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에 본 2015년(월간 선지동산 )
르네상스가 교회개혁을 위해 일어 났다.
그 후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인간의 삶의 형태가 완전히 변하였다.
달라진 르네상스는 그 기세를 꺾일 줄 모르고 달려 왔으나 이제 노년이 되어 인공두뇌 혁명에게 완전히 그 자리를 내어 줄 것이다.
두뇌혁명 이것은 인간의 지성을 인간의 몸 밖으로 끌어내는데 완성하는 것으로 막을 내리고 인간이 자기 자리에서 신의 대우를 받게 될 것이다.1 산업혁명이 낳은 인간 두뇌 혁명은 산업형명에 더한 가속도를 받아서 기간을 1/10로 단축시켜서 22세기 새로운 문명을 탄생한다(이 시기는 순전히 가상으로 기록한 것임 주님의 재림이 아직 임하지 않았다는 전제로 하는 것임). 이로 말미암아 21세기 후반, 지구에는 인간이 신의 이상에 도전하는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때는 인간은 인간 안에 내제하시는 신에게 자리를 주지 않으려는 주도권 싸움으로 새로운 변화를 맞고 결국 이를 묵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섭리가 인간의 세상에 도래하게 될 것이다. 인간들은 바벨탑을 높이 쌓고 하나님을 향해서 대적하던 초기의 심판을 기억하게 한다. 그들의 능력으로 잘 정돈되고 아름다운 신천 신지를 건설한다. 편리함 말 그대로 최상급의 표현할 새로운 언어들이 세상에서 사용되고 제일이라는 언어들로만 구성된 새로운 언어들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모든 언어가 통합되어2 노아 홍수 이후 인간 세계를 간섭하셔서 언어를 혼잡케 한 하나님의 심판을 되돌려 놓으려는 인간의 노력은 성취되었다. 인간들은 신과 싸워서 이겼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결국에는 신의 간섭을 불러들이는 세상의 종말을 불러오게 될 것이다. 14세기 르네상스와 함께 인간의 지성은 깊은 잠에서 깨어났고 인간은 과도한 지성의 사용으로 스트레스에 짓눌려 있어야 했다. 거대한 역사를 가진 인간 사회는 한 존재와 같이 하나의 동일한 의지와 존재력을 지니고 있다. 실지로 인간은 개개의 독립체이지만 그 인간하나 하나가 전체의 하나의 인간과 전혀 동떨어진 것은 아니다. 인간은 두뇌의 과다한 활동을 이겨내지 못하고 스트레스 공포에 시달리다 못해 Computer를 만들어 정보를 저장해두었다가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정보 혁명을 일으켰다. 이 정보혁명은 14세기 혁명 때와 같이 당연히 교회의 개혁을 부추킨다. 1995년 지금 교회는 개혁의 몸살을 앓고 있다. 이 몸살은 교회 관계자가 느끼고 있을 만큼 강한 움직임으로 나타나지 않고 여진으로 이어지고 있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이 시한 폭탄은 기존의 교회 지도자들을 두려움으로 몰아 고 있다. 어떤 지도자는 이 움직임을 이끌고 갈 것인가? 아니면 대응할 것인가? 아주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미래의 교회의 모양을 인식하기까지는 아직 이른 감이 없지 않다. 왜냐하면 그 개혁의 모습은 아직 분명한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다른 모습으로 지성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1. 감추어진 미래의 이념 인간들의 세계는 인간 지성의 사고에 의해서 문화를 창조해 나간다. 인간 안에 무엇이 숨겨 있느냐에 따라서 세상의 문화는 달라진다. 인간은 자기가 보고 듣고 자란 환경에 커다란 영향을 받는다. 그 환경에서 보다 나은 사회와 보다 나은 인간을 향한 문화를 꾀하게 된다. 세상은 변화의 연속이다. 쉬지 않고 꾸준히 변화하더니 오늘의 문화를 만들어 냈다. 오늘의 변화가 탄생하기 위해서 인간 지성에서 대 폭풍이 일어났고 이 폭풍은 인간의 내면을 떠나 외부에서 자리를 잡았다. 이런 지성의 운동의 변화는 21세기의 사회변화의 속도록 더욱 증폭시켰으며 변화의 폭이 좁아지고 있다. 인간이 내면에 자리 잡고 있던 권위는 오랫동안 사고를 변화시키며 인간을 지배해 왔다. 그런 권위가 정보에게 자리를 내어 줄 수밖에 없는 것은 인간 안에 자리를 틀어잡고 있던 지성이 인간 밖으로 웅지를 틀고 나왔기 때문이다. 권위는 오랫동안 유지해온 전통을 고수하려던 농촌의 구석에서마저 그 자리를 빼앗겨 설 곳이 없다. 이제 인간의 사고에서 권위를 찾아 볼 수 없는 세대를 향해 전진하고 있다. 권위의 도움을 받고 영화를 누렸던 이념이나 이데올로기들이 정신없이 사람들의 가슴을 짓밟고 지나갔고, 뒤이어 정보라는 거대한 인간 내면 이성이 인간 밖에서 인간을 지배하게 될 그날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사상”을 잘 분석해야만 내일의 우리의 모습을 잘 분석할 수 있을 탠데, 애석하게도 우리의 이성 속에 깊이 침투한 사상은 그 모습을 인간 앞에 분명히 드러내지 않고 있다. 허구와 허무는 인간의 지성에 자리를 틀어쥐고 인간으로 하여금 모든 속박과 고통으로부터 해방하려는 무아의 경지에 이르게 할 심산이다. 이제 사람들은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인생의 고민도 또한 삶에 대한 고통 속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될 그날이 한발 한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미래의 그 정체는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새로운 사상은 한 인간의 세대 내에 완전히 성숙되지 않고 여러 세대를 거쳐야만 분명한 모습을 볼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정보시대의 문화를 파악한다는 것은 역부족이다. 그것은 정보의 보편화가 이미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열매를 맺지 않았고 문화로서 열매를 맺기까지는 아직 시기상조이다. 1) 자리를 빼앗긴 권위 앞에서 말한 대로 지금의 세계는 권위가 무너져져 가고 있다. 이 권위의 탈을 벗어버린 현상을 Post Modernism이라고 한다. 국가의 권위도 사회의 권위도 법의 권위도 종교의 권위도 성경의 권위도 모두 무너져 버렸다. 젊은이들의 사고 속에 미래에 대한 소망이 없다. 그들은 인생의 목표를 설정하고 세상을 살지 않는다. 이 시대에 미래에 대한 목표를 가진 것은 단순한 직업관뿐이다. 이제 젊은이들이 미래의 인류 사회를 근심하지 않는다. 그들은 미래를 아주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래의 희망인 젊은이들의 마음에서 미래를 빼앗아 가버린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들의 마음에 온통 직업관만을 생각하도록 만든 것은 누구일까? 어떻게 젊은이들에게 미래에 대한 인류의 앞날을 걱정할 기회를 주지 않는가? 그것은 인간의 만족으로 말미암은 승리감이다. 젊은이들은 그들이 판단할 수 있는 윤리관과 사회철학이 그들의 머리에서 지워버렸다. 마치 Computer의 내부에 존재하지 않는 외장 Drive와 같은 기능을 하고 있는 정보가 젊은 학생의 지성을 훨씬 능가하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의 지성은 문화와 자신의 학습 환경과의 심한 갈등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 한 두 페이지 책장을 넘기며 이해하기 위해서 수많은 단어와 그 개념들 그리고 공식들을 외워야하는 힘든 학습 방법보다는 더 빠르고 많은 양의 학습을 할 수 있는 Multi Medea의 학습 방법이 주입식의 학교 공부를 지루하게 만들고 있다. 또한 기성세대들은 밀려오는 젊은이들의 정보문화가 자신의 자리를 파고드는 위기감 때문에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위기에 위기가 계속되는 문화의 도전에 불만을 일으킨 사람들에 의해서 곳곳에서 반문화 운동이 벌어지기도 한다. 권위 아래 머물러 있기만 한다면, 그들의 정신이 아무리 스트레스를 받아도, 아니 강한 두통 현상이 계속 된다 하더라도 자리 때문에 생기는 스트레스 같은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의자하나 지키기 위해서 당하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괴로운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지성은 인간의 환경을 변화시키려는 도전적 운동 때문에 결국은 구세대의 사고들을 몰아내고 자꾸 자꾸 신세대를 파견하게 될 것이다. 혼돈의 숨을 쉬고 20세기 말, 사람들의 의식은 권위 아래 아직 머물러 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면 권위 아래로 모여든다. 아직까지 권위는 인간 의식이 피할 안식처가 되지만 사회는 언제까지 그런 현상을 보고만 있지 않는다. 그래서 권위로부터 해방을 선언해 버렸다. 이것은 새로운 정보가 인간의 이성 안에 권위를 옷 입고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독재라고 비난하고 자신이 인간을 이끌 지도자임을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모든 인간은 이러한 정보의 혁명을 따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정보는 인간을 더욱 편리하게 만들어주고 문화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때문이다. 이제 인간은 사회에서 권위를 피난처로 삼을 수 없다. 권위는 더 이상 인간을 보호해 주지 못한다. 그럼에도 권위는 숨 쉬고 있다. 머리는 희고 얼굴은 주름살이 깊게 패어있다. 손은 부들부들 떨며 자기 자리를 잃은 슬픔을 감추지 못한다. 그의 품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으나 더 이상 인간의 안식처가 되지 못한다. 인간들은 더 이상 힘없는 군장의 말에 복종하려하지 않는다. 인간은 그 근본 본성에 따라서 배반한다. 지금까지 헌신하며 보호해준 안식처를 버리고 새로운 주인에게 도망 가버린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힘없는 노인에게 자신을 맡길 수 없다. 그것은 자기의 생명과 관계 되어 있기 때문이다. 변화와 기회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인간은 곧 바로 권위의 품안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회의 품안에 들어갔다. 르네상스로 거듭 태어난 인간의 이성이 인간의 내면에서 자기의 자리를 더 이상 고수하지 못하고 인간에게서부터 내어 쫒기고 만 것이다. 이제 인간 안에 들어온 새로운 정체는 인간으로 하여금 스트레스에 쌓이도록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이제 인간은 더 이상 지성의 피곤한 일을 할 필요가 없다. 지성이 해야 하는 엄청나고 기적적인 일들을 정보가 담당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정보의 혁명3이라 불리우는 새로운 사회이다. 오늘 권위의 품안에서 정보혁명이 진행되고 있는 과도기에 처한 오늘의 눈으로 21세기를 어떻게 관찰할 수 있을까? 그러나 막연한 판단하나마 21세기는 과연 인간의 이성이 두뇌 속에 계속 머물러 있지 않고 세상 밖으로 나와 있다. 우리는 세기의 변화를 거쳐서 수많은 위험 속에서도 굳게 자리를 지켜온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21세기에는 어떻게 받아들여질 것인가를 살펴보고 싶다. 더욱 조직화되고 세분화된 지금보다 몇 배나 두꺼운 책이 사람들의 손에 가볍게 들려 있게 될 성경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깨어난 인간의 이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체험한 오늘의 기독교와 정보의 혁명이 만들어 낸 하나님의 말씀 홍수 시대인 21세기, 그 시대의 기독교는 어느 기독교보다 더 강렬하게 발전된 문화를 만들어 낼 것이다. 2) 21세기의 기독교 환경 설교자의 설교가 마치고 새해 아침을 여는 성가대의 찬양이 울려 나온다. 뭣을 클릭했는지 설교자는 설교의 마침을 알리는 성경의 배경 사진이 화면에서 지워졌다. 그리고 새해 아침 인사를 가볍게 하고 사라진다. 방송국에서는 새해 첫날의 시작을 알리는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찬송가(248장)와 함께 21세기 기독교 문화와 과거의 기독교 문화를 총 편집하여 시청자들에게 들려주고 뉴스를 시작하는 앵커가 고개를 숙이고 묵도하면서 새해를 첫 시간을 여는 기도를 드린다. 새로운 뉴스들 그리고 세상의 구석 구석에서 새해 아침을 맞이하는 화면들이 나타나고 각 방송사에서 연결하는 교환 뉴스들이 스쳐 지나간다. 세계는 한 지붕 아래 있다. 일본이나 미국이나 온 세계는 장벽이 사라졌다. 그러나 여기저기에서 종족 분쟁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고, 이스람교도들의 테러는 세상은 온통 시끄럽게 한다. 그리고 다시 주님께서 천상의 사자들과 그리고 수많은 천사들, 일찍 죽임을 당한 사람들과 함께 화면으로 구름타고 강림하시는 모습이 나타나더니 앵커가 “주 예수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한마디의 기원을 시작한 다음 빠른 음성으로 뉴스를 읽어나 가기 시작 한다.4 모니터 화면 하단에 Call이라는 메시지가 나타나더니 화면은 나의 행동을 판단하기 시작한다. 나는 화면에 나타난 메시지에 따라서 전화가 왔음을 인식하고 상대방을 인식하는 Eye Key5를 응시하자 곧 바로 전화를 걸어 온 사람이 화면에 나타난다. 딸이다. “아버지 안녕 하세요” “새해엔 더욱 건강 하세요” “그래 고맙다. 너에게도 금년에 하나님의 은총이 넘치기를 바란다. 그리고 오후에 집에 들리거라.......“ 이렇게 인사를 마치고 있는데 교회의 성도들로부터 계속된 Call 이 따른다. 이들은 한결 같이 아침을 모니터로 연결하여 새벽을 맞는다. 멀리 해외에 여행을 나가 있는 이들에게는 2014년의 망년회를 가족과 함께 하면서 늦은 밤을 고국에 연결하여 인사하고, 시골 깊숙한 농촌에 있는 이들도 모두 화상 통화로 새해 인사를 한다. 화면 속에서 작은 Mini Computer를 발견할 수 있다. 종이에 인쇄된 성경책을 들고 있었으나 이제는 왠만한 경제적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성경책 보다는 미니 컴퓨터를 선호한다. 수만 페이지에 달하는 모니터가 달린 이 성경은 본문에 맞추어서 스크린 된 배경 화면이 나타나고 들을 수 있도록 음성이 들려오고 볼 수 있도록 문자가 나타난다. 이 Bible Software는 성경 배경을 화면으로 편집하여 성경 말씀과 일치한 배경을 보면서 듣고, 쓰고, 교정할 수 있으며 옮길 수 있는 Multi System Program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에게 성경에 관한 지식을 더욱 증가 시켜주고 깊이 이해 할 수 있도록 한다. 예전의 주입식 교육은 성도들에게 지식을 전달했으나 이제는 성도들이 지식을 이해하고 판단하여 서로 모여서 편집하는 새로운 교육 System이 생겨났다.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서 얻게 된 성경지식들은 더욱 발전된 이해들을 새로 편집한다. 이것을 통해서 자기의 믿음을 측정해보는 방법은 21세기에 일어난 새로운 학습이다. 초등학교도 중학교도 주입식 교육을 하는 곳은 문화 문명이 뒤떨어진 아시아의 개발 도상국가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뿐 우리나라 산간벽지 농촌에서 조차도 보기 힘든 희귀한 교육 방법이다. 교회에서는 목사가 강단에 올라 갈때 미니컴퓨터를 들고 있다. 목사는 자기가 가진 미니컴퓨터를 배경화면을 비춰줄 모니터에 연결된 잭을 꼽는 일부터 시작한다. 그 순간 강단 뒤에 있던 휘장이 걷혀지고 커다란 평면 화면이 교회 실내의 조명과 어울리도록 서서히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성도들의 좌석에서 보면 마치 TV의 화면을 보는 듯 하고 영화관에 앉아서 영화의 스크린에 나타난 현상과 같은 교회의 모습은 문화 변화에 따른 성도들의 의식에 맞추어진 것이다. 이 모든 모습이 마치 미국 대통령의 기자 회견장을 TV 모니터로 지켜보는 현상 같다. 대형 교회에서는 사람이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거나 오르간을 켜는 일을 하지만, 작은 중 소형 교회에서는 목사가 교회의 예배 프로그램을 전반적으로 리드할 소프트웨어를 조작을 통해서 찬송가의 연주까지도 컴퓨터를 의지하는 곳이 많이 있다. 3) 모니터의 역할 일지기 John Stott가 현대교회와 설교에서 말한바와 같이 TV 의 영향은 인간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바뀌어 놓았고 문화를 변혁시켰다. 고 말했다. 모니터는 사회과 개인, 그리고 인간 본질의 모든 비밀을 폭로하였다. 오랫동안 고수 되어 왔던 종족간의 갈등을 모니터는 해결하였고 흑 백 인종간의 유색 인종 문제도 모니터는 해결해 놓았다. 모니터는 인간 사이에서 인간을 점점 가까이 접근 시켜주더니 결국은 인간의 언어생활 까지도 하나로 묶어 주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인간의 양대 성 의 개념을 변화시켜 인간이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이해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또한 모니터는 인간의 가장 깊숙한 내면의 세계까지 점령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스스로 위해서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모니터는 인간이 완전히 이성에서 자유를 얻고 해방되도록 양심의 깊숙한 곳을 찔러서 파괴하고 해쳐 놨다. 실지로 진리 안에 거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양심을 소나무에 걸어 놓았고 자기 안에 있는지 조차도 느끼지 못한다. 그것은 모니터가 인간의 마음 깊숙한 양심의 선한 모습들을 파헤쳐 들추어 내주었기 때문에 그 더러움을 다시 생각하는 것을 고통스럽게 여기기 때문이다. 인간은 보잘 것 없이 처참하고 타락되었다. 인간의 악한 모습들은 20세기 후반에 분명히 확인되었고 더 이상 인간을 선한 존재가 아님을 스스로 확인하였다. 인간은 그 잔인성을 확인하면서도 인간으로서의 가장 가치 있는 존재임을 또한 확인 한다. 그러나 인간은 깊은 내면에서부터 타락함으로 기계의 노예가 되어 버릴 수밖에 없는 미래를 모니터는 분명히 보여주고 경고하였다.. John Calvin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선한 양심 안에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도록 남겨두셨다고 했으며, 그 양심으로 하나님을 찾도록 한다고 했으나(벧전 3:10) 모니터는 인간의 타락된 양심을 덮고 있는 덮개를 걷어 재치고 그 깊숙한 곳을 비춰냈다. 모니터는 인간 자신을 비추는 도구가 되었고 사회는 모니터를 새로운 인간 문명을 이끄는 이념적인 지도체제가 되도록 했다. 그러므로 21세기 초반에는 모든 것이 모니터화 되어버렸다. 이상도 사랑도 문화 욕구도 모니터화 되었고 심지어 종교 까지고 변질되어 모니터화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순수한 인간화를 주장하는 Humanist들은 한 쪽 구석에서는 탈 모니터화, 반 모니터 운동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을 모습을 지금 상상할 수 있다. 4) 21세기의 목회자 뒷배경 화면을 등지고 강단에 서있는 목사는 20세기 목사들은 자기들의 사상으로 전달해야할 설교의 본문 배경을 모니터를 통해서 성도들에게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성도들은 목회자에게 화상 편집에 능숙한 기술을 요구한다. 이 시대에 목회자들에게는 특별한 능력을 겸하지 않고는 목회가 불가능한 시대가 된다. 14세기 인쇄기술의 발달로 인류에게 성경을 풍부하게 제공하는 은총을 누리게 한 반면 정보혁명은 성경은 더욱 정교하게 제작되어 사람들에게 높은 수준의 지식을 제공하고 더 많은 영상 화면들은 2000년의 시간 간격을 초월하여 자연스럽게 넘나들도록 제공된다. Key하나로 1세기의 사회를 살펴보고 이해할 수 있으며, 성경시대를 통해서 성경이 말하는 배경을 눈으로 직접 보며 간접 체험한다. 사람들은 어렵고 힘든 역사 지식을 얻으려고 이 나라 저 나라 도서관들을 찾아다니지 않아도 된다. 백과사전이나 또는 전문적인 사전을 보면서 공부하는 시대는 이미 구시대의 산물이다. 만약 어떤 전문 프로그램이 시간을 초월하는 역사적인 개념 문제를 제공하지 않는다면 전혀 팔리지 않는다. 20세기 말인 지금에야 이제 시작 단계에 있기 때문에 토닥거리며 워드프로세서나 사용하지만 2015년쯤에 가서는 토닥거리는 컴퓨터는 박물관에 가야 볼 수 있게 된다. 사람들은 적당한 정보이용 기술만 습득하게면 무한한 인간의 지식을 사용할 수 있다. 예전에는 전문가가 아니거나 자기가 연구하여 습득하지 않으면 전혀 이용할 수 없었던 지식 세계에 함께 동참할 수 없다. 심지어는 대화도 불가능했다. 그런데 이제는 어떤 지식 세계이든 얼마간의 관심만 가지고 체험하면 곧 그 세계를 이용할 수 있고 공유할 수 있는 정보는 세상에 널려 있다. 굳이 어려운 수학 공식을 외울 필요가 없고 지루한 영어 단어를 사전 책을 시커멓게 손때가 묻도록 쥐고 다닐 필요가 없는 것이다. 또 외우려고 안간힘을 쓰거나 역사책을 수 없이 읽어서 머리 속에 담아두려고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런 지식들은 더욱 잘 조직 되어서 인간의 외부지성(정보창고)에 가득히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프로그램들은 완전히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편집되어야만 사람들에게 인정을 얻게 된다. 그리고 전혀 다른 분야에서도 상호 적용할 수 있도록 제공되며 연상이 가능한 프로그램이어야 한다. 분야 간의 지식에 구분이 없어지고 지금까지 인간이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던 수학적 문제들이 해결돼 전혀 다른 언어들이 사회를 지배하게 될 그 시대가 21세기 우리가 목회할 환경이다. 이런 세대에 오히려 우상 종교를 숭배하는 우상숭배자들은 더욱 늘어만 간다. 그것은 세상이 종교적인 현상을 더욱 집요하게 요구하고 있지만 오히려 사람들은 주관적이어서 더욱 자신 중심의 종교를 의지하게 된다. 사람은 본래 종교성이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이방신과 같이 우상을 찾아갈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참된 진리가 아무리 전파 되어도, 또한 그들 앞에 이해할 수 없는 이적적인 사건들이 일어나도 완악한 유대인들과 같이 진리 안에 들어오기를 거절한다.(행 2:41“그 말을 받는 사람만이 세례를 받음; 행 28:24) 어느 시대에나 마찬가지이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없다. 또한 예수를 주라 시인하는 많은 사람들 중에는 자기들의 이익을 중심으로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위장할 수도 있다. 그들은 자신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있으나 자기들이 받아들인 신앙의 종류가 선택함을 받은 사람과 일치하지 않음을 알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목회자들은 어떤 사람이 참된 구원을 받은 사람인지 올바로 판단할 수 없다. 다만 그들은 양과 염소를 이리가운데서 구분하여 보호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들을 위해 헌신하는 사역을 감당할 뿐이다. 이런 목회자의 사명은 20세기의 사명과 같지 않다. 한동안 주의 종이 되겠다고 몰려들었던 신학 연구원에는 목사를 지망하는 사람들의 형편없이 줄어들었다. 목회자 지망생들은 일반 사회학과의 지망생보다 더 많은 연구를 요구하고 희생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현상이 진실하게 사명을 가진자 만이 목회자로 지망된다는 이점이 있을지 모르나, 오히려 교회의 여러 부분에서 중요한 일을 담당해야할 사명자들이 없어서 교회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 쉬지 않고 해야 하는 설교의 부담은 목회의 일을 더욱 힘들게 할 수 있다. 게다가 풍부한 지식의 발전으로 인하여 오히려 구분된 전문 분야들이 이해 가능한 통합개념을 내포하는 새로운 언어들의 출현으로 더 많은 지식의 이해를 요구한다. 이렇게 성도가 목회자보다 더 많은 지식을 보편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정보화 시대에 성도들을 앞서야하는 목회자에게는 더욱 어려운 임무가 주어진 것이다. 목사에게는 진실로 하나님의 부름을 요구하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부여한 사명 의식이 뚜렷해야 한다. 성도들은 Multi medea(소형 전자 책) 말씀을 읽고 들으며 자신의 삶을 성경의 상황에 맞추어 미리 체득해 본다. 어린이들이 공상과학이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데 이용하던 가상 스포츠 기구가 보급되어 가상 실현들이 어디에서나 가능하고 심지어 인간의 생명공학6에 까지 이용된다. 시간을 초월해서 자신을 대상인물에 대응하고 삶의 미래적 현상들은 미리 살펴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 이용되고 있는 미래의 사회에 목사들은 어떻게 성도들의 삶의 방향을 이끌 것인가? 한 소그룹을 이끄는 목회자는 이 시대에 인간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연구했다. 그는 인간의 정신 상태를 깊이 연구 분석하였다. 정보화 시대에 살고 있는 인간의 정신 상태는 고독하고 외로워하며 쓸쓸한 삶을 산다는 것을 분석했다. 사람들은 온통 사람을 그리워했다. 그럴수록 사람들 간의 장벽은 더욱 높아만 갔다. 이웃과 이웃이 더욱 불신하였고 빈부의 격차는 좀처럼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많았다. 상대적으로 자연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공기 좋고 맑은 물 주위에는 부유한 사람들이 살고, 복잡하고 공기가 나쁜 환경에 사는 도심 중심의 사람들은 불평과 불만이 가득 차 있어서 항상 데모가 끊이지 않았다. 이에 가난한 사람들과 머리 좋은 인테리층이라 할 수 있는 지식층들 사이에서 자신의 불만을 폭로할 길 찾으려 해매인 사람들은 컴퓨터 해커가 되어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려고 시도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언어 분석 능력을 가진 프로그램은 이들의 일들을 쉽사리 성공시키지 못하게 한다. 이런 환경에 목회자들이 소외된 환경의 성도들과 문화로부터 선택받은 자들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기울이지만 결국은 실패하게 될 것이다. 프로그램화 된 21세기는 목회자의 목소리가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것은 세상 문화는 하나님의 음성을 인식할 수 없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람들 가운데 들려지는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 그리고 인간의 삶으로부터 자유를 가르치는 복음이 효과는 많은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인도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21세기 목회자들의 역할은 가히 희망적이다. 사람들은 자기의 이성을 잃어버린 자들처럼 사고하지 않고 생각할 필요가 없을지라도 인간의 근본적인 본성은 언제나 하나님을 찾아가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의 문을 열어 주실 것이다.<계속>
- VR. Virtual Reality는 가상현실을 체험하게 하는 프로그램을 말한다. 이것은 벌써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가상현실이 실제의 상황에서 벌어지는 High Medea는 음성정보를 분석하는 기능을 가진 Computer가 상상할 수 없는 속도를 가진 기능으로 발전하게 되고 곧 인간의 기능을 대신하게 될 것이다. 이때 인간은 지정한 Main Computer에게 명령하고 Computer는 그 명령을 따라서 작업을 수행할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추구한 신의 위치를 빼앗는 최대의 문화 건설이다. [본문으로]
- 인간은 바벨탑의 언어 혼잡을 극복하려는 장구한 역사적인 노력이 드디어 성취하는 과업을 이룩하나 그 결과 바벨탑 사건의 신비를 다시 경험하게 될 것이다. (주님이 아직 재림하지 않을 경우를 말함)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위대한 능력을 드러내기 이전에 이 땅에 임하시기를 강력히 소원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을 배역하고 극악한 죄의 길을 가며 전능자를 도전하는 모습이 바벨을 회복하려는 노력으로 분명히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에 등장한 새로운 언어는 Com언어가 된다. 그것은 문화가 새로운 의사전달 매개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 정보혁명은 종이에 인쇄하던 문화 혁명에 이어 미디어 매체를 이용한 인쇄술의 혁명을 의미한다. 르네상스가 인간 이성을 잠에서 깨어나게한 운동이라면, 정보혁명은 인간으로부터 이성이 자유를 성취하는 해방운동이라 할 수 있다. [본문으로]
- 화상 편집 그리고 뉴스 편집 이런 일이 시작이 되어 모든 사람들이 편집을 연구하고 생활화한다. 편집은 과거 전문가들의 독점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생활화요 곧 훈련이다. [본문으로]
- Eye key는 감각 기능을가진 센셔가 (특정한)돌발된 상황에 따라서 원하는 상대자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보턴. [본문으로]
- 여기에서 말하는 생명 공학 분야는 생명 탄생에 관한 분야에 한정하고자 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