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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의 행위(ἔργων νόμου)

생명있는 신앙 2021. 6. 23. 11:29

최근 새로운 바울연구의 결과물들과 새로운 시도들이 봇물 쏟아지듯이 내놓고 있다. 
해외 신약학회의 각종 모임 단체들은 대부분 바울과 유다이즘 연구에 몰두하는 것처럼 보인다. 
신학계의 논문 뿐만 아니라 연구한 논문들을 책으로 역어내는 출판물들이 바울 연구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대부분 유다이즘에 관한 연구를 발표하는 것으로봐서 그동안 교회가 유대인들에관한 배타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던 서구 사상에 대한 반성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번의 홍수처럼 교회를 휩쓸고 지나간 바울 신학의 새관점 주장과, 그이후로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붙들고 있는 유다이즘에 관한 연구들이 이를 반영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현재 팔레스틴에는 이스라엘이 약 2천년만에 나라를 되찾고 그의 백성들이 속속 하늘을 날아 입국하고 있다. 
현재 그 인구는 약 800만명이 거주하고 있고, 이슬람과의 갈등때문에 중동 화약고로 세계의 관심이 되고 있다. 

그들의 정신과 사상을 배우려는 세계인들의 관심도 뜨겁고, 아직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영향력은 세계의 중심이 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눈도장 같은 작업들이 새관점을 낳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바울의 율법의 행위가 그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는가?

그들은 바울을 유대인들에게 친근한 사람으로 엮으려는 의도가 무엇일까?
종교개혁사상이 유대인들에대한 배타적인 태도를 가졌으며, 신학적으로 잘못 오해했었다고 공개적인 회개라도 하는 것일까?

과연 종교 개혁사상은 유대인들을 향한 적대적이었을까?

그것이 바울의 율법 행위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바울에 대한 오해가 유대인을 혐오하게 만든 원인이었다고 생각하는 연구접근에 상당한 문제가 있는 것을 볼 수있다. 
우선 새 관점학파들의 주장에 의한 바울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으려 했을 것이다. 

다시말하자면 바울이 유대인을 혐오했다고 생각했던 전통적인 주장에 대한 다른 주장이 있다고 말하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의 칭의론이 바울 신학을 매우 단편적인 관점을 갖게되었고, 이를 개혁사상이 여과없이 받아들여 신학을 정립하여 교회가 칭의론 사상중심으로 세워지게 했다고 전통주의 신학을 비판하고 나섰으며, 실지로 바울이 말하는 율법의 행위는 루터의 생각과는 전혀다른 E,P Senders의 언약적 신율주의나 J, Dun 의 "이방인들과 구별하는 유대인에 대한 민족적 특성 곧 정체성의 표지"였다고 주장하게된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율법의 행위는 과연 무엇일까?
갈라디아5:14에서 "γὰρ πᾶς νόμος ἐν ἑνὶ λόγῳ πεπλήρωται ἐν τῷ ἀγαπήσεις τὸν πλησίον σου ὡς σεαυτόν.(Greek Study Bible (Apostolic / Interlinear))" 라고 말 한다. 

네 자신과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율법의 모든 것을 성취하는 것,(이루는 것)이다. 곧 율법은 사랑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13:8~9 에서는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라고 한다. 

  1.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2.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3.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이 말씀은 마태복음 5:17~18 에서 언급하신 것과 같이 율법의 완성, 19장 16에서 영생을 얻고자하는 한 선생에게 계명들을 지키라 그리하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라, 라고 말씀하신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율법은 사랑에서 나온 법이고, 율을 행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사람은 사랑하기를 싫어하고. 사랑하지 못한다. 이를 육의 사람에 비유하여 로마서 1:18~32에서 미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드러내고 갈라디아 5장에서 율법 아래에 있는 육체의 사람의 행위에 대해서 사랑과 대비되는 행위들을 지적한 것이다. 

이것이 바울의 생각이었다. 

한마디로 바울이 말하는 율법의 행위는 사랑이다. 

 

모든 사람은 율법아래 있고, 율법을 행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왜곡된 자세로 하나님을 섬긴 것이다. 사랑하지 않은 사람은 그 행위의 내용과 관계없이 율법 아래있는 사람이고, 율법은 그 사람을 죄인이라고 정죄 한다. 

최근 새관점 학파들이나 전통학파들이 바울의 율법의 행위에 대한 왜곡된 인식들로 인해 논쟁이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여기에는 현재 지중해에 위치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1948년에 독립하여 70주년을 보내고 있으며, 옛 서구인들이 유대인들에 대하여 예수를 죽여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은 민족이라고 뉘명을 뒤집어씌워 모진 고난으로 괴롭힌 것에 대한 반성차원에서 비롯된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1세기의 유대의 사회에서 나타난 여러가지 증거들이 있을지라도 성경보다 더 정확하게 제시한 자료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을 근본에서 출발하여 문제에 접근한다 할지라도, 이미 바울이 언급한 주장들에서 결론을 취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바울이 비판한 사회 환경에서 취해진 증거들을 근거로 바울의 말을 정의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이런점을 예견이라도 한듯이 바울은 그의 기록에 독자들이 충분히 이해될 수 있도록 개념들을 참고해두었다. 율법의 행위 또한 그렇다. 

 

결론적으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제의 의식을 통한 관계를 중시했다. 이로인하여 율법에 관한 해석도 그들이 관심을 가진 방법에 따라 적용되어지게 되었고, 복잡하고 다양한 율법조문들과 종교적 지도자들의 가르침과 교육을 중심으로 별도의 의식자료들을 생산하여 그것들이 율법의 행위라고 정의하게 된 것이다. 이를 발견하거나 취한 신약학자들이 율법 행위의 의미를 "언약적 신율주의" 혹은 유대인으로서의 표지인 "정체성"이라고 혹은 "보편적 관점에서 선행"이라고 정의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