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연구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며(롬5:3)

생명있는 신앙 2015. 1. 16. 03:27

환난중에도 즐거워하나니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사람의 상태에 관하여 그 지성이 하나님을 찾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하도록 지식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지성은 성령에 이끌리는 상태에 있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정하기는 우리의 본성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하나님을 향하여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확인했으니 우리 자세가 돌이켜지고 행하는 모든 것은 우리의 지성 안에서 성령께서 역사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동안 이 지식을 항상 기억하고 우리의 지성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을 의지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왜곡되고 거짓된 본성으로는 하나님의 지식을 가지지 못함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돌이켜 바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 본성의 지식은 거짓이고, 하나님의 지식은 진리이기 때문에 두 지식이 우리의 지성안에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본성상 거짓에 치우쳐 거짓을 사랑하고, 왜곡된 지식을 더 가까이하며 그 지식으로 사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식은 본질상 진리이기 때문에 우리의 지식과 가까이 할 수 없고 하나가 되거나 혼합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자의 영혼 안에는 두 지식이 있어 그 지식들이 우리를 주관하게 하는 욕구에 의해 행동을 드러내는데 우리의 욕구가 성령의 이끌림을 받을 때에는 하나님의 지식으로 행동하고 본성의 욕구대로 행할 때에는 왜곡된 지식으로 행하게 됩니다. 신자의 삶은 완전한 영화에 이르기 까지는 항상 이 두 지식에 의한 행위를 나타나게 됩니다. 다만 어느 지식의 삶을 사느냐에 따라 신앙의 정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도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은혜에 들어감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고 하는 것은, 성령께서 신자를 이끌어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지으셨을 때, 즉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에는 아담 스스로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고 하나님의 영광을 즐거워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타락한 그 순간부터 자기 앞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은 기억은 되지만 지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각되지 않은 것은 영혼에서 감각되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사람의 타락은 피조물이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유일한 감각을 상실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이 감각되지 않고 지성으로 판단하기는 어떤 이상을 추구하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기대하는 감정으로 오인합니다.

타락된 본성의 지식으로 사도가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은 일종의 환상이나 초자연적인 어떤 관계를 기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본성의 지식이 이것을 추구하고 있는 이상 다른 지식을 받아들이고 그 지식에 대한 지각을 가지는 것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이미 가진 지식이 다른 지식을 수용하려는 것을 매우 조심스러워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성경을 통해 살펴본 것에 의하면 타락한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향하여 자세를 돌이키고 바라보게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성령의 사역이라고 말해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으로 이끌림을 받을 때 비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지각할 수 있고, 즐거워하는 감각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여러번 확인했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기독교인 곧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움을 받은 것은 성령의 이끌림을 받고 있는 것이 객관적으로 확인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지 않아도 남들이 여러분을 향하여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한다면 여러분의 삶에서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확실한 증거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역으로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만 그리스도인이라는 주관적인 신앙에서 벗어나 객관적으로 어떤 환경에서든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객관적인 환신들이 자주 증거되는 삶이 필요합니다.

 

로마서 5장에서 사도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잘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는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가 세상에 대해서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4장에서 살펴본바, 아브라함이 그의 평생의 삶을 통해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얻었습니다.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그 믿음이 그에게 의로 여겨지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을 말했습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라고 말할 수 있고 우리는 이것이 아브람의 본성의 삶이 아니라 성령께서 이끌어주시는 삶이라고 확신하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아브람을 이끄시는 성령의 사역이 믿음으로 나타난 것이라면,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 하나님 아들에 관한 복음의 사건을 믿는 믿음도 성령의 이끄심으로 말미암은 삶의 결과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에 있다면,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믿음은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 두 믿음의 대상은 분명히 같지 않습니다. 아브람의 신뢰와 우리에게 주체가 되는 복음에 대한 인정은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믿음이나 우리의 믿음이 동일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나 우리에게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믿음으로 나타나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주관적인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객관적인 적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본성의 지식의 결과가 아닙니다.

믿음은 성령의 이끄심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다는 것은 성령께서 그 사람을 이끌고 계시는 것이 객관적으로 드러나고 사람들이 그것을 볼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아니고 자기만 믿는 것은 주관적인 자기신앙에 불과합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과 삶을 철저히 구분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삶속에 믿음이 포함되는 것, 즉 성령께서 개입하셔서 자기의 삶을 이끌어주시는 것을 의도적으로 거부합니다. 삶은 세상과 짝하고 세상을 즐기고, 세상에 치우쳐 살고 있습니다.

종교 부분에 있어서만, 주일에 교회에 나아가 예배하고 찬양하고 봉사합니다.

삶의 주 부분은 세상이고 종교는 세상에서 지나친 자기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자기를 성찰하며 자기의 마음을 정화하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와 삶을 철저히 구분하고 종교에 지나치게 빠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믿음은 성령의 이끄심이 삶의 결과로 드러나는 객관적으로 확인되는 것입니다.

 

! 이제 사도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에 들어선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고 앞에서 말하면서 곧 바로 믿음의 사람에게 있어서 나타나는 한 가지를 언급합니다.

이것은 믿음의 사람이 결코 피할 수 없는 삶의 현장에서의 시련을 말합니다.

그것은 환란입니다.

믿음의 사람에게는 항상 축복된 삶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삶이란 굴곡이 있습니다. 정상이 있는가 하면 밑바닥이 있습니다. 파도를 치는 것 같은 굴곡의 삶은 행복과 슬픔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어느 때는 즐거움만 있고 어느 때는 한없는 고통의 순간이 이어져 낙심하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서로 다른 두 삶에 적용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사도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믿음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환란중에 슬퍼하고 이를 견디지 못하고 사건을 터뜨리고 삶을 포기하지만 믿음의 사람은 환란 가운데에서도 즐거워하는 삶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믿음의 사람과 믿음을 가지지 않은 사람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환란이 자기의 본성의 삶으로 이겨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이끄심이 삶의 중심이 되기 때문에 성령과 함께 가는 그 환란이 그에게 어러움이 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이후 자기의 삶속에 나타난 자기의 변화를 통해 어떤 환란과 고난에서도 견고한 신앙으로 자기를 이끌어 오시는 성령을 항상 인식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사도는 심한 어려움 속에서도 자기의 신앙이 객관적으로 드러나 보여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는 확신을 갖게 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드러낸다면 무한한 영광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