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연구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롬4:25)

생명있는 신앙 2014. 11. 23. 19:57

의롭다 하시기 위해 살아나셨느니라(4:25)

 

오늘은 아주 긴 시간을 가진 4장을 마무리 합니다.

그 주제는 의롭다하시기 위해서, 오랫동안 달려왔습니다.

이 주제의 시작은 로마서 3:22절부터입니다.

오늘은 그 마지막으로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분명히 밝혀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사도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사람으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1:17)”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복음에 나타난 의가 무엇인지 분명히 밝혀왔습니다.

(http://blog.daum.net/godwithus/16051144)

그래서 이곳에서 많은 설명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복음에 나타난 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입니다. 그것만이 순전히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일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온전히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의가 되는데 단순히 십자가에 죽으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죽으심의 의미에도 하나님의 의가 충분히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의미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반드시 십자가에 죽으셔야 하는가? 그 문제들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충분히 살펴 본 것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죄와 죄의 결과로 말미암은 이방인의 출현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이방인의 정체성에 대해서 너무 많이 언급했기 때문에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정체성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하나님-이스라엘-이방인과의 삼각관계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의 목적이 분명히 드러나 보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에게 보내실 때에는 이스라엘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을 죽임으로 스스로 죄와 단절하는 계기가 되어 자기스스로 하나님의 아들들의 자 의식을 가지고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에게 보내어 졌든지 죽인 사람 자신의 죄 때문에 희생을 당하실 수밖에 없는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곧 사람이 범한 죄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 죄를 대신하여 죽어주심으로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여기에 있는 하나님의 뜻은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인데 그것이 아들을 죄에 대하여 죽이는 일이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반드시 죽음만이 죄를 해결할 수 있는가?

그것도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 반드시 필요한가?

하나님께는 다른 선택의 방법이 없는가?

우리는 언제나 라는 주제를 언급하면 우리 영혼의 지성은 자기지식으로 윤리와 도덕에 있어서 사회성에 적응하여 판단하게 됩니다. 타락한 사람의 영혼은 자기의 지식의 한계를 결코 벗을 수 없기 때문에 더 분명한 진리의 편에 있는 지식을 가진 사람의 지도가 없으면 자기지식 이상으로 판단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의 행위를 진리대로 판단하도록 율법을 보내셨고 그 율법이 규정하는 죄에 대한 판단을 가지도록 한 것입니다.

이렇게 죄에 대한 판단을 마치면, 자기에게 죄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고 그 죄로 말미암은 결과에 대해서는 타락한 사람에게는 양심의 찔림과 그로인한 부끄러움을 겪게 되고 성경은 반드시 사망뿐이라는 선고를 받게 됩니다.

사망의 선고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관계가 있습니다.

사망은 곧 죄의 종식을 말합니다.

더 이상 존재하는 자로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그 이상의 행위를 중단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내심은 바로 이 죄를 종식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으신 피조물이 죄를 범하여 비참에 빠져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은 삶으로 세상을 만드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도도 모든 피조물들 마져 죄가 가득한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다(8:19)”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은 죄를 모르는 존재들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이 고대하는 분이심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죄를 모를 뿐만 아니라 그의 영혼의 지성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말미암은 본유지식이 지음을 받은 그대로 유지된 진리만을 가진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모든 면에서 진리의 조명을 받아 생성한 지식이기 때문에 진리뿐입니다.

예수님의 지식에는 거짓이 조금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삶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고 무엇이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였는지 반드시 찾아서 우리의 삶에 적용하려는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거짓이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입에서 나오는 모든 지식이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삶의 종적과 모든 행동은 하나도 거짓이 없는 진리의 지식의 행동인 것입니다.

타락한 우리도 우리자신이 얼마나 거짓된 존재인지를 알 수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죄가 없으신 예수께서는 우리 속에 있는 거짓된 것들이 얼마나 추한지 확실히 보고 계십니다. 우리m이 조그마한 비밀도 그분 앞에는 숨길 수 없습니다. 그분의 진리가 우리의 거짓을 명확하게 들어다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영혼이 지니고 있는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거짓되고 왜곡된 지식입니다.

지식은 우리를 행동하게 하는 소프트웨어와 같고, 우리의 생물학적의 의미의 육체는 지식에 의해 움직이는 하드웨어와 같습니다.

좋은 지식을 가진 사람은 좋은 행동을 하고 나쁜 지식을 가진 사람은 나쁜 행동을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행동하려고 할 때 그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를 파단하고 제어하는 것도 지식입니다. 선악과를 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먹게 하는 지식을 제어하는 상위지식에 의지하지 않았을 때 우리는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이로서 하나님의 지식이 우리의 영혼에 더 이상 머물러 우리로 진리대로 살수 없는 존재가 되게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의 지성에 있는 모든 지식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바로 성령께서 복음이라는 거울로 조명하여 여러분의 지식의 본질을 파악할 때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사도가 말하는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해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4:26), 곧 예수께서 살아나시려면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조건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의로운지 살펴 보십시오.

예수께서 진리의 지식으로 행동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셨다고 말하면 이 내용을 하나님의 의에 적용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의식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의식은 타락한 자신이 행한 행위가 무엇인지 인식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는 분이시지만 죄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창조적 관계에 의한 작정된 사람들)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타락한 하나님의 아들들이 무슨 행위를 했는지, 그들의 삶에 드리워진 어두움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범죄 후에 정욕을 일으켜 이방인을 낳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이 이방인은 낳아도 되고 낳지 않아도 되는 정욕의 자식들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죄가 아니면 이 땅에 태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는 이 말을 강하게 부정하고 싶겠지만, 아무리 부정해도 이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사도의 의식에 명확하게 새겨져 있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의식은 이방인의 존재에 대한 정체성을 확인할 때부터 명확하게 인식되어집니다.

여러분들은 복음의 태마를 잘 살펴 읽어 보십시오.

자주 읽어 보십시오.

복음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이스라엘-이방인이라는 삼각관계 속에 보내어진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태마가 아니면 복음으로 말미암은 바울의 로마서 교리를 결코 바르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설령 이해했다고 해도 그 해석은 어딘가 많이 모자라는 지식에 불과할 것이 분명합니다.

먼저 이스라엘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이스라엘은 그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 약속은 신명기 18:18에 나타난 너와 같은 선지자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너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시고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두어 말씀하신다고 하신 약속이었고, 이스라엘은 이 약속을 근거해서 이스라엘에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이스라엘을 세상 나라 위에 우뚝 세울 것이고 다윗의 위를 이어 그 위에 앉을 것이며, 영광의 나라를 세울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약속한 메시아는 평화의 왕, 영광의 왕, 세상 나라를 통치하고 다스리는 만왕의 왕이었습니다. 그 왕을 보내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로 보내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평화의 왕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왜 그들에게 평황의 왕, 영광의 왕, 만왕의 왕이 필요합니까?

실지로 창조적 관계에 있어서 이스라엘만 존재하는 이 세상은 평화의 왕이나 영광의 왕, 그리고 만왕의 왕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들의 왕은 하나님이 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왕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어딘가 모순이 되는 문제를 야기 시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창조 세계는 이방인은 존재하지 않고 이스라엘만 존재한다고 보시면 그들에게 보내시는 만왕의 왕, 평화의 왕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살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 되실 탠데 무슨 왕이 필요할 것인지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처음부터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뜻은 이방인을 염두에 두고 계셨으며 그들과 어떤 관계를 위해 준비하신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시는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로 세상의 왕국을 세워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영향력을 세상에 드러내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이 나라가 어떤 나라일지 너무도 분명히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이 진리를 알아야 했었습니다.

만왕이 왕으로 오신 예수는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분명히 보여주는 실천하는 삶을 드러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삶의 모습이 어떤 것입니까?

가장 큰 목표는 죄를 지은 이스라엘에게 자신이 죄의 대가로 죽어주는 것입니다.

그들의 영혼에 있는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왜곡된 지식을 몰아내고 자기 안에 예수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 복음의 지식을 새롭게 담고 그 지식의 조명으로 생성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니고대모에게 말씀하신 거듭남(6:6~7)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이는 성령의 조명을 받지 아니하고 자기 스스로 생성하여 가진 지식으로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왜곡된 지식의 사람을 말합니다.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이는 성령의 조명으로 말미암아 생성된 진리의 지식을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죽음과 이스라엘의 거듭남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범한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입니다.

죄는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하나님께 진노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므로 죄는 반드시 죽어 죄를 끊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죽으신다는 것은 죄를 끊어 다시는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 버리고 맙니다.

만약 죽은 사람이 의인일 경우 죽음이 그를 지배하지 못할 것이고, 결국 하나님의 선은 죽은 사람이 죄가 없기 때문에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그들이 죄의 결과로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에 다시 살아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죽음으로 죄를 끊었기 때문에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으나 다시 살아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의 죄로 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자기의 죄로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죄를 끊어버리기 위해 죽으시기 때문에 자기의 죄에 대한 책임을 가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은 죄 없이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롤 죽음에 두시는 것이 선이 아닙니다. 그래서 반드시 살리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죽임을 당하신 하나님의 아들에 관하여 살펴보아야 합니다.

죽임을 당하신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죽기 위해 오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를 끊어버리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죽으셔야 하는데 누구에게 어떻게 죽을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아무에게나 죽는 것은 하나님의 선과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가 죽여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에게 보내셨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에게 보내셨습니다.

이방인에게 보낸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라면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야만 하고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는 죽인사람의 죄는 사하시는 것이지 아무의 죄나 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이스라엘에게 보내셨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예수를 죽일 때 자기의 죄를 죽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번제의 사상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속죄제의 제물을 가지고 성전에 나아가면 제사장은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는데 그때 그 사람의 죄가 제물로 전가되어 죄가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29:10)

제물은 자기가 죽이는 것입니다.

물론 이를 위임 받은 대제사장이 잡는 것이지만 실지로 제물을 죽이는 것은 자기 자신의 일임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는 것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는 성령의 조명하심의 지각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죄를 위한 제물로 보내셨다는 것을 알고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그들은 자기 안에 있는 죄를 죽이고 새롭게 성령의 조명을 받은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아들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롤 이방인에게 내어주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보냄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는 죄를 위해 죽기 위해 보냄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의 의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