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연구

환란은 인내를 10(롬5:3)

생명있는 신앙 2015. 6. 20. 00:53

하나님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천지를 창조하실 때 가지셨던 하나님의 기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을 지으시고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1:31)라고 말씀하신 심히 좋은 상태 입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철학에서는  스콜라주의적인 입장에서 접근해 왔습니다. 

스콜라주의적 접근이라는 것은 신앙을 이성으로 정리하려는 체계적인 학문을 말합니다.  관점은  어떤 매개를 통해서 인식하려는 것인데, 철학자들은 도덕 이라는 렌즈로 분석하고 이해하려고 했고,  처럼 어떤 주제나 객체의 사실을 어떤 매개를 이용하여 인식하려는 것을 이성적 방법이라고 하고 스콜라 철학은 기독교의 신앙을 이성이라는 랜즈를 통해서 이해하고 분석하는 것입니다. 

스콜라 철학은 교부시대 이후 중세 암흑기인 12세기에 에리우게나, 안셀무스아벨라르 같은 학자들이 체계를 세웠는데 대표적인 논증의 주제가  존재증명 관한 것이었고, 이후 알베르투스 마그너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구체적으로 정리되었습니다. 

실지로  철학은 아리스토 텔레스의 철학이 기독교에 대거 유입되어 기독교를 정리한 것이고 현대 신학에서 구체화 되어 등장하였으며 조직신학과 변증학에서 광범위하게 적용되어진 것입니다. 

조직신학에는 철학적이고 사변적이며 신학을 학문적으로 체계화 하는 방법 묻어 있지만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학에서 스콜라철학의 방법으로 기독교 신앙을 논술하는 것은  유대교 유일신 종교가 헬라문화에 유입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으로 인하여 기독교가 탄생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콜라주의적인 개념에서 하나님의  도덕이라는 매개를 사용하여 들여다보고  본질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피조물의 인지 기능

 

하나님의  이해함에 있어서 피조물이 사물과 객체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인지 기능의 의미 살펴 보지 않을  없습니다.  기능은 육체의 감각기능으로 인하여 감각된 객체와 사실들의 표상이 영혼의 지성서 반영되어 지식을 느끼는 작용을 말합니다

피조물은 육체와 영혼을 가진 사람과, 육체만 있되 영혼이 없는 동물과, 움직이지 않고 땅의 의지하고 자라나는 식물이 있습니다.  전체를 활동하는 존재와 활동하지 않은 존재로 구분하고, 활동하는 존재는 영혼을 가진 존재와 가지지 않은 존재로 구별합니다. 영혼을 가진 존재는 영혼에 지성이 있어 지식을 가지고 있고  지식을 육체의 감각에 반영시켜 전인으로 활동하고, 영혼이 없는 존재는 감각만으로 활동합니다. 

지성의 작용은 어떤 사실과 객체를 육체가 감각하고  감각된 표상을 반영 받게 되면 그것의 정체를 파악하여 전인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피조물인 사람이 인식한다는 것은 먼저 객체나 객관적 사실들  현실태를 플라톤이나 데카르트 처럼 관념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주장하거나, 로크와 칸트, 라이프니즈, 혹은 라인홀드,  처럼 경험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관념은 현실태와 객관적 사실과 일치하는 지식을 말하는데 플라톤이나 데카르트는  지식이 생득적으로 주어진 것이며, 로크나 칸트, 라이프니츠, 라인홀드는 경험에 의해서 얻어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관념이 생득적이냐? 경험에 의한 것이냐 따라 철학의 방향이 달라지고 지식의 세계가 분명하게 구별되지만 이런 구별들이 진리를 밝혀주는 것인지는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서 밝혀져야만 하는 것이지만 신앙의 입장에서는 이런 철학으로는 결코 진리에 이를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전인으로 인식하게 하는 지성의 작용은 생득적 관념이나 경험적 관념이 말하는 작용이 아니라 감각되므로 인하여 표상이 영혼의 지성에 반영시켜지고  반영된 표상을 지성에 선재하여 얻어진 지식이 조명하여 반영된 표상에 대한 지식을 갖게 하는데생성하여 가지는 / 이것을 로크는 비어있는 마음의 방에 감각된 관념을 비치하는 것 , 오성론 1,2,15)이것은 이미 이러한 반복적 경험에 의해 생성된 지식이 조명함으로 지식을 생성하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물이나 객체와 객관적 사실들을 육체에서 감각되어지므로 표상이 지성에 반영되어졌는데 이미 가진 지식으로  표상을 조명하였으나 자기의 지성에 가진 모든 지식으로는 표상과 일치하거나 인식될 만한 지식이 없을 경우  표상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가지지 못함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사람의 지성은 인식이 가능한 표상,  객체나 객관적 사실로 부터 억견이나 진리를 찾을  없으므로 자의적으로 지식을 가지게 되는데  지식은 진리와 전혀 다른 개념을 갖게 된다. 예를 들어 문명사회를 알지 못하는 오지의 원주민이 문명의 산물을 우연히 취득하게 되었을 경우  문명의 산물의 정체에 대한 지식을 가지지 못하고 자기 개념으로 지식을 가지고 인식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성경은  경우에 있어서 명확하게 인류의 조상의 후예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인과 아벨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관계를 설명함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으로부터 제사 명령을 받았고 그들은 각자의 주관에 따라 하나님을 향하여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를 받아주시고 가인의 제사를 받아주시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드리는 제물의 가치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니었고, 동일한 의미의 명령을 받은 사람이  의미를 이해함에 있어서 의미를 부여한 하나님과 일치한 마음으로 제물을 드렸는지가 중요한 것인데 아벨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제사를 드렸으나, 가인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의 생각대로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으로부터 거절당하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한 사람과 이해하지 못한 사람의 차이점은 하나님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가진 사람과 가지지 못한 사람으로 구별됩니다.  아벨은 하나님을 진리대로 이해하고 아는 사람입니다. 반면 가인은 오지의 원주민이 문명의 산물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의 판단에 따라 산물에 관한 지식을 가진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지지 못하므로 왜곡된 제사를 드려 하나님으로부터 거절당하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가인이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지식을 가지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반면에 아벨은 하나님을 알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가 무엇인지 알았던 사람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구별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인데  인식을 갖게 하는 것이  지식인 것입니다. 

 사람아 하나님으로부터 제사를 명령받은 것은 동일한 경험입니다. 그러나  명령에 대한 결과가 다른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입니다. 가임과 아벨이 하나님에 대해서 다른 인식을 가진 원인은 그들이 말씀을 들은 감각은 동일하지만  말씀의 표상을 지성에 반영하였을  지성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조명해주는 지식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아벨은 하나님의 성령의 조명을 받았지만 가인은 하나님의 성령의 조명이 아닌 자기 지식의 조명을 받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원주민이 자기가 습득한 문명의 산물에 대해서 명확한 지식을 가지게 되는 것은 문명인의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원주민에게  문명의 산물에 대한 가르침을   있는 사람이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문명의 산물에 대해서 전혀 다른 지식을 가진 것처럼 아벨에게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하나님의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있는 지식을 가졌으나 가인은 자기 자신의 지식의 조명으로 하나님을 이해함으로 하나님에 대한 심각한 왜곡된 지식을 가짐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  

결론적으로 사람의 지성작용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플라톤이나 데카르트의 주장처럼 생득적 관념으로부터 비롯되었거나, 로크나 칸트, 라이프니츠나 라인홀드와 같은 경험론적 인식론의 이성적 방법은 결코 사람을 진리로 인도되게   없습니다. 게다가 종래의 다윈론의 합리주의적인 입장으로는 사람은 존재하면서 자연적으로 인식의 기능을 가진 존재라고 받아들이고  이론이 보편적입니다. 누구든지 사람은 자연적으로 객체와 사물에 대한 지식을 가질  있다고 믿고 있고  지식이 공통적으로 동일한 의미나 표현을 가진 것은 선천적으로 지적인 기능을 닮거나 가지고 태어남으로 가능하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1690 로크의 인식론으로 체계화된 효시로 보고 칸트의 초월론적 철학의 성립된 인식론은 헤겔이 변증법적인 입장의 대항으로 베게네, 피히테, 라인홀트 등에 의해 다시 로크, 칸트 중심의 인식론으로 명확하게 정의되기에 이르렀습니다.(라인홀트, 인간의 인식능력의 이론 및 형이상학). 하지만 본래 로크가 지각이 있는 곳에는 참된 지식이 있으며, 지각이 없는 곳에서는 이를 태면 공상  수도 있고, 추측할 수도 있고, 믿을 수도 있더라도, 언제나 참된 지식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John Lock 1690, An essay concerning Human Unerstanding 2,1,2)”라는 말은 로크의 인식론에서 지식의 불명확한 개념을 보였습니다. 후대에 라인홀트가 분명하게 정의한 지식은  로크에 의하면 지식은 분명히 타고난 관념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얻어진 관념에 관계되기 때문이다John Lock 1690, An essay concerning Human Unerstanding ,,15)”라고 말한 의미에서 다윈론적인 의미에서의 지식을 생성하는 명확한 개념을 가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식한다 것은 인간이 주변의 자연   사회에서 작용하는 모든 외계에 있는 것에서 얻은 지식대로 지각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내가 감각한 대상을 의식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생각은 사람이 자신의 존재 외계의 자연과 사회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기능적인 결과를 말하는 것으로 지식을 얻고  지식에 의한 감각을 가진 것으로 지식에 의하여 반응하여 행동할  있도록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지식과 인식은 명확하게 구분되고 지식을 가짐으로 반드시 인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하기 위해서 반드시 지식이 필요하고 자연과 사회적 사실에 대한 대상이 지식에 의해서만 인식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지식은 사람 안에서 자연과 사회적 사실과 관계를 연결하는 매개체로서 사람의 지성으로 인식하게 하고 인식된 것에 대해서 반응 행동을 하게하는 것임을   있습니다

만약 사람이 동물과 같이 영혼이 없는 존재라면 지식이 필요 없이 감각적 반응으로 행동하지만 영혼의 지성이 있어 지적인 반응으로 행동하는 점에서 동물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지식이 아니고는 활동하지 못하고 사회적인 관계를 가지지 못합니다. 

지식이 없으면 자기 존재에 대한 인식을 가지지 못하는 감정적인 존재가  뿐입니다.  

그러므로 지식은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객체와 사실에 대한 자기 존재를 인식하게 하는 영혼에 담겨질 요소로서 영이라고 명확하게 말할  있습니다

 

분명하게 지식은 영입니다.  영이 진리에 속하는지 아니면 거짓에 속한 영인지 구별하는 것은 사람 영혼의 지성에서 지식이 생성될 때 성령이나 자기지식  중에 어느 지식의 조명을 받아 생성된 지식이냐  따라 구별되어집니다. 오지의 원주민이 문명인이 산물에 대하여 이것이 무엇이라고 알려줌으로 산물에 대하여 올바른 지식을 가진 것은 산물에 대한 지식을 조명해주는 것입니다. 성령의 조명하심은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를 내신 하나님의 영께서 사람에게 들려진 하나님의 말씀을 조명하여 주심으로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알려 주심과 같이 지성으로 진리의 지식을 생성하여 가질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반면에 자기지식의 조명을 받는 것은 문명의 어떤 산물에 대한 지식을 가지지 못한 원주민이 문명의 산물을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거나 이해하여 명명하는 왜곡되고 잘못된 결함의 지식을 생성하여 가지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으나 사람의 지성에 하나님과  말씀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자기마음대로 해석하고 판단하는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식한 하나님과 말씀에 대한 지식은 반드시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왜곡되고 잘못된 지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자기의 지성에서 생성한 지식으로 행동하는 결과를 보여주는 서로 다른 구별된 반응입니다.   

 

하나님의 영과 사람의 

 

우리는 지성의 기능을 이성의 방법으로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한 신앙으로 이해하려고 시도해 봤습니다. 사람의 영혼의 지성은 자율적으로 지식을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객체와 어떤 사실들에 대한 표상으로 반영을 받으면 자기의 지성 안에 있는 자기지식으로 표상을 조명하여여기에서 표상은 원주민이 우연히 얻은 문명인의 어떤 산물이고, 조명하는 것은  산물에 대한 지식을 문명인이 나타나 원주민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줌으로 표상에 대한 지식을 생성함으로  지식으로 인지할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자기의 지성이나 객관적으로 얻어진 사람이 이해할  있는 생성된 지식이 아니면 인식할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말인 지식과 일치한 코드를 가진 지식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 적용되지 못하고 반드시 하나님의 성령의 조명에 의해 사람이 이해할  있는 지식으로 생성 되어진 후에야 인식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같이 하나님의 명령을 자기지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진리를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왜곡된 지식으로 진리를 조명하여 이해할  있는 자기지식을 생성하였으므로  지식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곡해할  밖에 없는 오류를 행할  밖에 없습니다

영혼의 지성은 육체의 감각으로부터 객체와 사실들에 대해서 표상을 반영 받을 때 자기지식을 생성합니다. 이때 반영을 받은 표상을 어떤 지식으로 조명을 받느냐에 따라 인식할  있는 지식이 다르게 됩니다. 종래 대부분의 사람들이나 철학적 이론에 의한 인식론은 사람의 지성이 육체의 감각을 통해서 얻은 지식이나 하나님의 말씀 혹은 명령, 그리고 객체사물 사실사고나 억견들들의 표상을 직접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인류 최초의 사람 가인과 아벨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명령과 하나님에 대하여 각각 다른 이해를 가진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인이 이해하는 하나님과 아벨이 이해하는 하나님은 제사의 수납여부에서 확실히 드러났고, 가인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한 대화에서 가인이 하나님에 대해서 전지전능하심4:9~10) 무소 편재성4:16) 오해하고 있음을 드러냄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사람에게 적용하시는 하나님 은혜의 불평들을   있습니다. 실지로 하나님 은혜를 모든 피조물에게 불평등하게 적용되어지지 않지만, 적용을 받는 사람에게는 불평등한 것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가인과 아벨에게 제사를 명령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인 반명  은혜의 명령을 각각 이해하거나 해석하는 점에 있어서 구별되는 것은 아벨에게는 성령의 조명하셔서 하나님의 명령을 진리대로 이해하도록 하셨으나 가인은 자기지식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이해함으로 오류를 범하여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반응을 나타내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피조물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더라고 그에 대한 반응이 다른 것은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말미암은 인식과 피조물 스스로 조명에 의해 인식하는 차이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전능하시고 평등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사람에게는 진리대로 적용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진리의 적용을 받지 못하는 것인지 의문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것을 이해할  있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입니다. 

하나님의 선이란 창세기 1:31에서 말씀하신바와 같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아더라라는 말씀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앞에서 우리는 모든 철학이 하나님의   자체 이해하고  본질을 정체를 알기 위해서 도덕이라는 랜즈를 활용하여 이해하려고 한다고 말했습니다. 

인류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는 선입니다. 

 선은, 

불교적 개념 : 우리의 지극한 성심성의가 머리끝까지 다하는 지극정성

소크라테스 : 선을 좋은 , 지혜로와라 그것은 선하다

아리스토텔레스 : 인간의 궁극적 목적을 위한 행복의 실현을 위한 수단

칸트 : 본질 모두가 향상된 완전성을 선이라 

공리주의 : 쾌락

유교 : 밝은 , 이라고 각각 나름대로 개념을 정의해 왔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기 철학을 펼쳐 왔습니다. 

 최고의 가치가 되는 것은 인간이 궁극적으로 성취하고자 하는 최고의 목표이고  목표 의식은 모든 지식 속에 함의 되어진 개념인것은 사실입니다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사람의 행동 양식으로   지식을 주셨기  때문에 모든 지식에는 선을 향하는 근본적인 개념을 반드시 함의 되어지도록 코드를 부여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모든 지식에는 반드시 "선" 의미가 함의 되어 있고 결국 사람으로 선한 행위를 하도록 하셨습니다

반면에 참된 진리가 아닌 거짓된 지식에는 반드시 무지와 결함을 함의하고 있는데 그것이 선에 대한 결함을 포함한 결함입니다. 거짓 지식에는 지식에 따라 행하는 사람이 선을 향하도록 이끄는 의미가 함의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거짓은 선을 지향할  없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도 않은 것입니다. 이런 왜곡된 지식을 가질  밖에 없는 것은 지성이 자기가 인식할  있는 지식을 생성할  반드시 조명을 받아야 하는 하나님의  조명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차별적으로 사람의 영혼에서 조명하는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최후의 결과를 보시기에 심히 좋은 이라고 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인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이라는 언어의 구절의 의미가 보시기에 심히 좋은 이라는 의미와 다르게 인식된다면 나는 하나님의 이라고 말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보시기에 심히 좋은 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의미의 구절은 분명히 같은 의미의 구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하나님의 사역의 한계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역을  한계,  하나님의  이르는 범위까지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르지 못하거나 초과한 어떤 행위는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존재와  사역에 있어서 언제나 초월적이시지만 바로   있어서 스스로 제한을 가지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하나님의 사역의 범위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창조하시는 사역에 있어서   이르자 사역을 멈추셨습니다. 

이상의 어떤 한계를 벗어나지 않고 피조세계를 으로 완성시킨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심히 좋은  하나님의 케논인데  범위에 속한 것이나 속하지 아니한 것은 결국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은 것이 됩니다. 

우리는 가인과 아벨에게 있어서 동일한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사람에게 나타난 반응이 각각 다르게 나타난 원인을 하나님의 으로부터 이해할  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적용

 

가인은 하나님의 명령이 아벨과 동일하게 받았으나 성령께서  명령을 조명해주시지 않으므로 자기지식으로 명령을 이해하여 명령대로 반응하게 되었습니다.  반응은 아벨의 반응과 달랐고 하나님은 가인의 반응을 수납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동일한 명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성령은 동일한 명령에 동일하게 조명하시지 않았느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확인해볼 것은 하나님의 성령이 가인이 받은 하나님의 명령을 조명하시지 않았을까요? 결코 그럴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에게 동일하게 비를 내리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피조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에게 조금도 차별이 없이 동일한 적용을 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타나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우리는 동일한 명령과 조명에도 불구하고  반응이 가인과 아벨처럼 다른 원인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지 씨름하고 있습니다. 

저는  원인을 하나님의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무엇인가? 우리는  정체부터 파악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

우리가 파악하는 하나님의  정체는 세상의 철학이나 혹은 사색을 통한 결과나, 깊은 진리의 추구를 통한 발견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에서  하나님의  의미를 발견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본질을 말하는 것이 터무니 없고 일방적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도덕에 비추거나 혹은 사색을 통하여 얻은 것이 아니라 성령의 조명에 의해 드러나고 밝혀질  있는 진리의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조명을 통하여 우리에게 드러난 하나님의  지극히 질서롭고 지극히 조화로운 이었습니다. 질서롭다 것은 차서와 순서에 있어서 흐트러짐이 없이 분명하다는 것이고, 조화롭다 것은 질서에 따라 놓여진  자리가 모든 피조물이나 객관적 사실들이  어울리고 모순되지 않으며 어긋남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선이라고 하셨다면 우리는  의미를 따라 우리의 생각을 바꿔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조명되어진 하나님의  질서롭고 조화로운 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질서롭고 조화로운  가인과 아벨에게 비춰 보기로 했습니다물론 이런 방법은 스콜라 철학과 다를  없습니다. 철학에서는  도덕에 비추어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인과 아벨에게 질서롭고 조화로움을 비추어 하나님의  찾으려 하는 방법은 어떤 대상을 특정한 지식으로 조명하여 인위적으로 답을 찾으려고 하는  방법이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런 방법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의미를 이해 해보려고 하는 것은 그것은 도덕으로 하나님의  이해하려는 이해하려는 대상을 다르게 적용하기  때문에 담대하게 시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철학은 진리를 불완전하고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도덕으로 하나님의  비추어 인식하려는 것인 반면 우리는 하나님의   질서롭고 조화로움으로 가인과 아벨을 비추어 인식을 가지려는 것이기  때문에 찾고자 하는 본질이 다르다는 것을 우리가 지극히 합리적이며 명확한 방법이라고 말할  있습니다. 

이런 조명으로 우리는 가인과 아벨에게서 하나님의 선의 본질을 이해할  있습니다. 

가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조명하여 볼 때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였으며,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감각으로 가졌으며, 이로 말미암아 성령의 조명 받았으므로 당연히 하나님의 의 조명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떠나며, 미워하며, 원망하였습니다. 충만한 하나님의 은혜가 가인에게 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가인이 자기의 의지로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은 그의 출생에 비밀을 두지 않을 수 없는 데, 그 비밀이 하나님의 작정하심으로 말미암은 사람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은 정욕의 자식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가인은 모든 하나님의 은혜가 적용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만약 죄인이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임하고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가 부음바 되었으면 당연히 변화와 하나님의 사역의 역사가 나타나야 합니다.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모든 작정된 후손들이 죄에 바질 수 밖에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되었을지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였을 때는 그들이 그 은혜를 거부할 수 없게 되는데 이 은혜가 적용되지 않은 가인은 하나님의 은혜의 적용을 받지 못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선이 가인에게 적용되는 은혜를 가로막았다고 밖에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선은 질서롭고 조화로움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가인에게 조명되어지면 가인의 출생이 질서와 조화에서 철저히 멀어진 죄의 결과적 정욕의 존재이기 때문에 선이 하나님의 은혜의 조명을 가로막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어주실지라도 그 은혜가 적용되지 못하는 구체적인 근거들을 가인을 통해서 분명하게 발견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선은 하나님의 사역의 완성입니다.

이것을 최고의 선이라고 하고 이 최고의 선을 발견하려고 철학자들은 생명을 아기지 아니하고 궁구하지만 결코 성경을 떠나서는 그 답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선에 적용되지 않은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없는 비참한 존재로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존재는 분명히 비참과 저주의 운명을 타고났으며 하나님의 선에 합당하지 않은 출생의 비밀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방인이고 본래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하나님의 선으로부터 이탈된 존재입니다.

예수께서 스로보니게 여인에게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다(7:27)” 하시고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낳으니 너희 아비의 일을 행하는 도다. 저는 처음부터 거짓을 말하는 자요(8:44)”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의 출생이 하나님의 선을 현저하게 위반하였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