나셨습니까? 라고 질문을 하라고 권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이나 제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발견할 수 있고 아브람의 만남과 연관성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연관성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시지 않으시고 아브람에게만 나타나셨느냐고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몰려온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인생의 근심 앞에 우리를 구원할 삶의 문제에서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기대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우리의 기대 대로 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문제에서 아브람과 같이 만나주시는 하나님을 불러야 합니다.

아브람은 우리와 같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뜻이 있고 계획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와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브람과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우리는 찾고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온 마음과 생각을 집중하고 나아가야합니다.

우리는 어디에서도 우리의 문제를 해결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모든문제를 해결해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인생을 맞 바꾸는 각오로 우리를 하나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드러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