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연구

주관적 체험

생명있는 신앙 2006. 7. 19. 11:30
 

8. 주관적 체험


  누가의 언어적 표현에 따르면 사도들은 히브리말 곧 갈릴리 사투리로써 복음을 전했다. 이것이 방언의 현상이었고, 이 말은 지역적 언어를 분명히 표시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 언어는 신기한 언어였고 분명히 사람들끼리 통용할 수 있는 언어였다. 그 언어가 신기한 언어라 함은 말하는 자가 자기의 말로 말할지라도 듣는 자가 말하는 자의 언어로 들으면서 자기의 언어로 이해하게 되는 신비한 언어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기적은 듣는 이로 하여금 통역의 은사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너무도 분명하다. 다시 말하자면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역사 하셔서 통역해 주시고 있는 것이다(고후 14:5, 13). 그러므로 누가에게 기록되어 나타난 방언 이적은 복음 전도를 위한 필요적인 역사임을 2:4; 10:46; 19:1에서 분명히 표현하고 있다.

신비적 언어 「방언」은 주관적 체험이 아니었다. 성령 강림 이후 120문도들에게 나타난 방언은 주님의 약속을 성취한 것이며, 객관적인 구속중심의 사건일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친히 역사 하시는 일이다. 오순절때 성령께서 다락방에 임하셨을 때 외국에서 순례의 발걸음을 한 유대인들의 귀에도 임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의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였고, 사도들의 말을 듣고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동안 성령의 충만한 역사를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자기들과 함께 온 어떤 사람들은 회개하는 사람들과 같은 느낌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렇게 구분된 사람들의 모습은 분명히 성령의 임하심에 대한 구별이 나타난 것이다. 이 사실을 오늘 우리는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성령 강림의 현재적 적용에 대한 뜨거운 논쟁이 태풍의 꼬리처럼 우리에게 남아 있다. 모 학술 연구원의 토론들도 사라져 가는 이 뜨거운 현상을 계속해서 남겨보려고 안간힘을 쓰고있는 현상 중에 하나이다. 이 토론은 성령께서는 아직도 강림하시지 않은 지역이 어디인지 찾고 계신다는 것이다. 성령은 강림하실 곳을 찾아서 지구상을 헤매고 계신다. 성령이 강림하실 곳은 기도하는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이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인간 의지의 결과나, 감동적이고 열광적인 뜨거움이나, 외형상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화려하게 보이며, 교회에서 충성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들이 실패하였다는 것에 대해서 깨닫지 못하는 소경일 것이다.

그들은 1,990년 전에 오신 성령은 지금도 계속해서 강림하시고 계신다고 믿고 있다. 이들은 계시의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적용에 관해서 말했던 Vos박사의 말을 심중에 두지 않고 “성경 신학을 이해하였다”고 고집을 피운다.

과연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의 성령이 오늘 우리에게 계속해서 강림한다고 증거하고 있는가? 다시 말해서 오순절 신학자들의 주장에 따른 바와 같이 기도할 때 성령이 강림한다면 사도행전 안에는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성령을 받으시기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한 의도를 발견할 수 없는지 의문스럽다. 2,000년 전에 역사 하시던 방언의 역사는 아주샤 거리에서부터 시작한 방언과 동일한가? 방언의 은사로 나타난 언어의 내용이 분별없거나 뜻이 없고 이해할 수 없는 헛된 말을 황홀경 중에 내뱉게 됨을 성령의 역사라고 말하는 것인가?

성경에 관하여 「적용에 다양성」과 「주관적 적용」을 기대하는 사람들의 의도를 위와 같은 질문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그들이 어떻게 말을 할지는 모르지만 더 이상의 억지는 자신들을 해롭게 할뿐일 것이다.

사도의 증언은 우리에게 역사적이고 분명한 사실이다. 그들이 말한바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나타났고, 그 나라에 들어간 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그 말을 듣고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였다. 보혜사 성령은 높고 높은 보좌에서 영광의 하나님과 그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한 번 보내심으로 우리에게 계속해서 계셨다. 그러나 그 계시가 신자에게 적용되는 방법과 시기는 각자 다르다. 그것은 모든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성령께서 역사 하셔서 각 사람의 마음의 문을 여시고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도록 하시는 시기와 방법이 하나님의 약속과 그리스도의 성취로 되기 때문이다1).