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1 "하나님께서는 왜 아들을 보내셨나"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 1”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고전 15:3~4)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도가 말하는 복음을 성경으로 확인해 본 결과 다음과 같은 4가지 단락으로 구분해서 살펴 볼 수 있습니다.
"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는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시기로 약속하신 것을 의미하고,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는
두 번째로,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저주를 받아 죽으신 것이며,
“장사지낸바 되었다가,”세 번째로, 죽음에 대한 확실한 증거로 무덤에 장사지냈고,
“성경대로 살아 나셨다,”네 번째로, 부활을 의미합니다.
이 4단락이 한 문장으로 “복음”이고 진리의 서고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인생의 야망을 위해 혼신을 다해 추구한 바리새인이며, 국가의 공회원으로 입문하기 위한 문턱에서, 당대의 최고의 학자이며, 권위자인 가말리엘의 문하생의 자리를 내던지고,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이단으로 정죄 받은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예수의 십자가의 비밀에 전생을 바치게 됩니다.
바울 사도가 밝힌 십자가의 비밀은 기독교의 핵심이 되고, 13권의 성경으로 채택되어 교회의 신앙을 형성하는 교재가 되었습니다. 이 교재에는 이방인과 유대인의 화목, 하나님과 사람과의 화목, 하나님의 비밀인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인 섬김의 실천, 등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정의한 신학자였던 것입니다.
지난 주 요한복음3장에 등장한 니고데모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이 대화에서 사람이 하늘나라를 보려면 거듭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거듭남의 중요성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거듭남은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구원서정 중에 소명 다음에 두는 교리입니다.
소명을 부르심이라고 한다면,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거듭나야 하고 거듭난 사람이 회개하게 된다는 교리입니다. 우리는 이 교리가 배타성을 갖는 교리라는 이유로 배격할 수 없는 중요한 서정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여러분들도 각 분야에서 니고데모와 같은 최고의 분들입니다. 여러분들은 니고데모와 같이 지금 예수 그리스도 앞에 계십니다. 아마도 예전에는 그리스도의 매력에 흠뻑 도취된 사람으로 한동안은 먼발치에서 예수를 지켜보았을 것입니다1.
어떻게 예수님 앞에 나왔는지 알 수 없으나,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처럼 호기심어린 표정을 가지거나 혹은 부끄러움을 가지고 예수 앞에 나오셨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대 다수 사람들이 니고데모처럼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예수님 앞에 나아오게 됩니다.
그때도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것처럼,“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라는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여러분에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았으나, 실지로 모든 사람에게 묵시적으로 그들의 영혼에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의 도움
지난주에 제가 말씀을 드린 것처럼, 사람은 어떤 객관적 사실이나 실체 혹은 객체들에 대해서 어느 하나도 통전적(統全的,Holistic) 지식2이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람이 가진 모든 지식은 하나도 빠짐이 없이 모두 부분적이고, 전체일지라도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지식이며, 이 지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부분적이라는 말은, 객체를 보거나 관찰할 때 전면을 보면 뒤를 모르거나, 옆을 보면 다른 한편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의 지식만을 가지고, 모르는 부분을 무지에 두고, 알 수 있는 것들이지만 지식을 가지지 못하는 부분은 결함에 두어, 전체로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지식을 가집니다.
이렇게 생성된 지식은 감각된 다른 표상을 조명하여 다른 지식을 생성하기 때문에 결국은 또 다른 왜곡된 지식을 생성할 수밖에 없으며, 반복적으로 왜곡된 지식으로 조명하여 생성한 모든 지식은 더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의 지식을 내려놓고 모든 것을 통전적(統全的)으로 조명해 주시는 완전한 지식을 소유하신 하나님의 성령의 조명이 필요합니다.3 주님께서는 보혜사 성령을 약속하셨고,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시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자기 지식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성령의 도움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이 지혜는 이 세상의 통치자들이 한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4
왜곡된 지식
니고데모의 마음에 거듭난다는 직접적인 표현에 대해서 매우 의아해 했습니다. ‘사람이 늙었는데 어떻게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습니까?’이런 역 질문은 지식이 있는 이스라엘 학자에게서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의 지성에는 거듭난다는 것에 대해서 이 말 외에 다른 말을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의 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휼륭한 선생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놀라운 능력을 행하시며, 자기들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높은 도덕성에 감탄하고 동경한 가운데 자기가 직접 한번 만나서 대화 해 봐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자기의 신분을 뒤로하고, 남의 눈을 피하여 밤에 찾아왔습니다.
이런 니고데모를 보신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사람의 육체만 보신 것이 아닙니다. 그의 영혼과 영혼 안에 있는 지식들이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왜곡된 지식만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5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볼 때 예수님의 영혼을 보지 못하고 예수님 안에 함께 거하시는 성부 하나님과 말씀도 보지 못한 것입니다.
께어진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만드실 때, 흙으로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므로 생령이 되게 하셨으니, 영혼과 육체가 함께 있고, 영혼 안에는 그 사람을 움직이고 사람으로 활동하게 하는 지식이 있으며, 그 지식은 하나님의 형상의 조명으로 생겨난 것입니다.6
이렇게 지음을 받은 사람이 타락하게 되자 하나님 형상은 깨어지고 뒤틀리고 엉키어 혼란스런 지식들로서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왜곡된 지식들이 생산되었고, 눈에 보이지 않은 것들을 볼 수 없는 순수한 육적 상태이며, 그 지식으로 판단하는 모든 생각과 사상들이 하나님을 떠난 거짓들이었던 것입니다.7 이 지식들에게서 정욕이 일어났고, 육체에서 일어나는 알 수 없는 욕구들로 타락의 열매를 드러내며, 본성으로 주었던 생육의 욕구는 정욕으로 변질되어 하나님의 계획과는 무관한 타락한 죄의 열매들을 생산하게 된 것입니다.
정욕으로 말미암아 타락한 사람들의 영혼에서는 삶과 죽음의 비밀들이 적나라하게 지각되어, 유한한 인생과 삶의 무가치함도 알게 되고, 이생에서의 삶을 만끽하려는 타락된 생각들과,8 자기의 존재의 근원에 대한 미움과 분노와 증오가 들끓어 온 세상을 죽이고 파괴하는 난장판을 만들어 버렸습니다.9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서 영을 거두어 가셔서 지성을 어둡게 하심으로 자신의 존재의 근원과 미래의 삶에 대한 비밀들을 지각하지 못하도록 하시므로, 영혼의 존재를 지각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만 것입니다.10
육체가 됨이라.
니고데모는 육체의 두 눈으로 예수님을 볼수 있으나 영혼은 보지 못하고, 육체만 보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볼 때 상대방의 영혼을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육체만 봅니다. 모두가 사람을 볼 때 사람의 한 지체인 영혼에 대한 감각을 갖지 못합니다.
여러분도 저를 지켜보면서 내 안에 있는 손과 발 같은 또 다른 지체인 영혼을 못 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니고데모 안에 있는 한 지체인 영혼을 보셨습니다. 그 안에 있는 지식까지 훤히 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를 보시는 것 같이, 나와 여러분의 영혼을 아시며, 여러분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11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어떤 일을 하려고 하는지 이미 다 아시며, 어떤 행동을 할 것까지도 이미 다 파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12
그렇기 때문에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13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시간과 지적인식, 곧 사물을 인식하시는 지적체계는 타락한 우리와 같지 않다는 것을 증언합니다.14
저는 니고데모와 같이 영혼을 지각할 수 없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영혼을 지각하지 못합니다.
보이지 않으니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영이 없기 때문에 눈으로 보는 것으로만 판단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니고데모의 의문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답변을 타당하게 생각하면서도, 영혼에 관한 의문은 계속 되면서, 타락한 영혼이기 때문에 어떤 사물도 통전적(統全的)으로 볼 수 없고, 전부에서 일부분만 보고 그것만을 인식하는 제한된 존재가 육이고, 육은 보이지 않은 영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니고데모의 영혼 안에 있는 모든 지식들이 왜곡되고 결함이 있어서 항상 모든 것을 잘못 인식하고 있습니다. 15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모든 지식들은 바른 것처럼 보이나, 하나같이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왜곡되었고, 이런 지식으로는 어떤 진리라도 바르게 인식할 수 없으며, 결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볼 수 없고,16 가인이 그렇게 했다는 증거를 보게 된 것입니다. 17
이로 인하여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으로 오신 완전한 하나님의 지식을 가지신18 만물을 지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통전적(統全的)으로 완전하게 알 수 있는 로고스 지식 자체이셨습니다.19 이를 히브리서 기자는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그 앞에 드러나느니라”라고 고백했고, 다른 그 어떤 말이 필요 없이 예수님은 만물의 속성 까지도 이미 다 알고 계시고, 예수님의 말씀에는 단 하나의 용어에도 무지와 결함이 결코 함의 되지 않은 진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20
그러므로 예수라는 안경을 착용했을 때, 예수 안에는 성령이 함께 거하시므로 비로써 세상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질서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것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셔야만 한 것입니다.21
1) 하나님의 아들이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이런 탐구는 우리에게 영생을 보장하는 성경의 약속입니다.
우리 영혼은 예수를 알아야 합니다.22
우리가 예수를 알기 위해서는 영혼 안에 예수에 관한 지식이 있어야 하는데 그 지식이 복음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의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5:39)
이를 다른 말로하면 ‘성경을 연구하면 예수가 보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친히 사람으로 이 땅에 오게 된 것은 구약성경에 예언되어 있었고, 그 약속대로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바 대로 성경이 자신에 관하여 증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23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예수를 보내셔야 했습니까?
1, 천지 창조의 목적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세상에 각종식물과 짐승들을 지으셨고, 이것들을 관리하도록 사람을 지으실 때,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을 사람에게 부여하셨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자연의 모든 만물들과 중간에 위치한 역할로 지어졌으며,24 특별히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고, 보다 더 특별하게는 “자기존재를 인식”할 수 있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자기존재 인식”에 관한 구체적인 철학이나 과학에서 확증하는 진리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자기 인식”을 “모든 존재가 자기가 아니라”(GW9-123)는 의미로 이해했습니다.25
이는 존재의 대비 곧 자기와의 대비로 볼 수 있고, 곧 자기의 존재는 타자가 있기 때문에 자기가 인식된다는 의미입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초월적 자기인식"을 말했지만, “경험을 통한 자기라는 현상에 대한 자기인식”이라고 했습니다.
현대철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데카르트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cogito ergsum, 의심해봐라, 그러면 결국 네 의식은 자신만 남는다.
이 철학은 “물 자체”라는 유명한 철학적 통찰을 남겨 후대의 과학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 주장들은 합리적이라고 하지만 실지로 진리에 대하여 선과 악의 개념에 도입하면 합리적이지 않은 논리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장로교의 창시자 John Calvin 은 교회 개혁의 근본이 되었던 그의 책 기독교 강요 제 1권 1장에서 “사람은 자기를 알지 못하면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26
먼저 자기를 알았을 때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타자에 대한 인식을 하려면 먼저 자기인식을 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존재한다는 인식”이 복음에서 왜 이렇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가?
많은 사람들은 이런 증언을 무시하고, 자기존재가 무엇인지 확인하지 않고 무작정 하나님을 향하여 직접 뛰어들어 하나님을 이해하고 판단하려다가 혼돈에 휩싸이게 되는데, 하나님을 이해하는 자기의 본성에 대한 이해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왜 자기 자신을 알지 않고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인식하도록 지으셨습니다.
모든 신학의 출발점은 자기 자신으로 부터 시작합니다.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사람이 함께 어울려 사는 사회전반에 있어서 혼돈과 부작용들이 나타난 것은 사람의 자기 존재 의식의 결여에서 비롯됩니다.
자기를 모르면,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은 불완전하여 신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때 완전하시고, 전지전능하시며, 부족하심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그 일의 목표는 선하심이셨고, 성품에 따라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지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뜻대로 창조 완성을 이루시고 보시기에 참으로 좋았다고 하셨습니다.27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는 달성되었고, 성품에 따른 결과적 조건이 충족된 세상을 통해서 영원히 기뻐하시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창조되었고, 사람도 지으심을 받았으며, 사람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피조세계에 당신의 존재가 인식되는 자기완성에 한층 더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28
유일하신 하나님이 비록 지음을 받은 존재이지만, 타자에게 인식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 창조의 목적이고, 이 목적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하나님 자신이 객관적으로 인식되는 객체로서 사람을 지으시는 것입니다.29
쉬운 말로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사람에게 자신을 인식되게 하시려는 것이 최종 목표인 것입니다.
2, 완전한 객체로서 사람
하나님의 세계에는 하나님 외 그 어떤 존재도 없습니다.
심지어 물리적인 공간까지도 하나님께는 없습니다.
우리의 언어로 유일하신 하나님은 홀로 참 신이시고, 만물이 존재하게 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셨으나, 지음을 받은 만물이 당신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한 마땅한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존재의 가치가 무의미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존재들이 스스로 “하나님께서 사물들과 짐승들을 지으셨으니, 영광을 받으실만하다”고 간접적으로나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인식하고 영광을 노래할 수 있도록 사람을 지으신 것입니다.30
즉, 아름다운 꽃들과 세상의 자연을 보고, 저 꽃들과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께 영광을 노래하고, 자신 외에 타인을 보면서 저를 지으신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요한계시록 4:9~11에 보면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에 24장로들이 자기의 영광의 면류관을 던지고 하나님을 향하여 노래합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이 노래의 의미를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모든 세상이 완전하게 회복되고 영광스럽게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의 영광의 보좌 앞에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노래하는 영광송입니다.
자기라는 존재로 하여금 자기를 있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결국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하나, 당신을 인식할 수 있는 객관적 존재로 사람을 지으시되, 자동 기계장치와 같이 모든 조건을 다 만족 시켜주었을 때 비로써 하나님을 인식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완전히 순수한 객관적 개체에 의해 하나님의 존재가 인정되도록 지으신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고, 스스로 자기 지식으로 자기존재를 인식하고, 나아가 하나님과 소통하며 교제할 수 있는 독립적 의식을 가진 존재로 지으신 것입니다.
3, 사람의 타락
하나님이 지으신 존재 중에 사람의 위치는 매우 중요합니다. 위로는 하나님께 필요한 소통으로 자기의 의견을 말할 수 있고, 아래로 만물들을 관리할 수 있는 중간관계로서 하나님이 뜻대로 사역할 수 있는 사명자의 역할을 하도록 지으셨습니다.31
사람이 이런 일을 하는 데는 모든 생각과 사상이 하나님처럼 완전히 독자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모든 생각과 판단이 순순히 자기의 것이고, 행동에 대한 책임 의무도 자기에게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지으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잘 못 지으셨으며, 이로 인한 심판은 부당하다’는 판단을 받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지음 받은 사람이 죄를 범하는 것은 순전히 자기의 책임입니다.
그를 완전하게 지으셨고, 모든 판단의 행위가 자기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행위를 결단하고 실행하는데 어떤 영향력도 미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죄를 범하지 말라고 분명히 밝혀 주셨고, 약속하시며 주의를 주셨습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려는 생각을 마음에 품었을 때, 하나님께서 가인의 영혼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하셔서 죄가 엎드리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순전히 가인 자신에게서 미움이 솟구쳐 살인의 의도를 가지게 된 것이고, 가인은 이를 실행에 옮기므로 씻을 수 없는 죄를 더한 것입니다.
행위 언약,
하나님의 지으신 피조물 가운데 사람처럼 완벽하고 하나님에 대하여 객관적인 존재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각하시는 것과 동일한 모양으로 자기의 의사를 말할 수 있고, 순전히 독립된 개체로 존재하기 때문에, 사람의 행위에 따른 보상을 약속할 수 있게 됩니다.
실지로 하나님은 사람에게 “동산의 중앙에 있는 과실을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먹는 날에는 그 책임으로 인하여 네가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창2:17)
신학적으로 이것을 ‘행위언약’이라고 말합니다.
타락
하지만 사람은 유혹에 매우 약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사람과 언약을 맺어주시고, 모든 행위의 책임을 순전히 자기의 것으로 부여하시고, 완전한 독립채로 탁월하게 지음을 받은 것에 무한감사를 드려야 하지만, 오히려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사탄의 거짓 유혹에 아주 손쉽게 무너져 타락의 길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4, 사람의 탁월함
창조자가 피조물에게 행위에 대한 자기책임에 두는 피조물은 상상할 수 없는 탁월한 존재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광활한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이 먼지와 같은 작은 사람에게 하나님과 같이 생각할 수 있는 독립적인 존재로 지으셨다는 점에서, 사람의 탁월함이 얼마나 위대한지 감히 짐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실지로 사람은 하나님과 같이 자기존재를 인식함에 있어서 매우 놀라운 존재입니다.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난 존재의 탁월함은 영원성과 자기인식으로 지적으로 창조주를 인식하고 교제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영원성을 가졌다는 것은 불멸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는 그 시간으로부터 끝이 없는 존재의 삶을 누리며 하나님처럼 영원히 존재합니다.
현재 우리의 삶이 시간을 누리고 있다고 표현한다면 미래의 우리 삶은 영원을 누리게 됩니다.
성경은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시작은 어떤 목표를 향하여 출발하는 순간이고, 한발 한발 전진하여 나아가는 것이 시간입니다.
목표를 계획의 완성이라고 한다면 시작은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출발이므로 이것 또한 시간에 속하면서 전체의 계획에 포함된 하나의 점입니다. 이 점에서부터 또 하나의 점에 이르는 간격을 우리는 시간이라고 부르고, 이 시간들을 통해 목표지점에 이르게 되는데, 사람의 삶은 바로 이 시간에 속하여 목표를 향하여 지속적인 전진만 있을 뿐입니다. 이 전진이 시간이고 이 전진이 끝나는 지점이 영원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시간에 속한 기간에 있을 시작과 목표점 사이에서 성취되어야 할 어떤 사명 같은 일이 있습니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의 결과에 따라 영원의 지점에서 누릴 삶의 세계가 구별됩니다.
이 세계를 천국과 지옥이 이라고 하고, 영원성을 가지지 않았다면 이 주장은 아주 무의미하고 구원까지도 쓸모없는 것이 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시간에 속한 삶은 영원의 삶을 결정짓는 중요한 일이라고 하는데 그 일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복음뿐이고 이 복음을 통해서 자기 존재를 인식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이단사상이나 무신론적 사상을 선호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는 안개와 같이 태어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무’로 봅니다.
그들의 모든 사상의 결과는 ‘무’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보이는 것을 멸시하고 보이지 않은 것을 더 가치 있는 것이라고 믿는 그노시스적인 생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타락한 인류의 역사에는 언제나 신적인 것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숭배사상이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모든 사유의 기반이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지식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있을 것 같은” 미안의 존재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알고 우리 자신을 알았을 때, 세상은 “무”가 아니라 영원히 존재하는 "유" 인 것과,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유”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기까지만 봐도 사람이란 하나님과 얼마나 깊은 관계를 가진 존재로 지음을 받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피조물이지만 쉽게 버릴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가지고 지음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는 아들과 같은 존재입니다.
피조물로서 완전 독립체이며, 하나님과 완전한 객체로 관계할 수 있고, 피조 세상에서 모든 것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향유할 수 있는 엄청난 위치에 있으며, 영원과 시간을 동시에 향유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으며, 너무 뛰어나 하나님께서도 칭찬하셨습니다. 32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했습니다.
사람의 불순종은 오히려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의 완전성을 더욱 확고하게 드러냈습니다.
완전하게 독립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선을 행할 수도 있고, 악을 행할 수도 있으며, 모든 행위의 결과는 자기책임에 있다는 것을 확증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의 예언
그럼에도 모든 행위의 책임은 자기에게 있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왜 나를 이렇게 지으셨느냐고 항의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결과를 아신 하나님은 양당 간의 행위에 대한 모든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순종할 때와 불순종했을 때에 대한 모든 작정은 성경으로 명확하게 증언하셨습니다.
불순종으로 타락 했을 때,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신의(神依)를 벗어버린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대신 피 뭍은 옷을 입혀야만 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타락의 비참을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벌거벗은 상태를 가리기 위해 짐승을 잡아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33
가죽옷을 입히시는 것은 사람의 수치를 가리기 위하여 짐승이 희생을 당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사람의 수치가 온전히 가려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보아줄 수 있을 만큼 감추어야 했기 때문에 부득불 짐승을 죽여야만 했습니다.
희생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고 남을 위한 것입니다.
순종했을 때는 그들에게 주어진 신의(神依)가 손으로 짓지 아니한 영원한 그들의 옷이 되어 영화롭게 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를 영화로 관을 씌우셨다고 했습니다.(8:5)
하지만 타락한 우리는 이것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신의(神依)는 육에 속한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은 그에 대한 지식이 우리 영혼 안에 없기 때문이고, 딱하나 아는 것은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아니한 옷이라는 것뿐입니다. 이 옷은 에덴동산에서 입고 있었고, 그들이 타락하자 이 옷은 볏겨지고 만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타락하였을 때 나타난 변화를 보여주고, ‘이 변화는 의식과 함께 변화된 것입니다.’
존귀와 영화로관 씌워진 신의(神依)가 벗겨지고 자기의 수치가 드러난 것입니다.
이것은 예전에 보이던 것이 안보이고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상태를 “육으로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최초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창세기 3:14~19에서 구체적으로 심판의 선고하셨습니다.
이것은 죄에 대한 결과적 책임을 의미하고, 앞으로 나타날 일들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중에 예언적인 의미의 말씀은 “네 후손과 여자의 후손”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자의 후손”을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4:4)
창세기 3장14절 심판의 말씀에서 “네 후손”과 “여자의 후손”을 대비되는 개념으로 말씀하셨다면, “네 후손”은 뱀의 후손을 지칭하는 것이고, 죄의 후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면 “여자의 후손”은 “죄를 따라난 자”가 아니기 때문에, 죄와 상관이 없는 후손을 말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 둘은 서로 원수 관계가 되는데, 나타난 결과적 사실로만 알 수 있으며, 확실하게는 가인과 아벨에게서 명확하게 드러났고, 아브라함에게서 이삭과 이스마엘로, 이삭에게서 에서와 야곱으로, 사도 바울은 이를 “약속의 아들”과 “종의 아들”이라는 의미로 밝혀 주었던 것입니다.
종의 아들은 사람의 의도로 계획하여 낳은 아들을 말하고, 반면 약속의 아들은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나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아이를 낳을 수 없었는데,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90세에 잉태하여 이삭을 낳았습니다.
이를 동정녀 마리아에게 적용하면,
동정녀는 남자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잉태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잉태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명확하게 죄를 범한 사람이 자기의 정욕으로 낳은 것이 아니라 약속으로 말미암은 사람이라는 것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약속의 아들과 종의 아들”, “네 자손과 여자의 자손”의 의미가 죄를 따라 난자와 약속을 따라 난자라는 의미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에도 아주 명확하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낳은 아들들이 우리의 정욕으로 낳은 것과 약속을 따라 낳은 것의 구별이고 이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는 삶의 결과는 우리 눈에 명확하게 비춰 보입니다.
오늘 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 안에 적용되는 이 원리에 대해서 무지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자기 존재 인식”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누구이며 내가 왜 존재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자기 존재 인식”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삶의 분명한 목표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성경에 예시를 들어서 까지 정확하게 예언되어 있으나, 통전적(統全的) 지식을 갖지 못한 사람은 결코 이해하지 못함과 같이 자기 백성인 유대인들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더하여 하나님께서는 두 선지자를 통하여 탄생의 신비와 장소를 말씀하셨습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이사야 7:14.
이것은 아주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계시입니다.
약속의 시기가 가까움으로 선지자의 의식에 발현되어 명확하고 분명하게 알게 하시는 말씀으로 무 인식상태로 말한 것은 결코 아니어서, 창세기 3장 15절에 있는 “여자의 후손”이라는 의미를 명확하게 의식했을 것입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개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5:2)
이는 미가 선지자의 환상에 보여진 베들레헴에서의 메시아 탄생 관한 이야기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열어 보이시는 하나의 이미지가 뚜렷하게 인식되었고, 이런 놀라운 일은 영원성이 선지자의 인식 안에서 열린 것입니다.
이를 환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오늘 주의 성령이 여러분의 영혼 안에서 조명하여 미래를 인식하게 하심으로 예언할 수 있게 하신다면, 선지자와 의식과 같이 영원성이 여러분에게 현실로 드러난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선지자는 분명히 경험했기 때문에 글로 표현하여 우리에게 남겼고, 그것은 사실로 성취되었습니다.
렘 31:15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받기를 거절하는 도다”
(하나님의 아들을 미워하는 이 세상의 대적)
피신, 호세아 11:1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 냈거늘” 이것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왔을 때 말씀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사역을 의미했지만, 놀랍게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오셔서 애굽으로 피신하셨다가 나사렛으로 돌아와 성장하시는 일로 다시 성취 된 것입니다.
사역
갈릴리 사역(이사야 9:1~2)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 흑암이 없으리로다. 스블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치유하심 (이사야 35:4~6)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심 (이사야61:1~2)
비유로 가르치심 (시편 78:2~4)
이방인의 빛이 되심 (사 42:6)
나귀새끼를 타심 (스가랴 9:9)
핍박을 당하심
세상으로부터 불신을 당하심( 사53:1)
까닭 없이 미움을 받으심(시35:19)
친구에게 배반을 당하심(시 41:9)
은 삼십에 팔리고 그 핏 값으로 밭을 구매함 (슥11:12~13)
거짓 증인에게 고소당하심(시35:11)
고소하는 자들 앞에서 침묵하심 (사 53:7)/“그가 곤욕을 당할 때에도 괴로울 때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으며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깍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 하였도다.
모욕과 침 뱉으심을 당하심 (사 50:6)
채찍에 맞으심 (사 53:5)
그 옷을 나누며 속옷을 재비 뽑음 (시 22:18)
십자가에 달리심 (시 22:14~17)
멸시와 수치를 당하심 (시 22:7~8, 시109:25)
손과 발이 찔리심(시22:16)
하늘로부터 버림을 받으심(시22:1)
십자가에서 목마르심 (시 22:15)
쓸개와 식초를 받으심(시 69:21)
영을 하나님께 부탁함(시 31:5)
뼈가 꺾이지 않음 (시 34:20)
부자의 무덤에 뭍이심(사53:9)
그를 따르던 자들이 도망함 (슥 13:7)
부활
시편 16:10, 49:15, 118:17
승천
시편 68:18
시편 110:1
버린 돌과 머릿돌이 되심 (시118:22~23)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들을 보내셔야 했으며, 그리고 반드시 사람의 아들로 오셔야만 하는가? 라는 것입니다.
결론
첫째, 사람은 창조의 최종 목표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물들 가운데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완전한 객체로 사람을 지으신 것입니다. 완전한 객체란 하나님의 영향력과 관계없이 스스로 완전한 독립적 존재로서의 책임성을 가진 존재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영광을 돌리도록 만들어진 존재는 스스로 판단하는 완전한 객체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존재의 영광이 참된 가치 있는 영광 드러내는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피조물 중 유일하게 영원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영원성이란? 불멸의 존재입니다.
사람은 멸하지 않은 존재로서 이 세상에 태어남으로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이런 존재의 위험성은 비도덕적인 행위를 지속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 부득불 천국과 지옥이 만들어졌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하나님과 같은 지적으로 탁월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지으신 피조물 중에 가장 으뜸이고, 그들의 삶은 하나님께 무한한 기쁨이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노래하되 Record disk에 기록되어 반복적으로 노래 하는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창작해 내는 능력으로 영광을 노래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모든 예술들의 영광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빼앗았고, 친히 아들이라고 부르셨으며, 가장 사랑할 수밖에 없는 최고 관심이었습니다.
그런 아들이 타락했고, 죽음으로 빠지게 되자 하나님의 마음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죽음 이후의 삶
사람은 불멸하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죽는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의 또 다른 삶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죽음 이후의 삶은 육체로 살았을 동안 얻었던 지식으로 살게 됩니다.
만약 육체로 살아 있는 동안 삶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면, 그 사람은 영원에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육체로 얻은 지식이 선에 이르는 지식인지, 혹은 선에 이르지 못한 지식인지에 따라 영원한 삶의 위치가 다르게 구분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에 이르는 지식이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의미하고 이로서 천국에 이르고, 선에 이르지 못한 지식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지식으로 지옥으로 보내어집니다.
사람의 타락은 그들의 영혼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깨어지고, 그 기능을 상실함으로 조명하시는 일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필연적으로 타락되고 왜곡된 선에 이르지 못한 지식을 얻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방법
하나님께서는 최고로 탁월하게 지음을 받은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지 못하고, 하나님과 관계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을 보고 계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전지하심이 창세전부터 이미 이런 결과를 예견하시고, 계획하시기 까지 하셨지만,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구원하시려고, 창세전부터 작정하시고 그 구원을 성취하시려고 하셨으나, 아픈 마음을 지우실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오직 사람들이 육체 안에서 살아있는 동안만 가능합니다.
그들의 영혼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를 친히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을 뿌린다고 하셨습니다.34
사도요한이 요한복음 14장과 17장에 증언하기를,
14장10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23절에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24절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17장 21절에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3절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그들이 내 안에 있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심과 또 나를 사랑하심과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안에는 모든 진리와 보화가 들어 있는 하나님의 진리의 서고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떠나서는 결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식이 없고, 세상에서는 하나님을 결코 발견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복음의 씨앗입니다.
그 씨앗을 우리의 영혼에 심고, 그것이 지속적으로 자라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고, 복음으로 새롭게 거듭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시는 이유입니다.
다음 주에는 왜 하나님의 아들이어야 하는가? 라는 주제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 에수는 믿는 신앙을 가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호기심을 가진때 [본문으로]
- 통전적 지식, Holistic understanding, 하나의 개체를 완전하게 이해하는 지식 고전 13:12 [본문으로]
- '요한복음 14:26, 15:26 [본문으로]
- 고린도전서2:8 [본문으로]
- http://blog.daum.net/_blog/창세기%2015:6 [본문으로]
- 요한복음 6:63 [본문으로]
- 요한복음 8:44 [본문으로]
- 창세기6:2 [본문으로]
- 창세기6:5 [본문으로]
- '창세기6:3(요한복음 7: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어하나니 [본문으로]
- 창세기4:7, 하나님께서 가인의 마음을 들여다 보시는 것 같이 예수께서 사람의 마음을 모두 보시고 계십니다. [본문으로]
- '예레미야17:10 [본문으로]
- 요한복음 3:6 [본문으로]
- 요한복음 3:12,31. [본문으로]
- '창세기4:7 [본문으로]
- 로마서 3:23 [본문으로]
- 창세기4:7 [본문으로]
- http://blog.daum.net/_blog/요한복음%201:1,%2019:13%20'아버지가%20내안에%22%20요10:13,%2014:10,11,20,%2017:21,23. [본문으로]
- http://blog.daum.net/_blog/로고스,%20요한복음%201:1,3.%20히브리서%204:13%22Perfact%20termonology.%22%20%22완전하게%20개념이%20이해된%20용어를%20사용하는것%22 [본문으로]
- http://blog.daum.net/_blog/요한복음%2014:6 [본문으로]
- 요한복음 14:16,26. 15:26 [본문으로]
- 자기영혼이 생성한 지식은 자기를 입증할 수 있는 자신의 지식이다. 다른 사람이 생성한 지식이라도 자기의 영혼에서 조명하시는 성령에 의해 생성되어 영혼의 지성에서 지각되었다면 자기의 이름표가 붙게 된다. [본문으로]
- 유대인의 메시아는 예수와 다른 개념을 정의 해놓았다.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보내시려는 메시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요구에 따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본문으로]
- 창세기 1:26. [본문으로]
- 헤겔,GW9-104, “자기 의식은 대상 의식의 결과다.” [본문으로]
- John Calvin, Institutes 1,1,1 [본문으로]
- 창세기 1:31. [본문으로]
- 하나님은 피조세계에 인식되지 않아도 존재 하시는 하나님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인식되지 않은 피조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하나님을 하나님대로 인식하지 않은 피조물은 고쳐야 할 피조물이다. [본문으로]
- 하나님께서는 존재하는 피조물을 당신만 인식하고 피조물이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만족하시지 못하므로, 하나님과 함께 서로 인식하는 객체로서 유일한 피조물인 사람을 지으신 것이다. [본문으로]
- 시편 104:1. [본문으로]
- 창세기 1:26~27. [본문으로]
- 에스겔 28:15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본문으로]
- 창세기 3:21. [본문으로]
- 마태복음 13:19(3~23).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