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연구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생명있는 신앙 2006. 7. 19.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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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사도행전 18:1-2)

 

1) 아굴라 부부와 바울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어떻게 방언과 관계 있는가? 라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고린도 교회의 방언에 관한 문제를 해결해 주는 열쇠 역할을 한다. 이들을 바울이 고린도 지역에서 전도할 때 만난 로마에서 추방당한 본도의 유대인들이였다.1)

아굴라는 장막업을 하는 사람이었고,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 복음 전도를 위해서 이방지역을 순회하는 바울이 경제적인 어려움을 당할 때 마다 자기의 장막치는 기술로 어려움을 해결하곤 했다. 그때에도 바울은 아굴라를 찾아가 일을 거들어주고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었다.

바울과 아굴라는 이렇게 만났고, 두 사람은 주일이나 혹은 하나님께 예배하거나 제사하는 시간에 함께 모임을 가질 때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다시 만났고, 이때 바울은 복음을 전했고 큰 감동을 받게 되었다.

아굴라 부부는 바울이 고린도와 에베소 지역을 전도하는데 모든 일행의 경제적인 지원을 감당했고2). 바울을 만난 다음에는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이 주된 사업으로 바뀌었고, 많은 수입을 바울의 전도 사업에 협력하므로 전도 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다.

 

아굴라의 부부는 바울과 함께 고린도를 떠나 에베소로 건너갔다.

그들이 에베소에 도착하여 전도하였으나 많은 어려움이 부딛혔다.

유대인들이 그들의 복음을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복음을 전할 마땅한 장소를 찾을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아굴라는 자기의 집을 교회에 제공하여 복음의 전초 기지가 되도록 했다.

에베소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바울 자신에게 계획된 일이었기 때문에 변경할 수 없는어떤 일 때문에, 아굴라를 비롯한 여러 동역 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을 다녀와야만 했다. 신앙심이 강한 아굴라 부부를 비롯한 누가, 그 외에 여러 동역 자들을 에베소에 머물러두고, 예루살렘으로 내려갔다.

에베소에는 아굴라 부부와, 누가, 그리고 그 외에 다른 제자들이 남아서 교회의 발판을 다지고 있을 때 에베소에는 이미 알랙산드리아에서 올라온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자기 제자들을 데리고 와서 요한의 세례로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고 있었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성경에 관한 지식이 남들보다 뛰어났고 유일하게 예수를 증거 하면서 유대인을 이겼다.

바울의 동역자들이 에베소에 도착하여 교회를 세우려고 여러 가지로 노력하고 있을 때 에베소에서 아볼로 일행을 만나 그의 가르침을 듣게 되었다. 아굴라의 일행이 회당에 갔을 때 아볼로가 성경을 풀어 주의 도를 가르치고 있었고 아굴라부부와 일행이 복음을 듣게 되었다.

이때 아볼로의 가르침은 부분에서 부족함이 있었고 아굴라 부부는 아볼로를 자기 집으로 초청하여 하나님의 도를 대해서 가르쳤다’3)고 누가가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아굴라의 아내 브리스길라가 아볼로를 가르친4) ‘하나님의 도라는 표현과 아볼로가 주로 알고 있었던 주의 도에 관한 표현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누가는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이들의 가르침이 서로 다른 것을 나타내고 있다. 아볼로가 [주의 도/ την όδόν τοΰ κυρίου,18:25]를 알고 있었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하나님의 도/ την όδόν τοΰ θεου,18:26]를 더 자세히 가르쳤다고 말한다5). 아볼로는 주의 도를 말하면서 요한의 세례만 알뿐이다라고 말하므로 [물세례]를 말하였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말하는 하나님의 도는 성령께서 역사 하는 [세례]에 관해서 초점을 두고 서로 구분하여 사용하였다.

 

아볼로는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던 사람이다.

 

그러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알고 있는 성령 세례를 말했다.

 

누구든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가지고 있는 성령 세례에 관한 지식은 고린도에서 바울에게서 습득하였을 것이라고 간과하여 생각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바울 사도에게 듣기 이전에 자신들이 그리스도인 되었을 때 경험한 오래전의 일일 것이다.

 

그런대 아볼로는 지금 그 성령의 세례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그가 알랙산드리아에서 유대를 거처서 돌와와 에베소에 당도했을 경우에 아볼로는 가는 곳마다 성령으로 세레와 요한의 세례에 관해서 갈등을 가졌을탠데 그렇지 않고 에베소까지 와 있다는 것은 상당히 문제가 된다. 반대로 아볼로가 알랙산드리아에서 배를 타고 그레데 섬을 거쳐 곳 바로 에베소에 당도했을 경우에 알랙산드리아는 성령 세례에 관한 하나님의 도(브리스길라가 말한대로)”가 전파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거한 샘이다.

 

아볼로는 세례 요한이 예수를 그리스도임을 증거한 사실을 체계있게 정리하였고, 이 지식으로 유대일들을 설복 시킬 박식한 사람이었다.

 

아볼로는 자기의 지식으로 많은 유대인들을 이기며 에베소까지 당도하였다.6)

 

누가가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던 아볼로가 브리스길라에게 성령으로의 세례와 하나님의 도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은 것을 기록하는 것은 아볼로가 회당에서 그리스도를 가르친 것을 보고 브리스길라가 데려다가 가르쳐 그가 변화시켰다는 변화에 초점을 두려는 것은 아니다. 누가는 에베소에서 아볼로의 제자들에게 성령이 강림하였다는 것을 기록하기 위해서 였다.

 

첫째로 아볼로의 제자들이 성령을 전혀 모르고 성령을 받지 않았다.

 

둘째로 그들이 바울의 안수에 의해서 성령이 강림했다.

 

이들에게 강림한 성령은 베드로와 같이 사도들에게 나타난 것과 일치한 것이다.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개인적인 지식이나 혹은 사상 그리고 문학적인 작품을 전달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오직 데로빌로에게 문제된 의혹들을 해소해 주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적인 개념을 말하려는 의도는 저혀 없었다. 다만 성령에 의해서만 깨닫는 전혀 새로운 도를 말하고 그 새로운 도는 성령 세례에 의해서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입문임과 교회의 시작이라는 강력한 의도를 가지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때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19:1)

 

아볼로는 무슨 이유인지는 알수 없으나 급히 아가야 지역의 고린도로 건너갔다7). 아볼로는 알랙산드리아로부터 함께 대리고 온 제자들을 에베소에 머물러 두고 고린도로 건너갔다. 바울이 에베소에 도착했을때 아볼로의 제자들이 있었고, 이들은 모두 열두 사람쯤 되었으며,8)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다. 18:25에서 아볼로가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자기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 예수는 하늘로 가심으로 모든 역사가 끝나버린 것으로 알았는데 브리스길라의 가르침은 전혀 그렇지 않다.

 

아볼로는 고린도를 방문하기를 희망했다. 무슨 의도였는지는 알수 없으나 아볼로가 고린도에 가면서 그의 제자들에게 몇 마디의 말을 남겼을 것은 분명하고, 곧이어 아굴라의 추천서를 가지고서 고린도를 건너가 교회를 든든하게 하여 유대인으로부터 보호하였다.

 

그러나 아볼로는 고린도로 떠나기 전에 브리스길라에게 들었던 성령 세례에 관해서는 자기의 제자들에게 말하지 않고 떠났다. 왜그랬을까? 아볼로의 제자들은 여러면에서 자기의 선생과 다른점이 있는 아굴라 일행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자주 가졌고 많은 토론을 했을 것이다. 바로 이 기회가 아볼로의 제자들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일행으로보터 성령 세례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기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굴라 일행들은 아볼로의 제자들의 결점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아굴라 일행이 그들에게 언급하였으나 아볼로의 제자들이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말해야 할 것인지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고 아볼로의 제자들이 아굴라 일행과 전혀 면식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바울이 에베소에 도착했을때 아볼로의 제자들을 가장 먼저 만난 것은 아굴라 일행의 인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볼로의 제자들이 바울을 만나서 말할 때 자기들은 성령이 있음도 알지 못했다고 언급한다. 이것은 아주 진지한 고백인 것 같다. 왜냐하면 이들이 성령이 계심을 거부하려는 의도를 가졌다면 바울이 행하는 안수에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들은 아굴라 일행들이나 바울의 여러 동역자들에게 성령 세례에 관한 언급을 많이 듣고 또한 토론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이것이 생소한 것이었고 세례를 간절히 사모하고 있던 차에 바울이 당도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에게 성령이 있음을 알지도 듣지도 못했다9)(19:2). 라고 말한 것이다.

 

필자는 아굴라 일행들이 아볼로의 제자들에게 성령에 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고 본다. 더군다나 아굴라 일행이 성령 강림에 관한 사실에 대해서는 바울로 말미암아 확실한 내용을 듣고 알았던 것은 아니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고 경험한 것이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특별한 문제가 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것은 바울은 고린도에 있을때 성령 세례와 방언에 관하여 거의 언급하지 않았으며 오직 십자가의 도를 통하여 사람들이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게 했던 것이다. 이점이 바울과 아볼로 그리고 방언의 문제의 핵심을 밝혀줄 내용인 것이다.

 

2. 로마에서 추방 당한 사람들과 성령 세례

 

바울이 고린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도착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글라우디오 황제를 통하여 로마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추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때 로마에서 이미 그리스도를 영접한 그리스도인들은 여러지역으로 흩어지게 되었는데 특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같은 사람은 이미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가 고린도로 추방당해 있었던 사람으로 추측할 수 있다1). 그렇다면 아굴라 일행은 이미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이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을까? 2:10에는 로마로부터 온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사람들이 오순절 성령 강림의 현장에서 성령 강림을 체험했다는 기록을 보게된다. 아굴라는 바로 이런류의 한 사람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는 바울을 만나기 이전에 이미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고 답보 상태에 있었다. 그런 그가 바울을 만나고 난 이후 구약과 그리스도와의 차이를 자세히 가르치는 것을 듣고 그리스도를 확실하게 영접하는 새로운 변화를 체험하고 바울을 적극적으로 도와 교회의 건설에 앞장선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런 그에게 성령 세례에 관한 지식에 미약하다면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에 있을때 성령 세례와 방언에 관해서는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았고 약간 정도로 언급했다는 사실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다. 만약 확실하게 알고 있었고, 뜨거운 체험을 느끼고 있었다면, 그들이 성령 세례를 중심으로 해서 아볼로의 제자들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누가는 고린도에서 바울의 전도여행을 함께 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것같이 사도행전 2장에서의 성령 강림 사건을 기록한다. 또한 고넬료의 집에서(10:45-46)나 에베소같은 성령의 나타남이 분명한 사실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이 누가의 특징이었다. 그런데 바울의 전도여행을 기록할 때와 고린도 있어서의 기록에 대해서는 방언이나 성령의 세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고린도인들과 다른 아시아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은 성령 강림에 의해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니라 바울이 선포한 말씀의 능력에 의해서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을까? 아니면 상당수가 이미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가 바울을 만나서 견고하게 되었을까?

 

확실한 것은 소수이지만 일부 그리스도인은 오순절 성령 강림 때에 사도들에게 나타난 방언을 체험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이 고린도 교회가 파당으로 나뉘어질 때 베드로파를 따로 구성하였을 것은 당연하다. 이들은 오순절의 성령 강림의 역사와 바울의 복음전파 방식에 큰 차이를 경험한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사도성에 심각한 도전을 가했다. 그것은 고린도 교회의 7대 문제 가운데 방언에 관한 문제와 파당은 바울의 고린도 교회에서 어떻게 활동했는지 드러내준다. 다시 말하자면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은 성령 세례에 관해서 중점적으로 강조하지 않았다. 그래서 누가는 고린도 교회에서의 성령과 관계된 언급을 일체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예루살렘 교회에서 성령이 임한 것이나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나타난 성령 강림과 세례의 방식으로 믿음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것이다. 확실히 바울은 일년 육개월을 고린도에 머물면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임과 구원자임을 분명히 가르쳤다2). 바울이 친히 말한대로 오직 십자가의 도를 강조하여 교회를 세운 것이다. 이러므로 고린도 교회에서는 방언이나 성령 세례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았다는 분명한 증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이 성령 세례에 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는가3)? 그렇지 않다. 고린도에 속한 그리스도인들 중에 상당 수는 성령 세례에 대해서 이미 경험하였거나, 아니면 성령 세례에 관한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들었었다4). 그 경험의 주된 사건의 시기는 20년전의 예루살렘의 오순절 성령 강림때(2:10)에 관한 사건일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고린도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할 때 주로 가르친 내용이 무엇이었는가? 바울은 그들이 직접 경험하였거나 간접으로 경험한 성령 세례에 관한 것 보다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구약을 해석해서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가르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여러 신학자들 가운데 바울이 고린도 서신에 기록한 방언에 관한 언급에 관계해서 은사에 관해서 깊게 언급한 것으로 말하는 사람이 허다하다. 필자는 이런 분들의 주장이 과연 합당한지 살펴 보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 아굴라와 브리스 길라가 중요한 문제의 열쇠를 제공하고 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로마로부터 추방당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며 로마에 있을 때 이미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들이 누구에게 복음을 받았을까?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어 있었으며 세례를 받았는가?

 

먼저는 로마에서 추방당하여 고린도에 도착한 어떤이들중 몇은 14년전에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았던 사람들이 있다.5) 바울은 자신을 가장 열심히 도왔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자신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언급하지 않는 것6)은 이미 누구로부터인지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분명히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누구에게 이미 세례를 받았던 것이 분명하다.

 

두 번째는 이미 오순절때에 에루살렘에서 베드로나 다른 사도들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이 로마로 돌아와서 여러사람에게 세례를 행했다고 가정할 수 있다. 그러면 로마로부터 추방은 받은 사람들중에 그 누가 세례 의식을 행했다면 어떤 방식으로 세례를 행했을까? 또 그들이 세례를 행위를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을 만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사도들중 한 사람이 로마에서 이미 복음을 전했을까?

 

이 사실을 정확하게 증명하거나 추측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로마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이미 그리스도인들이 되어 있었다면 그들중에 유명하다 하는 사람이나 회당장 정도(그리스도로 개종한 사람) 되는 사람이 베드로나 다른 사도들에게받았던 세례와 같은 방식으로 로마에서 행했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예루살렘에서 베드로나 다른 사도들에게 세례를 받지 않았든지,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개종한 그리스도인중 그들 가운데 권위 있는 사람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바울은 이들의 세례 행위를 만족하게 여겼고, 충분히 인정해 주었다. 확실한 것은 바울이 증거한대로 자신이 그들에게 세례를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로마에서 온 그리스도인들에게나 혹은 다른 그리스도인들 중에 세례를 받았다고 언급하는 이들에게 다시 세례를 받으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분명히 언급한다7). 그렇다면 바울 사도가 어떤 의미에서 성령으로 세례에 관한 것을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는지 충분히 이해 할 수 있다. 그들은 이미 오순절의 성령 강림의 세례를 간접적으로든지 직접적으로든지 이미 경험한 사람들이 있었고, 성령 세례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대강 이해하고 있었다.

 

고린도에서 바울을 만난 대다수의 사람들은 오순절 성령 세례도 알고 있었고, 베드로와 120문도의 방언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오순절의 성령 세례에 대해서는 전혀 경험을 가진 것이 없다. 다만 이 사건을 이야기로 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자신은 전혀 경험하지도 않았던 오순절의 성령 세례 이야기를 경험한 사람들에게 언급한다는 것은 터무니 없는 태도가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냄은 세례를 주게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않고,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하려 함이라”(고전 1:17; 2:2)라고 확실히 말한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세우는 동안 사마리아나 가이샤라의 고넬료의 집에서 나타난 성령 강림이라든가, 아니면 성령 세례같은 중요한 언급을 가급적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 그리고 온 인류의 구원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한 것이 분명하다. 그런 바울이 예루살렘을 가기 위해 고린도를 떠나게 되자 아직 안정된 발판을 다지지 못한 교회는 유대주의자들이 들어와서 바울의 가르침을 멸시하고 베드로파와 그리스도파라고 주장하는 어떤이들이 바울의 사도권을 공격하고 나선 것이다. 앞에서 충분히 살펴보았지만 고린도 교회에서의 바울의 사도권은 얼마든지 의혹을 받을만한 이유들이 있었다. 특별히 120문도들만이 알고 있는 사도권에 대한 자격 기준에 의한다면 바울은 객관적인 사도성을 전혀 주장할 수 없었다. 이런 사실들이 고린도 교회안에 밝혀지고,

 

바울의 바리새인의 신분과

 

오순절 성령 강림에 대한 경험이 없는 것 등이 고린도 교회에 낱낱히 밝혀지자 고린도인들은 자기들이 속았다는 생각을 가지고 각자 파벌을 조성하여 따로 모이게 되었다. 이런 결과로 다른 여러 그리스도인들까지 미혹당하여 넘어져 교회가 심각한 위기에 부딪히고 만 것이다.

 

이제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자기에게 세례를 행한 사람을 자기의 선생이라고 주장하였고, 그들의 선생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사람들끼리 모여지기 시작했다. 이런 결과로 어느 누구도 바울의 제자가 되는 것을 꺼려했다. 게다가 고린도에서 바울의 전도 방법은 다른 지역에서와 같이 이적과 기적이 동반된 복음을 전파를 한 것이 아니다.

 

반면에, 고린도인들에게 들려진 바울은 능력을 많이 행하는 사도보다는 지식으로 교리적으로 가르치기는 잘하지만 능력면에서 그렇게 자랑할만큼 행하지 않았다. 또한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는 이적과 기적이 자주 있었으며, 가르침 내용은 오직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한 중심이었지만, 바울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대한 것 보다는 그 해석 중심이였다. 물론 바울도 역시 다른 지역에서는 그의 수건만 만져도 병이 나음을 입기도 했었지만 고린도에서만은 달랐다. 또한 그들중에 어떤이들은 로마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울보다 먼저 개종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이러한 차이점은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에 대한 심한 불신을 갖기에 적당했고, 바울을 멸시하고 사도권을 부정하도록 미혹을 받기에 안성마춤인 것이다.

 

고린도에 있는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이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의 역사를 적나라하게 늘어 놓는다. 그들은 이적과 기적을 행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고, 가는 곳 마다 성령 세례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다. 그들은 바울과 같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유대인들을 향하여 복음을 전했고 유대인들을 변화시키는대 열중이였다.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지 않았다. 바울은 구속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그리스도의 계시에 대한 해석에 열중하였다. 그렇다면 아굴라와 브리스 길라를 통해서 고린도교회의 방언에 관한 결론을 어떻게 정리할 수 있는가? 그렇다고 이 결론이 고린도 서신에 나타난 모든 문제의 방언에 관한 결론을 얻어내고자 한 것은 아니다. 다만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의 가진 은사 문제가 발생한 동기와 그 배경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결론으로 바울 사도는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 성령 세례에 대해서 강조하면서 복음을 전하지 않았고 이런 점들이 오히려 교회의 파당을 가져왔을때 바울편에서 바울을 지지하는 우군을 얻지 못한 결과가 가져 왔을 것이라고 보여진다.

   

3) 아볼로 제자들과 브리스길라 그리고 성령의 역사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와 방언 문제를 언급한 이 부분의 끝으로 에베소에서의 성령 강림과 방언의 역사에 대해서 언급하자.

 

바울이 에베소에 도착하였다. 그 때 아볼로는 고린도에 가서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라 말함으로 교회에 많은 유익을 주었다. 바울이 에베소에 당도했을 때 아볼로의 제자들은 바울에게 인도를 받았다. 바울은 그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었다. 그들의 대답은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알지 못하노라라고 대답한다. 이때 이 자리에 함께 있었던 사람은 누구일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이곳에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들이 아볼로의 제자들을 한 번도 만나지 않았을까? 그리고 아볼로의 제자들에게 성령 세례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았을까? 그들은 서로 여러번 토론을 가졌지만 성령 세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을까? 전혀 납득되지 않은 이야기를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누가가 이 사실을 자세하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과 아볼로 제자들이 모여있는 이 자리에는 바울과 함께 고린도를 나와서 전도여행을 위해 준비하고 있었던 사람들 모두가 이 자리에 동참했을 것이다. 그 중에 누가도 있었고, 아굴라도 있었다. 우리는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누가가 기록으로 증거해 주기 때문에 성령께서 강림하셨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누가가 기록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에 대한 기록 자료의 근거에 대해서 묻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보수주의적인 견해들은 성경에 기록된 저자가 인용한 자료를 저자가 직접 체험한 사실인가? 아니면 간접적인 경험을 통한 것인가?를 조사하는데 소홀했다. 이것은 성경의 완전 축자영감설(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교리를)을 완전히 잘못 이해하는 데서 온 것이다. 성경의 완전 축자영감이라는 말은 저자가 기록하려는 자료를 불완전하게 확신하거나 이해한 것을 기록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을 기록한 저자의 지식이 불건전한 것이나 불확실한 것을 성령께서 영감하셔서 건전한 것이나, 확실한 것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 성경을 기록한 저자를 영감하실때 저자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확신하지 못하는 어떤 자료를 기록에 포함하도록 하지 않으시고, 불완전한 지식은 기록에서 제외 되도록 저자의 사상까지 영감하여 성령의 열심을 이루신다. 그러므로 저자는 기록하고자 하는 사실에 대해서 완전한 지식을 갖춘 자료만 기록하였고, 성령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기록자의 사상과 배경을 포함하여 기록된 말씀으로 선포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어느 때에 확신하였으며, 어떻게 그 자료를 얻을 수 있었는가? 여기에는 누가의 변화 시기가 가장 중요하다. 누가는 이방인으로서 어느 때에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하였을까? 그 추측은 무성하지만 정확하게 밝힐 수 없다. 다만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그가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을 동반하였다는 사실만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누가가 경험한 성령 강림과 방언은 에베소에서 아볼로 제자들에게 나타난 사건뿐임을 확실히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누가가 방언에 관한 지식을 확신할 수 있는 여러 가지의 관점 가운데 에베소에서의 성령의 역사를 든다면 그때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가 초기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120문도에게 나타난 역사와 동질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더군다나 바울의 사도권이 불신되고 있는 상황에서 바울의 성령 강림의 사건이 완전히 무시되려 하지 않는가?

 

무엇을 근거로 에베소의 방언이 고넬료집에서의 방언과 예루살렘의 방언과 동질이라고 말하게 되는가?

 

여기에서는 막연한 근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가, 그와 비슷한 사건을 자기가 체험했다고 해서 이전의 경험하지 않았던 사건들을 동질이라고 말한다면, 증거를 받고있는 우리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관적인 경험은 많은 오류들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에베소에서 아볼로 제자들이 받았던 방언의 역사는 누가가 체험한 것 보다, 오순절 때 세례를 받고 이미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로마에서 추방당한 사람들에 의해서 확인될 수 있는 객관적인 확인도 배제할 수 없다. 우리가 이 객관적인 확인을 아굴라가 로마에서 베드로나 120문도에게 세례를 받았던 사람이라고 가정할 경우 이 객관적 확신은 더욱 분명해진 답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가정일 뿐이지 정확한 답이라고 할 수 없다.

   

 

반대로 우리가 가정하여 생각할 것은 에베소에서 나타난 방언의 역사가 고넬료 가정에서 나타난 방언의 역사와 구별된 이질적인 역사였을 경우를 생각해 보도록 하자.

 

누가는 바울에게 나타난 방언의 역사를 베드로로 말미암아 고넬료나 예루살렘에서 나타난 방언이라는 동일한 단어를 구사할 수 없을 것이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는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여 동일한 성령강림의 역사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분명하게 결론에 얻을 수 있는 한가지의 답을 발견한다. 그것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베드로에게 역사한 성령의 방언바울에게 나타난 성령의 방언은 동질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에베소에서의 방언과 고린도에서의 방언은 바울의 개념상 반드시 동질의 방언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방언과 고린도 서신의 방언이 구별된다는 항간의 주장들은 엄격하게 비 성경적인 주장이다. 왜냐하면 고린도 전서는 아볼로의 제자들에게 나타난 방언의 역사를 직접 경험한 바울이 언급하고 있고, 그 사실을 직접 목격한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살핀바와 같이 누가의 열심으로 분명히 조사하거나 아니면, 경험한 결과 사도행전 2장에서 나타난 오순절 다락방에 강림하신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방언과 10:44이하 고넬료 가정에서 나타난 방언, 그리고 19:6 아볼로 제자들에게 임한 방언은 다 같이 동일한 역사임에 틀림이 없었다. (누가가 2:4에서 방언이라고 언어로 표현하는 의미는 10:45-46, 19:6에서도 동일하게 표현하는 방언이란 말을 사용한다. 성경은 방언으로 표현한 2:4; 10:46; 19:6을 동일한 단어인 γλώσσαις를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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