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화평 1 (롬5:1)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5:1)
화평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롬5:10)”에서 의미들을 밝혀보려고 합니다. 화평은 헬라어로 είρήνη 라는 단어입니다. 그렇다고 이 단어가 화목의 의미를 명확하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화목은 καταλλάσσω로서 ‘화해시키다, 달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특징은 신약 성경에서 사도 바울만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화목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의 상태 변화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를 시간적으로 설명하자면 화목 이전에는 불화, 미움, 원망이 반복되는 갈등을 가진 상태에서 어떤 조건을 충족함으로 인하여 반목되던 관계가 화해되어 서로가 평온해진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화목은 관계의 상태변화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로마서 5장 10절에서 말한바와 같이 화목은 예전에는 하나님과 사람사이가 원수관계였는데 그의 아들이 죽으심으로 인하여 원수 관계가 해소되고 평화의 관계로 바뀌었다. 고 말하는 의미에서 화목이 말하는 의미를 명확하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라고 말합니다. 이는 대립되던 반목의 관계가 해소됨으로 인하여 서로 적대적인 관계에서 적과 적으로 대치하며 맹렬히 싸우던 관계에서 전쟁의 종결이 선언되어 쌍방이 서로 어깨를 걸치고 마음을 함께하며 평화를 누리를 것입니다. 이는 화목을 전재함으로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화목은 사람이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라면 화평은 이미 얻어진 관계에서 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라고 말합니다. 이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를 얻었으니 우리가 하나님과 적대적인 관계를 가질 것이 아니라 화평의 관계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앞에서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았으니 라는 전제로 인하여 화평을 누리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은 조건적입니다. 원인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평화를 누릴 수 없는 아주 불편한 관계에서 이를 해소해야 하는 조건입니다. 죄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불편하게 하는 요소가 무엇입니까? 가장 먼저 드러나는 것은 사람의 지성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각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성이 지각을 갖지 못한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인식하지 못하므로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실지로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십니다. 어디든지 계시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있는 곳에나 없는 곳에 우주 끝에도 계십니다. 사람은 항상 하나님과 함께 있고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눈을 열고 사방을 보면 곧 자신과 함께 거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사람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실지로 느껴지지도 않습니다. 사실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육체의 감각으로 느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 육적 감각으로 인식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하나님을 만났다는 특별 은총과 관계를 주장하면서 자기와 하나님과의 독특한 소명이나 혹은 사명을 강조하여 자신을 하나님의 부름에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처럼 주장하여 사람들을 현혹하는 사람들이 사역자들 가운데 많이 있습니다. 불덩어리는 받았다거나 혹은 하나님과의 독특한 신비 체험을 주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우리는 이 말씀에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성에 대한 핵심 정답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육적이고 육적 감각에 의해 인식합니다. 만져야하고, 들어야 하고, 보아야 하며, 냄새를 맡고, 맛을 보며, 시공간의 느낌을 가져야만 합니다. 이것을 육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입니다. 영은 육적인 육감에 감각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영은 어떻게 인식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영을 인식하는 비밀을 안다면 기독교 안에 침투한 신비주의를 명확하게 이해하게 됩니다. 지금 교회 안에는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수많은 비 기독교적 요소들이 교회를 완전히 점령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괴상한 비 인격적 존재로 전락시켜 기독교에 신비주의의 더러운 물을 뒤집어 쓰게 합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영으로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사단의 전략에 사로 잡혀버린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영으로 지각되어야 합니다. 영으로 지각된다는 것은 사람의 영혼이 자기지식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생성한 후 그 생성된 지식으로 영혼의 감성으로 감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사람의 영혼이 자기지식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생성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본질상 타락했기 때문에 영혼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지 않았고, 자기가 가진 모든 지식은 반드시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왜곡된 지식뿐입니다. 그러므로 왜곡된 자기지식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생성하려하면 이미 자기지식이 왜곡된 지식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도 왜곡된 지식을 생성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인은 본질상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결코 가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성령께서 하나님에 대한 조명을 해주셔야만 사람의 영혼이 바른 지식을 생성하고 그 생성된 지식으로 영혼이 지각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고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육적으로 감각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사역하시는 객관적 판단을 중요하게 생각하신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무슨 일이든지 하실 수 있다고 하면서 자기와 하나님 사이의 특별한 관계를 강조하기위해서, 마치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하여 큰일을 행하시려는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시다는 자기중심적 사상에 사로잡혀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까지 왜곡된 하나님을 믿게 하는 우를 범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사역의 원칙에 선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를 부르실 때 독특한 어떤 사람을 구별하여 부르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신비적인 어떤 방법으로 결코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실 때 확실히 보여주셨습니다. 열두 제자들이 부름을 받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실히 인식하는 것은 신비적인 체험을 사용하여 알게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한결같이 성령이 임하신 이후에 비로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알게되는 근거는 성령의 조명이고, 이것은 육적 감각이 결코 아닙니다. 성령의 조명은 영혼의 지성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생성할 수 있도록 비춰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생성하여 지각할 때 비로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지각하는 것입니다. 이때 비로서 자기가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을 알고 무소부재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사람이 하나님을 결코 인식할 수 없도록 합니다. 죄에 거하는 사람은 항상 함께 거하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아무런 의식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과 함께 거하면서 언제나 자신을 부인하는 사람과 화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는 본문 롬5:1에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로마서 4장으로부터 아브람의 믿음을 살펴보면서 믿음이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말미암은 이끄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곧 사람의 의식과는 전혀 상관이 없이 주도적으로 이끄시는 성령의 역사이며 이 사역이 마치 아브라함에게는 자기의 의지와 관계있는 것처럼 인식된다고 말했으며,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사람의 의라고 칭하여 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이끄시고 이끌림을 받은 사람은 삶의 환경과 상황이 이끌림에 합당하게 인식되어짐으로 자연인이 본성의 의지로 나아가는 것처럼 인식되지만, 바로 이것이 믿음의 행위이고 하나님께서는 이 행위를 의롭다하심으로 실지로는 사람이 자기의 의식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이끄심으로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은 자기의 의식적인 반응이 아니라 전적으로 성령의 사역입니다. 이 사역을 믿음이라고 하고, 이 믿음은 사람의 의식적인 행동으로 볼 수 없으므로 의롭다 칭하여 주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믿음은 우리의 의식적인 행위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성령의 사역이었습니다. 이 사역은 하나님의 사역이기 때문에 의가 되지만 이를 우리의 의로 칭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에게 바로 이와 같은 성령의 사역이 함께함으로 우리가 이 사역의 이끌림을 힘입어 우리의 본성으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