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구원1 -소명2 -부르심(딤후1:9)
3, 소명2 : 그리스도 안에서
지난 주에는 소명의 기초적인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이 의미를 모르고 단순히 ‘부르신다.’는 의미로 접근한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헤매는 초보적인 기독교 신앙에 머무를 것입니다.
우리가 본 소명은 무엇이었습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소명은 만물을 존재케 하시는 창조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 안에 계획을 세우시고 그 계획에 따라 만물을 불러냄으로 존재케 하신 것입니다.
둘째 ‘죄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을 부르셔서 영혼을 소생케 하시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은 영혼이란?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사람을 의미합니다.1
이 두 가지의 답변으로 소명의 의미를 충분히 설명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난 주 들었던 말씀에 더할 의미가 더 있는가? 라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게다가 종교적 의미에 국한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부르신다는 의미 외에 떠 어떤 것이 있느냐고 반문하실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소명은 창조적인 부르심뿐 아니라 죽음에서 살리시는 하나님들의 역사가 있는데, 그 역사에는 무수히 많은 의미들이 있습니다. 이 의미들을 우리가 알아야 할 아주 중요한 내용을 간과 할 수 없기 때문에 부득이 남은 설명을 드리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의 지식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왜곡되어 무지와 결함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소명의 내용에도 역시 무지부분과 결함부분을 함의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런 부분에 대해서 보충적으로 이해되지 되지 않고, 완전한 소명의 의미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2
그래서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소명이라는 내용에 함의 되어 있는 무지와 결함에 해당하는 부분을 수정하거나 채워서 완전한 의미를 이해하고자 하지만 우리의 지적 한계로 인하여 모두를 알 수 없으나 이해할 수 있는 부분까지 지평을 넓혀서 사유해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 신앙의 조상들을 거슬러 올라가 그들의 신앙이 주는 교훈으로부터 그들이 이해하는 소명을 역사적으로 검증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앞에서 소명이라는 언어를 이해할 때 일반적으로는 소리를 내어 부르는 것으로만 이해했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을 부르는 소명”을 ‘죽어 있는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해로만으로도 소명의 의미를 새롭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또한 ‘소명’은 아래와 같은 필수적인 결과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곧 살아 있는 사람이 삶으로 드러내는 그 행위에 대한 문화”라는 것입니다.
이 문화는 아주 포괄적인 것입니다.
그것이 구약 성경에 속한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아주 잘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은 그들이 지나온 발자국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믿음의 문화를 남길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속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그리거나 드러냈고, 말씀을 삶의 규범으로 하여 생활하는 곳에서 실천하거나 순종함으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의 문화를 만들어 냈습니다.3
이것을 볼 때 소명이 목적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자 그들은 이 율법을 외우고 읽어서 그들 영혼의 정신으로 삼았고, 그 영혼에서 생산한 노래인 시편과 잠언, 그리고 전도서와 같은 위대한 문헌들이 남겨졌고, 그 문헌들에는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말미암아 타락한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마음이 드러났으며, 그들의 삶속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찬양들이 삶의 문화를 드러냈습니다.
만약 이들이 모세오경과 같은 글이나 선지서들을 읽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내는 시편이나 잠언, 전도서 등 위대한 문헌들은 나타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부르심으로부터 나타난 결과적 삶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부르심이 아닌 본성으로서는 드러낼 수 없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과 관계되어 있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도록 부르신 것이지, 타락한 옛 사람에게 어떤 하나의 종교적인 기능을 덧붙여 신앙적 삶을 더하여 살도록 한 것이 아닙니다.4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은 잘못되어진 것을 고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 자체를 고칠 수 있다면, 사람은 자기 스스로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구원에 관하여 하나님의 개입이 아니고, 소명이라는 복잡한 과정을 적용할 필요도 없이 충분히 변화가 가능한 것으로 볼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변화된 이스라엘의 삶을 살펴본 이방백성들도 스스로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국의 청교도 설교가 ‘죠셉 얼라인’5은 그의 책 '천국에 이르는 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당신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시면 누구도 그분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당신께 나아오는 자를 아무도 내어 쫒지 아니하신다.(요6:37, 44)”고 성경의 말씀을 인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오래된 건물을 수리하는 것이 아니라 새 건물을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께서도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낡은 가죽부대에 거룩한 새 가죽 조각을 붙여서 꿰매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6
사람이 거듭나는 것은 타락한 본성의 사람을 그대로 두고 영혼에 새 사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7
참된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8
타락한 사람의 본성
사람은 최초 지음을 받았을 때, 하나님의 형상의 조명에 의해 자기의 본성이 형성되도록 지음을 받았고, 자기 안에 있는 자기 지식의 한계로만 본성의 삶을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본성은 모든 것을 아시고 불러내실 수 있는 지적인 완점함을 가지셨기 때문에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불러내실 수 있으나’, 사람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배우지 않은 것이나 경험하지 않은 것은 인식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을 주셔서 사람이 보고 감각하고 경험한 것을 하나님처럼 인식할 수 있도록 조명하여 주심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하셨던 것입니다.
타락한 사람의 본성은 하나님 형상의 조명이 없이 형성된 자기의 정체를 말합니다.
본래는 하나님의 형상이 조명하여 주심으로 자기 본성이 형성되어졌는데, 타락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조명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본성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이라고 부르지도 못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의도에서 완전히 벗어난 존재입니다.
이런 존재는 창조 세계에 있을 의미가 없습니다.
창조 세계에 필요하지 않습니다.
창조 세계에 해로운 존재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18에서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도 행하지 말라. 저희는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마음에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 떠나 있도다.”라고 말했습니다.9
이 본성의 사람은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관계할 수 없고 본래 생명이 없기 때문에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10
다시 말하자면 처음 삶을 시작한 사람은 생명과는 관계없는 시작으로부터 살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우리가 이 세상에 삶을 시작한 것은 생명이 아니라 다른 요소로 살게 되었는데 성경은 우리에게 생명을 얻으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 설명은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에서 아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집에 있을 때 모든 자유와 삶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독립하고자 상속받을 재산을 미리 받아서 멀리 타국으로 가서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결국은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거지가 되었습니다.
이 아들은 자기가 아버지와 같이 살던 날을 기억하고 자기의 신분에 어떤 처분이라 감수하고 아버지한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그에게 다시 반지를 끼워주고 옷을 입히면서 다시 받아도 들였습니다.
그런데 그 형에 보고 질투합니다.
자기는 아버지말씀에 순종하고 성실하게 살았는데,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저 동생에게 후히 대접하고 잔치를 하면서 다시 아들로 받아준 것에 대해서 불만을 터뜨리자 아버지가 한 말입니다.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잃었다가 얻었으니 잔치를 하는 것이 마땅하다. 라는 비유를 예수께서 하신 것입니다.
이 아들이 아버지의 의도와는 다르게 아버지 집을 떠난 것을 죽은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일락을 좋아 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은 자로다.”(디모데전서 5:6) 라고 말합니다.
이 논리로 인하여 어떤 사람이 죽는가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아버지 피를 물려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곧 죄를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된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그 안에는 죽음이라고는 한 점도 없는 분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이면서 하나님이셨습니다.
예수께는 죄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는 사람의 죽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만 있습니다.
어떤 상태에서든지 예수님은 죽으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생명이 없고 본래 죽음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11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제자들이 곳곳에 나아가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으며, 사도 바울에 의해서 이방에도 복음이 전파된다는 소식이 들려지자 예루살렘 교회에 사도 회의가 있었습니다.
이때 이방인에게 ‘생명 얻는 회개’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놀라고 인정하게 되었습니다.(사도행전 11:18)
여기에서 이방인이 ‘생명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받고 회개에 이르는 것입니다.
복음이라는 씨앗이 죽음의 사람의 영혼에 뿌려지고 그 씨앗이 싹을 내고 자라므로 새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죽음의 사람에게 생명의 사람이 심겨진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가 끊어지고,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적용되어지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삶의 열매
앞에서 사람의 삶은 문화를 낳는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즉 살아 있다는 것은 삶의 모양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 모양이 문화를 이룹니다.
타락한 사람은 타락한 문화를 낳고,
온전한 사람은 온전한 문화를 낳으며,
복음의 씨앗에 의해 새롭게 거듭난 사람은 중생한 새 사람의 문화를 낳게 되어있습니다.
초대교회의 문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이 이 땅 위에 뒤 덮었습니다.
물론 핍박이 너무 심해서 밖으로 드러내어 표시하지 못했지만, 당시 기독교는 타락한 사람들의 영혼에 생명의 씨앗인 복음을 심겨져 새 사람이 되자, 자기의 거짓과 위선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이런 삶을 살았던 것을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고, 이로 말미암아 새 생명이 사람들에게서 나타났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타락의 무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사회 문화와 정신문화가 강력하게 밀려들어왔고, 그 사상의 영향은 위대했습니다.
처음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설교하게 되자 30천명이 회개하게 되자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 사회는 커다란 위기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대제사상까지 나서서 사도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했지만.12 베드로와 사도들이 일어서 말했습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사도들은 세상의 죽은 자들의 어떤 위협에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하여 교회는 계속해서 확장되어 갔고,
북부 안디옥과 갈라디아,
그리고 에베소를 거처 데살로니가,
에게해 고린도까지 복음이 전파되어 생명이 뿌려졌을 뿐만 아니라 삶의 문화가 일시에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초대 교회의 사회의 모습은 사도행전 4:32절 이하에 아주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어떤 이는 이것을 이단 그리스도파들의 잘못된 종말론 사상에 물들었다고 하거나, 스탈린과 Marxism 자들이 주장하는 공산주의라고 했으나,
사실은 이런 왜곡된 사상과는 전혀 다른 삶의 문화였습니다.
이는 생명이 있는 순전한 사랑에서 나오는 성령께서 만들어낸 기독교의 사회 문화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이들을 지배하고 하나님의 선의 원칙에 따라 엄격한 질서와 조화로 말미암은 은혜의 통치가 시행되었고,
사람들은 죄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했으며,
거짓을 혐오하고,13
진리만을 사모하며,
날마다 교회에 모이고 말씀을 듣고 은혜를 나누는데 열심을 내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충분히 기뻐하신 공동체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을 자기들의 지식으로 왜곡하거나 곡해하여 각종 이단사설을 만들어내는 거짓된 사상으로 왜곡시켜 버린 것입니다.
율법이 선하지만 유대의 랍비들의 왜곡된 사상으로 해석하여 미드라쉬나 미쉬나, 탈무드 같은 유대전통의 해석이 나왔고,
이스라엘에게 강력하게 역사하던 하나님의 통치가 이스라엘에게서 멀어진 것같이,
초대교회의 진리가 거짓된 사상으로 해석되어져 사람들에게 엄청난 폐해를 가져와 사회 문화에 씻을 수 없는 고통과 암울한 미래를 남겼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왜곡하는 거짓된 사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오류들을 철저히 배격하고 진리가 우리의 삶에 적용되도록 우리의 신앙을 정결하게 할 필요와 사명이 동시에 있습니다.
만약 우리 가운데 성령이 역사하시면 오늘도 초대교회와 같은 은혜의 장은 반드시 일어납니다.
말씀이 있는 곳에 주의 성령의 역사는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 같이 이런 생명의 장이 우리에게 일어나기를 소원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직접 통치하시고,
우리 가운데 진리가 생명으로 드러나며,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문화로 보여 지도록,
절대적으로 우리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단순히 부르심으로 마침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르심에는 반드시 그 결과가 사람에게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영혼의 변화와 함께 삶의 형태가 달라집니다.
영혼의 변화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사람에게 들려짐으로 생명이 소생하는 것이니까, 중생의 결과로서 새로운 생명이 소생된 것입니다
두 번째는 마태가 기록한 예수님의 어록 중 팔복 산에서 행하신 산상수훈 가운데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고 말씀하신대로 삶의 열매로 나타나고, 곧 그 사람의 삶의 문화로 보여집니다.14
만약 우리 가운데 이런 결과들이 없다면 우리는 죽은 사람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쉽게 감동할 수 있는 것은 비록 작은 부분이고, 여러분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그 알 수 없는 명예 욕구가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도구로 해서 교회로 모여지게하고, 또한 그 모임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문화를 미약하게나마 드러내도록 하시려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이 모임이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계신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이 말씀은 신실한 진리이어야 하고,
세속화 되지 않은 말씀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직 진리만을 여러분에게 말할 것입니다.
세속화 교회를 세우는 그런 공동체에 전하는 말씀을 배격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통해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저 믿기만 했을 뿐인데,
기적이 일어나게 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사역을 보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는 분명하게 요구되는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가운데에서 역사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어디에서 역사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서만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부름으로 시작하시고 그 부름에 응답하는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을 부르심으로 생명을 일으키신 다음 그와 교제하시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속히 떠나 버렸습니까?
가장먼저 갈라디아 교회가 그랬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크게 책망했습니다.
“그리스도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쫓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어떤 사람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찌어다.”(갈라디아서 1:6~8)
고린도 교회가 그랬습니다.
분쟁이 일어나고, 파당이 일어나고, 간음사건이 터졌으며, 서로간에 송사가 일어나고, 가난한 사람들을 소외하며 멸시하고, 사랑이 식어져버렸습니다.15
사도가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복음으로 말미암은 삶의 열매였습니다.16
사도행전 처음에 보면,17 초대교회의 성도들의 삶은 하나님의 성령이 신자들 가운데 함께 하심으로 나타난 초자연적인 도덕을 추구하는 질서와 조화가 있는 사회였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협력하고 나누며, 아픔을 함께하고, 사랑하며, 위로하며, 자기의 것을 주장하지 않았으며, 서로 나누며 아낌없이 희생하는 사회였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사회 문화였고, 삶이 그렇게 드러난 것입니다.
이때에는 성령께서 강력하게 개입하셔서 치료하셨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세계를 지배하는 사회였습니다.
이런 사회가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나타났을 때, 거짓된 사회에서는 대대적인 거부와 반대로 말미암아 교회를 핍박하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아이러니하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더욱 거세게 박해하였고 핍박했으며, 교회의 중책을 받은 집사들을 돌로 쳐 죽이기까지 함으로 스데반 집사가 순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오늘 우리가 초대교회의 사회를 동경하는 데는 우리의 모습이 초대교회 사회와 너무 동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초대교회를 지향하면서도 그들의 모습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초대교회에 역사하신 성령의 감화가 오늘 우리 교회에는 역사하시지 않고, 초대교회와 같은 사람들처럼 진실한 마음과 진리를 향한 절대적인 의지감이 우리의 마음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우리의 영혼에는 덕지덕지 묻은 결함과 무지한 지식들로 말미암아 진리에 대해서 희미하게 감지할 뿐입니다.
하지만 최소한 이것이라도 없으면 우리는 구원의 소망이 없을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여러분은 세상이 교회를 받아들이고, 어깨동무를 한 4세기의 기독교를 아실 것입니다.
이때 교회는 세상의 사상과 어깨를 같이 하고, 모든 사람들이 교회를 향한 넓은 문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때에도 교회는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권력자도, 자유를 잃고 노예의 삶을 사는 사람도, 함께 않아서 예배하며 찬송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문은 좁은 문이 아니라 넓고 아름다운 문이 되었습니다.
이런 교회가 영혼의 순결성을 상실하였다는 주장에 아이러니할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거듭난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감탄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서서히 어두움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고,
상상할 수 없는 추악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순결한 교회의 복음이 세상의 지식으로 해석되거나, 노트화 되어서 모든 교사들의 사상의 Foot note로 밀려났고, 기독교는 헬라와 로마철학에 흡수되어 완전히 혼합된 후 빛나는 세속화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교회들이 13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 사상과 혼합되어 토마스아퀴나스로 말미암아 위대한 신학의 전승기를 맞았고,
14세기에 이르러 로마는 르네상스 운동18의 발단과 함께 오스만트르쿠의 콘스탄티노플 점령으로 인하여 동 서문화가 만나 신플라톤주의의 새로운 옷을 갈아입는 등, 교회는 세상의 철학과 혼합되어 본래의 순결은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16세기에 교회 개혁이 일어는 같은 시기에는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을 입은 합리주의로 말미암아 인간의 이성이 사상사를 지배하게 되었고, 18세기에 일어난 산업혁명과 함께 합리주의가 과학의 영향을 힙 입어 마치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것처럼 희망을 던졌으나, 오히려 1,2차 세계대전과 핵폭탄의 개발로 인류는 파멸의 직전에 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16세기 초 교회는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고 새로운 청교도 운동을 통해 순결성을 회복하여 왔으나,19 다양한 교회의 목소리가 순결한 교회를 소수의 소외무리로 전락(downfall)되고 말았습니다.
현대 교회는 다양한 목소리와 신학적인 차별로 인하여 배타적인 사상이 지배하는 교리중심의 교회로 변질되어 초대교회의 순수성과는 너무 거리가 멀어진 상태에서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여기에 있는 여러분들 가운데에는 제가 전하는 이 말씀이 기존교회에서는 전혀 들을 수 없는 말씀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설교자들은 오늘 저와 같이 설교하지 않았습니다.
보다 더 신실하고 진리에 가까운 살아 생명 있는 말씀으로 성도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고, 베드로가 설교 할 때에는 3천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으며, 세기를 거듭하면서 기독교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자 유명한 학자들이나 세상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무수히 많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세상과 어깨동무를 한 교회는 전례 없는 힘을 가지고 세상을 통치하고 문학과 예술 그리고 철학에 이르기 까지 학문 전반에서 왕자의 위치에 군림하게 되었으나, 반대로 교회는 소돔과 고모라 보다 더 타락하고 더러운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초대교회에서 나타난 신앙의 문화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으로 강력하게 거듭나는 삶의 혁신적인 변화였습니다.
그러나 세상과 짝한 교회에서는 그것보다 명예와 권력, 그리고 물질까지 넘치게 주어지게 되었고, 야망과 권력, 세상의 향락을 추구하는 욕구를 가진 사람들이 모임으로 나타난 추하고 더러운 세속의 정욕이 교회의 깊숙한 곳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초대교회의 모습은 깡그리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이들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교회에도 초대교회의 모습을 회복하기는 매우 어려워 지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로 교회는 세상에서 완전히 힘을 잃어버리고 말았고, 교회에 찾아와 중생하려고 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든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중생한 사람들이 모여서 작은 사회를 구성하면 거기에서 삶의 문화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우리의 작은 모임이 중생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우리의 작은 모임에서 삶의 문화 열매를 드러내고,
그 문화가 곧 세상을 향하여 들어 올리는 등불이 됩니다.
우리가 등불을 높이 치켜 들 때 세상은 우리를 향하여 말할 것입니다.
너희가 가진 것이 무엇이냐?
너희는 우리와 다른 이유가 무엇이냐?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것이나 다름이 없고,
우리의 실질적인 존재를 세상 드러내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삶을 살게 하며,
그 삶이 기독교의 문화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자기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거나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 이유는 사람의 영혼에 있는 지식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왜곡된 지식들뿐이기 때문에 그 지식으로 행동하는 모든 행위가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 본성의 정체성에 대해 너무도 무지합니다.
우리에게는 두 개의 본성이 필연적으로 존재합니다.
하나는 처음부터 우리의 생명을 일으킨 타락되고 왜곡된 죄의 본성인 사람으로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고,
다른 하나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복음의 씨앗으로 말미암은 생명입니다.20
이 생명은 서로 다른 지식 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왜곡된 지식으로 하나님을 모르는 체계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심겨진 복음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처음 태어날 때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모르는 왜곡된 지식체계가 사람의 생명을 시작하게 합니다.21
사실 이렇게 시작한 것은 생명이 아니라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사망에 잡혀 있는 죽음의 운명을 타고난 사랍니다.
이렇게 시작한 죽음의 생명은 마지막에 이르는 그날까지 육신의 주인이 되고, 어떤 존재도 이 죽음이라는 주인으로 부터 육신을 빼앗을 수 없고, 오직 사망만이 우리의 본성을 육신으로부터 분리하게 합니다.
이 사람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이 임한다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없는 소경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름은 다양합니다.
대부분은 전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지만, 성경의 말씀으로, 자연을 통해서, 삶의 환경에서,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소명은 시행되고 있습니다.
처음 인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삶을 시작한 것처럼, 거듭난 사람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생명이 시작됩니다.
이제 여러분은 스스로 자신을 점검해 볼 것입니다.
부름을 받았는지,
부름으로 인하여 삶의 변화가 있는지,
부름으로 인하여 삶의 문화를 드러내고 있는지,
부름으로 인하여 자기의 삶의 전반에 걸친 사고의 변화가 있는지,
여러분은 반드시 이런 결과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이 부름으로 말미암아 가장 분명한 변화는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보고 그것과 싸워 이기려는 신앙의 투쟁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탕자가 돌이킨 것,
사울이 바울이 된 것,
강도가 변하여 전도자가 된 것,
이것이 소명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인의 표지입니다.
저는 여러분 안에 생명이 일어나 그리스도인의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나도록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렵니다.
- 요한계시록 3:1 [본문으로]
- 소명을 이해하는 우리의 지식들에는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왜곡된 지식들이다. 소명을 해석하려고 유기적으로 적용한 모든 지식들에 있는 본질적인 결함이 곧 소명이라는 본질을 왜곡되게 해석한다. [본문으로]
- 하지만 이스라엘은 성경을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혹은 오석한, 미드라쉬(할라카/법규 와 하가다/설화로 구분), 미쉬나(장로들의 전통), 탈무드(랍비 지혜서), 게마라(미쉬나 강해서), 랍비들의 문서를 의존하였다. [본문으로]
- 에베소서 4:22, 골로새서 3;9, 로마서 6:6,에서 사도는 타락한 본성을 옛 사람이라고 지칭하고,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도다.” 했다. [본문으로]
- Joseph Alleine (1634~1668) “영국의 청교도 가정에서 태어남, 1645 교회 설교자인 형의 죽음을 계기로 회심, 옥스퍼드 링컨 칼리지 신학, 20세 장로교에서 목사 안수. 박해로 인하여 수차례 투옥되고, 34세에 소천, [본문으로]
- 마태복음 9:17, 누가복음 5:37, 마가복음 2:22. [본문으로]
- 하나님께서 사람의 영혼에 새 사람을 심으셔야 하는 방법은 죄의 사람을 제거하고 새 사람이 되게 하시거나 혹은 조금씩 고쳐가면서 새 사람으로 바꿔가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새 사람을 지으시는 데는 이유가 있다. 1, 하나님의 사람의 지식과 타락한 본성의 지식은 그 본성에서 결합될 수 없다. 결합시켜 새 사람을 드러낼 수 없다. 영혼을 일으키는 지식의 구조가 타락한 본성의 지식은 무지와 결함을 함의 하고 있고, 복음으로부터 자란 지식은 결함이나 무지가 없기 때문에 질적으로 구조가 다르다. 그러므로 진리를 적용함에 있어서 복음을 왜곡시키는 오류를 발생하므로 결코 결합되어질 수 없다. [본문으로]
-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본문으로]
- 요한복음 6:33,53, 요한일서5:12, 사도행전 11:18. [본문으로]
- 에베소서 2:5, 히브리서 6:1. [본문으로]
- 잠언 4:20~22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속에서 지키라. 그것을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에 건강이 됨이니라.” 요한복음 6:63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본문으로]
- 사도행전 5:40. [본문으로]
- 사도행전 5:3~11. [본문으로]
- 마태복음 7:16~20. [본문으로]
- 고린도전서 1:10,12, 6:7, [본문으로]
- 고린도전서 14:25 [본문으로]
- 사도행전 4:32~35 [본문으로]
- 14~16세기에 서 유럽에 나타난 인문주의 운동. [본문으로]
- Joseph Alline, A Sure guide of heaven, “아직 회개하지 않은 자여,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읽고 가능한 말씀을 신실하게 전하는 곳을 찾아가라,” [본문으로]
- Herman Bavinck(1864~1921) 개혁교의학 Vol4, 박 태현 역, 부흥과 개혁사, 2011, 31P. “중생 가운데 심겨진 영적 생명은 이 생명에 선행하는 자연적 생명과 도덕적 생명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이것은 인간의 활동이나 진화에 의해 초래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적 행위로 인해 발생한다.” 라고 말함으로 구원에 이르는 생명은 새롭게 태어난 새 생명임을 강조한다. [본문으로]
- Ibid, Herman Bavinck 는 이를 ‘자연적 생명’이라고 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